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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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40대가 넘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리라.

 

그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 1990년대니, 그 이전에 고등학교를 다닌 40대들은 그를 알기가 힘들다. 사실, 백석만큼 정지용을 모르는 40들도 많으니 무어라 할 말은 없지만.

 

정지용이나 백석은 모두 90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언급할 수가 없는 시인이었다. 그들은 월북을 했든, 납북을 당했든, 아니면 그냥 북한에 머물렀던 재북이든, 모두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니,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는 정00, 백0 등으로 언급이 간혹 되기도 하였지만,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그럴 정도니, 입시에 찌들어 사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격세지감.

 

어느 새 백석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인이 되었다.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를 교과서에 다뤄주고 있기는 하고, 또 '길상사'와 관련해 체험학습도 하곤 하니, 이제는 많이 알려진 시인이 되었다.

 

많이 알려졌음에도 그의 시는 어렵다. 아니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에 쓰인 말이 어렵다. 사투리, 많이 알려진 사투리라면 정감있게 읽을 수 있겠으나,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전혀 뜻도 모르는 너무도 생소한 사투리가 쓰였으므로. 읽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언어가 백석을 청소년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우선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입에 들러붙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탁 막히니, 백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누가 선뜻 그의 시를 읽으려 하겠는가.

 

한 번 시집을 펼치고는 닫아버리기 일쑤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미 발표한 백석의 시를 다시 고쳐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백석 시에 친숙하게 다가가게 할 수 있을까.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시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백석의 시를 좋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살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 "알라딘 온라린 중고"에서 구입한 책이다. 백석의 시를 음식을 중심으로 접근한 책.

 

먹는 것, 이것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게다가 백석의 시에는 음식이 너무도 많이 나오니, 음식과 백석의 시를 연결지으면 백석의 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도 굳이 이런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수정·보완' (8쪽)했다고 하니, 백석 시에 쉽게 다가가게 하는 일종의 안내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각 장의 처음에 백석의 시를 소개하는데, 그 소개시의 표기를 고형진의 "정본 백석 시집"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가능하면 원어를 살리되, 현대 표기에 맞게 했고, 어려운 사투리는 밑에 주석으로 처리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작품을 읽을 때 처음 한 번은 가급적 주석을 보지 않고 읽어보기를 바란다.'(7쪽)

 

왜냐하면 시는 의미해석도 중요하지만 입에 감기는 말의 맛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는 음악과 친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의미 해석에 막혀 시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접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석의 시를 소개하고, 그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중심으로 백석 시에 접근해 간다. 그 저근이 상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학위 논문을 수정한 것 답게 나같은 사람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청소년들이 읽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다. 여기에 백석에 관한 이야기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부록처럼 수록해 놓고 있어서, 시만이 아니라, 백석 당시의 사회 모습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백석 시의 의미를 갖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는 것, 음식이 왜 백석 시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까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백석에게 흥미가 생겼다면 그의 시집을 사서 읽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음식이 갖는 사회 · 문화 · 역사 · 정신적 의미에 관심이 생겼다면 음식에 관한 더 많은 책을 찾아서 읽어도 좋고.

 

덧글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26쪽. 그는 85세인 199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66쪽. 1995년(84세) 사망한 것으로 언론에 추정 보도됨.

 

그렇다면 아주 단순한 오타인데... 그래도... 그가 1912년생이라고 하니, 26쪽을 84세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249쪽. 백석의 시가 노래가 된다면

이 책이 2009년판인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백창우, 김현성 등에 의해서 백석 시에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비록 많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은 백창우나 김현성을 찾아서 들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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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을 바꾸다 - 세상을 움직이는 미술의 힘
이태호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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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근대에 들어서 소수의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지금도 미술은 전문가들만이 하는 것인양,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미술하면 몇몇 대학이 생각나고, 그 대학에 가기 위해서 초중고 때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가.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미술에 대한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한 기술 연마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 미술대학에 가고, 미술대학을 나와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미술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회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것이 아닌,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술은 어느덧 소술의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미술은 소수의 예술이 아니다. 옛날에 미술은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공의 장소에 있었다. 함께 생활하는 곳에 함께 존재했다. 생활과 함께 하던 미술...

 

이제 미술은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소수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도 공공미술과 벽화그리기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미술은 소수의 손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소수의 미술이 아닌, 우리 모두의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미술이 세상도 바꿀 수 있음을 세계 각지의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미술은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처음 시작을 사진으로 시작한다. 사진으로 우범 지역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 그들이 찍은 사진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한 사람, 그래서 자신들의 삶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 '슈팅 백 프로젝트'로 시작한다.

