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련해져 왔다. 제대로 읽지 않고 읽다가 포기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처럼 무언가가 과거로 나를 데려갔다.

 

  그 무언가는 바로 정지원의 시 몇 편이다. 시 몇 편이 나에게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한 과거를 일깨워줬다.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잠시 묻혀 있었을 뿐이라고, 그 과거는 내 기억 속에서 내 맘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또 우리 현실에서도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고, 다만 드러나고 있지 않을 뿐이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아직도 많이 있다고.

 

국민학교 졸업 당시,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 대도시가 아닌 곳에 살던 우리들은 같은 반에도 여러 나이의 아이들이 있었다.

 

기껏해야 생일이 빠른 아이가 있는 한 살 차이가 나는 학급이 아니라 두세 살도 더 나이 차가 나는 아이들이 있는 학급이었다.

 

어떤 연유로든 부모가 출생신고를 늦게 했던지, 아니면 출생 신고를 했음에도 학교를 늦게 보냈다든지 해서 나보다 두세 살이 많은 아이들과 같은 학급에서 지냈다.

 

형이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친구로. 이런 친구들이 학교를 졸업할 즈음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아니, 진학할 수가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최종학력이 국민학교로 끝났다.

 

공장으로, 공장으로... 그리고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 또한 동네에는 없어서 걸어서 한 시간이나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때 들어간 중학교에 산업체 학급이라는 것이 있었다. 산업체 학급. 요즘 말로 하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간 아이들이 중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일을 마치고 야간에 공부하러 오는 학급이었다.

 

이런 산업체 학급에 대해서 잘 표현된 소설이 바로 신경숙의 "외딴방"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산업체 학급의 현실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그때서야 그 아이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우리 학교는 여학생들-여자 노동자들-만 받았으니, 여학생들이 우리가 떠난 교실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번도 책상이 더러워졌다거나 물건이 흩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냥 그대로였다. 분명 우리 교실을 썼고, 내 책상을 썼을텐데, 다른 사람이 썼다는 흔적이 없었다.

 

그만큼 아껴서 썼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졸업식 날... 우리는 중학교를 떠난다는 것이 마냥 기뻤다. 기뻐서 생글거리면서 졸업식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우리와는 달리, 그 날만은 주간에 학교에 와서 졸업식을 우리와 함께 하는 산업체 학급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마음에 이 좋은 날 왜 울어 했지만, 그것이 이들에게는 학교 교육의 마지막이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그런 처절함. 그것을 이해하기엔 중학생이라는 나이는 너무 어렸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것에 내 책임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과연 내 책임이 없었을까? 그들의 책임, 그들 부모의 책임일까? 아니다. 그런 바로 우리의 책임, 우리 사회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산업체 학급을 담당하고 있던 선생님이 우리 학급에 수업을 들어오시기도 했음에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선생님들이 했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지도 모른다.

 

학교 동창들 중에 고등학교에 진학 못한 학생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를 안타까워 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종종 그 아이의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산업체 학생들에 대한 생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것은 사회의 책임임을 나이 들어서 통감하고 있는데...

 

이런 과거로 정지원의 시가 나를 다시 이끌었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말아야 하는데, 이제는 대학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터무니 없이 비싼 등록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허덕거리고 있는가. 그것을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우리 사회, 내 어린 시절, 나 몰라라 했던 나를 보는 듯해 더 부끄럽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것을 책임져 줄 사회, 그것이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 아니던가. 그런 사회를 우리가 이루어야 하지 않는가.

 

많은 시들 중에 이 시 '덕순이'라는 시가 특히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시를 보자.

 

덕순이

 

고등학교 원서를 쓰던 가을

덕순이가 쓰게 웃었습니다

고등학교 갈 돈이 없어서

공장에 간다는 말에 기가 막혀서

어둠이 덮치도록 빈 교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산업체 고등학생이 되어 덕순이는

공장을 마치면 우리 반 복도에서

단어장을 들고 자율학습이 끝나길 기다렸습니다

다가가 말 붙일 수도 없게 입 꽉 다문 채

꼿꼿이 자존심을 지키며 서 있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책상에 올려놓는

보름달빵 정도였지만

덕순이는 용케도 내 자리를 찾아서 앉곤 했습니다

 

책상 서랍 속에 쪽지가 들어 있기라도 한 날이면

참고서 잘 썼다는 한 줄의 글에

나는 기나긴 답장을 써서 넣어두곤 했습니다

 

누구는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는 일이

또다른 누구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목숨줄 같다는 걸

 

파르르 떨리던 촉촉한 속눈썹과

다부진 입 매무새를 꼭 닮은

덕순이 딸도 아마 제 엄마처럼 야무질 거라고

선뜻한 가을이면 날이 선 희망에 대해 생각합니다

 

정지원,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 문학동네, 2008년 개정판 2쇄. 60-61쪽.

