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와의 인연은 아마도 대학 들어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무언가 '창작과비평'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하여 영인본을 구입해서 비치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계간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해서 읽는 사람도 있었다.

 

나역시 꽤 오랫동안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했었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십 년은 넘게 정기구독했을 거다. 그 많은 책들 헌책방에 넘겨주면서 책장이 많이 가벼워졌었는데...

 

그럼에도 헌책방에 넘기지 못한 것은 '창작과비평' 영인본.

 

책장의 맨 위칸에 자리잡고 있어서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사진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참 오래 된 영인본이다. 차마 처분할 수가 없는 창비의 책들. 이건 창비 책이라고 할 수 없나?

 

이런 '창작과비평' 외에도 창비의 책들은 무수히 많았다. 많이도 읽었다는 생각, 증거? 지금은 글쎄... 소설들은 헌책방으로 가고 다른 사회비평서들은 책장 구석에 숨어 있어서 그것을 찾으려니 힘들다.

 

그럼에도 찾을 수 있는 것들은 한 때 관심을 가졌고, 또 지금도 꾸준히 관심 가지고 읽고 있는 시들... 우리나라 시인들이 시집을 내고 싶어하는 출판사 중에 가장 우선으로 꼽을 만한 출판사가 바로 창비 아니던가.

 

그런 시집들... 곳곳에 시인따라 독립해 나가 살고 있는 시집도 있지만, 창비시선들은 이렇게 종가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듯 책장의 한 쪽을 차지하면서 모여 있다.

 

이렇게 문학에 관한 책들을 창비에서 많이도 출판해냈나 보다. 여기에 내가 갖고 있는 문학이론서들이 있으니... 한때 우리나라 문학비평가들에게 꼭 읽혔던 책들... 그런 책들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으니...

 

이런 책들 말고도 더 많은 책들이 있겠지만, 내 서가 속 창비 책들 소개는 여기서 끝. 계속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출판사니 내 서가에 더 많은 자리들을 차지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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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흔적을 걷다 - 남산 위에 신사 제주 아래 벙커
정명섭 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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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난 지 70년이 지났다. 70년 대충 따져도 두 세대가 바뀐 세월이고, 강산은 무려 7번이나 바뀌어야 한 세월이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기간의 두 배를 독립된 국가로 지내오게 된 세월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프랑스를 예로 들면 그들은 독일치하에서 몇 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독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 발빠르게, 또 치열하게 움직였다. 7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에 나치 독일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아니라는 답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프랑스는 몇 년 안 된 나치 독일의 지배에서 이루어진 잔재들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무려 36년이라는 (정확하게 34년 11개월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통칭 우리는 36년이라고 한다) 세월을 일제 지배에서 지내왔으니... 얼마나 많은 잔재들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프랑스보다 더 치열하고 끈기있게 일제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엉뚱하게 일제가 우리나라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의 억지주장은 좀 아니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우선 인적 청산이었을텐데...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 가기도 하고, 그 자손들은 힘들게 살고,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그 자손들 역시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인적 청산이 안 되었으니, 나머지들이 제대로 청산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기껏해야 보존하여 기억해야 할 것들을 그냥 없애버리거나 또는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만 경우가 허다하다.

 

어디에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고. 최근에야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이 일제의 잔재를 찾아 보존하고 기억할 것과 없애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 단적인 예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위안부 배상금 문제... 일본이 배상금이라는 용어를 절대로 쓰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10억 엔을 받아 왔는데... 일본이 왜 그 돈을 주겠는가? 위안부 제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인권말살 정책이었음을 시인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데... 정부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단도리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느낌마저 주는데...

 

눈에 보이는 현안마저도 이렇듯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고 있는 실정에서 무슨 일제 잔재를 청산하겠는가. 인적 청산에 이어 제대로 된 사과도 배상도 받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일제의 잔재를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나라 곳곳에 일제 잔재가 있다고 하는데... 여러 번 가 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나쳤던 곳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이 책을 보니, 부끄럽게도.

 

이렇게 역사의식이 없어서야 하면서 나를 자책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꼭 나만의 문제이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처럼 이렇게 모르고 지나치는 일제 잔재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서울 한복판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일제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다. 남아서 일제시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일제시대를 기억 속에서 밀어내 버리고 있는 중은 아닌지...

