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하면 김정희 그림이 떠오른다. 그 그림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허름한 집과 눈 덮인 나무가 나올 뿐.

 

  사람은 나오지 않는데, 그림 속에 사람이 있다. 절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려운 시대를 견뎌내는 사람들.

 

  '세한도'는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과 함께 있는 글이 더 그림의 가치를 높여주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을 대부분은 모른 체하는데, 그때서야 진정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래서 더 빛을 발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한도'에는 있다. 그래서 '세한도'는 절망의 그림이 아니라 희망의 그림이다. 희망이다. 사람에게서 느끼는 희망.

 

세한(歲寒) :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뜻풀이가 되어 있다.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다. 세한은, 세한도는 그런 추위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희망을 느끼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바로 글이다. 글을 통해서 한겨울 심한 추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가를 알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랬으면 좋겠다. 삶에 어찌 굴곡이 없겠는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법. 이게 바로 삶,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삶의 법칙(?)이 깨어져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IMF사태.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 거꾸러졌다. 넘어졌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라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쓰러졌는데,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서로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살아야했기에.

 

그럼에도 따스한 희망의 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사람은 없지만 사람을 찾을 수 있듯이, 이 IMF라는 거대한 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온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시를 보자. 

 

  歲寒圖

     1998년 6월 2일. 비

 

비오는 날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굽은 등허리에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일렬횡대로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다

용산역 앞 광장

담벼락을 앞에 하고 주기도문을 마친 다음

다같이 슬픔으로 따뜻한 국물을 떠서

무료 제공의 한끼 식사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

집을 나온 우리나라의 아버지들

빗속에 나란히 앉아서

추운 겨울 하늘 오선지에 앉은 참새들처럼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오전 열한 시에 땅바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

 

강인한, 황홀한 물살, 창작과비평사, 1999년 초판. 54쪽.

 

얼마나 추운 모습인가. 때는 6월. 더운 여름으로 건너가는 때이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한겨울이다. 그래서 세한도다. 이 추위에 그래도 온기가 느껴지는데... 다시 20년이 되었다. 이때보다 나아졌는가.

 

이때는 아버지들이 이렇게 길바닥으로 쫓겨나 땅바닥에서 밥을 먹었다. 지금은 그 아들들이 길바닥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청년실업이 심각하단다. 아예 직장을 처음부터 얻지 못한 청년들도 많단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기회조차 갖기 못했다. 그렇게 한참 여름으로 접어들어야 할 청년들의 삶이 한겨울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세한'이다. 20년 전에 아버지들이 '세한도'의 인물이었다면, 이제는 그 아들들이 인물이 되고 있다.

 

그래도 '세한도'다. 이런 세한이 반복되고 있어서 슬프지만, 엄연한 한겨울 추위지만, 분명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바로 사람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에게서 희망을 느낀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하는 정치인... 이젠 그 희망을 믿고 함께 가야 한다. 그래야 한겨울을 날 수 있다. 이렇게 '세한도'에는 희망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은 없다. 그러니까 제목은 "바깥은 여름"이지만,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들은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목을 뒷받침하고 있지, 어느 한 편이 대표가 되어 제목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상하다. 한 소설가가 썼으니 공통된 주제가 있겠지만,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소설들이 각자 시간을 두고 다른 문예지에 실렸으니, 이들을 공통된 주제를 상정하고 소설을 썼다고 하기엔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제목이 된 소설이 없으니, 제목과 소설들의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반대로 생각해 본다. "바깥은 여름"이라면 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안은 여름과 상반되는 계절은 겨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바깥은 즉, 겉으로 드러나 있는 생활은 여름이지만, 실제로 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겨울이라는 말이 된다.

 

겨울, 삶의 혹독함.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계절이다. 그 본질에서 이제는 여름을 향해 견뎌내야 하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그렇다.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그만큼 이 소설에 나온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겨울'에 해당한다.

