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이야기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2
박정애 지음 / 단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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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는 우리나라.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세상을 등지기도 하는 나라.

 

세상을 등지려고 할 때 그 때 기댈 수 있는 몸을 누군가가 주기만 한다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무언가 잡을 것만 있다면 그것을 잡고 놓치지 않고 제 몸을 지탱해가면서 꽃을 피우는 나팔꽃처럼(파란 나팔꽃) 생명을 지켜나갈 수 있을텐데.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개뿐.

 

올라가거나 그냥 주저앉거나.

 

이 소설은 이러한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밑바닥까지 추락했음에도 그 밑바닥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 이야기.

 

그 희망이 친구이든(정오의 희망곡), 자신의 귀에 들리던 발소리, 그리고 자신과 하나임을 알게 해주는 남편이든(첫날밤 이야기), 자신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든(살 자격),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든(아주 오래된 하루), 말을 걸어줄 수 있는 나팔꽃이든(파란 나팔꽃) 무엇이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으면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소설.

 

성적때문에 절망의 늪에 빠지고 가족과 갈등이 일어나는 학생이라면 '정오의 희망곡'을 읽으며 공감하고, 공감하고, 그래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음을, 이들이 모두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의 맨 첫부분에 나오는 '정오의 희망곡'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첫날밤 이야기' 역시 주체로 서는 여인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시댁의 횡포에 맞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작은아기를 통해서는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가야 함을,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 자격'은 자책감, 죄의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볼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그냥 설교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죽는 것이 과연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죗값. 그건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 죗값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는 갚아지지 않는다. 그런 죗값은 다른 이의 목숨을 살리는 일로,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게 하는 일로 갚아질 수밖에 없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 점을 일깨워주고 있어서, 한 때의 실수로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안 좋은 수렁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아주 오래된 하루' 역시 마찬가지다. 불행의 중첩이다. 어른이 된 태호가 겪는 불행은 그가 어렸을 때 겪은 불행과 판박이다. 그의 형 태복이 말했다고 한다. 아이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은 부모는 부모도 아니라고. 그런 태복도 사고로 죽고 태호는 나락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 '여름'이라는 아이의 아빠가 되고서도 그가 겪은 불행은 계속 반복된다. 이럴 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극단의 선택? 아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살아남아야 '여름'이에게 아빠 노릇을 할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도 그를 삶으로 이끄는 끈이 있다. 바로 장형사인데...

 

아주 작은 끈이라도 이끌어주는 끈이 있다면 그 끈은 바로 생명줄이 된다. 튼튼한 생명줄.

 

'파란 나팔꽃'도 마찬가지다. 전신불구가 된 남편도 나팔꽃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아내도 나팔꽃에게 이야기를 하고, 중학생 아들도 중2병을 앓을 수도 없는 그 아들도 나팔꽃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팔꽃은 기댈 줄만 있어도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꽃을 피운다. 계속 뻗어나간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이 이 소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힘들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정말 힘들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우리들끼리 서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나팔꽃처럼 잡을 줄만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움켜쥐고 삶을 유지해 나가니까.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누군가를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꽃을 피우니까. 그러니까 힘들어도 우리 주변에 우리가 기댈 무언가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 우리 역시 누군가가 기댈 무언가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점들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서로를 삶으로 이끌어주는 줄이 있음을, 기댈 수 있는 기둥들이 있음을 소설이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살아라. 넌 살 자격이 있다. 아니 살아야만 한다. 그것은 네 의무이자 권리다. 

 

덧글

 

사실 이 소설집에는 소설이 한 편 더 있다. '젖과 독'이라는 아마도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시대의 궁궐을 배경으로 한 소설. 신분사회, 선택이 여지가 없는 그런 시대에 왕세자로 태어났다는 것, 적성에 맞지도 않은 공부를 하고, 누구에게도 위안을 받지도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하는 왕세자의 모습. 유모의 젖에서 위안을 느꼈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느낄 수 없는. 아직 세자빈은 그 역할을 못하는. 그래서 '독'을 생각하고, 그 '독'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침식당하고 있는 왕세자.