 

이 책에 나오는 일제 잔재들은 주로 관공서라든지, 우리나라 농민들을 착취했던 지주들의 집, 유물, 그리고 군사시설들이다. (구체적인 흔적들이나 장소는 책을 읽거나 찾아보면 될 듯)

 

특히 서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군사시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일제는 우리나라 곳곳에 자신들의 군사시설을 남겨 놓았고, 이 군사시설이 나중에 미군에 의해 또 우리나라 군에 의해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일제의 흔적이 남아 그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증언들이 학자들에게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 모습은 일제의 흔적이라는 것들은 학자들의 공부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우리는 현대사의 비극을 제대로 공부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은 반만 맞는다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없다고...

 

이 말이 가슴에 팍 와 닿았다. 그래 역사를 잊으면 현재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일제의 흔적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흔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이 책의 제목처럼 일제 잔재를 청산해서 일제의 흔적이 역사의 기억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일제의 잔재 속에서 헤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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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0-04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일제의 잔재나 흔적이 우리 한반도 곳곳뿐만 아니라 한국인 마음 속에까지 너무나 넓고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제의 잔재나 흔적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죠. 저는 우리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지적 의식 구조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봅니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식민지 노예의 의식 구조 속에 아직도 갇혀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한국/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자주독립하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위 글 가운데 《그리고 아직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데... 정부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단도리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에 일본어에서 온 외래어가 있는데요. 아시고 쓰신 것인지요? 즉 많은 사람들이 “단도리”를 우리말로 잘못 알고 있어서 한번 말씀드려 보는 것입니다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네요.

단도리(だんどり, 段取り)는 원래 일을 해 나가는 순서, 방법, 절차 또는 그것을 정하는 일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최신판에서 삭제하고 채비, 단속, 준비 등으로 순화한 단어라고 합니다. 혹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kinye91 2016-10-04 10:32   좋아요 0 | URL
아하, 감사합니다. 부끄럽게도 `단도리`라는 말이 일본 말에서 온 줄 모르고 썼어요. 우리말에 일본말의 잔재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에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아요.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은 그게 잘 안되고 있어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말 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즘은 성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삶창'에는 민중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 많았다. 그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민중의 삶이라는 사실, 관념에 의해 포장되거나 또는 관념에 의해 비하된 삶이 아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글들이.

 

100호를 넘어서면서 (사실 어떤 책이든 100호를 넘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책의 성격이 좀 달라졌다. 소위 밑바닥 인생이라고 하는 민중들의 글이 사라진 반면에 지식인들의 글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

 

그 전에는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면 이제는 대부분 지식인들이다. 사회에서 그래도 한 말씀 한다는 사람들의 글이 많다. (물론 그들의 한 말씀이 정권을 쥐고 있는, 또는 정권을 쥐려 하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민중들의 삶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식인들이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민중이기 때문이다. '삶창'에서 지식인이라고 내가 표현하지만, 소위 먹물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민중일 뿐이다. 그리고 그게 내 맘에 든다.

 

어차피 세상은 민중들에 의해 유지되고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맹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백성은 물이요, 정권을 쥔 자들은 그 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사실...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런 민중들의 이야기, 이번 호에서는 다른 일들을 빼고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밀양송전탑'과 '사드'다. 밀양송전탑문제는 정부 주도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지만) 해결이 되었다. 아니 해결이 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경과를 이번 호에서 정리해주고 있다.

 

읽어서 슬픈 그러나 꼭 알고 기억해야만 하는 일... 민중들의 생존권은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짓밟힌 것이 우리 현대사라면 이제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밀양송전탑 문제에서 그것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제기하고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드' 문제로 넘어가 또 지역 문제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으니...

 

'사드' 역시 성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밀양에서 송전탑이 "우리 마을은 안 돼!"를 넘어 전력생산과 수급의 문제를 제기했고, 이런 식의 송전탑은 어느 곳에서도 안 됨을 보여주었는데...

 

정부는 그런 소리들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다시 '사드' 문제를 일으켰다. 주민들의 목소리는 들으나마나 한 소리라고 생각하는지... 우리 마을은 안 돼가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안 돼!" 라고 외치는 그 소리를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지...

