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서 49호까지 시집을 낸 다음 50호는 그 동안을 기념하여 시인들이 각자 자신의 한 편씩을 뽑고 그에 대해 쓴 글을 모아놓은 자선 시집이다.

 

 49편의 시를 읽는 재미도 있고, 시인들이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엿볼 수 있어서도 좋다.

 

  시에 대한 시인들의 처절한 마음. 어쩌면 시는 시인 내부에도 존재하지만 시인 바깥에도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조각가가 바위에서 어떤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끄집어내듯이 시인 역시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시를 자신 바깥에서 발견하고는 언어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는 시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 시를 발견하기 위해 시인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는가.

 

가령 김병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에는 못 한, 못 할 말들이 화강암을 이루는 얼룩으로 박혀 있었다. (96쪽)

 

단단한 화강암에서 시를 찾아서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남다른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대송 시인은 '시를 쓴다는 일이 자기 살을 물어뜯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저 난감한 일' (129쪽)이라고 했다.

 

또한 박연준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말을 하고 있다.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144쪽)

 

이렇게 시에 대한 다양한 말, 시인들이 시를 대하는 자세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이런 점보다 우선 다양한 시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지만.

 

첫시집 최승호 시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49호는 박태일 시인이다. 이렇게 49명의 시인들이 각자 자신의 시를 뽑아 우리를 시세계로 안내해 준다.

 

최승호 시인의 시를 보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은 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덩어리, 그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또 시상(詩想)에 잠긴다.

 

문학동네 시인선 050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 문학동네. 2014년 초판. 14쪽.

 

시는 시인이 언어로 표현한 순간 태어났다고 할 수 없다. 시가 태어나는 순간은 독자를 만나 독자의 마음 속에 들어박힐 때이다. 그렇게 독자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시가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태어나기 전에는 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덩어리'다. 시인에 의해, 독자에 의해 무언가로 태어나게 된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우리에게 영원한 귓속말을 속삭이게 된다.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귀, 속삭임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있는 마음. 그런 것이 필요할 때다. 이 시집에서 속삭이는 49편의 울림, 즐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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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5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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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5 1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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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 - 당연할 수 없는 우리들의 페미니즘
김양지영.김홍미리 지음 / 한권의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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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논란이 되고 있다. 성체 훼손부터 시작해서, 음란표현이라는 말도 나오고... 도대체 페미니즘이 뭐라고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는지.

 

굳건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도 강한 벽에 균열을 내고, 그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망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망치는 그 벽을 부술 때까지만 써야 한다. 벽이 부숴지기 시작했는데도 계속 쓰면 그때부터 망치는 흉기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평등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게 평가한다. 아직도 여성이 수많은 차별을 받는다는 사람이 있고, 웬만큼 나아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엉뚱하게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높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페미니즘이란 망치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남성보다는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동등한 능력(과연 그런 능력을 동등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을 지니고 있어도 여성은 남성보다 더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이라는 말이 문제가 있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가정에서도 남성보다는 더 많은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불평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불평등이 지금도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데... 여성에만 국한되어 운동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소수를 위해 함께 일하는 운동이다.

 

여성만이 아니라 성소수자, 외국에서 온 이주민 등등이 모두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은 그렇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남녀, 또는 다양한 성을 막론하고 누구나 주장해야 하는 운동이다. 특정한 소수만이 추구하는 운동이 페미니즘이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남성이 빠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페미니즘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한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남녀의 행동 차이, 특히 예전에 여성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남성이 힘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 무슨 로맨틱.. 그건 그냥 성추행일 뿐인데... 성추행이 미화되던 드라마, 그 드라마를 보고 자란 남성들, 그래서 몇몇 남성들은 여자들의 노는 예스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그런 잘못을 잡아가기 위해 조금 더 강하게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있다. 그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목도 받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대동소이(大同小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차이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많은 부분에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점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남녀나 또는 다른 많은 성들이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 세상이 바로 화이부동의 세계다. 조화를 이루지만 결코 같아지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 그게 바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사회 아닐까.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 페미니즘이 그런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대동소이, 화이부동'의 세계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참 쉽게 쓰였다. 읽기에도 편하고 내용도 잘 들어온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도 많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도 해주었고.

