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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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가 쓴 작품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책, 소설로는 세 번째.

 

제7일, 무언가 환상 속에 이야기가 펼쳐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중국어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에는 시작하기 전에 성경의 창세기 구절이 쓰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제7일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 그 날은 어떤 날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시작부터 이상하다.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는데, 죽은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분명 괴기스러운 소재인데, 전혀 괴기스럽지 않다.

 

오히려 읽어갈수록 마음이 따스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때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전개와는 다르게, 또 '가랑비 속의 외침'을 읽으며 참 어두운 분위기구나 하는 느낌과 다르게, 이 소설은 죽음 이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따스하다.

 

밝다.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사랑 넘침을 죽음 이후에 무덤 속으로 가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며 사는 사람들,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사람들. 빈의관이라고 쉽게 말하면 화장터에서조차도 권력과 금력에 따라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중국에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자들이 어떻게 떵떵거리고 사는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사회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이것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빈의관에서 귀빈석과 평민석이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것, 그들이 쓰는 화장로도 다르다는 것 정도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보다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건사고를 감추는 모습이야 어느 권력이고 비슷하다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런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소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주인공은 양페이와 그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 아니 더 가난한 사람들이다.

 

위화 소설이 지닌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의 비극이 무겁고 칙칙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이들은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긍정한다.

 

무덤조차 마련하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죽을 때가 되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철로에서 주워 키워준 아버지 양진바오, 그리고 자신을 떠난 여인 리칭, 가난한 셋집에 살던 우차오와 류메이, 아버지의 친구로 양페이를 돌봐준 리웨전 아줌마 등등.

 

모두가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죽어서도 서로를 위하며 지내는 사람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또 관료의 책임회피로 자신의 유골이 아닌 다른 유골을 매장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 그들이 모여 지내는 곳.

 

마지막으로 류메이가 무덤으로 떠나갈 때 들어온 우차오는 양페이와 함께 이곳에 간다. 양페이가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를 찾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이 바로 '제7일'이다. 양페이가 이제는 편히 쉴 곳.

 

양페이가 의혹에 차 있는 우차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314쪽)

 

이렇게 제7일은 끝난다.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쉼터인 무덤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산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에서 사람에게는 한 평의 땅, 죽어서 묻힐 그 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한 평의 땅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화장한 유골을 넣고 보관한 0.1평정도의 땅도 허용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죽음 이후에도 이들이 불행하게만 살아서는 될까. 아니다. 위화는 소설을 통해서 이 사랑이 넘치는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야 한다고, 죽음 뒤에도 불평등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죽은 사람인 양페이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렇게... 정말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조차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죽어서 서로를 위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통해 '제7일'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제7일'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삶에서 그런 '제7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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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세밑 닭과 개의 대화

     - 정유(丁酉)년이 가고 무술(戊戌)년이 오니


민주주의 새벽을 깨운 올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깨어있으라고

우리는 목청껏 울었다네

우리의 울음으로

시민들은 잠을 깨

세상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걸음을 걷고 있다네

이젠 자네 차롈세

이들의 걸음을 막는 세력을

자네가 막아주고

이들과 함께 가기를


늘 사람과 함께 하며

사람을 지켜 주는 안내견처럼

나는 민주주의를 충실히

안내하겠네

누군가 침입하면

컹컹 경고하며

자네가 깨운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도록

나는

충직한 문지기

충직한 안내자로

풍요로운 다산의 사회를

만들고, 넘겨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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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괴로움. 어쩌면 시를 읽으며 세상을 해체한다는 것에 대해, 해체된 세상을 다시 재구성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확하지 않은 시, 시인의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찢겨버린 시들을 읽을 때는 편안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이 갈가리 찢겨져 있는데, 어찌 시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런 시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요,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이 이런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바로 현 시대 상황이 아니겠는가.

 

최치언의 시를 읽으며 참 많이도 해체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온전하지 않다. 세상은 단순하지도 않다. 세상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혼돈, 카오스. 그러나 카오스에서도 질서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다. 아니 우리 인간들이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을텐데, 이 어둠에서도 말은 있었다.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혼돈이라도, 암흑이라도, 갈가리 찢긴 세상이라도 말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재구성된다. 재탄생된다.

 

이런 재탄생의 주인공, 그가 바로 시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시집의 제목과, 그 제목이 된 이 시집의 첫번째 시를 읽으며 이렇게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이념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결국 그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시를 보자.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선물한다.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2쇄.  10-12쪽.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맹목의 상태. 이것은 이념의 늪에 빠진 사람의 상태다. 이런 맹목의 상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세상은 다양함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함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어거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려 하는 것, 이것은 곧 죽음이다.

 

좌측이 준 선물이 죽음이라면, 우측이 준 선물 역시 죽음이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해야만 삶으로 갈 수가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시.

 

툭하면 종북, 종북하는 이 나라는 우측이 준 선물이 너무도 가혹하다. 그러나 좌측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상대의 소멸을 바란다. 상대와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도, 눈도 없어야 한다.

 

오로지 자신들의 말만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이 시집의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피를 요구하는 선물은 거부해야 한다로...  시가 발표된 지 꽤 됐을텐데...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이 시에서처럼 어쩌면 피를 요구하는 선물이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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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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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화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소설로는 두 번째 읽은 책.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장면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고, 또 위화의 그 책에 나온 자신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소설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그 아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집안일과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자신들의 성장과정.

