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세운 집 -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
이어령 지음 / arte(아르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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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제목 잘 붙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시를 가지고,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 표현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런 표현을 쓰기는 하겠지만, 시를 해설하는 책에서 이런 제목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에 한발짝 다가서게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책을 펴내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는 말로 지은 집입니다. 벽돌로 집을 짓듯이 말 하나하나를 쌓아 완성한 건축물입니다. (6쪽)

 

그렇다. 시를 집에 비유할 수 있다. 온갖 재료들이 합쳐져 집이 되듯이 시 역시 온갖 말들이 합쳐져 시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 할까? 바로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삶이나, 사회적인 상황을 먼저 고려하기 보다는 시에 쓰인 언어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기호학으로 시를 읽어낸다고 하는데...

 

그런 시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를 파악하는데 언어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언어를 통해서 조직해 낸 것이 시니까 말이다.

 

집에 초가집, 기와집, 벽돌집, 콘크리트집, 아파트, 연립주택, 목조주택, 황토집, 통나무집, 돌집 등 재료나 형태, 기능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여질 수 있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어느 집이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집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좋아하는 집이 다르니까, 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름이 붙을 수 있고, 어떤 시가 좋은 시라고 꼭 전법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집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듯이(불량재료를 쓴 집은 곧 무너지게 된다. 안 좋은 집이다. 좋은 재료를, 적절한 곳에 써야 좋은 집이다) 시도 좋은 시, 안 좋은 시를 구분할 수는 있다. 이것을 그 시를 좋아하느냐 마느냐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 역시 언어로 세운 집이기에, 기본적으로 언어가 적절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들이 좋은 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중심으로 시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감상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어떻게 언어에 집중해야 하는가, 언어에 집중하면 시의 맛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를 32편의 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시를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을 위해서 배우고, 그래서 언어를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어떤 형태로 출제가 되는지를 중심에 놓고 시를 읽었던 습관을 이 책을 통해서 버리게 된다. 시는 결코 시험으로 평가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보면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시에 대한 해석이 이 책에서 해석하는 내용과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시에 쓰인 언어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동요로도 알고 있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부터 시작한다. 너무도 단순한 달랑 4행짜리 시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의미가 언어들의 조합을 통해 들어 있음을, 그래서 시라는 집의 안쪽,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시라는 집의 내밀한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시를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다른 시들을 읽어가게 되는데, 맨 마지막 시가 박남수의 '새'다. 제목으로는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고.

 

누구나 아는 시로 시작해서 시에 쓰인 언어를 통해 시인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글로 끝맺고 있다. 시라는 집의 안쪽을, 생활을 본 사람은 그런 집을 지은 시인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집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한 시인은 사라질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아니,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냐 없냐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수요자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집을 지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고, 언제라도 누군가 자신의 집을 보아주면 좋다는 생각으로.

 

학창시절 만났던 시들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 그 시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참고로 이 책에 나온 시들을 열거해 본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이미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춘설, 광야, 남으로 창을 내겠소, 모란이 피기까지는, 깃발, 나그네, 향수, 사슴, 저녁에, 청포도, 군말, 화사(花蛇), 해, 오감도, 그 날이 오면, 외인촌, 승무, 가을의 기도, 추일서정, 서시, 자화상, 국화 옆에서, 바다와 나비, The Last Ttrain, 파초, 나의 침실로, 웃은 죄, 귀고(歸故), 풀, 새 

 

총 32편의 시다.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한 번 찾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시를 찾아 읽는 민족은 문화민족일테니.

 

덧글

 

시에 관한 책에서 조금 아쉬운 점... 특히 제목이 언어로 세운 집인데... 언어가 잘못 사용되면 적절하지 않은 곳에 들어간 건축재료처럼 눈에 거슬리게 된다. 난 두 군데가 거슬렸는데...

 

하나는 청포도 시를 인용한 부분.

