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언론이란 말에서 황색이란?

 

황색언론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황색언론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언론에게

왜 황색?

 

황색은

오방색(五方色) 중 가운데 색

땅이, 똥이, 금이 지닌 색이다.

황색에는 만물의 생명이

생명을 살리는 밑거름이

화사하게 빛나는 존귀함이

모두 들어 있다.

 

황색은 왕의 색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군도 폭군도 될 수 있는

찬란히 빛날 수도

구린내를 낼 수도 있는

그러한.

 

금과 같이 드러나야 할 것은 드러내고

똥과 같이 들어가야 할 것은 들여넣고

금처럼 빛나는 일은 장려하고

똥처럼 묵히는 일은 발효시켜

모두가 땅에서 제 역할을 하게 하는

그러한.

 

구린내만 풍겨 내는 황색이어서는 안 된다.

똥이라도 거름이 되는

땅 속에서 금이 되는 그런 색이어야 한다.

그게 언론이다. 왕의 색, 중심의 색

그런 황색이 되어야 한다.

언론의 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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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격월간지라고 해서 사회적 문제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두 달만에 다 없어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니...

 

'삶이 보이는 창' 104호를 읽었다. 읽으면서 삶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게 만들지 않나 싶었다.

 

많은 삶들을 이번 호에서 보게 되는데...

 

1.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으로 인한 문제.

 

국회의원 지역구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문제에 국회의원들이 잘 나서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거기다 비례대표를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지역구를 늘리고 비레대표를 줄이자는 말도 나온다고 하니... 이거야...

 

이럴 때 자신의 이권이 아니라 공동체, 공화국의 이익을 위한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삶이고 정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추첨민주주의제도'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추첨민주주의가 가능함을 이번 호에서 이지문이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추첨민주주의는 공화국을 운용하는 기본이 될 수 있음을, 지금처럼 이전투구하는 정치인들을 보지 않아도 됨을 알려주니, 그것으로도 추첨민주주의(말이 어렵다면 제비뽑기)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게 하고 있다.

 

2. 노사정 대타협 또는 노동개혁과 임금피크제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한국노총지도부에서 합의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결과인데, 노동자들의 해고가 지금보다도 훨씬 자유로와질 거고,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기간도 2배로 늘어나게 되는데... 어떻게 대타협이 가능한지.

 

이 대타협이 안 되면 미래세대에게 부담이 될 거라 하는데, 부모가 제대로 못 하는데, 자식들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지?

 

복지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부모들을 자식들이 부양해야 한다면 이 노동개혁은 그야말로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에 불과할텐데...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아니고.

 

이 때 이런 고민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대책이 있으니, 그것은 기본소득. 전국민이 힘들다면 우선 청년들에게라도 기본소득을(기본소득이 이상하면 기본배당이라고 하자) 지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면 좋지 않을까.

 

이번 호에서 황규관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여기에 더해서 김경윤의 '예수 경제학'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임금피크제가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지 예수의 경제학을 빌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말, 성경에 나오는 일화를 예로 들면, 정말, 노동 시간이나 노동자의 나이에 따라 임금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동등한 지급을 하는 것이 신의 말씀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지방자치제도를 넘어 연방제로

 

연방제.. 낯선 말이고, 한 때 연방제를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르고는 했는데...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예산 분야에서, 또 정책 분야에서 진정한 지방자치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도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연방제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이번 호에서 말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더 고민하더라도, 지금 성남시에서 학생들에게 교복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정책을 시의회에서 통과시켰다던데...

 

이것에 대해서 지방자치단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와도 협의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이는 자사고 폐지를 둘러싼 서울시교육청과 교육부의 갈등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는데...

 

연방제가 되면 지방도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립해서 독자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고, 그렇다면 지역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지역민심을 반영한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는... 여기에 중앙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얘기들...

