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건축 - 지속가능한 저탄소 녹색도시를 위한 에너지 자립형 건축
니와 히데하루 지음, 박진아.백기석 옮김 / 인큐브(INKQV)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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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반드시 파괴가 동반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파괴는 결국 삶도 지속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괴를 최소화하는 것, 파괴로 인한 파멸이 아닌, 지속가능한 파괴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그동안 인류는 화석 연료를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지구를 파괴하고, 결국 환경을 파괴하여 우리의 삶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했다.

 

무분별한 발전이 초래한 결과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서 여러가지 협정을 맺는다. 기후협약부터 시작하여 에너지 협약, 탄소 배출권 등등.

 

이러한 노력들은 지금까지의 소비 패턴을 유지하면 우리의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주요 요소를 찾아보자. 가장 간단하게 우리는 흔히 '의식주'라고 한다.

 

사실 순서를 바꿔서 '식의주'라고 해야겠지만, 하여간 이 '의식주'에는 파괴가 따른다. 파괴하지 않고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가 없다.

 

입고 먹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요즘은 친환경적인 옷을 입자는 운동부터, 친환경적인 먹을거리 운동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의식주' 중에 '의식'에 해당하는 것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것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고. 자신의 생활습관만 바꾸면 되는데, 이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 비록 힘들다고 하지만,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주'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주'를 단지 '집'에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으로 확장한다면 참 문제다.

 

우리나라만 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건물들이 엄청난데, 이런 건물들이 환경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간과하고 있을 때가 많다.

 

마침 '제로 에너지 빌딩' 활성하 방안을 우리나라도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데, 건물에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 함으로써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의식'과 달리 이 '주'는 개인의 노력보다는 사회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를 법의 정비를 통해서 강제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한 '의식'과는 달리 '주'는 비용도 막대하게 들어 개인이 홀로 실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라 차원에서 건물을 친환경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데, 그런 일들을 지금 세계 가국에서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제로 에너지 빌딩을 짓고, 그것이 현재의 건물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에너지 절감 효과가 있나를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에너지 절감 효과가 있으며, 앞으로 더 나은 기술 발전을 생각하면 지속가능한 건물로써 '제로 에너지 빌딩'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가정집, 회사 건물, 학교를 도시 내와 도시 밖으로 나누어 비교하고 있고, 재생에너지 사용여부를 검토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수치를 보여주면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어서, '제로 에너지 빌딩'이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큰 복병으로 '경제성'이 등장하는데, 이 경제성 면에서도 효과가 있음을 수치를 통해서 보여준다는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제성' 운운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살아야 함을 생각한다면, 건물들을 조금 더 비용이 들더라도 '제로 에너지 빌딩'으로 건축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다.

 

지금 당장의 경제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면, 현재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이를 계속 추진해 나가는 과단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주'는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 전체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법적인 제도 정비일테고.

 

빙산을 향해 가는 타이타닉호를 멈출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주'에서부터 노력해야 하는데, 특히 '주'는 더 많은 파괴를 수반하니, 이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주'에 관해서, 충분히 가능함을, 또 우리가 실천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착한 건축'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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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

한때 스님 노릇을 했다는 사람.

그러나 내게 고은은 70-80년대를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젊은 나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던가.

 

90년대 시대가 많이 변했고, 2000년대 다시 또 변했다.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이 아스라히 멀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민중이 삶이, 민족의 현실이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시대의 모습은 이리도 변했으니.

 

어쩌면 고은의 과거 시집을 읽는다는 것이 복고주의에 불과할지도, 자기만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고은 시집,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책은 1993년도 3쇄판이니 말이다. 거기다 이 시집은 창작과비평사 시집 101번으로 출간이 되었으니, 창비시집이 100호를 넘기고 새로이 시작하는 의미로 펴낸 시집이라는 생악도 든다.

 

제목만 보면 내일을 노래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게다가 시집 번호도 101번이 아니던가. 그런 80년대를 정리하고 이제는 90년대를 잘 맞이하자는 그런 시들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2015년에 읽어보는 시들에서는 그런 희망을 느끼기가 힘들다. 세상이 그만큼 밝아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내일로 나아온 것보다 자꾸만 과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이 시집에서 두 시를 연결하고 싶어졌다. 자연스레 고사해가고 있는 진보진영과 그럼에도 그들이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할 일.

