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클라시커 50 19
마리 자겐슈나이더 지음, 이온화 옮김 / 해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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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공정한 직업이 재판관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외부의 압력이든, 자신의 편견이든, 그러한 것에 빠지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이것은 재판관에 대한 이론적인 생각이다. 현실에서는 재판관도 사람인지라 실수도 하고, 자신의 편견을 판결에 작동시키기도 하고,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또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재판관들이 과연 독립된 판단을 하는가, 공정한 판결을 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판결이 여러 건 있었다.

 

대법관 임명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하고, 권력을 쥔 자들이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뒷돈이 오고가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법원의 신뢰가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검찰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 수준이지 않나 싶다. 변호사라고 다를 것도 없고, 판사들에게는 조금 기대하는 것도 있지만, 거기서 거기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도찐개찐"인 상태이지 않을까 싶은데...

 

재판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솔로몬"과 "포청천"이다. 서양에서 지혜로운 판결의 대명사로 '솔로몬'을 들고, 중국에서는 '포청천'이란 인물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둘에게는 공평무사가 기본 원칙이었는데... 클라시커 50 시리즈 "재판"을 읽다보니, 참으로 재한은 공정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재판관은 권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삼권분립 시대 이전에는 권력자가 임명했기에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삼권분립이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그들이 완전히 권력에서 독립해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기 일쑤다. 이것이 아마도 중세시대의 '마녀 재판'에 해당할 것이고, 프랑스의 '드레퓌스 재판'에도, 또 소련에서 이루어진 공개재판에도 해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50가지 재판의 사례를 통해 과연 재판은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 50가지 사례들을 보면 재판은 절대로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둑맞은 왕들의 계곡'이라는 도굴꾼에 대한 재판에서 시작하여 '성폭행범들아, 우리가 너희를 잡겠다'는 유고 전범재판까지 50개의 재판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지금 사법권력으로 우리들의 문제해결을 넘기려는 이 시대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재판이라는 것이 여러 변수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재판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를 실현한 재판도 있다. 사실, 재판의 일차적 기능이 정의실현일테니, 세계적인 재판 50개 중에 정의를 실현한 재판이 그렇지 않은 재판보다 적은 것이 벌써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 이 책은 재판을 '권력과 양심의 파워 게임'이라고 하고 있다. 이 파워 게임에서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재판은 정의를 실현할 수도,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하는가? 정의가 실현되는 재판이 되기 위해서는 양심의 힘이 권력의 힘을 누를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을 지녀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삼권분립 시대... 그래도 재판이 공정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심있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양심의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우리들이 공화국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이 더 다가오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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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가 문득 혹, 시는 축지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멀고도 먼 거리를 가장 짧게 압축해 놓는 법. 그것이 바로 시고 축지법 아니던가.

 

그 압축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가 있는지는 하나하나 펼쳐가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터. 빠르게 대충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존재할 뿐일테지만, 천천히 그 사이를 살피면서 가는 사람에게는 온갖 세상이 펼쳐지는 신세계일 터이다.

 

그게 바로 시다. 축지법은 이곳에서 저곳을 한 번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도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주고, 그 사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메워나가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하고 많은 것들을 줄이고 줄여 자신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낸, 누구 말대로 하면 세계의 자아화가 이루어지는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또 행과 행 사이에 엄청난 것들이 숨어 있다. 그 숨김이 바로 시인의 재주요, 그 숨김을 찾아내는 것이 독자의 능력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바로 원재길의 시집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를 읽다가 한 시를 발견하고서이다.

 

그 시 제목은 '속도광'

 

  속도광

 

다섯 시간 반

여섯 시간 사십 분

자동차와 한 덩어리 되어

쉼 없이 달리는 짐승들이 있다

불타 버릴 듯 뜨거워진 머리

털털거리는 뼈

김 솟는 살덩이

 

쏜살같이 모든 풍경 버리고

바람에 너풀대는 것들

꿈틀거리는 것들

겨우 숨 붙어 있거나

검게 썩어 가는 것들

 

다 외면하는 척하며 무작정 달릴 때

삶은 얼마나 가벼우냐

이따금 언덕 너머 바다가 보이고

파도는 거듭 자기 몸 타넘을 때

죽음은 또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찰나

쌩 하고 한 생애가 옆을 스쳐

깜짝 놀라 눈

감았다 뜨니

그새 그 짐승 간 데 없다

 

원재길,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민음사, 2004년 초판. 68-69쪽

 

시하고 얼마나 다른가. 압축은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주변을 살필 여력도 사이를 채울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직선으로 내달릴 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직선이지 않은가. 속도광이지 않은가.

 

우리도 정해진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쌩하고 달리기만 할 뿐이지 않은가. 함께 하지 못하고, 그 멀기도 먼 거리를 아주 가깝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현대인들의 삶이. 내 삶이.

 

그래서 축지법처럼 단축은 하되, 그 사이는 보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시는 축지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속도광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압축해 놓았지만, 그 압축 사이를 채워나가야 한다. 우리의 상상으로, 우리의 삶으로.

 

그럴 때 시를 읽는 삶이 풍요로와진다. 가장 짧은 시에서 가장 풍성한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말한다.

 

'시처럼 사는 일도 날로 간결해지기를'이라고.