 

이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어떻게 희망이 있겠는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데... 그냥 처연하게 왕세자의 모습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암울하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 의지를 우리가 발휘할 수 있다.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선택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을 통해 선택을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왕세자와는 다르게 행동해야 함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선택에 바로 우리는 서로 기댈 수 있는 기둥, 줄들을 마련할 수 있고, 주변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해 다른 소설들의 의미가 더 살아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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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의 "국토"를 좋게 읽었었다.

 

그러니 헌책방에서 조태일의 시집을 보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손에 들게 된 것.

 

예전 그의 시에서는 남성성이 느껴졌다면 이 시집에서는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한없는 부드러움,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강함을 껴안고 가는 그러한 부드러움이다.

 

강하게 서로 자기주장만 할 때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감싸안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풀꽃같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

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

 

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

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

다만 웃고만 있을 뿐

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

 

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노래 되어 흔들릴 뿐.

 

꺾이는 것은

탐욕스런 손들일 뿐.

 

조태일,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창작과비평사, 1995년.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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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과 함께 하는 청소년 인문학
도홍찬 지음 / 글모아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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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독일 작가이다. 외국 작가들 중에 우리들에게 친숙한 작가들 이름을 대라고 하면 헤세의 이름도 꼭 들어가는데...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데미안'은 청소년들의 필독서로써도 인기가 많다.

 

"데미안"이 성장소설이라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필독도서, 또는 권장도서로 권하고 있기도 하지만, 또 가끔 논술문제에도 나와 청소년들이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청소년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읽어내기가 만만치는 않은 책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와 상황이 다른 독일 상황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책을 읽어나갈 시간도 부족한 우리나라 청소년들 상황이기도 하고, 또 학교 공부에 시달리느라 인문학에 관한 공부, 인문학에 관한 책들을 읽은 학생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읽어치우고 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점을 극복하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소년들이 이 책에 쓰여진 관점처럼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다면 "데미안"이라는 소설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도대체 소설을 읽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이 "데미안"에 들어 있는 인문학을 끄집어내어 알려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소설 한 편에 얼마나 많은 인문학적 성찰이 들어있는지를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어서, 다른 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에는 우선 서양 사상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내용과 고대 그리스 철학, 그리고 무의식을 다루는 심리학, 또 합리론, 경험론 같은 근대 철학 여기에 자연철학이 나올 뿐만이 아니라, 장자와 불교와 같은 동양 사상도 추출해낼 수 있다.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고민할 수 있는지는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책을 읽은 것으로 대체하고, "데미안"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데미안'이 아니고 '싱클레어'라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자.  책을 읽지 않고 제목만 본 청소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유년시절부터 대학생이 되는 성년까지 싱클레어가 겪는 경험, 고민들을 중심으로, 그 고민들을 싱클레어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 "데미안"이다.

 

안락한 가정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아갈 때 분리를 경험하고, 이 분리를 다시 통합으로 이끌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선과 악을 인정하되 분리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통합된 것으로, 이것들이 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에 있음을... 그래서 결국 데미안은 싱클레어 자아임을 파악해 가는 과정.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는 과정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고민할 시간도 없이 오직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다. 이들은 싱클레어처럼 고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과 거리두기를-이를 이 책에서는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자신을 타자로 볼 수 있는 관점- 하지 못하고 있기에 고민을 할 수조차 없다.

 

적어도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다른 세계를 기웃거릴 여유나 또 자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 여유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그러한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데미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핑계다. 자신의 모든 것을 외부에 돌리는 핑계. 외부의 세계가 아무리 나를 압박하고 몰아가고 결국 내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이고, 내가 나를 살 수밖에 없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이고, 이 책은 그래서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놓고 청소년들에게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하고 결정하라고, 다른 사람이 아닌 너 자신이 결정하라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너를 낯설게 볼 수도 있어야 한다고... 너 자신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존재이니 그것을 하나하나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또 다른   너를 찾아야 한다고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좀더 쉽게 잘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부록'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부록을 읽고 "데미안"에서 무엇을 찾아내서 고민해야 할지, 그 지점들을 인식한 다음, 이 책의 본문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구체화시켜 나가면 좋을 듯하다.

 

아마도 이 책은 소설을 이렇게 읽으면 좋다는 전범이 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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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소설을 통해서다.

