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정치가의 신년 기자 회담.

회담 중에 점점

정치가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는 자꾸자꾸 높은 곳으로 가고

우리는 그를 그냥 올려다보게만 된다.


비행기를 탄 정치가.

하늘 길에서 보는 땅은

너무도 깔끔하여 모든 것이 아름답다.

거기에는 땀이 없고, 생활이 없다.

생활이 없는 아름다움,

비행기에서 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늘 길을 가는 정치가도

선거철엔 버스를 타고,

우리 손을 맞잡고,

우리에게 기대었음을 떠올린다.

지금은 우리와 너무도 멀리 있는 그도.


그가 다시 만원 버스를 탄다면,

땀냄새, 술냄새, 세파에 찌든 냄새에,

몸도 옴짝달싹도 못하고,

사람과 사람에게 기댈 것이다.

세상의 비루함이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힘임을,

생활은 땅에 있음을

몸으로 알게 될 것이다.



자꾸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 길을 가는 정치가의

연설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서로 기대어 함께 가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그런 정치가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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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 - 21세기 노동해방과 녹색전환을 위한 적록동맹 프로젝트
김현우 지음 / 나름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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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

 

전환이 필요한 때임은 확실한데, 어떤 전환을 이루어야 하느냐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이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쓰였고, 영어로는 'just trasition'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이 어렵다면 조금 쉽게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결합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예전에 "녹색은 적색이다"라는 책도 있었고, "녹색희망"이라는 책도 있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함을 주장하기도 했었는데, 이 '정의로운 전환'은 이를 현실에 맞게 구체화시킨 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하여 사회를 위협하는 일자리를 그냥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자리를 사회에 유용한 일자리로 전환하는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하자는 운동,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이다.

 

자동차가 배출하는 배기가스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니 자동차 산업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겐 자신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니, 자동차 노조에서 자동차 산업을 폐기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정의로운 전환'은 무엇인가?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이를 친환경적인 산업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자동차 기술이 다른 교통 관련 기술에도 쓰일 수 있으므로, 이들의 기술을 친환경 분야의 기술로 전환하게 하여 고용과 환경을 함께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전환'이 우리나라에서 언제 시도가 된 적이 있었나? 적어도 전환까지는 안 갔더라도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래서 '정의로운 전환'의 단초를 보여준 일이 바로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영남권 건설 노동자들이 밀양 송전탑 공사 협조 거부 의사를 밝힌 적이 있고, 반대 운동에 함께 했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노동자와 송전탑' 참조)

 

건설 노동자들은 송전탑을 건설해야 하지만, 그 송전탑이 환경에도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건설 협조 거부 표시를 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함께 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원자력 발전, 즉 핵발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핵발전노조는 그들의 기술이 재생에너지 기술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하고, 환경 운동도 마찬가지로 "핵발전 폐기하라"에서 한 단계 나아가 핵발전을 폐기하고, 이런 발전으로 전환하면 노동자도 좋고, 시민들도 좋고, 자연에도 좋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사례들은 이미 외국에서도 많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자들과 환경 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될 일이고, 그래서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진 이들간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노동운동 단체와 환경운동 단체에서 한 명씩이라도 서로 사람을 파견보내 인턴 근무를 하게 하자고. 돈이야 각 단체에서 대면 되니, 이렇게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내용 교류도 이루어지고 대안을 함께 마련해 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이 책 244쪽부터 248쪽 참조)

 

이것이야말로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 단체의 지도부가 먼저 해야할 일 아니겠냐고. 지도부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문제부터 먼 과제까지 내다보고 대책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도부가 힘든 것이기도 하겠고.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지은이가 한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좋은 말은 역시 입에 쓰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이제는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걸기를 시도한 지은이의 말에 적극 응답해야 한다.

