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오드리 로드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상당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낸 시를 쓰기도 했다고 했는데, 마침 시집이 번역이 되었으니 읽어봐야지.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겪은 일들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물론 번역이 된 시라서 영어로 어떤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오드리 로드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다.


  유니콘 하면 뿔 달린 말이다. 주로 하얀 식의 말을 떠올린다. 왜일까? 그만큼 백인 신화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주무르던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니콘 하면 하얀 색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진 백인들은 처음에 흑인이나 인디오들이 인간인지 아닌지 가지고도 자기들끼리 논쟁을 했다고 하니, 그것도 모자라 자연사박물관에 그런 사람들을 전시까지 했다고 하니, 그들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 신화들이 지금도 사람들 무의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고정관념에 틈을 낸 사람이 오드리 로드다. 유니콘을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왜 상상 속 동물인 유니콘이 꼭 하얀색이어야 할까? 유니콘 역시 다양한 색깔을 지닌 말로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인정받는 세상, 이것이 바로 오드리 로드가 꿈꾸었던 세상 아닌가 한다. 


'초상'(90쪽)이란 시에서 오드리 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강인한 여성들은 / 자신의 증오가 / 어떤 맛인지 안다 / 나는 언제까지나 / 바람 부는 곳에 / 둥지를 지어야 하겠지' ('초상' 중에서)


피해가지 않는다.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나아가려는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여성이 말한다'(24-25쪽)에서는 '나는 여성이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 내 미소를 조심하라 / 나는 오래된 마법과 / 정오의 새로운 분노 / 당신에게 약속된 / 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 / 나는 / 여성이고 / 백인이 아니다.'('여성이 말한다/ 중에서)라고 하면서 자신이 여성임을 백인이 아님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더라도 그것이 오드리 로드가 나아갈 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1부에서는 흑인 신화에서 언급되는 여신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백인의 세계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갇혀 있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전승되어온 신화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신화를 신화로만 삼지 않고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 나오게 하고 있다.


당당하게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가려는 존재,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덧글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이 있다. 93쪽에 실린 시 '앨빈 형제'(93쪽)에서 '우린 함께 브라우니에서 나올 수 있었어'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번역자 주에 브라우니(Brownies) : 초콜릿 케이크, 7-10세 또는 11세까지의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스카우트단 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드리 로드의 자서전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미]를 읽어보면, 52-56쪽 정도에 앨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이 시에서 말하는 브라우니는 학급에서 우수 모둠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속한 모둠을 말하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는 앨빈이 숫자를 읽을 수 있는 덕분에, 자신이 글을 읽는다는 능력과 합심하여 둘이 브라우니 모둠에서 페어리 모둠으로 옮겨가게 된 이야기를 이 부분에서 하고 있다. 그러니 스카우트 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수준별로 구성했던 모둠, 그것도 보통 또는 열등하다고 인정한 아이들이 속한 모둠이 '브라우니'다. 이렇게 주를 달아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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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동물의 탄생 - 동물 통제와 낙인의 정치학
베서니 브룩셔 지음, 김명남 옮김 / 북트리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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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로 시작하자. 이 중에서 유해동물이라고 낙인 찍히지 않은 동물은?

(쥐, 뱀, 생쥐, 비둘기, 코끼리, 고양이, 코요테, 참새, 사슴, 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쥐와 뱀은 망설이지 않고 유해동물로 꼽을 것이다. 그런데 사슴은? 우리나라에서 가끔 고라니가 출몰해서 밭작물을 먹어치우는 일들이 있으니, 고라니와 비슷한 사슴도 유해동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도시에서 엄청난 배설물을 낙하시키는 비둘기도? 생쥐는 쥐와 구분하지 않을 테니, 유해동물이고...참새? 예전에 곡물을 먹어치운다고 박멸해야 할 새로 규정한 적도 있으니 당연히 유해동물? 고양이? 길고양이, 들고양이를 유해동물로 볼 수 있나? 누구는 유해동물로 보고, 누구는 먹이를 주어야 하는 귀여운 동물로 보고 있으니,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코끼리는?


다양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유해동물에 대한 기준이 뭐지? 하는 질문도 있을 수 있고.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동물을 유해동물로 본다면, 이 정의에서 벗어나는 동물이 있을까?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말에는 시간과 장소가 개입한다.


즉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동물들은 절대로 유해동물이 될 수 없다. 그냥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동물들 역시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 단, 시간과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


이러한 동물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오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어떤 동물은 유해동물이 된다. 아니, 대부분의 동물이 유해동물이 된다. 인간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여겨지는 끼어듦이 아니라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끼어듦. 


