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는 떼거리 문화


소나무는 

절개와 지조, 선비의 나무,

곧 우리나라 나무라고

예전 시가에서는 노래했지

그러나 이들이 소나무를 가까이서 봤는지 몰라

멀리서 우뚝 솟아 보이는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 말고

자기들끼리 떼거리로 모여 있어

그 밑에선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소나무를 말야

싹나고 잎나고 꽃피고 꽃지고 잎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늘 푸르르면서 제 잎으로 사시사철 햇볕을 가리고

쓸모없어진 잎들로 제 주변을 덮어

어느 곳에나 자라는 풀들도 나지 못하게 하는

저만 고고한, 저들만 고고한

그들의 떼거리 문화를 본 적이 있냐 말야

그렇게 가까이서 소나무를 봤다면

소나무가 우리나라 상징이라는 말,

참 부끄러운 말이지 않겠어

참, 삐딱한 생각이지.

그런데 한 번 소나무들 주변을 봐, 밑을 봐.

도대체 무엇이 있나.

떼거리로

저들만 잘 살고

나머지는 모두 억눌러 버리는

그래서 저만 푸르름을 자랑하고

저만 곧고 크게 잘 자라 동량이 되는

주변엔 아무 것도 없게 하는 그런

떼거리 문화

그것이 소나무인데 말야.

조금 보기 싫어도 제 때 되면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그 사이로 햇볕이 들게 하는

그런 나무들이

우리나라 상징이면 얼마나 좋았겠어.

소나무 밑을 보며 걸으니 참, 이런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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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예술 산책 - 작품으로 읽는 7가지 도시 이야기
박삼철 지음 / 나름북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도시라고 하면 우선 삭막함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지나쳐 가는 공간. 커다란 건물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해 다른 건물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제각각 자신의 일만 할뿐이라고 여겨지는 도시.

 

도시는 사람이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살고 싶지는 않은 곳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도시를 떠나서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시에는 온갖 편의시설이 다 있기 때문이다.

 

쉽게 편의시설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사람다운 삶에서는 좀 멀어진 생활을 도시에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 도시의 삶을 선으로 표현하면 직선의 삶이다. 그냥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좌우, 앞뒤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야 하는 직선의 삶.

 

하지만 자연은 직선보다는 곡선이 더 많고, 우리 몸 자체도 직선이라기보다는 곡선이 더 많지 않은가.

 

강을 개발한답시고 꼬불꼬불 흐르던 강이나 하천을 직선으로 쭉 뻗게 해서 결국 주변의 모래사장이라든지,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없애버리고, 콘크리트로 막아버리고 만 것, 사람들이 좀더 편리하게 살게 하겠다고 도로도 직선, 건물도 직선 모두 직선, 직선, 최단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도시 아니던가.

 

이렇게 도시의 삶은 삭막한데도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떠날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도시에 사는 인구가 지구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하듯이 도시는 이제 사람들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절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도시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도시에서 떠나 살 수 없다면 도시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시를 바꾸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직선의 도시를 곡선으로 바꾸는 일이다. 어떻게?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그렇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미 도시의 직선을 곡선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노력을 발견한다면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거기에 함께 한다면 도시의 삶도 충분히 변화가 가능하다.

 

이 책에서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빠르게 지나치지만 말라고, 천천히 걷기의 속도로, 자전거의 속도로, 아님 마차의 속도로 지나가라고.

 

그러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그냥 내쳐 달리기만 했을 때 보이지 않던 도시의 장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도시에도 이렇게 많은 예술이 있음도 알 수 있게 되고.

 

그 예술들이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해주고 있음도 알 수 있고.

 

따라서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삶에 주름을 하나하나 접어 넣기 시작하는 것이 도시의 예술이다. 그런 주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시의 삶도 느려지고 풍요로워진다.

 

이 점을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 벌써 도시의 변화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시를 경원시하고, 그냥 회피하고 멀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그것도 바로 주변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안다면 자신도 도시를 마냥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너무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긍정적인 면, 예술가들이 동떨어져 홀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쉬고 함께 관계 맺으며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 또 우리 도시에서 예술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있음을, 그 예술들이 도시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도시를 걸으며 주변을 살피고 싶다는 생각, 도시에 살면서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은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도시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다. 그곳의 주인공은 도시를 꽉 채운 문명이 아니라 바로 사람임을 잊지 않도록 이 책이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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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9-1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생각 나네요

kinye91 2016-09-13 11:08   좋아요 1 | URL
서울이 삭막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천천히 찾아보면 서울에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음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어요. 좀더 사람과 함께 하는 도시로 서울도 변모해 가지 않을까 해요. 도시 생활에 사람들이 관심을 지니고 있다면요.