 

이 따스함이 내 과거를, 나는 중학교 때 산업체 학급을 경험했지만 시의 화자는 고등학교에서 경험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부끄러움과 함께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누구는 당연하게 누리는 일이 / 또다른 누구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 결코 놓을 수 없는 목숨줄 같다'는 말에서 주위를 살펴보게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시인의 이 따스한 눈길이 아마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낳게 했나 보다.

 

안치환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로 더 유명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이 시인의 시라는 사실을 시인이 쓴 다른 그림에 관한 책에 실려 있는 시인에 대하여에서 알게 되었지만, 그 시가 이 시집에 실려 있어서 더 반가웠다.

 

시인은 그만큼 따스한 시선으로 사회를 본다. 결코 군림하지 않고 낮은 곳에 함께 서서. 우산을 펴는 사람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 시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좋다. 그리고 따스하고 편안하다.

 

간만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런 시집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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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 화가들이 기록한 6.25
정준모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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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을 보면 역사화가 참 많다. 화려한 색채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역사화. 그 중에서 신고전주의파라고 하는 다비드의 나폴레옹에 관한 그림들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전쟁의 역사를 그림으로도 잘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그림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자랑스러워할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쟁을 그린 그림은 별로 없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배운 적도 본 적도 별로 없다)

 

아마도 전문적인 화가들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시키는 그림만 그리는데, 우리나라 왕들은 전쟁에 대한 그림을 선호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런 점이 좀 아쉬웠는데,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전쟁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들이 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림으로 그 비극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그렇지. 전쟁 때 종군작가단이 있었는데, 종군작가단에 미술가들이 포함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역시 이 책에 의하면 종군미술가들이 꽤 있었다. 종군 사진가도 있었고. 다만, 사진은 인화를 일본을 통해 했기 때문에 원본 필름을 사진작가가 지니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전시회를 하기는 힘들었겠단 생각을 하고.

 

자기의 보조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로 전시회를 연 작가는 있었다고 이 책에 나와 있지만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은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물질적, 기술적 한계였으리라.

 

그 반면에 미술은 그렇지 않다. 화가들이 그리면 되는데... 물론 그림 도구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유럽처럼 대작이 나오기는 힘들었겠지만, 종군미술가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그림으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에 미술가들이 참여한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전쟁기간 동안 종군화가로, 군 연예대로, 정훈업무로, 선무공작대로 전쟁을 기록하는 시대의 눈으로 당시를 살아야 했다. 그렇게 제작된 전쟁화 또는 전투화는 약 300여 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우리의 빈곤과 두려움과 무지로 인해 이들 작품은 산실되고 말았다. 아니, 그간 우리가 관심이 없었던 탓에 지금 찾지 못하면서 당시의 그들을 방관자라고 부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354쪽)

 

시대적 상황 때문에 작품이 많이 사라져 전쟁의 비극에 관한 그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작가들도 나름대로 이를 역사에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많은 그림은 아니지만 전쟁 당시 (1950-1953년)에 그려진 그림들이 제법 나와 있다. 그 중에는 도판으로만 확인 가능한 작품도 있다고 하지만 미술가들이 노력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 전쟁 그림에 대해 알아야 할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림은 직접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보다 그림 한 편을 보여주는 편이 빠를 수 있다. 이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쟁 중에 만화가들이 소위 '삐라'라고 하는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했던 것이기도 하다.

 

전쟁을 담은 그림을 보면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전쟁 영웅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다. 전쟁을 겪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전쟁만큼 힘든 상황도 없다. 피난민들, 부상당한 사람들, 폐허가 된 도시를 그린 그림들을 보라.

 

이런 비극을 누가 되풀이 하고 싶겠는가. 그런 이유로도 우리가 겪었던 전쟁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무관심했다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찾으려는 노력, 기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있었는데... 화가들 중에서도 줄이 좋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전쟁 중에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했고, 또 나가기도 했다는 사실... 전쟁 중에도 예술은 지속되어야 하나,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려고만 했던 예술가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씁쓰레했고, 부산 임시청사에 걸려 있었다는 대형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은 '6.25전쟁 기념행사를 위해 1952년 6월 정부의 공보처장 이헌구는 부산시 공관 벽을 장식할 대형작품의 제작을 현역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이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중앙의 '여신'이 장총과 태극기를 들고 전진하며 '민중'은 한국 사람들로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316쪽)고 한다.