 

모두 힘들다. 첫소설인 '입동'에서는 아이가 죽고, 두번째 소설인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개가 죽고, 세번째 소설인 '건너편'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헤어지게 되고, '침묵의 미래'에서는 사라지는 언어, 그만큼 사라지는 삶이 나오고, '풍경의 쓸모'에서는 교수가 되지 못하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한창인 여름에 접어들지 못하고 있는 강사가 나오고, '가리는 손'에서는 다문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들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한창 때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겨울'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소설인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의 인물인 명지가 앓고 있는 병이지 않나 싶다.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피부병. 피부감기라고도 한다는데, 소설에서만 있는 상상 속의 질병인 줄 알았더니, 검색해 보니 실제로 일어나는 질병이다. 많이들 겪는 질병인가 본데... '주로 몸통에서 사지로 퍼져나가는 반면, 얼굴이나 햇빛 노출 부위, 손발바닥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설명되어 있다.

 

역시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맞다. 이 질병을 통해 소설의 제목을 거꾸로 읽게 됐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들은 이런 질병을 앓고 있어도 잘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소설 속 현석이 명지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게 되듯이, 또한 이 소설집 속의 인물들의 삶 역시 남들에게 그 아픔이, 슬픔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속으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바깥은 여름'인데 '안은 겨울'은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만을 보지 말고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다고.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간결한 문장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무성한 여름을 느낄 수 있는 문체가 아니라 낙엽들이 생기는, 그리고 가지만 남게 되는 가을, 겨울의 문체라고 할 수 있다.

 

빠르게, 간결하게 읽히는 소설이지만,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이런 뼈대들만 보면 안 된다. 그 뼈대들이 추구하는 잎들을 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입동'으로 겨울에 들어섰음으로 시작하지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삶은 겨울이지만 이 겨울이 봄으로, 여름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발표 순으로 소설집을 엮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바깥은 여름'이니 우리 안도 여름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겨울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고.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여름을 꿈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숙한 장소에서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냥 자신도 그 장소를 이루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낯선 장소에 자신을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장소와 다른 자신이 있을테니 말이다.

 

 여행을 통해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여행은 다른 곳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낯선 곳을 우리에게 들여오기도 한다. 바로 우리 장소를 다르게 보기 위해서다. 여행은 이렇게 나를 낯선 곳으로 보내는 일이면서도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데려오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집은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느낀 점을 쓴 일종의 기행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이집트, 몽고, 일본, 우즈베키스탄, 그리스, 이탈리아, 유럽 등등.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들을 시로 쓴 것을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제목도 '낙타의 길'이다. 특급열차, 비행기, 버스가 아니라 낙타다.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빨리 갈 수 없는 낙타.

 

그런 낙타의 길이 편할 수만은 없다. 우리 인생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게 장소와 하나가 되는 여행, 그것이 바로 낙타의 길이다.

 

이 시집에서 이 시, 그람시에 관한 시가 눈에 들어왔다.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 혁명가. 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무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갇혀 감옥 속에서 죽은 사람.

 

헤게모니라는 말과 진지전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 바로 그를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나다. 그를 만난 것이 아니라 소나기를 만난다.

 

 혁명을 생각하며

- 그람시를 위하여

 

이탈리아 크레모나 학회에 가는 길

밀라노에 내려

안토니오 그람시 광장 옆

하필 연변에서 온 동포가 운영하는

하숙집 독도하우스에서 들어

밤을 지새다가, 딩굴며 지새다가

아침 산책을 나선 길에 공원에 들렀는데

소연히 쏟어지는 소나기를 만나

휘몰아치는 소나기 언제나 그렇듯

천둥과 번개 더불어 오는 것

한 사람의 생애가 소나기처럼

혹은 번개처럼 휘몰아 폭발하기 위해서는

저 밑바닥으로부터 몰려오는

구름과 물결이 있어야 하리.