 

가끔은 그들은 국가와 정권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통령이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된다. 대통령은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권력을 잠시 위임한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다른 국가 기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을 보면 이들은 자신이 국가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에 실린 '밀양송전탑 문제'나 '사드' 문제에 대한 글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이들 권력을 쥐고 있는 소수의 몇몇이 아니라 나라를 지탱하게 하고 있는 다수의 민중들이다. 송전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국가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승만이 외쳤던 구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것을 권력을 쥐고 있거나 쥐고 싶어하는 자들은 잘도 지킨다. 그들은 정말 그들끼리 똘똘 뭉친다. 도무지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뭉쳐 있다. 뭉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반면에 민중들은? 이들보다 더 뭉쳐야 할 민중들은 아직 제대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각개격파되어 싸움도 각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송전탑부터 사드까지 (그 전에 있었던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통하여) 민중들은 뭉쳐야 함을 깨닫고 뭉치기 시작했다.

 

그게 이번 호에서 보여준 희망이다. 그런 희망이 아직도 우리를 버티게 해준다. 세상은 어두컴컴하지만 새벽은 어김없이 온다는 믿음, 그런 희망... '삶창'을 읽으며 그래도 버티는 희망, 그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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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6-10-03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격월간이었는데, 어느새 계간으로 바꿨군요. 성격이 좀 달라졌다는 말, 수록글 제목과 저자를 보니 알것 같네요. 다만 제 생각에는 예전에도 글쓴이들은 대분분 이쪽에서 유명하거나, 공부 좀 하신 분들이었어요. 글의 성격이 시사가 아닌 생활글 위주였다가 이젠 좀 이슈 중심의 잡지로 변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16-10-03 16:40   좋아요 0 | URL
계간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예전에도 민중운동 쪽에서는 유명하신 분들이 많았다는 말에 저도 동의해요. 다만 예전에 격월간으로 발행할 때는 일반인들의 소위 생활글이라는 것이 뒷부분에 한 꼭지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예 없어져 버려서, 그게 좀 아쉽다는 얘기지요... 여전히 `삶창`에는 기대하는 것이 있고, 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전집 5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카뮈의 작품을 꾸준히 틈나는 대로 읽고 있는 중. 소설이건 희곡이건 수필이건 다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한 권씩 한 권씩 구입해 읽고 있다.

 

이 소설이 죽음에 대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또 이방인의 전편 또는 이방인을 쓰기 위한 구성단계의 초고라는 말도 있던데, 읽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읽을 필요가 없다는, 왜 카뮈가 생전에 이 소설을 출판하지 않았겠는가라는 혹평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혹평할 필요는 없는 소설일 것 같고.

 

제목을 중심으로 소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제를 제목과 관련이 있는 이 구절에서 파악한다. 이 소설의 1부 1장에 나오는 메르소의 생각을 표현한 구절이다.

 

'그처럼 무르익은 공기와 풍요로운 하늘 가운데서 사람들이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이란 사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0쪽)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답을 주는 사람이 바로 메르소가 죽인 자그뢰스다. 그는 이렇게 메르소에게 말한다.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 다만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많은 시간이. 행복 역시 길고 긴 인내에서 오는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고 삶을 허비해요. 돈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요.' (82쪽)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어요. 아니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부자이거나 부자가 된다는 것, 그건 바로 우리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 때 행복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83쪽)

 

그러나 그는 돈만이 행복을 불러온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돈은 행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 ... 돈만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 얘기는 다만 어느 계층의 사람들에겐 행복이란 - 시간이 있을 때만이지만 - 가능하다는 것과, 돈이 있다는 것은 돈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85쪽)

 

그러므로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저절로 오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서 올 수밖에 없다. 즉, 돈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행복이 오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자그뢰스는 메르소에게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행복만이 비극적이란 걸 알아두시오.' (87쪽)

 

이 구절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행복이 비극적이라니. 결국 행복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온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테고. 하여 비극적이라는 말을 다르게 생각해 보았다. 예전 서양의 비극. 그 비극은 바로 평범한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뜻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다가 좌절하는 것 아니었던가.

