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교실 : 중등 편 - 미국 명문대 재학생의 30%를 차지한 유대인 공부법 하브루타 질문이 있는 교실
전성수.고현승 지음 / 경향BP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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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는 본래 말이 많다. 이론도 많다. 그리고 결과도 다 다르다.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교육은 정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론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 이론이 모든 교육활동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론으로 모든 교육활동을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상황에 맞게 교육에 관한 이론은 계속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교육에는 이론보다는 늘 실천이 앞선다. 그런 실천을 보편화하는 작업이 바로 교육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부터 이루어져왔던 여러 교육이론을 들어보면, 실용주의, 구성주의, 열린교육, 몬테소리 교육, 발도르프 교육, 프레네 교육, 섬머힐과 같은 대안교육, 일본에서 일어났던 배움의 공동체, 요즈음은 거꾸로 교실이라고 하는 운동 등등 참으로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이론들이 있음에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교육이론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학교와 동일시 하지 말고 또 교육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침보다는 배움을, 이는 교사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의 교육이(이것을 우리는 배움이라고 한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 중심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학생 중심이라는 것은 배움을 중심에 놓는다는 말인데, 배움을 중심에 놓으면 당연히 질문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질문이란 알고자 하는데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즉,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배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이 책에서처럼 유대인 교육법, 또는 '하브루타 교육법'이라고 굳이 명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중심에 두는 생활은 유대인들이 해왔고, 그들의 그런 교육방식을 '하브루타 교육법'이라고 했으니, 그 말을 써도 별 문제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나온 '하브루타 교육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학생들이 질문과 대답, 그리고 또다른 질문을 통하여 배움을 이루어나가는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거창하게 유대인 교육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질문이 없는 교실은 죽은 교실이고, 질문이 없는 배움은 배움이 일어나지 않은 배움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는 수업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론이 앞부분에 있다면 뒷부분에는 실제로 학교 수업에서 적용한 '하브루타 교육법'의 실제가 실려 있다.

 

아이들이 수업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질문법을 생활화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있는 이 책은, 질문이 사라진 교실은 배움이 없는 교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둘이 또 모둠이, 반 전체가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또 질문하고 대답하고 또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배움을 이끌어가는 수업... 그런 수업에는 진도는 중요하지 않다.

 

배움에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게, 자세하게, 정확하게 알았느냐하는 질적 관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또 사람의 기억은 혼자서 읽고 쓰고, 듣는 활동의 기억보다는, 서로 이야기하고, 자신의 말로 바꿔서 설명하는 동안 더 오래동안 우리의 뇌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학습효과면에서도 이런 질문 교육법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 변화에도 질문교육법은 유용하다. 질문은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알아야 함은 기본이고, 상대방의 말, 상대방의 태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상대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질문교육법은 창의적인 인재, 융합하는 인재를 기르는데도 도움이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 창의성이든, 융합이든 이런 말을 떠나서 질문을 하면서 수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수업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재이닜게 참여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됐다.

 

수업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 다음은 저절로 이루어질테니 말이다.

 

질문이 있는 교실... 이건 꿈의 교실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시기에 우리가 이뤄야할 교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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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으며 빙그레 웃음지어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시들이 어려워 해석하기 바빴는데... 사실, 해석도 잘 안 되고, 모호한 개념들만 머리 속에서 맴돌다 끝난 시들도 많고,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 이렇게 시를 써서 과연 누가 읽을까 했던 시들도 많았는데...

  이시영의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은 나에게 무척 친숙한 시들이었다. 시들이 친숙하다는 말보다는 시의 내용이 내게 친숙하다고 해야 맞겠다.

 

  고은의 "만인보"를 읽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고은의 "만인보"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주로 시인이 만났던 사람들, 그것도 민중문학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라는데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로 읽는 문학 동네 뒷이야기 정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단지 문학 동네 뒷이야기가 아니라, 문학인들이 겪어내야 했던 60-80년대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시인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마음이 아픈 내용이어야 하는데, 후일담 비슷하다고 여겨서인지, 아픈 마음, 분노보다는 따스한 느낌, 배시시 배어나오는 웃음이 넘쳐 흐른다.

 

시인 자신이 겪었던 감옥 얘기도 어둡고 무겁다기보다는 밝고 경쾌하다. 그래서 그땐 그랬구나, 우리가 이런 시절을 거쳐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참 많은 문인들이 나오는데... 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문인들이 시에 등장한다.

 

시집을 다시 뒤적이지 않아도 떠오르는 이름으로 '김남주, 이문구, 황석영, 송기원, 윤흥길, 천상병, 조태일, 김동리'가 있다.

 

창작과비평사에 근무하면서 시인은 많은 문인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느 순간 시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 시집이 나오게 되었고, 시를 통해서 우리의 지난했던 과거를 잊지 않게 되었다.

