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란 분갈이

 

두 해째

군자란이 꽃 피우지 않아

분갈이를 하다 보니

뿌리가 엮이고 얽혀

서로를 감싸고 뭉쳐

제 살찌우기에 바빠

도무지 영양분을 꽃으로

보낼 수 없게 되었다.

꽃도 피우지 못하는 것들이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며

잎과 뿌리만 존재한다는 듯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고

흙이 주는 영양을 저희들끼리

생산 없는 소비만 하고 있었다.

이 얽힘을 풀지 않으면

웃자란 뿌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앞으로도 꽃을 보지 못하리라.

서로 얽혀 있는 군자란을

떼어내고 뿌리를 잘라내고

다시 심어 내년을 기약하는

분갈이를 하면서

세상도 이렇게

한 번씩은 갈이를 했으면

난마처럼 얽혀 있는 뿌리들을

잘라내었으면

꽃 피우지도 못하고

제 자리만 지키는 일은 없을텐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엮고 엮여 있지 않고

꽃을 피울텐데,

군자란처럼,

세상도 가끔은 갈이가 필요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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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총기 사고가 난무하고 있다. 흉악 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며, 묻지마 범죄도 일어나고, 무언가에 분노한 사람들이 그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풀고 있다.

 

연일 뉴스에서는 이러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연 이런 사건 사고들이 예전에는 없었을까? 특별히 요즘에 들어서 더 많아졌을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사건 사고들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자꾸 중심에 놓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엽적인 곳으로 눈을 돌리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나 가족끼리 총으로 죽이는 사건이나, 주한 미대사를 비롯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하는 행위들은 나무의 줄기에 상처를 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행위들이 일어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 근본 원인을 찾아 치유하려고 해야 사회가 안정된다. 그렇게 뿌리를 찾아 뿌리를 고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지엽적인 문제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과연 안정적인가? 우리들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부터 폭력에 길들여져 있고, 학생들은 입시에 찌들리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취업난에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있고, 어른들은 언제 짤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노인들은 막막한 생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이것을 고칠 수 있는 사회의 근본 개혁이 필요한데... 교육부터 경제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데, 그것을 외면하고 땜질 처방만 하고 있으니 이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담 근본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적어도 생계가 막막한 사람이 나오지는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각종 사건 사고에 대한 정부 입장을 보면서 나희덕의 이 시...'나무 한 그루' 얼마나 시의적절한지.

 

그의 시집 "뿌리에게"가 다 읽을 만한데... 그래도 지금은 이 시가 지금의 상황과 가장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자. 그렇게 하도록 하자. 우리도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나무 한 그루

 

학교 뜰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뿌리를 거세당한 채 기울어진다

세상에 이럴 수가,

교장선생님은 얼굴까지 붉히며 열을 올린다

잔인하게도 학생이 이런 일을 할 수가,

학교 뜰의 나무 줄기에

누군가 칼로 긁어 상처를 냈다는 것이다

그런 학생이 사회에 나가면

흉악범이나 될 게 분명하다며

누군지 밝혀내어

마땅한 처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싹수가 노란 것은 미리미리 잘라내야

선량한 나무들이 벌레먹지 않는다고 한다

쓸쓸한 마음으로 나와

시들어가는 나무 한 그루 쓰다듬으니

바람결에 우우우 소리내어 운다

퇴색해버린 이파리,

난자당한 줄기보다 더 아픈 것은

묶여진 이 뿌리, 때문이에요

울고 또 울어도 듣는 이 없어

나무 한 그루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간다

 

나희덕, 뿌리에게, 창작과비평사, 1995년 4쇄.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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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
비노바 바베, 김성오 옮김 / 착한책가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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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

 

그에 대해 알게 된 건 평전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브라만 출신으로 간디의 제자로 평화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교육운동에도 참여한 사람. 나중에 토지헌납운동을 벌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을 한 사람.