 

중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어찌보면 한 손씨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해준다고 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중국판 '삼대', '태평천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삼대'나 '태평천하'에서는 할아버지 세대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게 되고, 아버지 대에서 흥청망청 돈을 물쓰듯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도 쫄딱 망해버리는 상태로 나온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아버지 세대는 좌절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소설인데, 위화의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무지랑이에 해당한다는 것이 다르고...

 

그러나 아들 세대는 역시 배우고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대의 맨 마지막 세대의 눈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점에서는 위화의 이 소설이나 우리나라 '삼대, 태평천하'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위화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들 세대는 우리나라 아들 세대보다 더 세속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다르다.

 

이 소설은 이처럼 할아버지 손유원, 아버지 손광재, 그리고 그의 아들 셋 손광평, 손광림, 손광명의 이야기에 덧붙여 소설의 서술자인 손광림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본능에 충실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민초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가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을 끊지는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살이가 이토록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살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온갖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손광평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어쩌지는 못하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 도시로 갈 때 배웅해 주는 모습이라든지, 첫째 형을 닮았지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손광명이라든지... (그것이 비록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을지라도)

 

여기에 주인공의 친구들, 이들 역시 버림받거나 가난에 찌들어 살게 되는데... 그런 시대를 중국이 거쳐왔다는 것.

 

이 소설에도 도회지에 대한 부러움이 드러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창 개발이 될 때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듯이, 중국 역시 도시로, 도시로를 외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 위화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를 소설로 형상화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거쳐왔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그 시절을 잊지않도록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미 변해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시절이 지금의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소설. 이것이 위화의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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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114호를 읽으면서 갑자기 몇 주 전의 장면이 생각났다. 포항 지진으로 인해 수능이 연기된 날.

 

  수능 전날 자신들이 공부하던 참고서, 문제집들을 모두 버렸던 수험생들... 그러나 시험이 연기되자 부랴부랴 다시 자신의 문제집을 찾으러 가야만 했던 수험생들.

 

  하지만 책들의 산더미 속에서 자신의 문제집을 찾는 일은 한강 모래밭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격.

 

  결국 다른 학생의 문제집, 참고서를 들고 온 수험생들이 많았다는 후문.

 

한데... 수능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중요하지만, 그 수능으로 인해 버려지는 수많은 책들, 그 책들을 이루는 종이들에 대해서, 그런 소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언제든가 학교에서 교과서 물려주기 운동을 한답시고, 쓴 사람의 이름을 적게 한 적이 있었는데... 교과서를 후배들이 물려받은 적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은 거의 없다. 아주 적게... 극소수의 학교에서 이루어졌다는 얘기는 들은 기억이 있지만...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들의 종이질을 본 적이 있는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 책들이 고급스런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재생용지로 만들어도 충분한 교과서를 이상하게 화려하게 만들어야만 채택이 된다는 식으로, 겉으로 번지르하게 만들고 있으니...

 

수많은 나무들이 목숨을 바쳐 학생들의 공부를 돕지만,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 뿐. 책들은, 예전에 그렇게도 귀했던 책들은, 돌려보고 돌려보고, 베껴쓰곤 했던 그 책들은 이제는 너무도 흔한 소비물품이 되어 쓰레기가 되든지 재활용 공장으로 보내지든지 한다는 사실.

 

이번호 특집이 '윤리적 소비'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쳐온 학교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지 않은지...

 

이미 비윤리적 소비를 생활에서 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소비란 바로 생활 아니던가. 그런데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조차 윤리적 소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윤리적 소비에 관한 책을 소비한다면... 이 엄청난 배움과 실천의 괴리, 앎과 실천의 괴리, 글과 생활의 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윤리적 소비'에 관한 글들을 읽으며 마음이 뜨끔했다. 나 역시 윤리적 소비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를 양산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가능하면 조금 덜 쓰자고 하지만, 여전히 많이 쓰고 있는 형편이고, 생산은 없고 소비만 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 이런 내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 윤리적 소비 운운하는 것도 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뜨끔' 하니, 무엇을 소비할 때 한번 더 생각하는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  

 

'민들레'를 청소년들이 읽었으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른'이다. 반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 그러므로 민들레를 읽는 독자들은 이 윤리적 소비를 주제로 다룬 글을 읽으며 '뜨끔'하겠지만 정작 뜨끔해야 할 사람들은...

 

농축산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농축산물에 관해서는 상한가를 10만으로 올린다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결정... 이것과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면 과연 이 방침이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소비 생활'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니... 한번에 흐름을 바꿀 수 없겠지만, 이런 소비의 풍토에 작은 저항이라도 할 수 있는 이 민들레를 뿌려봄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이런 '윤리적 소비'에 관한 글도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짠한 글은 농아인 대안학교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란 글이었다.

 

왜 농아인들에게 우리와 같은 말을 하도록 강요를 하는가? 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인 수화가 있는데... 오히려 그들이 자유롭게 수화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고, 일반인들도 수화를 배워 함께 대화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대화 방식을 인정하고, 일반인들이 음성언어로 이야기를 하듯이 그들 역시 수화로 대화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글...

 

지나치게 일반인으로 표준화된 대화 방식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그들을 위해 인공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대화 방식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글이었으니.

 

다양함,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그것이 바로 민들레의 표어인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하는 그런 사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본질을 잊고 되는 대로 살아온 삶을 반성하게 하는 민들레다. 이번 호를 읽으며 많이 '뜨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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