 

이처럼 이번 호에서는 삶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게 만들고 있다. 가만히 있는 내 눈에 무언가게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찾아 보게 만드는 역할을 이번 호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삶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가 있다. 삶, 제대로 보자. 삶창은 그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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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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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이다. 그럼에도 읽어갈수록,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아쉬움이 드는 책이다. 더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시대를 훔친 미술"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에 나타난 시대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미술은 당연히 그 시대를 반영한다. 이것은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또는 초현실주의든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넘어설 수는 있다. 그래도 넘어선다는 것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보다 나은 다른 시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니, 모든 미술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하여 그림 하나하나를 보면서 이 그림에는 어떤 시대의 모습이 담겨 있을까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편적으로 그림을 보는 것보다, 그림을 역사로 보는 것이 더 재미있고 의미있을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미술과 역사, 그리고 화가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 또 화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역사라는 꾸러미에 그림과 사람들의 삶을 엮어넣을 수가 있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가고, 그림을 보면 자연스레 근대사가 머리 속에 들어온다. 역사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구나 할 수도 있고, 또 그림을 이렇게 융합해서 볼 수 있구나 할 수도 있고, 화가들이 이런 삶을 살았구나 할 수도 있다.

 

그림의 역사를 꿰는 재미도, 각 그림들을 보는 재미도, 그리고 이를 통해서 역사를 알게 되는 재미도 있는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말도 있듯이 역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느니 마느니 문제가 붉어지고 있지만, 국정교과서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렇듯 역사를 알면 좋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하여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재미있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 책은 역사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림에 관한 책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순서대로 주욱 보기만 해도 우리 인류가 겪어온 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여기에 지은이가 진고 있는 역사적 관점을 더하고, 나만의 관점으로 다시 이 책의 내용을 더한다면, 우리 역시 안 좋은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그림들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가장 가까운 현재, 독일이 나치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반성하면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는 것. 비록 그녀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죽었지만, 그녀의 정신과 작품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미술은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를 환기시켜주고, 역사를 기억하게 해주고 우리의 행동을 반성하게 해준다는 점을 이 책이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1993년.

 

5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읽기에 결코 길지 않다. 지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읽을수록 흥미진진해진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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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많은 디자인 씨 -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김은산 지음 / 양철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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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활하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디자인은 도처에 있다. 길 가다 보는 간판에서부터, 그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 걷고 있는 도로, 그리고 신고 있는 신발에, 입고 있는 옷,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많은 전자기기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디자인들이 우리 곁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는데, 우리는 이 디자인을 특정한 순간이 아니면 인식하지 못한다.

 

특정한 순간, 그것은 이 자본주의 시대에는 구매욕구가 발동할 때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또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우리는 제품의 성능을 보기도 하지만, 디자인을 보고 구매하기도 한다.

 

이런 구매 욕구를 자본은 철저하게 이용한다. 기능과 성능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자동차에서도 요즘은 디자이너들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하니, 디자인은 이미 우리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고, 특히 자본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책인데, 제목을 "비밀 많은 디자인씨"라고 붙은 이유는, 우리가 디자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디자인이 겉으로 보여주는 면과 속에 지니고 있는 의미가 다를 수도 있음을, 그런 양면을 디자인이 지니고 있는데...

 

어떤 디자이너들은 철저하게 자본에 봉사하고, 어떤 디자이너들은 자본을 넘어서려고 하니, 디자인은 그 자체에 비밀이 있다기보다는, 디자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지닌 의미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디자인의 비밀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디자인이라는 개념부터, 활용부터 시작한다. 디자인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면서 디자인의 비밀에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디자인의 비밀을 엿보았다면, 그 다음에는 디자인의 본질로 가설 차례다. 그것을 '닫힌 디자인, 열린 디자인'개념을 사용해 설명하고 있는 2부와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를 묻고 답해주는 3부에서 보여주고 있다.