 

시인은 시의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가 무슨 '보복'처럼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그것을 밤을 새워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은 시인과 한 몸이 되어 한 시대를 겪어냈던 사람들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이 시집이 가능하기도 했으리라.

 

결국 우리의 과거는 지금 우리를 만들어주고 있으며,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시집에 나오는 많은 것들이 과거로 사라졌지만, 그래서 지금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을 수 있지만, 여전히 쓸쓸함을 주는 시.

 

이 시집에서 극히 적은 그러나 적어도 이 시집에서 너무도 쓸쓸하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이 시의 내용이 이제는 끝나도록.

 

8 · 15 

 

  기념식에서 돌아온 독립유공자 유족이 올해도 어김없이 비닐천막 문을 열고 들어간다.

  조국의 하늘은 저리 푸르건만

 

이시영, 바다호수, 문학동네. 2004년.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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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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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한 번 읽으면 주욱 읽게 된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무어라 할까, 자꾸 소설의 내용에서 거리를 두게 되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몰입하지 않게 하는 장치. 등장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서, 등장인물과 함께 행동하고 웃고 울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하지 않는 장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라고 하면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고, 등장인물에 감정을 푹 담아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데,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만은 소설이 현실이라고, 자신이 그 소설 속에 들어가 경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 중간중간에 나오는 서술자의 말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데, 작가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조금씩 들려주겠다는 노골적인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옛날 영화에서 영화의 내용을 해설해주는 변사의 느낌, 아니면 고전소설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작가가 정리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힘이 있다.

 

이 소설을 펼치는 순간 책장을 계속 앞으로 넘기게 한다.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서술자라고 해야 옳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직접 등장하니, 작가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물론 실제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작가이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 중에서 어떤 사건을 들려줄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소설은 춘희에서 시작해서 춘희로 끝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춘희의 엄마인 금복이다. 어쩌면 금복의 일대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작품 분량의 2/3를 금복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금복의 딸인 춘희로 시작해 춘희로 끝나고, 춘희의 벽돌에 대한 에필로그와 춘희가 사라지는 것으로 작품을 마감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제목에 대해서 생각했다. 제목이 "고래"다. 얼핏 제목만 보면 무슨 해양소설일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고래는 금복이 바닷가에서 보고 충격을 받게 만드는 대상이자, 또 그 충격을 영화관을 짓는데 고래 모양으로 짓는데서만 나온다. 그밖에 고래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고래"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내용과 몇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우선 고래는 바다에서 육지로 왔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포유류다.

 

그것은 그의 큰 몸집을 육지에서 유지하기 힘들었겠단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육지 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던, 다른 성향을 지닌 생명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히 고래를 생각하는 금복은 이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고래처럼 육지에 살 수 없다. 남들에게는 장대하게 비치나, 실질적으로는 병들어가고 있다. 그러니, 금복은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바다로 가지 못하는 고래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고래는 춘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춘희의 덩치는 여자의 몸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통뼈다 보니 힘도 장사다. 그런 춘희는 다른 사람들과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춘희가 말을 못 할 수밖에 없고, 다만 예민한 감각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물로 표현될 수 있다. 고래는 인간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파탄을 맞는다. 춘희 역시 자식을 잃고 자신만의 죽음을 맞는데... 그런데, 이런 모습을 작가는 우리에게 덤덤히 전달해주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정점을 향해 치달을 때도 곧 몰락이 있음을, 그것은 고래가 바다에서 위용을 자랑할 수 있겠지만, 육지에 올라와서는 다른 사람들의 먹잇감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결국, 고래의 몸이 해체되는 장면을 통해 금복의 최후가 그려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고래는 인류의 유년시절을, 순수했던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춘희의 벽돌이 대극장의 벽돌로 남아, 그를 생각하게 한다는데서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에는 동물이 세 종류 나온다. 작품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금복과 관련된 것이 바로 고래라면, 춘희와 관련된 동물은 코끼리다. 그리고 극장에 끝까지 있는 개가 있는데...

 

개는 제외하더라도, 고래의 삶과 금복의 삶, 그리고 코끼리의 삶과 춘희의 삶을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고, 서로 다른 표현법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 소설이기도 한데...