 

그 정도였다. 그의 교육론에 대해서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토지헌납운동이 더 내 마음에 다가왔고, 그 토지헌납운동이 자비가 아니라 의무임을, 토지를 달라고 하는 일들이 애원이 아니라 권리임을 천명한 그에게 놀랐고, 또 그런 운동으로 많은 토지를 기부받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됐다는데 더 놀랐었다. 인도란 나라 만만한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가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는 사실, 그것이 토지헌납운동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이탈림

 

그가 관여한 교육운동을 나이탈림(새로운 교육)이라고 한다. '새로운' 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교육을 거부하고, 새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나는 의미도 있고,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낡은 교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교육을 '기초 교육'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기초는 유치원이나 초등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초'를 배우게 하는 (분명 '가르치는'이 아니고 '배우는'이다. 이는 교사를 중심에 놓은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중심이 되는 교육, 그리고 교사 역시 학생이 되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교육을 한다는 의미다.

 

이 나이탈림에서 교사와 학생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이 지금의 교육처럼 학교라는 공간에, 교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수업시간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교과서로 특정한 교사에게 배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윤리가 기본이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비노바는 인도의 교육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특히 대학교육에 대해서는. 대학교육을 배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들은 지식위주로 배웠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자부심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노바는 대학을 나왔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좀더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비윤리적인 경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옳지 않은 행위를 덮으려고 하는 경우는 윤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오로지 지식이 중심이 된 교육의 결과인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금과 너무도 비슷하고, 비노바의 이 외침이 지금 우리에게 적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나이탈림은 이런 실생활과 괴리된 교육을 거부하고,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추구한다.

 

지행일치

 

그래서 비노바의 교육은 지행일치, 언행일치를 추구한다. 배운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행한다는 것은 가르친다는 것이자 곧 배운다는 것이다. 말이란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말은 곧 행동이다.

 

이것들이 따로 논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육이 아니다. 하여 교사는 독립된 공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단지 학생들과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생활 자체가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존재로서의 교사인 것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에서도 전문가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교사다.

 

그는 말로만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또 함께 함으로써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하는 존재다. 따라서 말과 행동이 가르침과 달라질 수가 없다.

 

통합교육

 

비노바는 통합교육을 주장한다. 통합교육은 교과목을 통합한 것만이 아니라 일과 공부를 통합한 것을 말한다.

 

그는 일에서 멀어진 교육은 죽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일을 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서는 옷을 만드는 실잣기가 필요했고, 농사가 필요했다. 비노바는 교사는 직접 실을 잣고,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 원리를 배우게 해야 한다고, 학생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교육의 우선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데 있다고 한다. 오로지 '가르치는 것'만 할 수 있다는 학생에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보는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어떤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오로지 '가르치는 것'만 아는, 실생활에서 자신의 필요를 직접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모르는 교사들만 양성하고 있지 않는가.

 

일을 할 줄 모르는 교사들이 일을 천시하는 교육을 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교육을 비노바는 낡은 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생활과 괴리된 교육, 이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육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비노바의 교육철학이다.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

 

비노바의 교육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교육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은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철학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배우게 해야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을 보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철학을 주고 있는가? 아이들이 어떤 것을 배우고자 하는가?

 

적어도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갈 때 의미있게 사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오직 대학입학을 위한 교육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은 천시하고,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는 직업을 가질까 궁리하게 하는 교육을 하지 않는지... 대학을 나오고 과연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자신의 생명을 잇는 존재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 오히려 그런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현실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우리는 교육개혁을 운운하지만 늘 방법론에 치중했지 철학에 대해서는 등한시했다. 이제는 교육에 대해서 진정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인지 교육 철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할 때다.

 

비노바의 교육은?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옛날 고리타분한, 그것도 발전하지 않고 농업이 중심이 된 인도의 이야기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가 이야기한 것들은 당시 인도의 상황에 맞는 교육론이었지만,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그의 주장이 지닌 핵심을 추구하면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교육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한 지식보다는 실생활과 연계된 지식을 추구하게 해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윤리가 중심이 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 교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 그는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학생이라고 지칭한다. 교사는 학생이어야 하고, 학생은 교사이어야 한다는 말...

 

이런 것들은 지금도 꼭 필요한 교육론이다.

 

이 책 글 하나하나가 참조할 것이 많은 교육에 관한 책이었다. 비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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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책세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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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으로 자신의 삶을 구한 어떤 간증 같은 것을 바랐다면 이 책을 잘못 고른 것이다.

 

문학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와 있지만, 그것이 조각조각 연결되어 있어 하나로 이어 읽기가 상당히 불편한 책이다.

 

게다가 작가가 자신이 읽은 작품들을 수시로 인용하는데, 이는 마치 '퀼트'와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저것 모아서 엮어 놓아 하나의 예술이 되게 만든.

