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ㅣ 민음의 시 195
박판식 지음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세상에 다 똑같은 것들만 있으면 그것을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까? 다 다른 것들만 있으면 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까?
고 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 동(同)과 화(和)를 비교하는 글이 있었는데, 동은 같음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화는 어울리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어울림이란 바로 이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하는 것이 아니는가 한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제목인 시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를 보자.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모자와 박쥐우산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완용 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이 있다면
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는 딸이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다
하지만 내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딸과 늘 동행하고 있다
웅덩이가 모자처럼 떨어져 있다 인생은
그 위를 지나가는 멀리서 온 구름이다
옷을 입은 개가 맨발일 때
이 경이로운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얼굴이 세 개나 네 개로 늘어날 때
모자 대신 접시를 머리에 얹고 걸어도 이상할 게 없다
개업식 경품 행사로 1등 자전거에 당첨된 일이 있다
빵집 주인이 내 이름을 세 번 연속 불렀는데
끝내 나가지 않았다. 빵집은 반년 만에 폐업했고
이 시장 골목에선 흔한 일이다. 처녀 시절 아내가 키우던 개가 죽었다
개는 죽기 직전 젖은 걸레 위로 올라갔고
자신의 똥 위로 올라갔고 이부자리 위로 올라갔고 나의 배 위로
올라갔다.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 개가 죽고 문득
아들이 태어났다
박판식,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민음사. 2013년. 1판. 20-21쪽
나는 나일뿐인데, '나'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를 읽어보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대상으로 '모자, 개, 딸' 이 나올 뿐이다. 여기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나'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들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의 존재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 무엇하고도 어울릴 수가 없다. 따라서 모자는 나와 어울려야 보기 좋은데, 아니라고 한다.
이 시의 1연에 나오는 대상들이 2연에서는 모두 뒤집어 진다. 내게 없는 딸은 늘 나와 동행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 있어야 할 모자가 웅덩이로 발 밑으로 내려오고, 애완용 개는 옷을 입었지만 맨발이다.
무언가 부조화다. 이런 일은 3연에서도 반복된다. 경품에 당첨되었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 가게는 망했다. 그리고 개 역시 죽는다. 그 개가 죽고 딸이 아닌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딸과 모자와 개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죽음으로 삶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시가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 결국은 나와 어울리는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반드시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나와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으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극복해 냈을 때 나는 나와 어울리는 대상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데...
다름을 통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 시의 전반부에 나타난 것과 같이 어울리지 않는 대상들을 더 잘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것을 기를 쓰고 밀어내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와 어울리는 존재들하고만 함깨 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랬을 경우 진정 삶에서 어울림을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시 읽으면서 진정한 어울림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 '개가 죽고 문득'이라는 말, 이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제 역할을 마칠 때까지 그것과 함께 했다는 의미 아니던가.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전에 함께 하는 대상과 지내는 일, 그런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자신과 어울리는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제했다가는 진정으로 어울리는 존재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굳이 시에서 아들과 딸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딸과 아들을 바꾸어도 이 시의 의미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 한 편을 놓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이런 억측, 오독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즐거운 오독(誤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