 

"소년이 온다"

 

한강은 많은 소설을 썼는데, 작년에 이 소설로 한강을 처음 만났다. 물론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리고 한강이 시인이자 소설가라는 것. 마치 성석제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고.

 

하긴 소설과 시가 확연히 구분되어 한 분야에만 종사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니...

 

최인훈의 "광장"을 보라. 그 소설 속에서 이미 시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작가 최인훈이 주인공인 이명준을 빌려 시 창작을 하고 있는데...

 

더 오래 전으로 가면 "소나기"로 잘 알려진 황순원은 시인으로 시작을 했고, 또 마지막에 시인으로 작품을 썼으니... 시와 소설이 함께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이 이상할 이유가 없다.

 

이상이라는 말이 나오니, 이상은 시와 소설 분야에서도 독특하기로 소문난 사람 아니던가. 한강 역시 시와 소설 분야에서 모두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보자마자 한강이라는 이름에 그냥 손에 들고 만 시집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이런 시는 이 시집에 없다. 다만 이 시집에 실린 시의 내용들이 이 제목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할 뿐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말이 무엇일까?

 

여러모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늘 저녁에 자신이 곁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제 저녁은 내 필요할 때만 꺼내 볼 수 있게 넣어 두었으니, 저녁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무튼 이 시집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다. 저녁, 어둠, 겨울 등의 시어들이 많이 나와 대체로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무언가 축축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를 보면 방향을 잘못 잡아 결국 파멸로 이르는 초나라 사나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방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회복기의 노래',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이라는 시가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둠을, 겨울을 이제는 이겨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꾸만 어두운 분위기를 내뿜는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 이 시가 제일 눈길을 사로잡아 계속 몇 번이고 읽게 만들었는데...

 

                    저녁의 소묘 3

                - 유리창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앞집 마당

나목에 매놓은 빨랫줄에서

감색 학생코트가 이따금 펄럭인다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4년 초판 4쇄. 65-66쪽 

 

흑백의 차가움.

 

이 시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저녁도 붉은 황혼이 들 때 따스함과 편안함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시에서는 유리창으로 이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유리창을 얼음의 종이라고 표현해서 차가움을 극대화하고 있다.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안과 밖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안과 밖을 보인다는 것을 계기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라고 표현해서 보이지만 함께 할 수 없음을 그래서 차단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뒷연에서는 이를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래서 소통이 되지 않으니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신은 단단한 밀봉을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함께 있어야 할, 내 육신에서 심장이 떨어져 나가 서랍 속에 있다는 것은 자신 역시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들은 보통 심장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장은 즉 마음이다)

 

결국 유리창은 나와 밖을 가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몸과 영혼으로 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차갑고 어두운 무채색의 분위기를 이 시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다. 이 시집의 맨 마지막 시 '저녁의 소묘5'에서는 '(살아 있으므로) /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시집을 마치고 있다.

 

어둠은 밝음을 예비하고 있으니, 그래서 저녁은 서랍에 넣어 두었으니, 이제는 나에게는 밝음이 나타날 거라는 희망... 아마도 이 시집에서 가장 긍정적인 시는 '괜찮아'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지금은 어둡다. 어두워. 그런데 뭐? 괜찮아. 어둠은 곧 사라질테니... 어둠은 밝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니. 어둠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테니.

 

그래서 한강의 이 시집을 읽으며 회복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참고로 한강의 이 시집에서는 시어들이나 또는 시행이 (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참 많다. 이러한 (  )의 사용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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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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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드물다.

 

우리나라 전라도 무주에서 일어났던, 그것도 10년에 걸쳐서 한 건축가가 한 마을을 건축하는 그런 과정을 건축가의 글로 직접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 건축은 그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공공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건축가라면 모름지기 자신만의 건축을 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건축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는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정기용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에 있다. 사실 공공건축은 공개입찰을 한다. 이 책에 보면 당시인지 아니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3000만 원 이하면 수의계약이 가능하고, 3000만 원이 넘어서면 공개입찰을 해야 한다.