 

이것을 행복이 비극적이라는 말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찾아 온갖 노력을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행복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찾을 때 오히려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메르소는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그가 찾은 행복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더불어 완성되는 것이다.

 

2부에서는 그의 행복찾기가 시작된다. 자그뢰스를 죽임으로써 그의 많은 재산을 확보한 메르소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떠난 일이다. 2부의 1장은 그래서 여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여행은 자신을 낯선 곳에 놓아둠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첫번째 할 일이다. 그렇게 떠나 고독 속에 자신을 내맡기지만 행복은 거기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일상을 떠난 행복이 있을 수 없듯이.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그가 돌아오는 곳은 같은 장소가 아니다. 비슷한 곳이기는 해도. 여기서 그는 사랑을 찾는다.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 속에서도 그는 고독을 찾는다. 고독 속의 행복. 이것은 행복은 자신의 것이지 남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 뤼시엔과의 관계다.  메르소는 그녀와 동등하게 지적으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그녀는 그의 생각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의 생각 밖에서 그녀가 들어오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런 그녀에 대한 설명.

 

'그녀는 필경 지적인 여자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잘됐다고 기뻐했다. 정신이 깃들이지 않은 미(美)에는 어떤 신성한 데가 있는 법인데 메르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 점에 민감했다.' (144-145쪽)

 

메르소에게는 행복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일상생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서 온다.

 

'행복은 선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그 선택 안에서는 어떤 신중하고 냉정한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167쪽)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고 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을 일상을 떠난 그 어떤 곳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시간을 벌어주는 돈 역시 일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그는 부끄럽게도 (이건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 ... 자신이 찾고 있는 특이한 행복은 바로 이른 아침의 기상과 규칙적인 해수욕과 의식적인 건강법에 있다는 부끄럽기 짝없는 진실을 뼈저리도록 느끼고 있었다.' (168쪽)

 

'행복이란 인간적인 것이고 영원이란 일상적인 것이다. 요는 하루하루의 리듬을 우리의 희망이 그리는 곡선에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루하루의 리듬에 순응하도록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한다.' (170쪽)

 

이렇게 깨달은 그는

 

'행복에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든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해야 한다든가 하는 조건이 있다고 믿는 건 잘못이야. 중요한 것은 말이지, 다만 행복의 의지이고 언제나 뚜렷하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178쪽)

 

라고 말한다. 행복은 결코 일상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상에서 내가 행복을 깨우치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최종적인 행복이 죽음에 있다. 어떻게 죽느냐...

 

'운명이 인간 속에서 창조하는 선택을 그는 의식과 용기 속에서 행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의 모든 삶과 죽음의 행복이 있었다. 짐승처럼 날뛰면서 그가 바라보았던 죽음, 그는 이제 그 죽음을 겁낸다는 것은 바로 삶을 겁낸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죽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인간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정당화해주는 것이었다.' (199-20쪽)

 

이 말은 삶에 대한 집착은 삶이 주는 행복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라는 말로 이해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라져버릴 것들에 자신의 마음이 매여 놓여나지 못하게 되는 것, 거기서 행복은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느냐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았느냐와 같은 질문이 될 수 있음을,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은 메르소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는 죽을 때 미소를 짓고 죽는데, 그것은 자신이 행복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면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단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소설 속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행복한 죽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급작스럽다.

 

그리고 삶에서도 그는 행복을 찾는다고 하지만 지루한 일상을 반복할 뿐이다. 아무리 행복이 우리의 일상에 있다고 해도,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고 말을 하려고 해도, 그리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라고 해도 소설을 읽으며 그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런 생활을 하는데, 즉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 살인으로 얻은 돈이기 때문이다. 수단부터 정당할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 올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소설 속에서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이 소설이 카뮈 생전에 발표가 된 소설도 아니고, 완성된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소설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잘 못 찾겠다.

 

그냥 소설 속 구절들을 따라가면서 혹, 이런 말을 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설을 한쪽으로 밀어넣고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정말로 우리는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로 돈이 시간을 벌어다 주고, 그것에서 행복이 찾아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돈은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그 필요조건인 돈을 충분조건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이고 선택이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산 사람은 죽을 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즉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 메르소는 행복한 죽음과는 거리가 좀 먼데... 그는 돈을 행복의 충분조건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 그리고 잘못된 수단으로 얻어진 돈은 결코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행각하므로...