 

       에스페란토어

 

요셉 스탈린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사람까지

그의 적으로 삼았다 다 죽여버렸다

이런 참극도 모르고

나는 스무살 무렵

전쟁이 지나간 뒤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다 말고 떠돌았다

 

세계의 언어 가운데

에스페란토어만큼 외로운 것이 어디 있는가

이제 그것은 누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unu, du, tri, Kvar, Kvir, Ses

하나 둘 셋 세어가며 죽어가고 있다

sep, ok, nau, dek

이렇게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그것을 배우다 만 나도 죽어가고 있다

 

고은,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3년 3쇄. 60쪽

(nau라는 글자 u위에 -표가 있는데, 여기서 그런 글자를 찾지 못해서 그냥 u로 표기했다)

 

지금 진보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죽어가고 있다. 한 때 세계공통어라고 했던 평화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가 죽어가고 있듯이.

 

그런데 이렇게 진보를 그냥 죽어가게 만들 것인가? 살릴 방도는 있는가? 적어도 이 시집이 "내일의 노래"인데, 이렇게 죽음만을 노래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시인은 '머리 바꿔'란 시를 선보이고 있다.

 

진보가 살려면 이래야 한다. 이렇지 않으면 진보는 그냥 죽어가 사라지고 만다. 명심해야 한다.

 

        머리 바꿔

 

옛날 당나라에 온 역승 구나바드라가

중국어에 능통하기 위하여

꿈속에 나타난 신인에게 청하여

서로 머리를 바꿔

다음날부터 구나바드라는

황하유역 중국어가 잘도 흘러나왔다

무엇을 하고자 하건대

이런 꿈이 있어야 한다

아니 무엇을 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서로 머리를 바꿀 필요가 있다

네 문수보살의 머리와

내 만황씨 머리와

서로 바꿔

 

고은,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3년 3쇄. 106쪽.

 

단지 머리를 바꾸자는 얘길까?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만의 고집해서는 전망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꿈'이란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바꾸어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벌써 20년도 전에 나온 시집이지만, 이 두 시, 요즘 현실에 딱 들어맞는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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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쟁탈전 -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첫 번째 관문 - 우리가 알아야 할 그들의 역사
조후 지음 / 민들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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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쟁탈전"

 

제목이 재미 있다. 역사를 지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싸움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한정된 자원에서 그 자원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지구 역시 한정될 수밖에 없고, 인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그 인간들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구획한 나라들 역시 늘어나고 있었으니 쟁탈전이 벌어짐은 당연한 일.

 

이 책은 서양의 역사만을 정리하고 있다. 물론 간간히 동양의 역사, 인도나 중국, 일본, 우리나라가 나오기는 하지만, 동양의 역사는 다른 책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서양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를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의 시각으로 확인한 후 해석하기, 상징단어 지우기, 거짓말 탐지하기, 언어의 함정 피하기' (253쪽)라고 한다.

 

자칫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고, 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그들이 정리한 상징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그들이 왜곡한 역사를 따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명심하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진실에 다가서게 되고, 그 진실은 오늘의 나를 파악하고 내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서양의 역사에 대해서 쓴 내용을 보면 서양의 역사를 주도했던 요소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리적 위치. 왜 문명이 그곳에서 발생했는가? 어째서 그들은 제국이나 강대국으로 성장했는가? 하는 점은 우선 우연적이게도 지리적 위치에서 생긴다고 한다. 문명의 발상지들이 지리적으로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나, 그리스 문명이나 로마 문명이 어떻게 세계적인 문명이 되었는가 하는 점 등을 우선 지리적 위치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유럽은 처음에는 참 찌질한 지리적 위치로 주목받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들은 게르만(원래는 이 말은 야만족이라는 뜻이란다)이라고 불리는 야만족에 불과했다고.

 

그런데 지리적 위치에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번째 경제 문제다. 경제가 결국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데, 경제라는 말이 어려우면 쉽게 먹고 살기 문제라고 하겠다.

