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철학사 2 - 재현과 추상: 독일의 표현주의에서 초현실주의까지 미술 철학사 2
이광래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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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한 권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앞의 권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방대한 양이다. 이 방대한 양이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가 되면 좋겠지만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오가고 있으니...

 

그럼에도 어떤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을 따라 미술과 철학과 세상이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도도하게 흘러 미술이 변화되고, 그것이 나라에 따라서 다르게 또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2권은 표현주의에서 시작한다. 표현주의 그러면 어떤 유파인지 잘 모르겠지만 칸딘스키란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의 시작... 이렇게 이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2권은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표현주의로부터 시작한다.

 

표현주의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재현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한다. 이제 세상은 단순히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표현주의가 대두하는 데는 철학의 변화도 있어야 겠고, 과학의 발전도 있어야 했다.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이런 인식은 미술가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해야 함을 깨닫게 했다.

 

독일에서 이렇게 표현주의로 세상을 재구성하게 시작했다면 네덜란드에서는 몬드리안의 재구성이, 프랑스에서는 마티스와 피카소의 미술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는 미래파라는 화가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포기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그리고 우리는 한 방향에서 보지만, 방향을 달리해 보기도 하는데, 이를 평면인 화폭에 여러 방향에서 보는 관점을 표현해내기도 한다.

 

어디 세상이 하나로만 구성되어 있던가. 세상은 이미 단순한 세상이 아니라 복잡다기한 세상인 것이다. 단순함을 추구하던 세상은 이미 죽었다.

 

하여 철학도 니체,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의 시대가 되고 과학은 뉴턴의 시대에서 아인슈타인을 비롯된 상대성,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과학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런 과학, 철학과 더불어서 미술에서도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당시 미술가들은 이러한 철학을 공부했으며,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공부하면서 토론도 많이 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한 세기를 풍미하려면 이렇듯 과학과 철학을 자신의 그림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러한 시기를 거쳐 이 책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마그리트다. 그의 그림은 기묘해서 우리에게도 알려진 그림이 많은데, 이는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무의식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이 책의 후반부에 나타나는데... 세기말 현상과 더불어 이러한 미술이 등장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도대체 이 놈의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세상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어떤 세상인지에 대한 화가들의 답이 바로 다다, 초현실주의이고, 그런 그림들을 그린 대표자로 마그리트와 달리를 들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많은 미술가들을 다 알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지식보다는, 이 책에서 왜 그런 미술들이 나왔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런 미술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 시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또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필요한 것은 미술의 변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미술이 그 시대를 인식한 철학, 과학과 어울려 어떻게 시대를 인식했고, 그 시대에 대응했는가 하는, 그 대응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이제 다시 3권이다. 장강(長江)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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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나들이 6

         - 교복


난젠지(南禪寺)에 갔을 때

동산학원이라고 

입학원서를 받고 있는 학교가 있었다.

아이들이 체육복을 입고 도로를 걸어온다.

어, 방학이 아닌가

‘철학의 길’로 가는데,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짧은 치마, 세일러 복

이런 교복을 생각했던 나에게

서울여상과 같은 단정한 교복을 입은 그들은 낯설었다

너무도 단정해서

세상에 신발과 가방까지도 같은 그들의 복장에

이제 우리도 몇 년 뒤엔 그들과 같아질까.

우린 이렇게 일본을 계속 따라가야 하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는데...

다음에 탄 버스엔

아이고, 귀여워

유치원 아이같은데

교복을 입었다.

재잘재잘 대는 아이들

앉아마자 책을 펼쳐 보는 아이

모두 같은 복장, 같은 가방을 지니고 있다.

유치원생, 중학생, 초등학생, 고등학생

모두 교복을 입었다.

도대체 이들은 언제 교복을 벗지

대학에 가야 벗나

성인이 되기 전까지

철저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니

이건 통젤까, 아니면 질서일까.

그들의 질서의식은 여기서 나왔나.

