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 - 평범한 아이를 특별한 아이로 바꾸는 기적의 교육법
레이프 에스퀴스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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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교육이 잘돌아가고 있을까?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까지도 한국 교육을 본받자고(이 사람 참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종문제로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으니, 그런 나라를 교육이 잘되고 있는 나라라고 하기엔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50개 주에서 자기들만의 법이 있어서 나름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자치들이 무서운 힘으로 작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도 많지만 해결책도 많고, 문제 교사도 많지만 좋은 교사도 많은 그야말로 다양성이 살아 있는 나라다.

 

이래서 문제가 많음에도 미국이 아직도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교육에 대한 책을 읽으면 미국 교육이 지닌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는데, 이들도 역시 교육당국의 압력이 너무 세고, 또 표준화시험이라는 것을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을 시험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다운 공부, 원리를 알고 즐기는 공부를 할 수가 없는데, 이런 현실에서도 교사들에 의해서 제대로 된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우리나라 역시 교사들의 자율권보다는 교육당국의 힘이 너무 커서 거기에 종속되고, 또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입시에 아이들이 찌들리고 있는데, 이를 이겨나가는 것은 결국 교사들의 노력이라는 점을 미국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 초등학교 5학년이 대상이긴 하지만 레이프 에스퀴스 선생님이 한 교육은 단지 초등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모든 교육에 적용이 가능하다.

 

그는 읽기, 쓰기, 수학, 역사·지리, 과학, 음악·미술, 체육, 경제 시간으로 나누어 자신이 한 활동을 안내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에스퀴스 선생님은(이 책에서 아이들에게 그는 레이프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다음부터는 레이프 선생님은 으로 하겠다.) 자신이 중심이 아닌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

 

레이프 선생은 아이들이 독서를 좋아하게 만들고(그래서 그는 꼭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을 모두 미리 읽어본다), 글쓰기를 꼭 하게 만들며, (이 반 학생들은 한 학년이 끝나갈 때 이미 한 작품집을 가지게 된다), 수학을 문제풀이 중심이 아닌 원리를 깨우치는 쪽으로 활동을 통한, 또 고민과 협동을 통한 공부를 하며, 역사와 지리를 알아야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미국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와 지리도 공부하며,(그것도 암기식이 아닌, 영화와 이야기가 결합되고 학교 행사와도 결합하여 진행된다), 성적으로 인해 자칫 소홀하기 쉬운 음악,미술,체육이 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인식하고 아이들이 반드시 참여하게 하며(그러나 즐겁게), 한 학기 동안 반을 살아있는 경제체험을 하도록 운영을 하고 있다.

 

이렇게 8교시로 나누어 자신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레이프 선생은 시험을 중시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아이들의 성적에도 신경을 쓴다.

 

다만 이것이 주가 아니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 왜 공부하느냐는 것이 주가 되고, 공부는 그 사람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실천하고 있다.

 

즉, 시험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에서 바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목표이고, 그의 학생들은 이미 훌륭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껏 부럽기만 한 그의 교실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는 무한정의 노력을 한다. 주말도 반납하고, 자신의 돈도 학생들을 위해 쓰고, 아마도 그가 사명감이 없었다면, 또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가는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육을 위해 자신 개인의 생활을 희생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아이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약속은 꼭 지키는 모습을 보이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참여하는 수업을 할까를 고민하는 그런 교사.

 

읽으면서 부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우리에게도 이런 교사들이 많이 있을텐데, 자꾸만 외국에서 사례를 찾는 것은 아닌가 하고.

 

외국의 사례에는 감탄하면서 우리나라의 사례에는 시기와 질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찌됐건 우리나라 교육이 여기까지 온 것은 교사들의 힘일텐데...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교육활동을 지지하고 지원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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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없는 세상

              -관세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맘 속에 있던 말이

주인을 찾아

천지사방, 날고 있는데,

귀 있는 자,

의인 열이 아니라

하나만 있어도

멸망치 않을텐데.