 

여기에 이어 브라질의 벽화그리기를 통한 함께 함을, 낙서화라고 불리는 그라피티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뱅크시를, 미술 교육의 방법을 바꾸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 사람, 할렘가에 직접 들어가 살며 그들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 등등,

 

2부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차별에 저항하거나, 진실을 드러내거나, 68혁명과 같은 문화적 변혁 시기에 미술로 참여한 사람들 이야기, 이어 3부에서는 그 시대에 드러난 미술, 우리 미술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술이 사회 속에 있어야 함을,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면 미술은 집 안에 고이 모셔놓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으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미술이 순수미술과 더불어 계속 존재해 왔고, 우리나라 역시 그런 전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형식적으로 흐르는 벽화그리기나 공공미술 운동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미술, 이제는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모두와 함께 해야 한다. 미술이 사회 속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덧글

 

부끄럽게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데... 서울대 문양이나 연세대 문양에 대한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럴 수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서울대 문양이 서양의 문양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니...게다가 연세대의 경우 프린스턴 대학의 문양과 왜 이리 비슷한지... 연세대야 선교사가 세웠다 해도, 서울대는 해방이 되고 나서 국립대학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문양에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니... 이 책을 읽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어느 정도 비슷한지 궁금하다면 이 책 251쪽부터 257쪽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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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금서였었지. 이름으로만 들었던 마르크스란 이름과 그가 지었다는 책, 자본론.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직접 원어로 읽고 싶다고 독어나 영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

 

  이론과실천이라는 출판사에서 '자본'이란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게 80년대 후반이던가.

 

참 읽기 불편했었다. 사실, 자본론이란 책 자체가 쉽다고 할 수 없는 책인데... 경제학도 알아야 하지만 철학도 알아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외국에서는 '자본론 읽기'에 관한 많은 책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러다가 책도 두껍고 겉표지도 양장지인 누가 봐도 있어뵈는 "자본론"이 나왔다.

 

고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이다. 그는 서울대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 경제학의 학문적 다양성이 확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가 정년 퇴임한 다음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지 못해 그런 학문의 다양성이 서울대에서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제도권 교육에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참여한 공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비록 지금은 사회주의권이 모두 무너졌고,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전세계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는 이 때, 자본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자본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고 김수행 교수는 그런 모습을 제도권 교육에서 보여줬던 사람이기에 우리 학문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7월 31일 세상을 떴다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부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마르크스란 이름은 서서히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지만...

 

그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후임이 다른 전공자가 왔을 때, 다시 한 번 시대가 기울어 감을 느꼈지만, 이제 그의 죽음으로, 제도권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이름을 드러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

 

한 시대가 완전히 기울었구나. 이제는 정말 다른 시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번역본 "자본론"을 읽기 전에 그가 쓴 "자본론 연구1"(한길사)을 먼저 읽곤 했었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가버린 시절이고, 그런 시대를 풍미했던 학자의 죽음으로, 어쩌면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시대가 되었나 싶은 마음이다.

 

고 김수행 교수.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공부하시고, 후학도 양성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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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를 읽는 방법 - 현상학적 해석과 치유시학적 읽기 크리티카& 2
김성리 지음 / 산지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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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주술적 힘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 왔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생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미신이려니 했는데... 일본의 과학자가 펴낸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의하면 말은 사람을 변하게도 한다고 하니, 우리들이 말에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의 힘을 바탕으로 '시치유'가 이루어진다. 시를 읽으며 자신의 감정을 읽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활동이다.

 

가끔 마음이 외로울 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시를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치유 행위인데, 시나 노래는 짧은 언어 속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들이 치유에 좋을까? 이 책의 저자는 김춘수의 시를 꼽고 있다. 자신이 왜 김춘수 시를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김춘수 시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김춘수 시의 치유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본인이 김춘수 시에 그렇게 매력을 느꼈구나 하는 이야기를 '머리말'에서 하고 있다.

 

시가 발휘할 수 있는 치유의 힘은 어느 시라고 갖고 있겠지만, 저자는 김춘수 시 전반에 걸쳐 그의 시가 지닌 치유의 힘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초기 시부터 후기 시까지, 김춘수 시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를 하고, 그를 통해 김춘수 시의 치유력을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김춘수는 삶의 의미를 추구했고, 그것을 시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시를 무의미시라고 하지만, 결국 무의미라는 것은 의미로 규정되는 좁은 이성의 세계를 넘어,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인식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점.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넘어 정치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아나키즘에 경도되기도 하고(시에서 단재 신채호를 만나는 장면이 표현되기도 하는데...단재는 말년에 아나키즘 사상가로 변모한다), 천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는 외적인 제한을 넘어 자신의 내면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김춘수의 시를 읽으면 이해는 못하더라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의 시를 계속 들여다보다 보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김춘수 시의 치유효과다. 그냥 "꽃"의 시인으로만 알았던 김춘수,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정도만 알고 있어서,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순수시인으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 본질을 대면하려고 했다. 본질을 대면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 몸부림을 시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시라는 것이 현실도피의 시가 아님을 어쩌면 그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춘수의 시를 천천히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간에 배워온 편견을 놓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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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과 대상이(대상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자연이건 상관없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난다.