 

앞으로도 계속될 카뮈 작품 읽기... 왜 이 작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그것이 의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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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박태균.정창현 지음 / 역사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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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이제는 제 나라를 세울 때인데, 이 때부터 일제로부터도 암살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제 동포들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렇게 우리나라 현대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서막이라는 사실을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자는 말에는 이들의 노력을, 죽음을 배제하자는 말이 포함되어 있을텐데,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정치 신념을 펼치려 했던 사람들을 우리나라 역사에서 괄호치려는 그런 모습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더 한심하다고 생각한 것은 제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한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밝혀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본적인 사실들만이라도 밝혔어야 하는데, 당시 경찰과 법원은 도대체 한 일이 없으니...)

 

오히려 그들이 죽음에 경찰이 관여되어 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고, 더 높은 선에서도 그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음에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도 경찰, 검찰, 재판부에 대한 불신이 이때부터 싹트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하는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인은 다섯 명이다. 암살 당한 순서대로 하면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 구'다.  

 

이들을 다시 인지도 순으로 배열하면 김구>여운형>송진우>장덕수>현준혁 순이 아닐까 하는데...

 

해방직후에 암살당한 현준혁은 사회주의자라는 점에서, 또 북한에서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고, 그의 암살이 남한의 정치계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또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 네 사람은 남한에서 암살당했고, 당시 정치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암살은 남한의 정치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영향 하에서 이승만 독재 정권이 탄생하게 되고, 그의 독주가 시작된다.

 

이승만의 독주 속에서 진상규명은 물 건너 가 버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들의 암살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해방 정국의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이렇듯 암살이 빈번했던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남과 북의 분단을 초래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온건한 보수주의자였던 송진우의 죽음으로 온건보수 쪽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중도 좌파 정도의 평가를 받던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이 물 건너 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 분단이 이루어지기 더 쉬워졌으며, 장덕수의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카드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김구의 죽음으로 인해 이승만 독재를 견제하고 물리칠 수 있는 가장 큰 정치가가 사라져 버렸으니...

 

이들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암살의 배후를 캐는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 암살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아직도 미국의 비밀문서 중에 해제되지 않은 것이 있어 이들 암살의 전모를 밝히기는 힘들다고 한다. 게다가 이제는 암살의 관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떴으니... 기록에 의해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최근까지의 결과로 이들 정치가들의 암살에 얽힌 배후와 의미를 파악해 보여주려는 노력을 한 것이 이 책이다. 따라서 이런 역사를 알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의미일 것이다.

 

덧글   

 

읽다가 발견한 소소한 오류와 동의하기 힘든 부분

 

1. 22쪽. 고은의 시 인용 첫구절에서 1995년은 -> 1945년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2. 120쪽. 장경근은 ... 1960년 3.15 부정선거 때에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부정선거를 총체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 이상하다. 이 부분은. 내가 알기론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인물은 최인규인데... 최인규 편을 찾아보면 그렇게 나오고, 그가 부정선거 죄목으로 사형당한 걸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하다.

 

3. 229쪽.  미군은 결국 6월 29일 철수를 끝냈다. 바로 김구가 암살 당하기 3일 전이었다.  -> 김구가 암살 당한 3일 후였다가 맞는다. 240쪽에는 미군이 철수하기 3일 전이라고 제대로 나온다.

 

4. 그 다음 납득하기 힘든 부분 : 여운형 편에서... "지도자의 삶은 그 자체가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 여운형은 통일정부가 수립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 그 자신에게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 이전보다 더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134-135쪽)

 

이런 말이 있는데, 이건 참... 여운형은 미군정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나 무시당했고, 경찰은 그의 암살에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정계은퇴? 그건 정치가로서의 책임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 여운형은 개인 경호원을 두었으니, 그는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보는데... 또하나 해방 정국에서 훌륭한 정치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

 

간디를 보라. 그 역시 죽음을 예견했음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순간을 모면한 정치가는 훌륭한 정치가일 수 없다.

 

죽음의 길을 알고도 가야 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삶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의 여운형 편의 말미에서 한 주장은 여운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동의하기는 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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