관세음(觀世音)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듣고 있는가

무엇을 들으려 하는가

말들은 넘실대는데,

말들은 귓전을 때리는데.


관세음(觀世音),

귀 있는 자,

세상의 소리를 보고

세상의 소리를 들어

세상을 살릴 의인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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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밝은 달빛이 유감한 까닭에 우리학교 작가탐구클럽
정재림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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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허 이태준.

 

그는 나에게 "책"이라는 수필 한 편으로 다가왔다.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로 시작하는 그 수필.

 

책을 좋아하던 나에게 책에 대해서 쓴 이 수필은, 그리고 책을 그렇게도 많은 대상에 비유하는 그 글은 너무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것이 상허 이태준에 대해서 지니게 된 첫 만남이었다. 이어서 그는 '문장강화'라는 글쓰기 책으로 다가왔고...

 

문장의 아름다움, 조선의 모파상, 단편소설의 완성자. 이것이 바로 이태준을 말해주는 수식어였다. 이것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냥 그랬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태준의 소설은 카프 계열의 소설보다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냥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 그런 느낌만을 주었다.

 

그런 그에 대해서 여러 책을 읽긴 했지만, 기억 속에 그리 오래 남아 있지 않은 작가였다. 다만 월북되어 생사를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구인회 일원으로 이상을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정도.

 

그에 대해 많은 전기적 사실을 읽었을텐데도 머리 속에 얼마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는 점을 분명 읽었을텐데도 그가 부유한 생활을 한 것처럼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의 '상고주의'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한다.

 

즉, 이태준에 관한 책을 읽어도 그의 어려운 시절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그가 고완품(골동품)을 비롯해 난초 등 과거의 것들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만 기억에 남아 있게 된 셈이다.

 

이런 것들이 기억에 왜곡을 일으켜 이태준은 그냥 부유한 삶을 산 사람이겠거니 하고 어떤 고정된 상을 만들어버렸다.

 

이게 아닌데... 열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 아닌가.

 

온갖 일을 하면서 고학을 했음에도 고등학교도 일본에서 한 대학 유학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람. 기껏해야 1930년대 신문사 기자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하면서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 돈으로 생활에 안정을 찾은 사람.

 

진정한 예술작품을 쓰고 싶었으나 돈에 매여 관심을 끌어야 할 신문연재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래서 그의 장편을 읽고 실망한 하고, 뭐, 이런 통속소설이 다 있어 하면서 그의 소설은 단편밖에 쓸 만한 소설이 없다고 단정했던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스럽게 느껴지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태준을 조금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이 책은 학생들에게 읽히겠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쓰여졌다는 생각이 든다.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태준이라는 학생들에게는 조금 낯선 작가를 이해할 수 있게 그의 작품과 생애를 잘 연결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어쩌면 시인보다는 소설가였기에,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줄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태준이라는 작가를 소설과 연결지어 설명하기에 훨씬 수월했겠지만, 그래도 처음 읽는 사람도 이태준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남과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작가이지만, 북한에서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이지만, 그는 1930-40년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해금이 되어 우리나라에서 연구가 되고 '상허문학회'라는 단체가 생긴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의 단편소설은 읽을 만하고, 생각할거리가 많으니 말이다. 하긴 요즘은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니, 그가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제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천천히 학생들이 이 책을 읽으며 상허 이태준이라는 사람을 알아갔으면 좋겠다.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수필집은 "무서록"도 읽고, 또 글쓰기 책인 "문장강화"도 읽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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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가장 사이가 좋아야 함에도,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 중에 하나.

 

서로 영향을 가장 많이 주고 받았음에도. 서로를 가장 많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

 

무언가 꼭 이겨야만 하는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그런 나라다.

 

무비자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영토 문제로, 역사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어서 그리 편한 나라는 아니다.

 

한 번은 여행을 해봐야지 하고 있던 나라이기도 한데, 어디 해외에 나가는 일이 쉽나?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시간이고, 또 그만큼 투자를 했으면 무언가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있어야 여행이 성공했다는 그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난데... 그냥 즐기면 되지 않나, 그것이 바로 여행 아니던가 하면 되는데...