109쪽. 청포도 시에서 5연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

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오식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라고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주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255쪽. 유치환의 시 귀고(귀고)에서 11행 행이불언(行而不信)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자어가 잘못 표기되었다. 행이불언(行而不言)이어야 한다. 역시 주석에는 바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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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이렇게 세상을 본다 재원미술총서 15
박우찬 지음 / 재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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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문에서 작가는 '미술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예술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우리의 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이 전부는 아니다. 눈으로 본 것을 표현할 재능이 있어야 하니, 재능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눈이 본다? 도대체 눈이 무엇을 볼까? 신기루라는 것도 있고, 우리 눈은 가끔 제 필요한 것만 보고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도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눈으로 보는 예술이 미술이라면 어떻게 보느냐가 미술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미술의 역사를 르네상스부터 시작한다. 그 전에 나온 미술품들은 미술이 아니라 종교, 숭배의 대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예술에서 제외하자고.

 

왜 르네상스인가? 이때부터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사물을 인간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 그렇다면 그 전에는? 그것은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신의 눈으로 본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이제 인간의 눈으로 보게 되니, 사실성이 문제가 된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잘 보았다고 하고, 그것을 보이는 대로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 때 나온 것이 '그리드'라고 한다. 격자창이라고 하면 좋을 듯한데... 줄무늬가 그려진 창으로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것, 그러면 원근법을 살릴 수 있기에 사물의 모습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그리드'를 이어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바로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술에 원근법이 들어온 다음에 '빛'이 들어온다. 빛이 하나의 대상으로 미술에 들어오고, 한 시대를 풍미한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무엇을 볼 수 있나 하는 문제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미술에 위기가 닥친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보다 더 정확히 사물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나온 뒤 미술은 변화를 추구한다.

 

무엇으로? 추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추상, 인간이 볼 수 있는 대상들을 원초적인 물체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평면에 모아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입체파라든지, 추상화가들이 이렇게 해서 등장하는데... 단지 추상만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보려고 한다. 미술은 거기까지 나아간다. 초현실주의다.

 

여기서 그치면 미술이 미술이 아니다. 그러면 미술은 이미 우리 시대에 사라졌을 것이다. 미술은 이제 최첨단 기기들을 이용한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런 기계들과 함께 미술행위 자체도 미술이 된다.

 

이것이 미술이 세상을 보는 방법의 변화이고, 그런 방법이 미술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정이다.

 

그 점을 이 책은 아주 간단하고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용어에 관해서는 용어를 분석해서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술에 관심있는 초보자에게는 아주 유용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만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도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변화하지 않고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는다. 쉬임없이 변화하고, 요즘 세상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미술의 많은 유파들이 세상을 보는 눈, 방법을 바꿨기 때문에 나왔듯이 우리 역시 세상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방식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 점까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 부분에서 안견과 안평대군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상력은 있지만 그림 재능은 없는 안평이 안견의 도움으로 예술 작품을 남길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 시대에는 상상력이 있는 안평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그림 재능만 있고 상상력이 부족한 안견은 제대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가상의 이야기...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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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독재자들의 말


1


입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가려야 한다.

부정 속에서 긍정을

찾을 생각조차 없으니

세상 말들을 가둬야 한다.

핵폐기물 보관소

보다 더 두텁게, 

더 크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말들을 가두게,

 오직 내 말들만,

날 따르는 말들만

나오게 해야 한다.

나는, 임금이므로,

내 귀, 당나귀 귀

사람들이 알아서도,

말해서도 안 된다.


2


세상 무식한 쥐들은 지들이 늘 밤 말을 주워들으면서도 말을 가두려고 한다. 핵폭탄보다 더 센 말들을. 볕이 들어도 잠시란 걸 알 수 없어 영원을 꿈꾼다. 그러니 쥐지.


우리의 독재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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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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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강간"이다. 이 말이 심하게 느껴진다면 "성폭행"이다. 그것은 서로가 마음이 있는 썸도 아니고, 서로의 만남을 이어가는 데이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의 합의하에 육체관계를 맺는 섹스도 아니다.