 

꽤 오래 전에 보았던 무표정한 남녀의 사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갖기도 했고... 그럼에도 책 후반부에 각 딸과 아들을 낳은 페미니스트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게 되는 일을 읽으며 '대동소이, 화이부동'의 세계는 몇몇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힘들다는 것.

 

사회가 전체적으로 변하도록 제도를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 육아 휴직제도부터 군대 문제, 그리고 학교 교육 및 직장 문화까지 심지어는 정치제도까지 바꾸지 않으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여전히 강한 벽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페미니즘이 강하게 우리 사회를 강타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다. 여전히 페미니즘은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드리워져 있는 벽이 강하다. 그 강한 벽에 이제 겨우 금을 내고 있을 뿐이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덧글

 

약간 의문.

 

19쪽.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나무꾼은 아이 셋을 낳은 후'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은 아이 둘을 낳자 감춘 옷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이 점은 고쳐야 할 듯

 

191쪽. 안녕(晏寧), 안식(晏息)에서 한자 晏자를 썼는데 이 安 자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고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고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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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날.

 

  도대체... 도덕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용서하지 못한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고 해도 끝까지 부인하고, 부인하다 안 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인간들이 널려 있는 정치판에서, 도덕성이 강한 정치인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쉽게 생각했던 일이 자신을 벼랑으로 몰라가는 경우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더한 일을 하는 인간들은 살아남고, 세상을 조금이라고 좋은 쪽으로 움직여 보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묻은 티끌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 세상을 떠난다.

 

노회찬 의원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왜 이리 서글픈 생각이 든 것인지...

최인훈 작가가 쓴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가 떠올랐으니...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강고한 현실을 이기지 못한 환경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기 장수.

 

우리 세상을 바꾸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노회찬 의원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다니...

 

좋은 사람은 떠나고 안 좋은 인간들은 남아 있는 현실. 똥 묻은 개들은 득시글한 현실에서,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스스로를 심판한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빈다.

 

저 세상에서도 이 땅 민주주의가 발전하도록 지켜볼 것이라 믿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만큼이나 내게 다가온 죽음이 있다. 최인훈 작가의 죽음. 그래, 최인훈 작가 하면 참 오래 전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오늘 돌아가셨다고 한다.

 

  1960년에 나온 '광장'으로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섰으니 말이다. 단지 광장뿐이겠는가. '가면고'는 어떤가. 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는...

 

일제시대가 오래 되어 조국을 생각하지 못하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태풍'은... 우리나라 현실을 박태원 소설에 빗대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그리고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는 또 어떤가.

 

소설에서 희곡으로 넘어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는 아기 장수 전설을 극화해서 우리 민족의 수난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화두'까지... 최인훈 작품을 빠짐없이 찾아 읽으면서 그에게 중독되다시피 했었는데...

 

이제 그는 떠났다. 작품만 남기고. 그 작품들을 통해 계속 내 맘에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최인훈 작가도 하늘에서 잘 쉬시기를...

 

노회찬 의원과 최인훈 작가, 이제는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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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3 1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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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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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이 무엇일까? 소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과연 여기에 대한 답이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 관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제목이 '커튼'이다. 커튼이 무엇인가? 가리는 것이다. 가리는데 뒤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커튼은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커튼을 들추었을 때 나타나는 것, 그것은 다른 세상일 것이다. 그런 다른 세상을 다 보여주지 않고 커튼으로 가리면서 그 세계를 탐구하도록 하는 것.

 

그렇다면 소설은 바로 이것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그 있는 것을 살짝 가리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들춰보라고. 들춰서 뒤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그렇다. 커튼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우리의 삶. 그런 삶에 대해서 모두 아는 사람은 없다. 삶은 미지의 세계이고, 늘 변하는 세계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리 만들어져 있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소설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정류장이다.

 

정류장에 내릴 수도 있고, 잠시 머물다 떠날 수도 있다. 그만큼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정류장을 제공해주고 있다. 종점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지...

 

그 정류장에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다만, 쿤데라가 체코인이지만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이나 작가들이 거의 유럽의 작가들과 작품들이다.

 

그런 문화에 친숙하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카프카에 대해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커튼은 마냥 가리기만 해서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다. 커튼은 분명 뒤에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커튼을 젖히도록 해야만 한다. 젖혀지지 않는 커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커튼을 젖힐 수 있도록 하는 것, 소설은 바로 이런 커튼 역할을 한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또는 가려져 있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일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영속적인 소설을 통해서 자기 삶을 발견해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이 하는 역할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쿤데라는 커튼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 우리 앞에 커튼이 있다. 그 커튼 뒤에 무엇이 있을까? 한번 커튼을 젖혀보고 싶지 않은가.

