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공간의 환상 다빈치 art 5
안토니 가우디 지음, 이종석 옮김 / 다빈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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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건축은 놀랍다. 보통에서 벗어나 있다. 특히 외관에서 드러나는 변화는 다른 건물에서 느낄 수 없는 점이 많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외관만이 아니라 내부도 그렇다는 것이다. 내부도 직선을 거부하고 곡선을 활용하고 있으며, 외관의 빛 못지 않게 내부의 빛에도 엄청나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다.

 

가우디 건축의 외부야 사진을 통해서 많이 보아서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인데, 그가 지은 건물의 내부는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 그냥 짐작만 할 따름이다. 그것도 사진을 보면서.

 

이 책은 가우디 건축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다른 책에 비해 깊이가 떨어질지 모르지만 가우디 건축의 외부, 내부에 대한 사진만은 원없이 볼 수 있다.

 

여기다 가우디 자신이 건축에 대해 한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점 하고.

 

단지 그가 외관을 멋있게만 하려고 했을까? 그렇다면 그 건축가는 당대에 이름이 있을지 모르지만 금세 잊혀지고 말았으리라.

 

그는 공간에 대해서 고민을 했으며, 건축은 종합예술이라는 점, 분석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건축이고, 그러한 건축에는 빛의 발현에 유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에 관한 가우디의 이론이 이 책에 담겨 있으며, 그것을 그의 건축을 통해서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통해서 외관과 내부, 장식 그리고 빛의 조화까지 종합적으로 건축에서 발현되는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데...

 

가히 환상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그의 건축물을 보면, 과연 이 시대의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수많은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이 때 과연 우리나라의 특성을 살린 - 가우디의 기본 신조는 건축재료는 그 지방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이다. 이 말을 확장하면 건축물은 그 지방의 역사, 문화를 표현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안목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몇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감탄을 줄 수 있는 건축, 그런 건축을 우리도 예전에는 가지지 않았던가. 그것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충분히 가능함을 가우디의 이 책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이렇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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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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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이라고 유명해진 소설이다. 나온 지가 한참 되었는데, 제법 읽혔음에도 외국에서 상을 한 번 받으니 다시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든 소설이다. 

 

한강이 쓴 소설을 읽은 것은 "소년이 온다"가 처음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 그 많은 광주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설들이 나왔음에도 한강 소설은 나름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것. 그런 느낌을 바로 이 소설에서도 받았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제목이 다른 단편들이 모여 있지만 내용이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이라지만 작은 소제목을 지닌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다만, "소년이 온다"와 비슷하게 사건마다 주인공이 다르다. 즉, 한 인물과 얽힌 사건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소설은 바로 "영혜"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그렇다고 "영혜"가 주인공이 된 적은 없다. "영혜"를 둘러싼 인물들이 때로는 서술자로 때로는 주인공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는 "영혜"를 빼놓으면 안된다.

 

"영혜"가 실질적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소설인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서술자이자 주인공이다. 어느날 갑자기 채식주의를 선언한 영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그 남편은 우리나라 보통사람을 대표한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가정적이고, 적당히 남을 의식하는 결코 튀지 않으려 하는, 그렇다고 다름을 인정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아내가 '채식주의'를 선언한 것은 일탈이다. 보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영역에서 아내가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을 포용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영역만을 고수하며 그 영역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배제해야만 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영혜의 남편이다. (그가 이러한 보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영혜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을 의식하는 모습에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자신의 아내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관습, 즉 보통의 삶에서 일탈한 것이고,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배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는 처가를 동원한다. 장모와 처형. 이들에게 아내의 채식이 일탈임을,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압력을 넣으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영혜는 자해로 병원에 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둘은 결국 이혼하게 된다.

 

보통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의 영역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소설이 등장한다. 이 소설 '몽고반점'에서는 바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 보통사람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변화해가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바로 영혜의 형부.

 

그는 예술가다. 요즘 말로 하면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였다. 사회에서 보통에 가까운, 사회를 거스르는 것 같지만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보통 예술가.

 

그가 어느 순간 아내에게서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극히 개인적인 예술적 영감.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예술적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신이 고수하고 있던 영역에서 나와야 한다.

 

그 영역에서 나옴은 일상의 규범에서 나와야 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할 때만 가능해진다.

 

함께 예술하는 후배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그는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고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서로 교합하면서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는다.

 

규범에 얽매인 것이 아닌 규범을 초월해 개인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술. 그것이 순수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술이라고 해도 (이런 점에서 어른이 되어도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는 영혜는 순수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는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순수에 충격을 받아 그 세계로 들어서는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예술이 과연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끼?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영혜가 다시 정신병원에 가고, 그가 가정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이 상황에서 소설은 '나무 불꽃'으로 간다. 가장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영혜의 언니. 그는 동생은 이혼당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남편과 헤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혈육이라는 이유로 영혜를 돌본다.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려 한다. 받아들이려 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영혜를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한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그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 바로 영혜의 언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의미가 있을끼?