이러한 불편한 끼어듦을 느끼게 하는 동물은 유해동물이 된다.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반달곰은 절대로 유해동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캠핑장에 들어와 인간을 위협하는 곰은 유해동물이 될 수도 있다.


산에서 사는 고라니는 우리에게 자연을 즐기게 해준다. 하지만 밭작물을 해치는 고라니는 유해동물이 된다. 어떤 사람은 뱀을 반려동물로 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뱀을 보기만 하면 피하거나 죽이려 들기도 한다.


결국 유해동물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다. '거리'의 문제다. 이런 '거리'는 사람들끼리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지나치게 가까워도 우리는 피곤함을 느낀다. 피곤함이 불편함이 되면 상대에게 불만을 품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같은 사람들끼리도 그런데 동물들이야... 앞에 언급한 열 종류의 동물은 이 책에서 유해동물로 취급받았던 적이 있었던 동물들이다. 그런 동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인위적으로 환경을 바꾼 인간에게 책임을 묻기는 쉽지만, 진화론을 생각하면 동물들은 언제든 어떻게든 우리의 예측과는 다르게 진화할 수가 있다. 그들의 서식지도 한 군데로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당연히 '공존'이다.


이 '공존'이 마냥 평화롭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온갖 동물들이 평화롭게 함께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누군가의 삶이 유지된다. 그것이 자연이다. 그러니 '공존'에서 삶과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공존'이 최소한의 피해가 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만 하고, 지구가 오롯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다른 존재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인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공존'이다.


때로 인간의 것을 그러한 '자연'에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하고... 인간이 아무 것도 '자연'에 돌려주지 않고 자기 것만을 지니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공존'이 아니니까.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러한 관점을 지니게 된다. 다양한 동물들의 사례를 통해, 또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나 이외의 존재를 쉽게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동물들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고로 이 책에서는 앞에 언급한 동물들을 모두 유해동물로 여기는 지역,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존'에는 적당한 '거리'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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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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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도 한다. 관계를 통해서 삶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말. 이 관계라는 말에는 상대를 생각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내 말과 행동에 늘 상대를 끌어와야 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남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학교에 다니면 다녀야 하고, 일하면 일해야 하고, 결혼하면 결혼해야 하며,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런 생활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을 하는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이라고 하면 지녀야 하는 생활과 감정들.


이런 관계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기를 쓰고 그런 사람을 밀어내려 한다.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범주에서 제외시킨다. 그런 존재를 배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들이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의 삶을 어떨까? 과연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이 소설 [편의점 인간]은 그러한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도무지 남의 감정을 읽을 줄 모르는 인물 후루쿠라(게이코)는 보통의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어린시절부터 학창시절까지 자신의 행동이 왜 남들에게 문제가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남들 눈에 띠지 않으려 한다.


최대한 남에게 맞추려는 행동을 하고, 편의점이 생겼을 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꽉 짜여진 매뉴얼대로 하는 편의점을 편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개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간섭을 하려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대로만 하면 되는 일.


다른 일을 찾지 않고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보낸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도 안 쓴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다른 삶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그것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후루쿠라.


나중에 다시 편의점에 들렀을 때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편의점이 운영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신은 편의점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편의점 인간. 어쩌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언가 같은 범주로 묶여야만 안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서 벗어난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남의 삶에 끊임없이 들어와 간섭하는 사람들. 그것이 옳은 일인 양, 당연한 일인 양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다른 삶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사는 삶에 특정한 틀만이 있지는 않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 현대 사회. 같은 방향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주위를 둘러보기도 또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지도 못하게 하는 현대인의 삶.


편의점 인간은 그러한 삶에서 다른 인간을 배제하고 있다. 자신이 할 일을 그냥 할 뿐이고,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한때 루저라고, 밑바닥 인생이라고, 패배자라고 하는 그러한 삶이 과연 패배자의 삶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정규직이 아니라고, 또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남들과 같이 사귀고 회식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잘못된 삶일까? 아니라는 것. 


남들 눈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아 보이는 삶 속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있음을 소설은 주인공은 후루쿠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삶이 있음을, 그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굳이 자신들의 삶의 범주 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 경쾌한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우선 이 소설은 재밌다. 그냥 죽 읽힌다. 아주 빠른 시간에 읽을 수 있다. 어찌보면 패배자라 할 수 있는 후루쿠라의 삶을 안타까워 하면서 읽지 않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후루쿠라의 삶이 패배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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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4-18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이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kinye91 2025-04-19 08:35   좋아요 1 | URL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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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영국에서 주는 유명한 문학상을 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작품조차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을 읽힐 수 있느냐고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운동을 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될 수 있을까?