 

이 말 속에는 압축만이 있지는 않다. 이 간결에는 더 많은 복잡함들이 채워져야 한다. 그게 바로 삶이고, 시이다. 하여 우리는 축지법을 실행하더라도, 그 사이에 온갖 것이 있음을,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시, 그래서 필요하다. 현대처럼 속도광인 시대에는 더더구나. 사이를 찾고, 사이를 채우려는 노력을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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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시작이다.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힘들다.

 

자신의 온몸을 던져 새로운 발걸음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새싹들이 얼어붙어 있던 땅을 뚫고 나오듯이,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순들이 단단한 가지에서 솟아나오듯이,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익숙한 것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시기, 그것이 바로 봄이고, 이러한 여행이 바로 삶이다.

 

우리의 봄은 이래야 한다. 낡은 것조차도 새로운 출발을 꿈꾸게.

 

정철훈의 시집을 읽다. 이제는 봄도 여름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새출발을 한 것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 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마냥 뒤에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면서, 함께 갈 수 있는 봄. 그런 오월이었으면...

 

정철훈의 시집은 해설에서 '북방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 그러한 시들이 2부에 실려 있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와 닿은 시는 바로 '봄날'이다.

 

   봄날

 

봄날 녹슨 함석지붕이 운다

봄바람에 어깻죽지를

들썩이며 운다

겨우 붙들어맨 못대가리가 빠져

함석도 날개가 있다고 덜덜덜 운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렀음인가

양계장에서는 장닭이 암탉을 올라타다 말고

흙먼지를 날리며 홰를 친다

먼산엔 질달래 개나리 매화가 불붙고

바람은 모래를 날려 삶을 재촉하는데

봄은 근질거리는 날갯죽지로 오는가

봄날 함석지붕이 운다

봄바람에 어깻죽지를

들썩이며 운다

 

정철훈,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민음사. 2002년 1판 1쇄. 11쪽.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또 새롭게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봄은.

 

봄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현재다. 그러므로 생동감이 있다. 살아 움직여야 한다. 낡은 것조차도, 이 시에서처럼 녹슨 함석지붕조차도 들썩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새로움을 찾아 가는 날, 그것이 바로 봄이다.

 

과거로 붙들어맨 못이 빠져 이제는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봄. 계절로서의 봄만이 아닌, 우리네 삶으로서의 봄이어야 한다.

 

그렇게 이 오월은 새로움의 달이어야 한다. 오월의 시작, 정철훈의 '봄날'을 읽으며 삶의 생동감을 생각한다.

 

출발은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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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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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민공통교육이라고 하나? 우리나라 사람이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면 예외없이 배워야 하는 과목.

 

의무교육이 9년이니, 9년 동안 누구나 배워야 한다. 학교를 거부한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런 과목들 중에서 예술교과라고 하여 음악과 미술이 있다.

 

9년이나 배우는 예술 교과. 사실 유치원도 거의 의무이다시피 하니 10년 넘게 음악과 미술을 모든 국민이 배운다고 하면 된다.

 

그야말로 대단한 문화민족이다. 문화가 융성해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사회 전반에 예술이 넘쳐 흘러야 한다. 모든 국민이 10년 넘게 예술 교육을 받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간혹 '그림을 읽어준다' 또는 '그림을 보여준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왜지? 그렇게 오랫동안 미술 교육을 받았는데... 단지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다.

 

왜?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너무도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만 배웠기 때문에... 마치 "삼국지"에서 관우가 유비를 만나러 간다고 '오관돌파'를 할 때처럼 시험이라는 관문만을 통과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미술과 음악은 실생활에서는 멀어지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을 자기 나름대로 보지도 읽지도 감상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정해진 정답만을 찾는 교육을 받았으니,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 그림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림은 나와는 상관없는, 한 때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했던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건 비극이자 낭비다. 시간 낭비 예산 낭비, 그리고 청춘의 낭비, 열정의 낭비, 창조성의 낭비다. 아예 창조성이 생겨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차라리 미술이나 음악교육에서 시험을 없애고, 이 책처럼 미술에 대해서 자신만의 감상을 지니도록 안내를 하면 어떨까?

 

그림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니라 그 그림에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하는 점을 느끼도록 하는 미술 교육.

 

또 그처럼 자신의 감정을 미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표현하게 하는 교육, 그런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명실상부한 예술국가, 문화국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젬마의 이 책은 이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고 있다. 그림에 대해서 어떻게 다가가면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나 할까?

 

그림을 통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다른 사람, 또 그림을 연결짓고 있다. 그림 따로 사람 따로, 또 사회 따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연결되게 된다.

 

한젬마의 이 책은 이런 점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여긴 대상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와는 먼 미술이 결코 멀지 않음을, 미술은 늘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그림과 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여 그림에 다가갈 수 있다. 또 그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림을 통해서 나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이게 이 책이 지닌 장점이다.

 

<부록>에서 미술에 관해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어서 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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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되 남은 못 보게 하는 정치는

 

독재다.

정치인이 국민과 멀어질 때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스스로 장막을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장막을 위해

스스로 선글라스를 쓴다.

나는 볼 수 있지만

상대는 내 눈을 볼 수 없는

그 장막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선글라스를 이어받은 장막이

바로 전화,

마주보고 이야기 하면 미세한 표정에서

감정을 들킬 수 있으니

전화로 정책을 의논한다.

의논이 아니라 통보다.

 

보이지 않고 보는 정치

얼마나 무서운 정치냐.

벤담이 이런 정치를 알았으면

-옵티콘을 설계하지는 않았을텐데

독재가 이렇게

선글라스나 전화를 통해서도

올 수 있음을 알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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