낭만인생 2016-09-1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쑥 책 사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도심을 잘 들여다보면 예술 작품이 적지 않는데 그냥 스쳐 지나 가는 것 같습니다.

kinye91 2016-09-13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도시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장소일 뿐이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도심 속을 걸으며 한 번 예술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늘 기다려지는 책이다. 이번 호에서는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나도 궁금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오면 반갑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고 싶지만, 한달음에 읽고 싶기도 한 책이다.

 

너무도 근본주의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주의는 우리가 기본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 아니겠는가.

 

세상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 종말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그래서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지 않으면 종말이 기어코 오고 말텐데, 어찌 근본주의적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근본주의와 극단주의는 다르다는 점 명심하자)

 

어떤 사람들에게 녹색평론이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카산드라의 예언은 비록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그렇지 그 예언은 모두 맞는 예언이었다는 사실.

 

녹색평론이 주장하고 있는 문제들은 예언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예측이라는 것, 그 예측이 빗나가게 하는 일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는 점.

 

예측이 된다면 예측대로 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율성이고, 인간의 힘 아니던가. 그런 자율성과 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책이 바로 녹색평론이다. 결코 녹색평론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이번 호는 "개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소강상태가 되다가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쏙 들어가 버리곤 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지금은 개헌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라는 인식을 한다.

 

87년 헌법이 이제는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제왕적 대통령제는 손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대체 수많은 사표(死票)들을 발생시키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뭐냐고? 기득권 세력들의 힘에 밀려, 그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전락해버린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개헌은 필요하다. 단지 대통령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지금 시대적 상황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다만, 개헌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번 호 좌담에서 개헌을 할 수 있는 주체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밖에 없는데, 둘 다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 아니던가.

 

위임받은 권력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데, 정작 권한을 위임해준 국민들은 개헌을 발의할 수도 없다니, 이게 무슨 주권을 지닌 국민인지...

 

그래서 개헌은 국민들이 참여하는 개헌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국민들이 참여하지 않고 87년처럼 몇몇 소수만이 참여한 개헌은 하나마나한 개헌이라고,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번 호에서 말해주고 있다.

 

전국민이 참여하는 개헌, 그것이 바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주체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개헌 논의가 흘러갈지 지켜봐야겠지만, 녹색평론에서 최소한 개헌은 국민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즉 국민이 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성은 제시했으니...

 

개헌말고도 이번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사드'와 '쿠바'다.

 

'사드'는 우리가 미국의 입김하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보는데, 과연 '사드'가 우리나라 안보에 도움이 되느냐, 또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논의 자체가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서 사회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단지 사회 갈등뿐만이 아니라 외교 갈등까지 일어나고 있음을 여러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드'에 관한 글이 이번 호에 네 편이 실렸다)

 

이런 '사드'와 반대편에 있는 글이 바로 '쿠바'에 관한 글이다. 미국의 바로 아래에서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나라를 유지해 온 쿠바. 의료천국, 유긴농, 도시농으로 식량문제 해결, 쿠비에 맞는 민주주의로 자주국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쿠바에 관한 글이 세 편 실렸다. 읽어볼 만한 글들이다.

 

한 편 한 편 읽으며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읽는 눈을 키울 수 있는데...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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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
이재운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조선 건국의 공신, 그러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혁명가. 왕보다는 신하의 권리를 더 주장한 사람, 그래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던 사람.

 

조선의 기초를 다진 사람, 지금도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특히 경복궁에는 그가 지은 이름들이 남아 그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는 자신의 사상을 한 나라의 기본 사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그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그는 그 먼 과거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는 정치가이기도 하다. 왕 하나에 어떻게 나라를 다 맡길 수 있느냐고,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주로 하고, 왕은 나라를 대표하면 된다는, 신하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권(臣權)을 주장한 것은 지금에서 보면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헌군주제는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다. 중세 시대에, 그것도 왕이 다스리지 않는 나라를 꿈꾸지 못하던 시대에 신하의 권리, 신하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그가 용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자기들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태종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눈엣가시였을테고, 어떻게든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제거되어야만 했을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제거되었다.

 

그 다음 태종이 얼마나 왕권을 강화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정도전은 역적죄로 죽어야 했다. 역적죄란 무엇인가? 삼족을 멸한다는 죄이다.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방계 친족들도 피해를 입어야 하는 죄다.

 

여기서 소설은 출발한다. 정도전 아들의 관점에서. 이상하지 않는가. 역적죄로 죽었을텐데, 정도전 아들의 관점이라니... 정도전 아들이 살아있어? 어떻게? 이런 의문에서 소설이 출발한다.