 

자신의 삶은 보통의 틀에 갇혀 버린, 남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둔 삶이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을 영혜를 통해서 얻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자신의 틀을 깰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영혜의 언니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삶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영역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름을 무조건 배제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사회다.

 

채식주의자를 통해서 다르다는 것이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런 배제가 우리 삶 전반에 걸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영혜나 영혜의 형부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당한다. 그렇게 배제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영혜의 남편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모습, 이것이 이 소설의 앞 두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세 번째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자신의 영역을 다르게 보기. 그래서 자신의 삶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여기까지 소설은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뿐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더 많은 정리가 필요한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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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캐슬린 배리 지음, 정금나.김은정 옮김 / 삼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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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몇 권의 책을 읽기는 했지만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그들마다 주장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매춘이 아닐까 싶다. 매춘을 허용하느냐 마느냐로 페미니즘 진영도 갈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내 착각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매춘에 관해서는 페미니즘 집단 내에서도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니)

 

한 때 여성들이 성매매 하는 것을 성노동이라고,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성노동자라고 하고, 그들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노동력(?)인 몸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이니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여성 성노동자가 자신들도 노동자라고 성노동을 인정하라고 얼굴을 가리고(가릴 수밖에 없다) 시위를 하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폭행이나 착취가 아니니 이런 경우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 자신의 몸을 파는 길 이외에는 도무지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법으로 막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생각을 하기도 했다?에서 그쳐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생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자유의지로 하는 행위인가?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개인의 자유가 과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성을 파는 행위는 자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행위다.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는 행위는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다.

 

인격, 인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테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대다수의 사람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이런 환경을 만든 사회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몸이, 성이 상품이 되면 이것이 다른 면에서도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다. 

 

즉 광범위한 성의 상품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이런 성의 상품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나 국가, 또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춘이 일어나는 이유는 구매자가 있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사례들을 보면 매춘활동을 한 여성은 처벌을 받았어도 성을 구매한 남성이 처벌을 받은 경우는 별로 없으며, 매춘 활동을 강제한 포주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음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자유의지로 인한 매춘을 허용한다는 논리는 구매자의 욕구를 그대로 따르는 논리일 수 있고, 성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무시하게 된다는 얘기다.

 

더하여 성의 상품화는 곧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만들 가능성이 많으니, 그야말로 '섹슈얼리티의 매춘화'가 자연스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거의 400쪽에 걸쳐 성의 상품화를 비판하고, 그런 사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상에 자발적인 성 판매는 없다는 것, 그리고 성을 구매하는 사람을 먼저,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점, 그것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점... 우리나라 사례도 참 많이도 나온다는 것. 그 유명한 기생관광에 미군부대 주변의 기지촌까지... 그럼에도 우리는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 이런 매춘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운 적이 있었던가 하는 부끄러움.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툭하면 성희롱, 성추행을 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의 의식 속에 이러한 '섹슈얼리티의 매춘화'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부끄러움이다. 그러니,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 두 가지, 그것만은 명심하자.

 

세상에 자발적인 성 판매는 없다. 그것은 사회적 선(善)이 아니다. 그 다음에 성판매자보다는 성구매자에 대한 처벌이 더 엄격해야 한다. 구매가 있으니 판매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매자는 대부분 판매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처벌에 관대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성매매, 이건 없앨 수 있는 일이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으면서 참 많이도 부끄러웠던 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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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1
이어령 외 29명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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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온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고, 또 어떤 책이 나왔는지를 모두 알 수도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에는 지금 엄청나게 많은 책이 나오고 있다.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에 가 봤다. 엄청나게 많은 책들. 그 책들 중에 사람들에게 읽힌 책이 얼마나 있을까? 지혜의 숲이라서 그런지 꽤 높은 곳까지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와!' 라는 감탄사만 내지르며 지나치곤 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어도 과연 몇 권이나 읽겠는가.

 

그러면서 문득 시집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이 많이 발간되고 있는데, 이 중에 사람들에게 읽힌 시집이 몇 권이나 될까? 그 시집 중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시가 몇 편이나 될까 하는 생각.

 

그 많은 시집 중에, 그 중에서도 그 많은 시들 중에서도 마음에 와서 콕 박힌 시, 그런 시가 있다면 그 시는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시에 감정이 없다고 하면, 그런 시를 쓴 시인은 정말 행복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는 생각.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시를 좋아할까? 어떤 시들이 사람들 마음에 와 박혀,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시와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시들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시도 있지만 처음 보는 시도 있으니...

 

시를 새로이 읽는 재미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왜 그 시를 자신의 마음에 품고 사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더 좋다.

 

이 책이 1999년에 나왔는데,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요즘에서야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말았으니, 책에 대한 정보가 늦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손에 들어왔다.