 

그래도 한 번은 갔다와봐야지, 우리가 얼마나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던가, 그러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꼭 한 번은 갔다오고 싶었던 나라라.

 

백문이불여일견. 일본에 대해 듣고 듣고, 또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그래 가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가겠냐 하고 선택한 일본의 도시가 바로 교토(京都).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해당할텐데... 일본에서도 천년 고도라고 불리는 도시 아니던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하고.

 

일본어도 영어도 안 되지만 하여튼 가족을 믿고 함께 한 여행.

 

비록 제대로 의사소통은 하지 못했지만, 앞의 두 책을 꼼꼼하게 읽은 결과 여행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명소와 또 어떻게 버스를 타는지, 기차를 타는지, 입장료는 얼마인지, 특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어서 두 책을 읽고 간 결과가 만족스러웠다고나 할까.

 

물론 짧은 일정으로 교토의 모든 것을 볼 수 없었지만(말이 3박4일이지ㅡ오고 가는 날을 빼면 교토를 온전히 돈 날은 이틀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교토 동부로 한정하고 가기를 잘했다), 나름 알찬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시인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다녔다는 동지사대학에 들른 것도 좋았고, 거기서 나란히 있는 그들의 시비를 보고 감회에 젖기도 하고, 정지용이 걸었다는 가모강(押川)도 한 번 걸어본 기억은 참 좋았다.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있는 <정지용 시비>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

 

동지사대학에서 더 좋았던 점은 이 대학 학생들은 자가용을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것. 도처에 자전거 보관대가 있고,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데,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차가 아닌 자전거로 다니는 모습, 이건 우리도 함께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으니... 

 

그래, 배울 것은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없애야 하겠지.

 

한 번은 가볼 만한 곳, 교토. 그리고 교토 여행이 참조가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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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탈무드 - 하브루타 아빠의 특별한 자녀 교육법 하브루타 교육 시리즈
양동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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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다.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유대인 도서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도서관 하면 무조건 정숙, 정숙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대인 도서관은 떠들썩했다. 그런데 그 떠들썩이 남을 방해하는 시끄러움이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소리들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구난방이 아니라 주제를 향해 가는 소리들의 모음, 그러한 떠들썩함이 온 도서관을 채우고 있었고, 그러한 채움이 유대인의 지혜로 나타나는가 보다 했었다.

 

그러한 교육방식을 '하브루타' 또는 '헤브루타'라고 한다는데, 책을 읽어도 혼자 읽고 혼자만의 사색에 빠지지 않고 꼭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 교육방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은 토론에 능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게 된다.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무드'

 

이러한 하브루타 교육의 집대성이 바로 탈무드라고 할 수 있다. 너무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탈무드지만 우리에게는 동화나 우화 수준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냥 이솝 우화 읽듯이 읽고는 재미있네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아주 가끔은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사실 우화나 동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면들이 발견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읽느냐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같은 동화라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삶에 방향을 다양하게 제시해주기도 한다.

 

탈무드 또한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성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삶의 지침서 역할, 지혜를 얻어가는 도구로써의 역할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자녀 교육'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하브루타'란 말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자녀 교육에 있어서 토론을 도입하는 가정이 많다.

 

자녀와 대화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책은 어떻게 대화하는 것이 자녀교육에 좋을까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것이 자녀의 지능발달에도 또 정서발달에도 좋다고 하니,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책을 읽으라고 하거나 또 읽어주더라도 읽어주고는 거기에서 멈춘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러면 안 된다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책을 읽어주었으면 그 책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교육을 탈무드를 통해서 하브루타 교육을 한 결과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탈무드 한 편 또는 두 편 정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에서 주제를 끌어내어 함께 이야기하는 것, 아무리 엉뚱한 대답이라도 인정해주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하브루타 교육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으로 자녀들의 지혜를 일깨우는 것도 있지만, 함께 이야기를 함으로써 가족간의 유대도 돈독해지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아이에게 탈무드 이야기를 해주고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또 질문을 하는 과정, 결국 자녀를 동등한 이야기 상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브루타 교육 방법이다.