 

자본에 봉사하는 디자인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좀더 좋은 쪽으로 바꿔가는 디자인도 있음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디자인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디자인에도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디자인은 이윤을 생산해내기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쪽으로 나아가야 함을, 그래서 이 책에서는 디자인 비평가 앨리스 로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185-187쪽)

 

로손은 디자인이 꼭 해야 할 좋은 디자인을 위한 질문의 마지막에 '죄책감'을 들고 있다.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에 죄책감을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 하는 것. 만약 죄책감을 느낀다면 디자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디자인은 단지 미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차원까지 나아간다는 것. 윤리와 정치의 영역에까지 이르러야만 우리는 디자인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디자인에 대한 관점을 세우게 해주는 책이고, 이 책 중간중간에 좋은 디자인의 예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작품들이 나와서, 그것들을 보는 즐거움도 주고 있는 책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는 '열린 디자인', '죄책감이 들지 않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그런 디자인을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시민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시민들을 길러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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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에서 직원들이 출동했다. 이유는 민원 때문에 커다랗게 자란 나무를 잘라내야 한다는 거다.

 

단순한 가지치기라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이 지난 뒤 나무들을 보니, 이런 가지치기가 아니다.

 

이건 학살이다. 나무의 몸통만 남기고 몸통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들을 모두 잘라냈다.

 

마치 목을 처낸듯이, 목없는 귀신 형상인듯 스산함을 넘어 참혹함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까지 나무들을 잘라내야 하나? 이게 제대로 된 가지치기인가? 나뭇잎이 떨어져 지저분하다고 인근 주택들과 어린이도서관에서 하도 민원을 내, 구청도 어쩔 수 없단다.

 

나뭇잎... 어느 구청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라고 치우지 않는다던데, 이건 애물단지가 되어, 오직 쓰레기 취급을 받는 동네도 있으니... 자신들이 조금 불편하고 귀찮아져서 치우면 될텐데... 가끔은 낙엽을 밟는 멋도 느낄 법한데...

 

살기가 팍팍하니, 나뭇잎은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에 불과하고, 그러니 그런 나뭇잎을 제공하는 나무는 잘라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나무가 우리에게 준 것들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학살당한 나무들을 보며,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낙엽이 많이 떨어진다고 베어버리는 이런 생활 형태가 과연 올바른 삶일까... 아니라는 생각.

 

이것은 기본에서 너무 벗어난 삶이라는 생각. 우리는 기본, 기본 하지만, 정작 자신이 조금 불편해지면 기본을 무시하고, 그냥 자기 편리대로 하려고만 한다.

 

이럴 때 기본을 부르짖으면 경직되었다느니, 원론주의라느니, 근본주의라느니, 급진주의라느니 하는 말들로 자신의 삶에서 배제시킨다.

 

그래서 점점 기본에서 멀어지고, 어느 새 기본은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아주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기본은 기본이다. 지켜야 한다. 이런 기본을 주창하는 잡지, 이것이 바로 "녹색평론"이다. 우리에게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기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잡지.

 

그래서 나는 두 달에 한 번 이 잡지를 받으면 다시 기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내 삶 역시 기본에서 많이 멀어져 있지만, 기본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 한창 '노동개혁'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는데(사실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비정규직을 없앨 수도 없고, 또 청년 일자리를 만들 수도 없고, 오로지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는, 그런 노동개혁이 어찌 개혁일 수 있겠는가) 진정한 '노동 개혁'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기본... 그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생계가 아닌 생활이 될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다. 그 보장은 노동시간 단축, 제대로 된 노동 환경, 적절한 임금 등으로도 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것이 바로 "기본 소득".

 

이번 호에서는 기본 소득에 대해서 또 다루고 있다. 성남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년 배당과, 농민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 그리고 알래스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기본소득은 민주주의와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여는 글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여러 운동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들을 다루고 있는데...

 

한 편 한 편의 글을 읽으며 기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기본이 몸에 밴다면 낙엽을 쓰레기로 인식하는 일도, 그래서 나무를 이렇듯 학살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무에도 이렇게 기본을 지킨다면,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

 

녹색평론 144호를 읽으며, 처참하게 잘려나간 나무들을 보며, 다시 기본에 대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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