 

따라서 장소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이고, 무의미가 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비록 그 상황을, 그 필연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만나거나 서점 또는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데, 길거리에서 그것도 다른 잡다한 물건들을 내어놓고 판매하는 벼룩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을 여러 곳으로 돌리다가 시집이 몇 권 놓여 있는 가판을 보게 되었다. 어, 시집이 있네... 모두가 '문학과지성사'판 시집들이다. 한 예닐곱 권 있었나 보다. 읽은 시집과 읽지 않은 시집을 분리하다가, 모두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집이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로 나앉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시 하면 알아주는 '문학과지성사' 시집들이.

 

어떤 시집들은 이미 내가 읽은 시집이기도 했지만, 어떤 시집들은 도대체 외면당해도 이렇게 외면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를 켜켜히 쌓아놓고 있는, 퇴색의 흔적들만 남은 시집들이었다.

 

그런 시집을 제해놓고, 먼지가 덜 쌓인, 그래도 세월의 힘을 덜 묵은 시집을 두 권 골랐다. 그 중의 한 시집이 바로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

 

시인의 이름도 처음 듣거니와 제목도 신선해서 골랐다. 라이오의 날들이라니... 웬지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을 것 같아서, 내 지난 날의 향수를 자극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이런, 참... 시가 어렵긴 하지만, 이토록 시의 내용이 인과성을 배반하고 의미를 삭제해 버렸을 줄이야.

 

인과성 없음. 의미 없음. 내 말은 나와 상관없음. 유체이탈 화법이 춤추는 시대를 미리 경험한 것도 아닐텐데, 그런 지금의 모습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니...

 

내가 해석 못할 내용을 이렇게 유체이탈 화법이 난무하는 시대를 먼저 전유해낸 시인의 시집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좀 이해되게 시를 쓰면 안되나? 시가 마음 속에 들어와 그 속에 머물러,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내 마음을 울리게 하면 안 되나?

 

현대가 이렇다고 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써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언어의 기본 의미는 의미 전달 아닌가.

 

'무의미 시'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시는 소수였으면 좋겠다. 시는 의미를 지니고, 읽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마음을 울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아무리 나와 세상은 상관 없다는 태도를 지닌 말들이, 말과 행동이 겉도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에서 내가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가 없다. 시집 뒤의 해설을 읽어도 그럴까 하는 생각만 들뿐,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차례 읽은 시가 있었으니, 그 시는 바로, '아마도 내일은' 이라는 시다.

 

아마도 내일은

 

아마도 내일은

오래된 눈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를 몰고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눈은 날리고 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네

 

그대의 검은 머리에 내려앉고

내 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던

 

오래된 눈 창에 얼룩을 남기고

나는 얼룩을 지우네

 

누군가 흰 꽃을 던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네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져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아마도 내일은

그대와 나와 오래된 눈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12년 초판 4쇄.  26-27쪽.

 

내용은 몰라도 같은 시구들이 반복되어, 또 행의 끝구절이 같은 음절로 끝나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각 2행으로 이루어진 연들이 서로 짝을 이뤄 자연스레 형성하고 있는 운율은 이 시를 읽기에 좋게 하고 있다.

 

그냥 입 안에서 웅얼웅얼 읽기에 좋다. 그래서인지 자꾸 눈길이 가고 읽게 된다.

 

세 대상, 눈, 그대, 나... 이들은 모두 내일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살아 있음을, 이렇게 생기없게 노래할 수도 있다니... 살아 있음이 마치 오래된 눈.... 눈은 내리면 금방 녹는다. 그런데, 오래된 눈은 깨끗한 하얌을 잃고 더러운 검음을 유지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순간에서 지속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월의 힘이 켜켜히 쌓인 눈. 그것이 오래된 눈이다.

 

그럼 이런 오래된 눈은 누구인가? 나는 자꾸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대의 머리에 내리는 눈은 세월의 힘으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로 해석을 할 수 있고, 내 검은 눈을 비껴가던이라는 눈은 내가 애써 외면하던 늙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서 남의 스러짐을, 사라짐을 흰 꽃으로 애도하지만, 정작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의 영욕을 모두 안은채... 그래서 젊은날 환희에 찼던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지지'만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는 '아마도 내일은' 그러나 그 내일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내일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늙음은 사라짐이 아니니, 늙음이 생기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늙음은 젊은 시절의 노래를 이어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늙음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마도 내일은' 젊음은 젊음답게, 늙음은 늙음답게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가 되어야 유체이탈의 화법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세대에 맞는 언어를, 자신의 상태에 맞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곡해 아닌 곡해,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될 시에서 굳이 의미를 찾는 그런 나. 아직은 언어와 의미가 일치한다고 믿고 있는 나를 이 시집에서 애써 찾고 있었다.

 

이게 이 시집과 나의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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