보기에 좋았더라가 이런 획일성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터

교토의 거리도, 교토의 집들도, 교토의 차들도,

어쩌면 이런 생활에서

최소한 십 년이 넘는 무채색의 질서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편치만은 않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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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16
임현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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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을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이라는 말,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어가 '~처럼'이다. '~처럼'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꾸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제목을 보면 우리는 같이 살지 않고 있는데,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꼭 같이' 위장하고 있으니, 사실은 함께 하지 않음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한 장소에서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도 몸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지 정신은 지구에서 화성까지의 거리보다도 더 떨어져 있다. 기껏해야 인류는 지금 우주선을 화성에까지 보내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그만큼 우리는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간신히 긴 시간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화성처럼 우리와 우리 사이는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대한 우려, 그런 세상의 비극적인 모습, 그것이 이 시집에 잘 나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체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어둡다. 분위기가 칙칙하고 우울하다. 죽음과 단절이 시집 곳곳에서 나오고, 시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시집을 읽으며 마음은 더욱 우울해진다. 어둠 저 끝까지 마음이 내려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단절된 세계에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가장 먼저 느끼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면, 이 시집에서 풍겨나오는 우울, 단절, 죽음, 분리 등등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공동체가 파괴된 현재, 우리의 모습. 그런 단절 속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너무도 어두운데, 이 어둠을 인식한다면 빛을 향해 갈 수가 있다. 자신이 어둠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면 빛을 추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절과 어둠,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함께 함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이런 시집을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각자가 제 목소리만 내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소리를 내는 사회. 너나없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판치는 세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나서기보다는 받쳐주는 사람이 존경받고 우대받는 그런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아닐까.

 

적어도 이 시집의 제목을 따온 이런 시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아니지 않은가.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장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임현정,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문학동네. 2013년 1판 2쇄. 64-65쪽

 

'사금파리' 자체가 이미 깨어진 조각 아니던가. 그런 사금파리가 반짝 빛나던 길은 이미 깨어진 길일 수밖에 없다. 즉, 함께 하지 못하고 단절된 삶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가 무너진 삶들. 그것은 사금파리가 빛나는 길에 다름 아니다.

 

이 시에 여자, 남자, 경비 아저씨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세계에만 있을 뿐이고, 이들의 삶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자 행복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사회, 그런 세상, 이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아니다. 이런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자 행복이 되는 세상, 사금파리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밝혀주는 불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회를 꿈꾸게 한다. 적어도 나에게 이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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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가 속 책'에 관한 이벤트.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사실 처음에 한 열린책들 이벤트는 책을 찾아보니, 기억에는 분명 예전에 열린책들에에서 나온 외국 소설들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서가에는 책이 없으니, 헌책방에 팔았거나, 버렸거나...

 

한정된 서가에 계속 들어오는 책들을 감당할 수 없어 주기적으로 처분을 하는데, 예전에 책을 처분하는 기준이 소설책들과 이제는 시효가 지난 사회과학 서적들이었던 것.

 

두 번째 이벤트 민음사인데... 민음사는 소설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많이 남아 있을 터. 서가를 주욱 둘러보니, 제법 있다.

 

우선 번역 대우학술총서, 외국의 이론을 소개하거나 우리나라 학자의 문학이론을 소개했던 책.

 

 

다음은 민음사에서 나온 책들을 모아 놓은 사진.

 

내가 민음사 책을 이렇게 샀던가 싶기도 하고, 민음사 책이 예전의 나와 코드가 맞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문학 쪽에 관심이 있어 그쪽 책들을 많이 구입했는데, 민음사에서 그런 분야의 책이 많이 나온 것도 한 가지 이유겠다.