 

한 사람에 의해 다른 한 사람이 또는 여러 사람에 의해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강제로 성관계를 당하는 일이다. 이것은 범죄다. 당연히 범죄인데... 이 책의 제목이 이렇게 나온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또는 당한 일을 '강간'이나 '성폭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떨 때 사람들은 '강간'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는가? 바로 이 책에는 강간의 좋은 사례(참, 이 말 쓰기도 민망하다. 좋은 사례라니, 이런 역설이 있다니... 하지만, 이것은 경찰이나 검찰이 기소하기 좋고,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 이것도 가능성일 뿐이라는 게 우습다 - 많다는 것이다)가 나와 있다.

 

좋은 사례의 피해자는 대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처녀로 그녀는 어느 날 오후 두세 시경,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의 벙문안을 가다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 그 남자는 칼이나 총, 혹은 쇳조각 같은 흉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주먹을 날려 턱뼈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적어도 한 번 이상 그녀을 칼로 찌른 후 수풀로 끌고 가서 강간을 한다. 피해자는 이미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계속해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그 덕분에 어느 남자 경찰관에게 발견돼 마침내 목숨을 건진다. 이후 공식적인 의료 검진을 통해 피해자의 질 속에 남아 있던 정액이 가해자의 것으로 밝혀지고, 마찬가지로 가해자 몸에 묻어 있던 혈흔과 피부 조직은 피해 여성의 것으로 확인도니다. 또한 피해자의 온몸에 난 상처들 역시, 사건 당시 가해자가 갖고 있던 흉기로 인한 것임이 판명되기에 이른다.  218쪽.

 

아마, 이 지경에까지 이르려면 강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아니, 주로 목숨을 잃어야지만 강간살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인식을 지니고 있으니, 알고 지내던 사람, 그것도 데이트를 하거나 또는 그전에 이미 성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에게 '강제로' 당했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았고, 또 무언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강간'은 아니었다고 피해자가 생각하거나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다. 피해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사례들을 보면 이렇게 관계를 맺은 다음 가해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피해자을 집에까지 데려다 분다. 이 생각 없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화의 문제라고 이 책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사회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가해자가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 신고가 되는 경우가 1/5도 채 안된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사례들이 미국의, 그것도 17년 전의 미국 사례라고 우리가 안십해도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보다 성에 관해서는 더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성에 관해 상당히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빈도에 비해 신고 건수는 적고, 처벌 건수는 더욱 적은데...

 

우리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네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래'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은 나라니...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얼마나 많을지 두려워진다.

 

특히 조금 권력이 있단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만지고 놀리고 하는 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는데... (그많은 유명인들의 성추행 사건 보도들을 보라. 이들은 잠깐의 실수라고 하거나, 기억이 안난다고 하거나, 잘못한 게 없다고 한다. 피해자가 받을 고통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흥미 위주로 기사를 쓰지. 피해자의 인권은, 감정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이것이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떤 통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성경험을 한 청소년들은 약 4%정도라고 하고, 이들의 첫 성경험 평균 나이가 15세 전후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 나이로 15세 전후라고 하면 만으로 따져도 중학교 3학년 또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이들의 성경험이 과연 모두 합의에 의한 성관계일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도 이렇게 그것이 '강간 또는 성폭행'이라는 생각없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 일어날 수 있는 일, 또는 자신이 잘못해서, 유혹해서 생긴 일이라는 인식으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 모 대학에서 벌어진 성추행, 성폭력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뻔한 일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오히려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보는 일도 생기고 하니, 아마도 신고 없이 넘어가는 일은 우리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제적 성관계, 즉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음에도 물리력이나 또는 심리적 압박을 통해서 강제로 맺은 관계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닌" 바로 "강간"이라고... "성폭행"이라고.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일만이겠는가. 우리에게도 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것은 여자만의 일이 아니다.

 

피해를 여자가 당하더라도, 그 여자의 주변에는 남자가 있다. 함께 고통을 받을 남자가 있으니, 역시 이런 일은 남녀 모두의 일이다. 서로가 예방하고, 또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 몇 가지 대응방법이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조해도 될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응보다는 예방이 더 우선이다. 인식 개선이 우선이다.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법률적으로도 명확하고 단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이루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이 책 학교에, 집에 비치해두고 두고 두고 참조해보면 좋을 듯하다. 남일이라고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하면 안된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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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2016년 1월 15일 영면. 이렇게 또 한 명의 지성이 우리 곁을 떠났다. 신영복 선생이 이제는 편히 쉬시길 바라며...