 

무역을 한다든지 정복을 한다든지, 노예를 부린다든지 하는 일들은 기본적으로 경제와 관련이 있다. 즉, 지리적 위치에서 어떤 경제 문제가 생기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식민지 개척이라든지 소위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들, 그리고 커다란 전쟁 등은 기본적으로 경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세번째는 어쩔 수 없이 정치다. 정치가 빠질 수는 없다. 몇몇 사람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듯이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양은 경제보다는 정치가 더 힘을 발휘했다면, 같은 이유 때문에 서양은 정치보다는 경제가 더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

 

중국을 예로 들면 이들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고, 따라서 이들은 운동장을 차지해야 한다, 그래서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대로 서양은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란다. 골목길은 누가 완전히 차지할 수가 없다. 여러 골목들에서 각자 왕초 노릇을 하거나, 다른 골목으로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서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가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바로 서양 역사의 원점이라는 것이다.

 

참 명확하다. 그리고 재미있다. 또 서양의 중심의 역사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괴감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을 말끔하게 씻어내줄 수 있는 책이다.

 

역사란 한 가지 해석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또 자신의 눈으로 제대로 해석해야만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오직 한 가지 교과서로 같은 내용의 역사만을 배우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떠올리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정도가 아니라 우려가 된다. 그것은 가장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답지 않은 역사공부가 될테니 말이다.

 

여하튼 이 책 지구라는 곳을 서로 빼앗는 과정으로 서양의 역사를 서술한 책. 서양 역사를 보는 다른 눈을 키울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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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들렀다. 시집이 놓여 있는 서가에서 눈에 들어온 시집.

 

하노이-서울 시편.

 

베트남에 여행했던 기억이 -내 첫 외국여행이 베트남이었고, 하노이였고, 하롱베이였다- 떠올랐고, 예전에 들었던 '월남'이라는 말, 그리고 '베트콩'이라는 말, '호지명(호치민)'이라는 사람, 또 고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손에 들고 집에 함께 온다. 이제는 나와 함께 하는 시집이 되었다.

 

하노이, 베트남의 수도.

 

수많은 강들이 있다고 해서 하노이(河內)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없어도 될 나라였는데,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은 나라.

 

그닥 좋은 인연이랄 수 없는데... 그래도 지금은 국교를 맺고 서로 왕성하게 교류를 하고 있는 나라.

 

식민지라는 체험을 함께 했지만, 그 뒤에 걸어온 길은 서로 다른 나라.

 

그들은 프랑스와 미국과 싸웠고, 또 자기들끼리도 싸웠는데, 우리 역시 일본과 그리고 동족끼리 싸웠던 그런 아픔을 함께 겪은 나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베트남에 가서 문인들과 교류하고, 우리의 잘못을 사과도 하고, 사실 이 시집에도 나오지만 사과보다는 유감이라는 말로 대체하긴 했지만...(식민 지배 체험을 공유한 한국과 베트남 양국 사이에 적대행위가 있었던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 이 시집 52쪽에서)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 나라의 수도 하노이에 갔다 온 체험을 시로 쓴 시집.

 

베트남에 대해서 안다면 이 시집에 나와 있는 시들이 가슴에 다가올 수 있으리라. 아니, 우리 역사도 알아야만 더 가슴에 다가온다.

 

그 중 한 시.

 

다시, 하노이로

                     -  하노이-서울시편 9

 

돌아오는 길은 하롱 Bay, 눈물 고인다

낡은 10인승 승합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은 하롱 Bay, 조선식으로,

비가 숲을 검게 하고 호수를 빛나게 하는

시골의 영롱한 장면처럼

 

창 밖은 일찌감치 어둠이 깔리고

전력이 부족한 하노이 외곽 마을에서는

그 밖에도 밤이 무언가를 포옹하며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없다

 

하노이 가까울수록 간절하다

하노이에 도착해도 후줄근한 70년대 신촌

변두리까지밖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귀향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간절한가?

그것은 내가 30년 전에 못 가보았던 길이다

공포가 없는 길이다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사람들의

마을이 밤을 식구처럼 포옹한다

아, 이, 안온과 경건

 

돌아오는 길은 하롱 Bay, 눈물 고인다

 

김정환, 하노이 서울 시편, 문학동네. 2003년. 28-29쪽.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우리나라를 만난다. 우리나라의 70년대를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70년대와는 다르니, 그곳에는 공포가 없다. 독재자가 없다.