 

이런 표절도 버젓이 일어나다니. 그것도 우리나라 현역 화가들이 집단적으로 그린 그림에서. 아무리 전쟁 때라고 해도 그렇지 자신들의 재능과 상상력과 현실을 살펴서 종합적으로 우리나라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런 부끄러운 일도 일어나곤 했다고 하니...

 

그래도 전쟁을 기억하려는 화가들의 작품은 우리가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점, 기억할 점이 많을 테니까. 그 점에 대해서 전쟁 기간을 통틀어 화가들, 조각가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대응했고, 어떤 작품을 남겼으며,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 미술사를 위해서도, 우리 역사를 위해서도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작품들이 발굴되어 이 책이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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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그림이 예쁘다. 예쁘다고 하기 보단 마음이 밝아진다고 해야 더 어울릴 듯하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 이제는 그림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놀 공간이래야 겨우 놀이터라고 변화할 수 없는 고정된 공간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놀 시간이 없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친구 만나기 위해 학원에 간다고 하겠는가. 어린아이 시절부터 정신없이 공부란 놈에게 매여 지내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이 이 책의 표지 그림처럼 이렇게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어느 시인은 어린이를 볼 수 없으면 천사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이러한 천사가 될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지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호에는 육아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있다. 교육을, 배움을 생각하는 책이 바로 "민들레"니 공교육이나 대안교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삶을 살지를 고민하는 글들을 싣는 것도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 기획기사는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다. 육아에 대한 글인데, 부모 혼자, 특히 엄마 혼자 키우는 육아를 독박 육아라고 한다.

 

부담이 많은 육아인 것이고, 그런 부담은 부모를 지치게도 한다. 부모가 지치지 않고 아이가 행복해지는 육아, 정답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들의 글이 이번 호에 실려 있다.

 

아직 아이가 어린 사람들, 이번 호를 읽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육아를 내팽개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제도권에만 맡길 수도 없으며, 혼자만의 육아를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아이를 위하고 또 부모를 위하는 육아를 하고 있는지 참조할 수 있다.

 

이 중에 마음에 와닿았던 육아가 바로 '부엌 육아'다. 아이에게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든지 - 넌 공부만 잘하면 돼 -, 아이가 다칠까봐 두려워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서도 요리 하나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되기 쉬운데 - 학교에서 가정이라는 과목이 있음에도 아이들은 이 시간에 주로 이론을 배우지 요리를 하거나 다른 일을 실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실습할 장소도 시간도 부족한 것이 제도권 교육의 현실이다 - 아주 어려서부터 아이와 함께 부엌에서 일을 하는 '부엌 육아'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그래,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요리를 해야 한다. 그래야 가족이다. 식구다.

 

이런 식으로 육아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고, 요즘 상황과 관련하여 '시민 교육, 정치 교육'에 관한 글도 있어서 교육 전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책 뒷부분에 민들레 읽기 모임도 소개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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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의 역습 -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일리치의 개념을 빌려와 현대인의 일상을 분석하고 있는 책인데,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란 책에서 집안일처럼 임금에 기초한 경제에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했다. (17쪽 참조, 또는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참조)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제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신들의 노동을 기계에 맡기고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이론상 그래야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 여가 시간이 늘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이 책은 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이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니, 이것은 분명이 기계화, 정보화 되었음에도, 아니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더 늘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즉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여기서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전에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예전에는 그 일을 누군가가 임금을 받고 일을 했는데,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 일을 포함하고 있는 일을 기계가 처리하고 (이런 기계 군단을 '키오스크'라고 한다. 무인정보화시스템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김포공항에 갔다가 그 키오스크를 보게 됐다. 당당하게 키오스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기계. 거기에서 직원 없이 직접 항공권을 뽑는 사람들) 그에 따르는, 누구 말로는 부수적인 일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예전에는 주유소에 가면 주유를 해주고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냥 앉아서 카드만 내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셀프 주유소가 많이 생겼다. 셀프 주유소에서는 내가 차에서 내려 직접 주유를 해야 한다.

 

주유를 해주던 사람은 임금을 받고 그 일을 했는데, 이제는 직접 내가 임금을 받지 않고 내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비슷한 예가 바로 지금 이렇게 리뷰를 작성하는 일. 예전에는 서평을 기고가들이 돈을 받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쓴다. 이렇게 시간을 쓰면서도 돈은 받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이런 사례들이 이 책에는 많이 나온다. 매표를 하는 경우도 그렇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먹고 나오는 경우도 그렇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경우도 그렇다. 여기에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의 일은 더 많아졌다.