 

대화는 대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좀 낯설다. 아빠와 아이들이 이렇게 조곤조곤하게 대화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이들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함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쑥쓰럽다는  이유로 이런 교육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가정환경이었다면 좀더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우리 아이들이 습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중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하는 공부기계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과연 다양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만약 그런 학생이 있다면 우선 아이들에게 진도 나갈 시간을 빼앗는다고 엉뚱한 아이라는 비난을 받을테고, 교사에게도 역시 시간을 뺏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아이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많다.

 

교과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보는 질문, 또는 그런 교육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이건 가능의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문제인데, 아직도 그런 교육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이와 아빠가 조곤조곤 대화하는 이런 '토론 탈무드' 책이 부럽기도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우리나라 학교는

 

하급반 교과서다.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아이들이 큰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교육출판기획실 편, 내 무거운 책가방, 실천문학사. 1988년 3판. 147-148쪽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다. 도대체 질문이 없다. 아니, 우리 사회도 역시 질문이 없다. 하급반 교과서는 학교의 저학년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나 전반에서 쓰이고 있다.

 

비판을 비난으로 다름을 차별로 만드는 사회 아니던가. 좀 다르다는 것을 못 견뎌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브루타' 교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입 다물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도무지 질문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말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회, 그 말들이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책

 

무언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하브루타라고 하면 대등한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아빠는 답을 알고 있고, 그 답으로 아이들의 대답을 유도해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모습이 하브루타가 아니지 않은가. 하브루타는 답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대화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아무리 아이들이 어리다고 해도 아이들의 답은 그 자체로 답이다. 아빠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답을 유도하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답을 잘 찾기 위한 방편이 하브루타가 아니라 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하브루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아빠는 너무 답에 매달려 있다. 아니, 본인이 끝에서 꼭 답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대화가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을 준다. 잘못 읽은 것인가?

 

동의하기 힘든 것들

 

이 책 224쪽에는 중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노조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큰 자동차 회사의 노조들이 임금협상을 위해 극단적으로 자살을 하거나 그런 일이 있어요. 예전처럼 노동 환경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좀 자제해야 돼요. 그렇다고 회사 편만 드는 것도 안 좋으니 서로 절충해서 살아야죠.'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중도는 힘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이고, 좋은 실천이지만, 힘없는 사람에게 중도는 포기요, 좌절이요, 죽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예전처럼 노동 환경이 나쁜 것도 아니고'란 말, 노동환경을 과거와 비교하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 만해졌는데 무슨 불만이냐는 말과 같다.

 

노동환경은 늘 현재의 문제다. 지금 노동자들이 견디기 힘들면 그것은 좋지 않은 노동환경이다.

 

235쪽에 '친구를 사귈 때는 나보다 한 단계 높은 친구를 사귀고, 여자를 사귈 때는 나보다 한 단계 낮은 여자를 선택하라는 말이야.'라는 말. 이상하다. 자기보다 나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내가 나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좋다. 이런 이야기는 뒤에 나오니 더 말할 것이 없는데, 문제는 여자에 관한 얘기다.

 

자기보다 한 단계 낮은 여자를 선택하라는 말, 이거 여성 비하 아닌가? 이 글이 나오는 장의 작은 제목이 '여성 상위'이고 여성이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왜 이런 말을 굳이 삽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친구건 여자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좋은 일은 친구건 여자건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여간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초등학교 정도의 아이를 둔 가정에서 해볼 만한 교육방법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도 든다.

 

토론 교육이 강조되고 있고, 학생 활동 중심의 수업을 강조하고 있는 이 때 이 책의 세세한 내용보다는 그 방법론을 배워서 교육 현장에 적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내용을 100% 믿고 따르지 말 것. 그것은 '하브루타'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볼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잘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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