 

'... 민주성과 계급성을 잃지 않고 조직을 잘 지켜온 노동조합들이 지역사회 실천과 녹색전환에서도 앞장서고 있다. 이미 코앞으로 다가온 미래를 선취하지 않는다면 궁색하고 외로운 방어 투쟁으로 끊임없이 후퇴하고 말 것이다. 후퇴가 아닌 공세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면 이제 거기에는 노동과 산업 자체의 전환, 우리의 살림살이와 유대 방식의 전환을 위한 모색이 함께해야 한다. ... 이 책은 그런 기대를 담아 적색과 녹색, 녹색과 적색의 씨앗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말 걸기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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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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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키우는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공동체가 교육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근대화 되면서 마을은 학교에 교육의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 버리고 만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학교는 마을에서 독립하여 교육에 관해서는 전권을 휘두르게 된다. 마을과 교류없이, 교감없이.

 

현대에 들어와서 마을은 교육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가령 비행청소년(이 말이 적당한가? 담배 피고, 남녀가 몰려다니고, 함께 술 마시는 아이들... 한 때의 방황 또는 마음과 몸을 둘 데 없는 아이들을 우선은 이렇게 말하자)이 있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타이르려 하지 않는다.

 

우선 학교에 전화를 한다. 이 동네에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학교에서 지도하라고, 그렇게 해도 되지 않으면 경찰서에 전화를 한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학교에 그들에 대한 처벌은 경찰에 넘기고 마을은 아이들의 교육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존재한다.

 

이게 현실의 모습이다. 바람직한가? 이렇게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마을이 교육에서 멀어졌기에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계맺기의 실패가 두려움으로, 교육의 두려움이 포기로 나타나고, 이러한 포기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는데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도시라면 어디에서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시골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요즘은 마을이 제 역할을 못한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마을로 대표되는 공동체는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는가? 다시 마을이 교육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있다. 학교 자체의 교육으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에 학교에서 마을에 손을 내밀고 있다.

 

2015년인 지금 학교는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함께 하자고, 이건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지역사회에서도 학교 교육에 적극 참여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된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이 시장이 되기 전 희망을 찾는 여행을 했다. 그는 희망을 마을에서 찾았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라고 하겠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가장 기초는 함께 삶이다. 함께 삶에는 함께 앎이 따른다. 함께 알기 위해서는 함께 가르쳐야 한다.

 

생활과 교육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사라는 직업이 따로 있어서 전문적인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교사는 학교에만 존재해서는 안된다. 배움이 있는 곳에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배우고자 하는 곳에는 늘 가르치는 사람이 존재한다.

 

다만, 찾지 않았을 뿐이다. 찾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마을이 교육에 참여하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곳들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 책은 2010년에 발간되었다. 하여 한 달이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참으로 먼 옛날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 먼 옛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것은 다 빨리 빨리 변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느린 속도를 지닌 곳이 바로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미 5년 전에도 마을과 학교가 하나되는 이런 활동들이, 이런 장소들이 존재했음에도 얼마나 확대되었느냐 하면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오히려 줄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공동체가 생겼어야 했는데, 공동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더욱 비대해지는 현상이 지금까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귀하다. 우리에게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그런 움직임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미래형이라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과 학교가 함께 갈 때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지금 제도권 교육에서 마을에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이런 활동들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미 유명해진 풀무학교로부터 시작한다. 풀무학교는 학교와 마을이 하나가 되어 교육을 해나가는 전범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아예 마을공동체가 되어 생산과 소비, 교육이 함께 되어가고 있느니, 풀무학교로부터 시작한 것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풀무학교에서 시작하여 '대안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제는 공교육에서 달라진 초등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의 심성이 형성되는 초등학교 시기에 마을과 하나되는 학교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교육에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 이어서 학교 밖에서, 그러나 마을 안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교육공동체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청소년뿐만이 아니라 어른과도 연결된 명실상부하게 마을공동체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공동체들은 지금까지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에, 앞으로 통섭의 시대, 융합의 시대에 마을과 학교가 함께 가려는 노력을 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에 가망이 없다고 할 때 박원순은 교육에도 분명 희망이 있다고, 그런 희망이 바로 우리 눈 앞에 있다고 그 희망들을 찾아 보여주고 있다. 5년 전 일이다.