 

그람시여, 그대 기다리던 민중의 소나기는

어느 언덕에 물보라로 밀리고 있느뇨.

 

우한용, 낙타의 길, 태학사. 2012년. 162쪽.

 

그람시가 기다리던 민중의 소나기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죽은 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그의 희망이 이제는 덧없음을 알려주는 지도 모른다.

 

그가 꿈꾸던 사회는 과연 사라졌는가. 아니, 아직 오지 않았다. '밑바닥으로부터 몰려오는' 그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람시가 꿈꾸던 혁명을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이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민중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뤄 정권을 바꾸어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먼저 소나기를 몰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를 생각하며 썼던 이 시를 지금, 우리는, 그람시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다.

 

하여 이 여행시집에서 그람시를 통해 다시 우리를, 나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원택 지음 / 김영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성철 스님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이 떠오른다. 선승으로 유명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철저한 수행으로도 유명한 스님인데, 최근에 법정스님과의 대화를 엮은 '설전(雪戰)'을 읽고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을 들어본 것에 비해서 성철 스님의 글을 읽어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읽을 인연이 되었는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전'도 원택 스님이 엮은 것인데, 이 책 역시 원택 스님이 쓴 것이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다는 분.

 

시봉이라는 말이 모신다는 뜻이니, 성철 스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글들이 실려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원택 스님이 출가를 하게 되는 과정도 나오지만 이 책의 중심은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던 성철 스님의 과거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잣집 큰아들로 태어나 출가를 하기까지의 과정, 결혼을 했음에도 출가를 했고, 그 따님까지도 그리고 부인까지도 출가를 했다는 것, 조계종의 기본을 세운 스님이 바로 성철 스님이라는 것 등등.

 

이런 개인적인 일화말고도 불교에 관한 성철 스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성철 스님의 주장은 '돈오돈수'라는 것. 학교에서 불교 사상에 대해 배울 때 - 국사 시간에 조금이지만 - 지눌의 '돈오점수'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돈오돈수라... 단박에 깨우쳤는데, 무슨 조금씩 조금씩 닦아갈 것이 있겠느냐는 말.

 

그런 깨우침을 위해 정진, 또 정진을 해야 한다는 성철 스님의 말, 수행. 음식 하나에도 최선을 다해 생활한 분이라는 것. 그리고 결코 중들을 위해, 절을 위해 불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중을 위해, 아니 대중이 바로 부처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교가, 스님이, 절이 존재함을 역설한 스님이라는 것.

 

그렇다. 그렇게 큰스님이 된 성철 스님은 도시로 나와 대중 앞에 서기보다는 산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실천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절에 가면 실망을 할 때가 많다. 점점 더 멋져지는 절들, 산 입구에서부터 걸어가는 스님보다는 비싼 차를 타고 가는 스님을 보게 될 때, 과연 절이, 스님들이 도시에 있는 교회들을 닮아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종교는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지 않는가. 성철 스님은 그렇게 불교가 존재하기를 바랬을 텐데, 지금 불교는 어떤가... 조계종은 지금 몇 분파로 나뉘어 서로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불교의 모습인가? 성철 스님이 바라던 불교의 모습이던가. 아닐 것이다. 종단이 권력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불교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철과 같은 스님들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겉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연스레 그 법력이 드러나는 스님들이 여전히 있기에.

 

성철 스님의 이야기... 불교에 대해서, 스님에 대해서 아니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신문에 커다랗게 난 불교 갈등의 광고를 보면서 다시금 성철과 같은 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맑은 기쁨2

                   - 연


가느다란 실로

겨우

내 손에 잡혀 있는 넌

내게서 멀어져 갈수록

네 존재를 더 알릴 수 있는데,

아직 꽉 쥐고

널 잡고 있지만

언젠간 놔줘야 하리

훨~ 훨~

자유롭게

네 세상을 찾아가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7-10-04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04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