 

나의 대학시절

 

내가 신영복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이 글이리라. 물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많이 읽히고 있었지만,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뒤로 미루다 미루다 먼저 읽게 된 것이 "녹색평론"에 실렸던 (정확히 몇 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대학시절'이라는 글이었다.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고리키의 말을 인유해서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했다지만, 그의 대학시절은 서울대 재학시절이 아닌, 감옥에서 지낸 시절을 말한 것이다.

 

지식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들보다 감옥이라는 그 폐쇄된 공간에서 그것도 사회에서 무지랭이라고 천대받고 멸시받고 경원시되던 사람들에게서 배웠다는 사실.

 

절절한 배움. 사람에 대한 예의, 그리고 관계에 대한 성찰이 그 글에 묻어 나 있었다. 참 좋은 글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렇게 감옥을 대학으로 여기면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참 좋은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

 

나무야 나무야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엽서 책. 한 편 한 편의 글에서 성찰의 결과가 느껴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특히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중에서 '반구정과 압구정'.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는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갈매기와 함께 한다는 이름을 지닌 두 정자. 반구정과 압구정. 하나는 청백리로 소문난 황희 정승이 세운 정자고, 다른 하나는 모사꾼으로 유명한 한명회가 세운 정자.

 

지금 어느 정자가 남아 있는가? 반구정인가, 압구정인가? 압구정은 이름만 남아 있다. 강남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동네로. 하지만 반구정은 지금도 임진강 가에 서 있어 갈매기들을 벗할 수가 있다.

 

비록 분단으로 인한 철책선이 강을 가로 막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정자 이야기.

 

여기에 편한 길을 놓아두고 어려운 길을 간 사람,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평강공주와 온달이야기를 다룬 글이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궈갑니다'였다.

 

어리석은 자, 요즘 말로 하면 '바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바보'들... 우리가 얼마나 존경하고 따르고 있는지... 우리나라에서 바보로 불리는 사람들이 몇 있다는 것. 그들에게 이 '바보'란 말은 경멸의 말이 아니라 존경의 말이라는 것.

 

강의

 

긴 감옥 생활. 대학시절이라고 이름 붙였듯이 사람들을 만나 인생 공부를 할 수도 있었지만, 많은 시간 동안 신영복 선생은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옛 학문을 다시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다.

 

동양사상을 정리한 책. 강의.

 

소위 제자백가에 해당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동양사상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 책이었다.

 

이런 '강의'가 예전 학문에 대한 지식을 펼치는데 있지 않다. 우리가 예전 학문을 배우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최근에 책을 내셨는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중.

 

쇠귀체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철학적인 용어로 하면 인식론, 존재론을 넘어 이제는 관계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던 그.

 

감옥에서 목수 출신의 죄수가 집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는 그. 흔히 집을 우리는 지붕부터 그리지만 목수는, 직접 집을 지어왔던 사람들은 기초부터 그린다는 사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기초부터,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함을 말했던 지성인.

 

그는 떠났지만, 우리에게 글씨를 남겨주었다. 일명 쇠귀체. 한 글자 한 글자를 떼어놓고 보면 무언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모습, 그리 잘썼다고 할 수 없는 글자지만, 이 글자들이 모이면 서로가 서로를 받쳐 아름다운 글자로 존재하는.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는. 사람은 더불어 살 때 그 빛을 발휘할 수 있음을 글자로도 보여준 그 분의 쇠귀체.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먹는 술, 소주에도 그 글씨가 쓰여 있으니...

그래,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서로 어울리면서 더 좋은 세상을 향해 기초부터, 어리석게 묵묵히 살아가야겠지.

 

그것이 우리 시대 지성을 보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겠지.

 

고 신영복 선생님. 하늘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지 잘 지켜봐주시길...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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