있겠다. 왜냐하면 읽히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또 대부분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도, 제대로 읽지도 않으니까. (다 그렇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오드리 로드의 책은 꽤 번역이 되어 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블랙 유니콘]. 그리고 [자미]. 물론 오드리 로드에 대한 평전도 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평등을 향한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담은 책이기에 도서관에 소장하는 것을 별로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반대하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성소수자에 대한 불평등을 대놓고 자행할 수 없는 시대니까.


하지만 성소수자로 자라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자미]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직도 성소수자 이야기가 전기로 나오면 그것을 읽는 학생들이 성소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지만 이 책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전기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서 '자전신화'라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과 신화를 합친 말. 그렇다. 이 책이 쓰인 때가 1980년대 미국이지만 미국에서도 과연 이때 성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러한 불평등, 어려움을 겪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제는 성인이 된 흑인이자 여성이고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성소수자인 오드리 로드의 성장기는 거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기 전에 스러져 간 사람이 많으니까. 잊힌 사람도 있고, 스스로 물러난 사람도 있으니, 이 책에서도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한 친구 제너비브(제니)의 이야기도 있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화'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그러한 말이 생각나듯이, 오드리 로드는 살아남아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니,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으니, '위인전' 읽히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 오드리 로드의 이 이야기는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 (사실 읽은 책이 [시스터 아웃사이더]밖에는 없지만)과는 다르게 20대까지 삶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즉 운동가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러한 운동가가 되는 오드리 로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일들, 흑인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온갖 차별들, 여기에 흑인여성 레즈비언으로 겪게 되는 더 많은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오드리 로드가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일, 감정, 사랑 등이 펼쳐진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오드리 로드를 만날 수 있으며, 그가 경험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랑으로 오드리 로드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불평등을, 불합리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들에게만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는 레즈비언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드리 로드가 그러한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고, 성소수자들이라면 대다수가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성에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말고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고 그렇고.


이 책 제목이 된 '자미'는 캐리아쿠 말로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여자들로부터 받은 삶들이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전사'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떤 책을 두고 도서관에 있을 만하다 아니다는 논쟁도 할 필요가 없어야겠고.


20대 초반까지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먼저 읽고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이 책에서 오드리 로드가 깨달아가는 것들이 어떻게 주장으로 발현되고, 사회를 바꾸는 '전사'로서 하는 주장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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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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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가 있다. 깊은 뜻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재미있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두 편 읽었지만, 비록 번역으로 읽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결코 길지 않은 문장들. 그리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어떤 빛이 비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단편이지만 더 짧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그런데도 내용은 무거운 소설이 많다. 특히 첫 작품인 '작별 선물'은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런 인간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인물도 등장한다.


자식들을 자기 노예처럼 부리는 아빠. 성적 희롱까지 하는 아빠. 그럼에도 한 소리도 하지 못하는 엄마. 집을 떠나는 자식을 끝까지 희롱하려는 아빠. 참, 현대의 도덕으로는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덤덤하게 그려낸다. 이 덤덤함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딸은 집을 벗어나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두 소설에 비해서는 좀 어둡다. 두 소설은 어둠보다는 빛이 더 강했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빛보다는 어둠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빛을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요소들이 있으니...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실은 결코 빛으로만 차 있지 않으니.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은 남성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어긋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꾸 어긋나는 관계를 소설은 보여준다. 사실, 어긋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남을 중심에 놓고, 남과 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남을 자신에게 끌어오려고만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찌 어긋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런 관계를 어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어둠도 있지만 빛이 더 강하다. 당연히 어긋남이 있지만 이 어긋남은 어둠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빛 쪽으로 향하는 어긋남이다. 빛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둠과 어긋나야 한다. 그 어긋남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 '작별 선물, 퀴큰 나무 숲의 밤'이 그렇다.


특히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옭아매던 남자(신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설화를 차용해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여성이 삶의 주체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에 남성은 보조자로서 등장한다. 첫번째 남성과 두번째 남성 모두 여성과 어긋나지만, 첫번째는 여성에게 어둠으로, 두번째는 빛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처럼 빛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완전한 빛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짧은 소설들을 엮은 이 소설집에 주로 나타나는 관계가 '어긋남'이지만,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빛'이 보이게 하고 있으니, 우리 삶에도 수많은 어긋남과 어둠이 있을 테지만, 그러한 삶에도 빛이 있음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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