 

그리고 이런 희망을 보여준 지 5년... 우리 교육은 과연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는가? 우리는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학교가 과연 마을 속으로 들어갔는가? 마을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교육혁신지구 등등의 말로 마을과 학교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지금은 하고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을 이 책에서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의 송인수가 말했듯이 정치권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정치권이 움직일 수 있도록 시민들이, 바로 우리들이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좋은 때 아니던가. 교육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때는 지났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지금이. 이미 우리는 마을이 학교가 되고, 학교가 마을이 된 사례들을 몇년 전부터 만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자신의 마을에서 실천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런 희망이 바로 길이다. 우리 교육이 가야 할 길. 그 길에 우리 아이들은 행복은 웃음을 지으며 다니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은 또 우리들을 모두 웃게 할 것이다.

 

그런 희망, 길... 아이들의 행복은 웃음, 어른들의 행복은 웃음. 우리 사회의 행복이다. 이게 우리 교육이 나아갈 길이다.

 

그 오래된 미래(참 이 말 좋은 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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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이 지나고, 을미년이 시작된 지 10여 일이 지났다.

 

왜 우리 기억에 갑오년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동학혁명 때문이다. 이름 가지고 여러 말들이 많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동학혁명으로 하자.

 

그것은 분명 혁명이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지만, 농민들이 삶의 주체로, 정치의 주체로 나선 혁명이었다.

 

그런 혁명을 기리는 갑오년이었는데, 혁명은커녕 오히려 더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었던 갑오년이 되고 말았다.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 최용탁은 그런 참담함을 이렇게 말한다.

 

'다시 참담한 갑오년이었다. 새삼 주워섬기기도 싫지만 올해 우리 농업에 몰아친 전면개방이라는 태풍은 확실하게 숨통을 끊겠다는 광기가 번뜩였다. 이 무지막지한 농업 죽이기 속에 위대한 갑오년은 치욕과 한숨의 갑오년으로 저물고 말았다. 김남주의 시 구절을 빌리자면, 아, 얼마나 음산한 갑오년이었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갑오년이었던가.' (211쪽)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이 벌어졌던 갑오년. 

 

이번 호 제목이 "국가의 쇄신, 어떻게?"다. 나라를 쇄신하겠다던 갑오년 농민들의 함성이 잦아들고, 곧 멸망의 길로 치달을 을미년. 과거의 역사는 이랬다.

 

왜? 쇄신을 하지 못했으니까. 쇄신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가두고, 없애버렸으니까. 그래서 국가는 파멸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역사를 반복시킬 것인가? 아니다. 갑오년에 우리는 국가를 쇄신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온갖 사건 사고에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었을 뿐이다. 한번 "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힘 한번 떨쳐보지 못하고, 온갖 소문 속에서, 온갖 사고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말았을 뿐이다.

 

절망, 좌절, 그러나 역사는 반복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맑스의 말대로 다시 반복되는 비극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에 불과하다. 막을 수 있는 것을 막지 못했기에. 

 

이번 호는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정치 혁신. 핵 문제. 스마트폰 문제.

 

그런데, 이것들이 다른 문제냐? 아니다. 하나로 연결이 된다. 핵 문제든 스마트폰 문제든 이들은 정치 혁신으로 귀결이 된다.

 

정치란 곧 우리 삶이기 때문에, 우리 삶을 혁신시키지 않으면 핵이나 스마트폰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정치가 곧 삶인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다. 우리네 선거다. 선거가 끝난 뒤 과연 우리가 찍은('뽑은'이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찍은 사람이 뽑힌다는 보장도 없고, 또 그렇게 뽑힌 사람이 내 의사를 제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과연 우리의 의사를 반영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핵이 우리네 삶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정치권은 핵 문제에 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정신을 좀먹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경제를 살린다는 목적으로 또는 세계적인 정보통신강국이라는 명목으로 꼬마 아이들까지도 스마트폰과 함께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눈감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나를 대변해준다는 남에게 맡기고 있다. 그냥 맡기고 말 뿐이다. 그 다음은 없다. 그가 나를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수밖에.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다음 선거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렇게 반복된 정치현실이 무감각으로, 자포자기로 간다.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정당이 그 정당이고, 투표를 하나 안 하나 똑같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냥 그렇게, 그런가 보다 하면서 살아간다.