 

이 모든 것을 떠나 한 편의 이야기로, 장대한 번영과 몰락의 이야기로 이 작품을 읽을 수가 있다. 그냥 재미있게... 여기에 작중인물과 제목에 대해서, 또 우리의 삶에 대해서 더 생각하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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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사랑

 

누군 18년간 이 나라 제왕으로

온 국민 가슴에 박혀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기념관 세우겠다고 난리인데,

국민 뜻과는 상관없이

제 하고 싶은 것 다

했을 따름인데,

좋든 안 좋든

너무도 강하게 각인되어

한 순간,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계속 존재하고,

국민들이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는데……

 

독재자도 아닌데,

독재자도 될 수 없는데,

내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존재 자체로

내 의지완 상관없이

내 마음에 들어와

온통 헤집어 놓고,

어느 날,

가 버려도 이미 마음에

새겨진 화인(火印)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수렁같이

지울 수 없는

내 맘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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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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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AXT' 창간호에 나온 천명관의 대담을 읽고, 천명관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그의 말에 동감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에는 동감하는데, 그가 쓴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이런, 이런, 그의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바로 "고령화 가족"은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인데, 문화 생활을 잘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영화를 보지도, 소설을 읽지도 않은 상태.

 

작가에 대한 이야기, 또 작가의 이야기만 읽고 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적어도 그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둘보다는 우선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하지 않나.

 

그래, 작품을 읽어야지, 그의 소설을 읽어 보자고 도서관에 갔는데...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이 "고령화 가족"

 

나이가 많은 가족이라는 뜻인데... 다른 말로 하면 늙어버린 가족이라고 할 수 있고, 여기서 늙었다는 말은 희망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이 되지만, 온갖 경험을 한 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형(오한모), 나(오인모), 여동생(오미연) 그리고 조카 장민경. 이런저런 일을 겪은 끝에 이들이 엄마가 살고 있는 집에 모여 살게 되고, 살게 되면서 또 이런저런 일을 겪은 끝에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

 

시작부분은 우울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영화 감독인 내가 완전히 망해서 거의 알콜중독자 수준이 되고, 더이상 살 곳도 없어 엄마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상하게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무언가 갑갑하지 않고, 그 상황이 경쾌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소설 속 삶은 무거우나, 소설의 표현은 무겁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명 한 명 집으로 들어오는 과정, 이미 첫째인 오한모는 감방을 들락달락 하면서 엄마랑 살고 있는 오십 대이고, 나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고 영화감독까지 하지만, 갑갑한 삶을 살기는 매한가지고, 내가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고 난 뒤, 남편과 이혼하게 된 여동생이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 참으로 암담해야 하는데, 오히려 웃음을 머금게 하면서 펼쳐진다.

 

이 다음부터는 각종 사건들이 재미있게 펼쳐지는데... 그들이 겪게 되는 간난신고가 바로 이들을 늙게 만들고 있다. '고령화 가족'이다.

 

제일 어린 민경이조차도 소위 말하는 비행청소년이 되는데... 이 아이가 겪은 현실이 그리 만만한 현실은 아니다. 그러니 가장 어린 인물조차도 '고령화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경쾌했듯이, 집을 나가는 과정 역시 경쾌하다. '고령화 가족'이라는 제목이 풍기는 것과는 달리 소설의 전개는 빠르고 가볍다. 심지어 서술자인 내가 깡패들에게 맞는 장면조차도 무겁지 않다.

 

그렇게 각자의 무게를 짊어진 삶을 사는 가족 구성원들은 제 삶의 무게를 또 스스로 지고 살아가게 된다. 각자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읽다가 우리나라 옛 윤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가족이냐, 콩가루 집안이지라고 할 정도로 엉망인 집안이지만, 이들은 함께 살았던 장소에서 함께 했던 기억을(비록 서로 다르게 느끼고 기억하고 있지만) 바탕으로, 또 엄마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배다른 형제, 아버지 다른 남매지만, 이들에게는 이들이 힘들 때 늘 묵묵히 먹여주고 재워주는 엄마가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이들은 하나로 엮어주는 엄마가 있기에 가족으로서 지낼 수가 있게 된다.

 

많은 얘기가 전개되지만, 이들을 가족으로 엮어주는 것은 바로 '밥'이고, 이 '밥'을 해주는 존재는 엄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맨 처음 하는 말로, 위대한 작가들 빼고.. 우리는 모두 '맘마'라는 말을 먼저 한다는 것, 그 맘마는 바로 엄마에서 나온다는 것, 자식들이 아무리 엇나가더라도 엄마는 밥을 중심으로 자식들을 늘 맞이한다는 것.

 

'고령화 가족'은 그냥 재미있게 읽어도 좋지만, 밥상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읽어도 좋다. 여기에 이 밥상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엄마라는 사실. 하여 비빌 언덕인 엄마가 있음으로 해서, 이들은 다시 제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생각할 수가 있다.

 

'고령화 가족'... 늙은 가족이라는 얘긴데... 많은 경험을 한 가족이라는 뜻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 결국 늙든 늙지 않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이 바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엄마 집으로 모여들고, 엄마 집에서 나가 제 삶들을 사는 과정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은 늙었지만, 이들의 출발은 늙지 않았다. 모든 출발은 늘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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