 

또 최근에는 시집에 관심이 가 시집을 사 읽고 있는데, 민음사에서도 시집을 꾸준히 내고 있으니 자연스레 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번엔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들

 

 

사실 민음사에서도 소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문열의 소설, 대학 때 많이 읽었던 소설. 집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말과 행동이 변해 더이상 그 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어 그의 책들을 모두 처분했던 기억도 난다. (젊은 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웅시대, 황제를 위하여 등등 그의 작품은 그의 화려한 문체와 더불어 젊은 날의 추억이 되었는데...)

 

그래서 내 곁을 떠나간 민음사 책들도 제법 있으니...

 

'민음사'라는 출판사 이름도 좋지 않은가. '백성의 소리'

 

즉, 백성, 민중이 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책을 내겠다는 말로 읽히는 이름이기도 하고, 백성의 소리를 대변하겠다는 말로 읽히기도 하니, 이래저래 '민음(民音)'이라는 말 좋다.

 

모아놓고 보니 민음사에서 문학 관련 책만 나온 것이 아니다. 다방면에 걸쳐 우리에게 필요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책의 존재 이유 아니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좀더 넓고 깊게, 정확하고 바르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앞으로도 민음사에서 좋은 책들을 많이 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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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철학사 1 - 권력과 욕망 : 조토에서 클림트까지 미술 철학사 1
이광래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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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출판사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책이라고 하는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한 권이 다른 책 세 권 분량을 지닐 정도로 엄청난 양을 지니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술가들도 많고,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그렇다고 미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그 사회를 구속하거나, 또는 사회에 규정당한 철학들과의 관련성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미술과 철학, 또 미술과 사회, 미술과 문학, 미술과 음악 등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들이 융합되어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다보면 중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사상들이 있어왔는지, 그 사상들과 그림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알고 있는 시기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즉,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접어드는 그 시기부터, 미술이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그런 표현을 하는 미술을 시작한 작가는 누구인지, 왜 그가 그런 평가를 받는지에서 시작한다.

 

그전까지의 미술은 인간의 세계에 있다기보다는 신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 책 제목이 '미술철학사'임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전 시대는 철학의 시대가 아니라 신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인간의 모든 것을 맡긴 시대에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 때문이다. 그냥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신의 뜻에 의해 규정된 세상일 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갈수록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해 갈수록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시대,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점을 르네상스 언저리에서 잡고 있으며, 이 책은 조토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들을 가능하게 한 선구적인 미술철학가들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런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미술의 정점에 미켈란젤로가 있다. 우리가 르네상스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지만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주변의 인물일 뿐이다.

 

인간의 시대를 이끈 것이 이탈리아의 '피렌체'라면 이런 피렌체의 이데올로기 중심에 미켈란젤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고흐에 대한 평가에서는 기존의 평가를 뒤집어놓고 있는데...

 

르네상스기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의 화가들(벨라스케스, 고야 등등)과 영국의 화가들, 그리고 프랑스의 화가들까지 나아가는데...

 

화가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정신과 사회정신을 구현하는 화가들을 다루고 있다.

 

하여 이 1권은 클림트에서 끝난다. 인간의 시대로 넘어와서 낭만주의를 거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이르고 이들에 대한 반동으로 상징주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미술과 철학의 과정.

 

미술이 공시성을 띠기도 하지만 통시성을 띠기도 한다는 점, 공시적 통시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관철해 나가는 미술의 철학을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통하여, 그 시대의 철학을 통하여, 또 그 시대의 사회사상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 문학가, 예술가들을 통하여 이 책은 그 도도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근대 초기 클림트에서 이 책은 끝난다. 이제 2권은 표현주의에서 시작한다.

 

덧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오타일 듯 싶은데...

 

398쪽에 '결국 다비드도 산악파의 냉혹한 독재와 공포 정치를 증오하는 지롱드당의 여성 당원인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의해 자신의 집 욕조에서 척살당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코르에의 칼에 죽은 것은 '마라'니, 그리고 이 문장의 바로 앞 부분에서 '마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피살된 마라'를 그린 것이 다비드이니, 이 문장의 '다비드'를 '마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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