 

요즘말로 하면 주민자치센터, 또는 지역구청 건물을 설계하는데 건축가에게 3000만 원 이하로 받으라고 할 수 있을까? 건축가에게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은 건축이 실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공개입찰은 담합을 막을 수도 있지만(사실 4대강 사업에서 공개입찰을 했지만 담합을 했다는 증거나 나와 문제가 되기도 했으니,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공개입찰은 담합을 막고 투명한 선정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건축가가 한 마을을 건축하게 할 수는 없다. 한 건물을 건축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군수와 건축가의 뜻이 맞아 무주 마을 건축이 이루어졌다. 정기용은 이를 무주와 자신이 감응을 하고, 군수와 자신이 감응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땅과 하늘과 감응하는 건축, 그리고 이런 건축이 사람과 감응하는 건축, 그가 바라는 건축이었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설치한 것은 그가 처음이리라. 그 후 그를 모방한 건축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가 면사무소 건물에 목욕탕을 설치한 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마을사람들과 감응하려고 노력하고, 그 감응을 무주라는 마을로 넓혀 갔으며, 무주라는 마을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감응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무주 마을 만들기에 참여한 많은 건축들이 있지만 이렇게 무주의 어른들을 위한 목욕탕이 있는 공공건축,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무주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 밤하늘이 아름다운 동네에 천문대를 세워 별을 볼 수 있게 만든 건축, 마을 행사 때 내빈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그늘에 있지 않고 모두가 그늘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공설운동장, 구청 건물을 건축할 때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머물 수있는 공간으로 만든 건축들 등등

 

이 책을 읽으면서 무주에 한 번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건축했기에 자연과 사람과 감응하는 건축이라는 것인지 사진이 아닌 실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의 끄트머리로 가면서 아니 무주는 가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책의 후반부에 보면 정기용 건축은 이미 개발에 묻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건축이 물론 원형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그도 말했듯이 시간을 받아들이는 건축이 좋은 건축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과 사람과 감응하는 그 정신은 살아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그 점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개발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 정말, 금수강산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과 물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그런 자연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은 더 많이 사라졌겠지. 이 책을 쓸 당시가 벌써 8년이 넘은 과거이니...

 

그러나 이 책은 앞으로 마을 만들기를 하는 사람, 진짜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무엇이 공공건축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마을 만들기를 해야 하는지, 정말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지... 건축가와 공무원이 함께 어떤 지점에서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무주에서의 10년 기록을 통해 잘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너무 즐겁게, 좋게,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다. 이런 건축 시도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무주에 한 번 가봐야겠다. 어떤 식으로 정기용 건축이 시간을 받아들여 거기에 함께 녹아있는지 보기 위해서.

 

이 책에 나와 있는 말 가운데 기억할 만한 말들...

40.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 문제다.

79. 건축에서는 외관의 형식을 정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축에서는 사람들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는 삶의 형식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 결과가 형태나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건축의 기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면밀한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 보는 배려에 대한 문제다.

96. 어떻게 보면 건축가는 영화인일 수도 있다. 어떤 호흡과 속도로 특별한 장면을 생성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건축가도 영화인인 셈이다.

152.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다.

216-217. 건축가가 하는 일은 건물을 설계하기 이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횡단하며 여러 가지를 사유해야 하고, 또 나아가서는 땅과 시대와 세상과 관습과 싸우기도 해야 하며, 모든 기술적․경제적 요인을 결합하는 능력도 발휘해야 하는 총체적 작업이다.

240. 소위 선진국이란 건물을 신축하는 데 드는 비용만큼 건물의 유지 관리 보수에 예산을 아낌없이 쓰는 나라들이다.

243. 건축가란 근사하게 집을 그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며 여러 가지 설계행위를 통해 건축을 미리 살아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262.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283.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장소, 이것이 납골당의 존재 이유다. ... 이 세상의 모든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은 사실 산 자를 위한 것이다.

307. 우리에게는 위대한 건축가보다 우선 사회적인 필요성에 화답하는 보편적 해답을 보다 다수를 위해 생산해 낼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로서의 보통 건축가가 필요하다.

368. 건축가의 관찰력은, 우리의 농촌과 도시에서, 반복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또한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를 것인지, 그리고 우리 땅의 문제점은 외국의 것과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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