 

그런 나라에서 우리의 과거를 보게 되는데ㅡ 단지 과거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본다. 우리가 잃은 것, 그러나 추구해야 할 것. 그것. 그래서 그런 그리움이 눈물 고이게 한다.

 

하노이와 서울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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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가면고 - 작가와 함께 대화로 읽는 소설
최인훈.이태동 지음 / 지식더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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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던 책이다.

 

왜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책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고, 또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책도 집에 있는데 굳이 산 이유는, 바로 최인훈과의 대담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서 단 한 명만 고르라는 무리한 질문이 따른다면 나는 조금 고민은 하겠지만, 거의 주저 없이 최인훈을 선택할 것이다. 최근에 나온 '바다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소설은 다 읽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광장"부터 시작하여, "총독의 소리" "태풍" 등등.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을 모두 읽고 참 대단한 작가구나 했었는데... 그 때 이 "가면고"도 읽었는데...

 

그런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가면고"가 그렇게 난해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너무도 난해해서 인기가 없는 작품 운운해서, 정말 그런가 하고 다시 읽고, 또 작가의 대담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 하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소장하기로 결심한 책.

 

나는 난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작가가 난해하게 썼다고 하고, 평론가들도 난해하다고 하면 내 소설읽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보니,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소설을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이태동 :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저와의 '대담 시리즈'를 위한 텍스트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가장 아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너무나 난해한 작품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최인훈 : "같은 주제를 번복한 형식이 주제 전달에 흥미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우선 저는 이 작품을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긴 하지만 "가면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4-195쪽

 

이거다. 이 소설에 대해 비평가들의 평론을 읽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소설은 모두가 자신의 이해에 맞게 읽을 수밖에 없고, 어떤 소설도 결국 자기 것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인훈이 말한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계속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또 언제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재미있는 소설은 언제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데, 이 "가면고"도 그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고" 한자어로 보면 가면에 대한 고찰인데, 가면은 결국 무엇인가? 우리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신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뭐 전후세대의 방황, 이런 말들을 신경쓰지 말자. 오직 얼굴,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만 집중하자.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얼굴은 자신의 내적 영혼이 밖으로 표현되는 형식이다.

 

정신의 형식이 바로 얼굴인 것이고, 그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바로 가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가면이라고 한 이유는 변화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행동,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면이라는 말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가면을 쓰느냐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데,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가면을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즉, 자신의 얼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는 얘기다.

 

외부의 화려함, 언뜻 보면 좋아보임, 겉으로만 꾸밈 등이 아닌,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용들이 얼굴이라는 형식 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다문고(多聞苦) 왕자는 상징적이다. 많이 듣는 고통은 결국 외부로 시선이 향해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외부의 탈이 아닌 자신의 내적 성찰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 현실에서 주인공인 민이 만나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자. 물론 작품에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가슴 가운데 기미가 있는 여자, 미라, 정임. 첫여자를 제외하고, 그가 깊이 사귄다고 할 수 있는 미라와 정임은 민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미라는 화가이고 정임은 무용수다. 그들은 둘 다 예술을 하는데, 예술은 표현을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표현을 하는 행위에서도 미술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 즉 몸과 정신 사이에 그림이라는 매개가 개입한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한 번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니, 이 과정에서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정신과 얼굴의 일치를 추구하는 민이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용은 자신의 몸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다. 몸으로 표현하는데 중간 매개항이 없다. 오직 자신의 몸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왜곡될 가능성이 없다.

 

정신과 얼굴이 일치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니 민이 누구를 선택할지는 이미 이들의 직업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다.

 

현대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을 겹겹으로 가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중국의 예술인 '변검'처럼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때에 따라 계속 가면을 바꿔가고 있지 않나?

 

맨얼굴로 살기 힘든 세상이 되지 않았나? 이런 때 정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서 내면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도 있다.

 

내면과 얼굴이 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지니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갖지 못한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가면이 아닌, 자신의 행동과 내면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얼굴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사는 현대인들이지만, 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영혼이 얼굴을 만든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존중한다.

 

이 소설은 그래서 현대에도 의미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내적 영혼이 얼굴을 만들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깥에서 오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서만 올 수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람임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읽어도, 다시 샀어도 후회되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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