 

더 찾아보니 1권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책이 나와 있다. 아무리 궁핍한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시를 아직은 버리지 않았나 보다.

 

시를 버리지 않고 시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그 사회는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시를 이해하는 만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시가 왜 그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았는지, 왜 그 시를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어떤 시와 함께 하는가, 어떤 시와 함께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사람들처럼 시를 가까이 하자. 지금... 많이 힘든데... 그래서 더욱 시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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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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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이라는 말, 낯설다. 이은미의 노래 제목에서 이 말을 들어보았는데, 계속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말을 놓아두고 외국어를 쓴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본래 음악에서 나온 이 용어가 음악에 문외한인 내 처지에서는 어려운 말이고,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말임에는 틀림 없다.

 

"녹턴"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 비록 문제가 많다고는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사전이고, 현재는 우리나라의 기본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녹턴(nocturne) :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나타낸 서정적인 피아노곡. 19세기 초엽에 필드(Field, J.)가 처음으로 작곡한 형식으로, 특정한 박자와 형식은 없고 세도막 형식 또는 론도 형식을 따른다. 쇼팽의 19곡이 가장 유명하다. ≒노투르노ㆍ몽환곡(夢幻曲)ㆍ야상곡(夜想曲).

 

이라고 되어 있다.

 

무언가 서정적인,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그럼에도 가슴에는 잘 다가오지 않는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그냥 음악을 듣는 수밖에.

 

이 시집의 제목이 "녹턴"이다. 음악을 듣는다기보다는 시를 읽으며 그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굳이 제목을 의식하지 않아도 읽어가면서 무언가 마음을 울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밤에 느낄 수 있는 착 가라앉은, 그러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렇다고 절망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 그런 분위기.

 

이 시집의 시들은 이런 분위기를 너무도 잘 드러내고 있다. 시들이 하나하나 모여 '시'를 구성하고 있다.

 

마치 이 시집에서 '나'와 '나'가 모여 '나들'이 되듯이 - 분명 시인 '우리'라는 말이 아니라 '나들'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라는 말이 '나'와 '너'가 모여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나들'이라는 말에는 '나'와 '나'가 모여 있단 느낌을 준다 - 시와 시들이 모여 시집을 이루고, 이 시들이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가 바로 '녹턴'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분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시인의 현실 인식에서 온다. 우리 시대는 환희에 찬 시대가 아니다. 밤의 분위기를 지닌 시대다. 어둡다.

 

그러나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다. 차가움을 녹이는 따스함도 있다. 그것이 태양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어둔 밤 길을 밝혀주는 달빛처럼 - 그 달빛엔 빛만이 아니라 열(따스함)도 있음을 - 시들이 작동하고 있다.

 

시인은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객의 본업은 죽은 사람을 만나 못다 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

  가객의 부업은 산 사람의 고단한 저녁에 피가 도는 날개를 달아주는 일 (조금 먼 아침 중 일부. 26-27쪽)

 

이 시에서 가객을 시인으로 바꿔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2부에서는 '세월호'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에 대한 시들이 나온다.

 

시인이 그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시인이 애도하지 못하고, 그들이 못다 한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저 해주지 못한다면 세상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을테니 말이다.

 

시인은 그래서 또 이렇게 말한다.

 

  지상에서 더 이상 시가 읽히지 않을 때

  '너'의 아픔에 덩달아 아픈 '나들'은 합리적으로 사라지고

  '나'이거나 '너'인 세상만 질서 있게 퇴화하여 남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첫번째 이유 (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중에서 125쪽.) 라고

 

그렇다. 이 시집에서는 이렇게 시는 바로 '나들'이 된다. 시인과 시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 또한 다른 존재가 아니다. '나들'이다. 이 '나들'이 있는 한 세상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차가움 속에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 바로 "녹턴"이다. 그래서 제목이 녹턴이지 않을까, 녹턴이라느는 낱말이 조금 가까이 내 마음 속으로 다가오게 만들어준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기억하고 싶은 시. 바로 '사랑'이란 시다. 읽어보자. 그리고 읽히자. 문을 꼭꼭 잠가 자물쇠를 걸어둔 사람들에게.

 

사랑

 - 앞선 순례자의 묘비에 이 시가 적혀 있는 것을 읽었으나 곧 잊어버렸다 이 부주의함이야말로 나의 원죄이니 기억하라 오늘 당도한 사랑의 순례자여

 

새장 속에 꽃을 기른 적 있지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꽃은 날아가지 않았네

 

새장 속에 심장을 기른 적 있지

새장 문을 닫아둔 날

심장이 날아갔네 꽃이 날아갔네

 

잠긴 새장 바닥엔

무거운 핏빛 깃털 몇 낱

마르지 않는 고통 몇 잎

 

두려워 새장을 짠 자여, 문 닫은 자여

스스로의 무지를 애도할 것

 

김선우, 녹턴, 문학과지성사, 2016년.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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