 

이 책도 마찬가지다. 여러 작품들의 말을 인용하고, 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도 이야기하는데 이것들이 퀼트 작업을 하듯이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를 연결시켜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서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소설들을 읽었다거나 또 여러 이야기들이 서로 엮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회고록이라고 해야 하는데,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우리가 사실 문학을 읽는 이유가 다 다르겠지만, 이 책의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길 바라지만, 그 무엇도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 문학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필요하다. 231쪽.

 

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흔히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을 많이 쓴다. 문학이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베르테르 효과는 삶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종말로 이끌어서 문제지만, 이 베르테르 효과를 거꾸로 하면 문학은 삶을 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직접 볼 수 없으므로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되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보기,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때문에 문학은 삶을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베텔하임이라는 사람이 쓴 "옛이야기의 매력"을 보면 동화들이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와 그들의 삶을 구하게 되는지가 잘 나와 있다. 아이들은 그냥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읽겠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방향을 만들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제적 시대,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그런 과정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런 이야기들로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대다수를 모른다는 것뿐. 만약 알았다면 이 작가가 이 부분에서는 이런 의도록 이 문장을 인용했군, 다음엔 뭘 인용할까 기대하는 재미로 읽었을텐데... 그게 아쉽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문학은 우리를 간접 경험의 세계로 이끈다. 이런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할 수도 망칠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문학이란 사람들의 삶을 구하는 쪽에 더 힘이 실리는 문학이겠지. 그래야 문학이 살아남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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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청년 실업 말고도 삼포세대라고 하는 말들이 유행한다.

그만큼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재미 있는 것을 봤다. 서류전형 통과라는 벽에서 서류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나 비행기는 번번이 벽을 넘지 못하자,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망치를 들고 그 벽으로 돌진하여 망치로 내리치는... 그러나 벽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망치만 부러지고 마는.

 

아마도 예전의 애플 광고를 패러디한, 그러나 너무도 슬픈...

애플의 광고에서는 거대 권력을 박살내고 있었는데...우리나라 이 광고에서는 망치가 부러지고 마니... 현실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서류전형이라는 취업의 1단계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고, 젊은 시절 그런 고통쯤은 견뎌내야 한다고,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이미 취업의 문을 통과해 기득권을 견고하게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면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책임을 청년 개개인들에게 지운다. 너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더 노력해 봐라고.

 

하지만 이것은 청년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놓고, 그 좁은 문을, 그 견고하고 높은 담을 통과한 사람만이 취업할 수 있게 한 우리들의 잘못이다. 우리들의 책임이다.

 

적어도 기성세대라고 한다면 지금 청년들이 이리도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 미안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어른의 몫이고, 어른의 자세다.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이 광고, 결국 책임지는 어른들은 나오지 않는다. 함께 벽을 부수겠다고 망치들고 나오는 어른은 없다. 오로지 얄팍한 취업 팁, 서류전형 팁만을 알려주려고 한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일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어른들에게 당신들 도대체 뭐 했냐고,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제대로 대책을 마련하라고 외치게 해야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누구나 아프다고,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너희들을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그렇게 함께 하자고 해야 한다.

 

그게 어른의 자세다.

 

이희중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예전에 '사냥꾼'이라는 시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도 잘 나타내 주었다는 생각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청년 실업의 문제와 연결되는 시를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렇게 청년들을 소진하게 하면 안 되는데...

 

함께 그들을 막고 있는 높고 단단한 벽을 부수는 일에 나서야 하는데... 하는 생각... 어른으로서 미안해졌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문, 또는 기다리면 온다는 고기

 

문이 있는가

두드리면 열리는 문이 있는가

왜 헤매며 아무 벽이나 두드려 보는가

누구는 쉽게 열리더라고 하기도 하고

아예 열려 있더라고

문이 아니라 길이더라고 하네

그런가, 저마다 찾는 문

서성거리는 발들

세상은 바다 그 변경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늘 끝에 자신의 살점을 매달아 놓았다

목숨을 달아 놓았다, 무서운 미끼여

기다리면 큰 고기가 오는가

들린다, 경첩이 녹스는 소리

미끼가 썩어 가는 소리

 

이희중, 푸른 비상구, 민음사. 1995년 1판 2쇄.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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