 

그게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갑오년에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우리들이 을미년을 또 이렇게 보내다간 우리는 파멸의 길로 내달리게 될 뿐이다.

 

하여 녹색평론은 이번 호에서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우리 나라 쇄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고.

 

국가 쇄신, 정치 쇄신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정치는 곧 삶이니, 내 삶을 되돌아보고, 내 삶을 고치고, 내가 주인임을 천명해야 한다고.

 

내가 주인이 될 때, 핵과 스마트폰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우리를 대변해주는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참여하는 정치가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주인이라고.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국가의 쇄신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이번 호의 여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민들 자신이 바로 '권위'라고 용기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1항의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세일 것입니다.'(15쪽)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내 삶을 남의 처분만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체로 내 스스로 나설 것인가? 국가의 쇄신,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갑오년을 보내고 맞는 을미년, 120년 전의 을미년이 되지 않도록,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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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슬픈 배따라기를 남겨둘 뿐 우리학교 작가탐구클럽
류한형 지음 / 우리학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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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학교 작가 탐구 클럽 시리즈를 계속 읽고 있는 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를 알아야 한다는 기획 취지에 따라 작가 탐구 시리즈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는 백석, 김소월, 이태준, 이상, 김동인 이렇게 다섯 명의 작가를 탐구했는데, 책 표지에 보면 윤동주가 곧 나올 예정이고, 또 다른 작가들도 계속해서 탐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가에 대해서 알려주는 일,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문화 강국을 표방한다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나라가 미술이나 음악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많겠지만, 우리나라 문학을 일구어낸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책은 반갑다.

 

그만큼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고 학교 생활을 하면서 그냥 이름만 들어보고 끝난 경우도 많으니, 학생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무방한 책들이다.

 

김동인 하면 어떤 소설이 떠오를까?

 

내가 학교 다닐 때 김동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한 다섯은 되는데, "감자, 배따라기, 광화사, 광염소나타, 붉은산" 이렇게 기본으로 그의 소설을 읽고 배우고 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젊은 그들"이라는 작품을 어렸을 때 읽고 그 활극에 재미를 붙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태형'이란 작품을 알게 되었고, 역시 어렸을 때 '김연실전'을 읽고 일제시대 신여성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지니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동인이었다. 그는 내 학창시절만 해도 우리나라 근대 소설가 중 최고였다. 늘 최고의 자리에서 그의 작품을 논하였고, 그가 한국의 '오스카 와일드'라고 불릴 정도로 유미주의자였다고 하니, 소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소설의 구조를 이야기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김동인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이 책이다. 그의 개인사와 문학관을 종합하여 작품과 연결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는 책.

 

아마도 중학생들이 읽으면 생소한 어휘들 때문에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솔직히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카프'라든가, 신경향파, 유미주의 등등) 고등학생쯤 되면 쉽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문학을 아름다움에서 접근한 사람, 우리나라 소설에서 과거형이라든지, 인칭대명사가 자연스럽게 쓰이게 만든 사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오만했던 사람.

 

그런 그에 대한 책. 읽어가면서 우리나라 근대소설의 초창기에 이런 작가가 있었음을, 그는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소설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음을 알아가도록 하자.

 

지금은 많이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그래도 김동인은 무시할 수 없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그의 작품 '광염소나타'를 통해서는 천재와 보통사람의 관계를 고민할 수 있으니, 과연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누군가의 말로 영재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그것이 옳은가 하는 토론 거리로 이 책이 유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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