 

프랑스에서는 업무시간 외에 오는 상사의 이메일에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명시한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하고, 우리나라 역시 이와 비슷한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단다.

 

그만큼 여가 시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사회가 되었는데, 일을 지시하는 일 이외에도 이메일로 오는 수많은 스팸메일들을 확인하고 지우는 시간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노동 시간을 줄여준다는 기계들이 오히려 다른 일을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회적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즉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지닌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돈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상류층도 그림자 노동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그 일을 할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류층은 이런 변화된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 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자신이 온전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가 시간이 늘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노동 시간은 비슷하다고 해도 하지 않았던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 현실이다.

 

알게모르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회색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시간을 많이 확보한다는 환상을 지닌 발달이 오히려 그림자 노동을 더 확산시킨 셈. 회색신사들의 꾀임에 빠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우리는 참 바쁘게 산다.

 

바쁘게 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에 대한 대책은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돈이다'는 명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물어 보라. 왜 공부하니? 대학 가려고요? 왜 대학 가려고 하니? 돈 잘 벌려고요. 왜 돈을 벌려고 하니? 행복하게 잘 살려고요. 그럼 지금 행복하니? 아니요.

 

삶의 목표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결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단인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희생시키고 있는 현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럼 대책이 뭔가? 답은 명확하다. 시간이 중요하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라는 의미다. 돈을 버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즐기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돈을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기계를 확산하는 것보다, 조금 벌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벌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롭고 자유롭게 보낼 시간을 확보하는 것.

 

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너무 빠른 속도의 기계를 거부할 수도 있는 것. 미국에서도 셀프 주유소를 금지하고 있는 주가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이 더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회색신사로부터 그림자 노동의 역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 아닐까.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대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계가 처음 나왔던 시대처럼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을 벌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슬로 라이프라고 천천히 여유롭게 살기 운동을 전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행복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그리고 인터넷 속에, 스마트 폰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시간, 그런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가는 것.

 

조금 더디더라도 일자리를 나누는 것, 기계에 모든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 아마도 인공지능이 모든 직업에 잠식한다면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즐길 수 없는 생계 불능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불편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지니고, 더 즐거운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 그런 느리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대안을 제시 못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대안은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이 시대의 방향을 틀거나 반대로 돌려야 하는데, 그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여가 시간,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문제는 제기해야 한다. 문제를 알아야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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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트런드러셀의 <게으름에대한찬양>에서 주장하는 철학과 일맥상통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17-02-25 18:13   좋아요 1 | URL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란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통하는 면도 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은 빨리빨리 문화나, 또 자동화, 기계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니까요.
 

  시집 전체가 불행으로 꽉 차 있다. 시들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모두 불행이다.

 

  어쩌면 이렇게 징글징글하게 불행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어둠 속에 고통 속에 불행 속에 있을까?

 

  어떤 시를 펼쳐보아도 불행이 나타난다. 마치 피할 수 없다는 듯이. 제목이 좀 밝은 느낌을 줘서 읽어보면 아니다. 제목과 달리 내용은 불행으로 점철된다.

 

  시인을 등단하게 한 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란 시를 보면 시인의 출발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반지하동굴이라면 반지하 생활, 이미 낮은 곳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유적지란 말이 나온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담담하게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시집에는 이렇게 죽음을 당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아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그게 현실이다. 현실, 시인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이게 현실이라고. 아무리 눈 감고 귀 막아도 이런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외치는 시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등단작이 반지하에서 시작하는데 지상으로 올라와도 사람들은 목을 매달고(누가 달에 이불을 널어놓는가), 공중으로 올라가도 떨어져 죽고 만다. (땅속을 나는 새)

 

이 시집에서처럼 불행한 시대에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죽음이 존재한다. 죽고 싶어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바둥대다 죽는 죽음, 결국 사회적 타살이라 할 수 있는 죽음들이 사회 곳곳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들이 이 시집 곳곳에 널려 있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지니고 있는 나라인데, 자살만이 아니라 사고로 죽는 죽음도 많은 이 나라, 시인은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이토록 불행한 사연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시집을 탁 덮지 못하는 이유는 시인의 표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불행하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언어로 표현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한 시인, 다음은 우리의 몫이라고 하는 듯하다. 시인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여줬으니까.

 

이 시집에서 가장 짧은 시를 골라 봤다. 짧은데, 이 짧음 속에서도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제목과 달리.

 

   만찬

 

밥상을 앞에 놓고

빈 그릇처럼 둘러앉은 식구들

한 대접씩 빗물을 퍼먹고 있다

 

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2010년 초판 6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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