 

신기하게도 정도전의 아들은 정도전이 죽은 지 16년이 지나서 복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세종 때에는 높은 벼슬 (형조 판서- 요즘 말로 하면 법무부 장관쯤 된다)까지 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역사소설의 묘미다. 재미다. 역사에서 비어 있는 한 틈을 찾아 그 틈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 그것도 참으로 사실적으로.

 

소설은 정도전을 명나라와 조선의 세력 다툼 사이에 낀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명나라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조선을 꼽고, 그 중에서도 정도전을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

 

여기에 지나치게 신권이 커지자 불안감을 느끼고, 또 조선의 건국에 아무런 공이 없는 배다른 아우 방석이 세자가 되자 불만을 가진 이방원이 주원장과 결탁하여 조선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도전을 제거한다는 내용.

 

정도전을 제거하되, 정도전의 사상이 나라 통치의 방향과는 맞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정책들을 따르겠다고, 자손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겠다고 정도전에게 약속을 한다는 그런 내용.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 틈을 이런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 정도전의 자손들이 어떻게, 그것도 큰아들이 정도전이 그렇게 죽어갔음에도 중용되어 벼슬을 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 의문을 상상력으로 채워넣었으니...

 

아들의 관점에서 내용이 전개되고 또 소설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문장도 잘 읽혀서 읽는데 문제가 없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역사의 빈 틈을 메우려는 상상도 해볼 수 있고.

 

다만, 이 소설에 나온 내용을 사실(史實, 事實)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사소설은 역사보다는 '소설'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읽으면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이다.

 

내가 읽은 소설은 옛날 판이라 절판이 되었고, 새로운 제목으로 책이 다시 나왔던데... 제목을 살펴보니 내용이 그리 대폭 수정이 된 것 같지는 않고.

 

새로운 제목은 "칼에 베인 용" (책이 있는 마을, 2015년)이다.

 

덧글

 

읽으면서 좀 거슬렸던 장면이 몇 있는데...

 

우선 하나는 아들인 정진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오원) 예를 들면서 오자서에게는 부차와 손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자서에게는 오왕 부차가 아니라 합려 아닌가. 부차에게서 죽음을 명령받은 게 오자서일텐데... (170쪽 등)

 

또 하나는 장량이 항우를 황제로 만들었다고, 정도전을 장량에 이성계를 항우에 비기는 대사가 나오는데, 장량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을 황제로 만들었다. (181쪽)

 

개정판에서는 고쳐졌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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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에 입원해서 병상에 누워 몸을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냥 누워만 있었다. 그것도 며칠동안이나.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니 미칠 노릇이다. 앉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음식도 남이 먹여주어야 하니 이거야 살아 있는 시체가 따로 없었다.

 

그때 내 몸을 생각했다. 내가 내 몸을 너무도 막 썼구나. 내 소중한 몸을 이리도 막 다룬 결과가 지금 이것이구나.

 

내 몸을 내가 아끼지 않으면 누가 아끼겠는가. 내가 몸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닌, 몸과 정신이 함께 바로 '나'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자신의 몸을 이렇게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어떤 계기가 있는데... 그 계기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몸이 영원히 계속 잘 활동할 줄 알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다. 어떤 계기가 없어도 자신의 몸에 대해서 늘 관심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펴야 한다. 몸이 너무 피곤하지 않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바로 자신의 몸 아니던가. 그런 몸을 이렇게 막 굴리다니... 그런 안 되지.

 

그러다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이 생각났다. 이 시집을 펼쳐보니, 두 번째 시 '노숙'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에 입원해서 내 몸에 대해 생각했듯이 시의 화자도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 몸이 참, 내가 입원해 있는 것만큼 혹사당했나 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데,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몸의 혹사는 결국 정신의 혹사로 이어지고, 그것은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많이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더라도 내 몸, 내가 지켜야 함을 생각해야 겠다.

 

세상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험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10년 초판 11쇄. 12쪽.

 

시에서 말하는 몸과 건강을 잃은 몸과는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 몸으로 살아왔지만 몸에 대해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못햇음도 공통점이다. 그렇다, 노숙은 자신의 몸뚱이를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뉘인 행위이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 몸 사랑해야 한다. 그 몸이 지금까지 날 위해 해온 것에 대한 보상, '네 노고의 험한 삯'을 우리는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그 지불, 몸의 주인인 내 몫이기도 하지만, 내 몸이 살아가는 사회, 내 몸으로 살아가는 사회도 역시 '노고의 험한 삯'을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몸도 안락한 곳에 뉘일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다.

 

작고 힘없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시다. 이런 애정이 우리를 좀더 건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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