 

커튼을 젖혀보도록 한다면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우리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 그 균열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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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구 하면 소설을 떠올린다. 그가 쓴 소설 "우리 동네", "관촌수필"은 우리나라 대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말을 그토록 잘 구사한 소설가를 만날까 싶기도 한 소설가이기도 했고.

 

  젊은 시절 이문구 소설을 읽다가 절망을 한 적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낱말들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하는 절망감. 한쪽 한쪽 넘길 때마다 모르는 낱말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대충 문맥으로 의미를 넘겨 짚으며 읽긴 했지만, 일일히 사전을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가 구사하는 우리말에 놀란 것이 하나라면 이문구가 김동리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보수적 문인을 스승으로 섬기면서도 민주화 운동에는 빠지지 않았다는 것.

 

인간적 의리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한 사람이었다는 것. 또 그가 쓴 "문인기행"을 읽고 참으로 많은 문인들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게 되어서 좋아했던 작가였는데... 그가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모르고 지냈다. 역시 견문이 좁다. 이문구 작품을 많이 읽었으면서도 그의 동시집을 알지도 못했고, 읽지도 못했다는 것이.

 

"개구장이 산복이"라는 동시집을 냈단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동시로 썼다고 한다. 자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경험한 것, 느낀 것을 동시로 썼다는 것인데... 그 후, 손자 손녀를 위해 또 동시를 썼다고 한다.

 

[개구장이 산복이]는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쓴 것이고, 그래서 손자 손녀를 키우게 되면 그 때 가서 다시 동시를 쓴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미리 60여 편의 동시를 썼다는 대답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손자 손녀들한테 이런 얘기만은 꼭 들려주고 싶어서," 그는 동시를 쓴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 118쪽. 신경림, 이문구 유고 동시집 출간에 부쳐에서)

 

이 동시집을 읽다보면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들에게 그동안 지내온 삶, 자신이 겪었던 문화를 들려준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뒤에 나온 신경림의 글을 보니,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대 간 단절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특히 너무도 변한 우리 사회에서 문화 단절이 심한데, 이문구는 그런 간극을 메우는 작업을 하고 싶었으리라. 자신의 손자-손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이 살아온 삶을 알려주고 싶었으리라.

 

그런 소망이 동시를 통해 나타났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단순히 아이들 취향에 맞춘 동시도, 아이들에게 맞춰 말을 아름답게 하려고 꾸민 동시들도 아니다. 그냥 덤덤하게 살아온 이야기, 어른들이 겪어온 어린 시절, 겪었던 문화를 들려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억지로 맞추려고 한 동시에 비해서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어른들이 읽었을 때 '아하, 그랬었지' 하는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다. 가족 간에 대화할 시간도 많이 부족한 현대에, 지금 부모들 역시 근대화, 산업화가 된 사회에서 살아, 지금과는 무척 다른 과거 일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기가 힘들다.

 

그렇게 이제는 먼, 아이들에게는 무슨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1970년대까지의 어린이들이 지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지낸 어린이들의 삶은 너무도 멀리 있다.

 

이 멀리 있는 것들을 지금 어린이들 앞으로 끌어온 것이 바로 이문구의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다. 어른인 내가 읽으면 너무도 아름답고, 그리움을 자아내는 시들로 넘쳐나는데...

 

아이들 역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동시들이다. 굳이 동시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시라고 해도 된다. 아이들은 이런 시를 읽으며 과거를 현재로 불러올 수 있다. 자신들 할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할 수 있다.

 

세대 간에 다리를 놓는 일, 그것이 이문구 동시집이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더 굳히게 됐는데... '콩쥐팥쥐'란 시다. 아마 요즘 애들도 다 아는 이야기 하니던가.

 

 콩쥐팥쥐

 

어렸을 때는

콩밥보다 팥밥이 좋고

콩고물이나 콩죽보다

팥고물과 팥죽이 맛있어서

여름엔 콩국수보다

팥빙수가 더 시원해서

팥쥐 아닌 콩쥐가

어질고 착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데,

자란 뒤에는

두부랑 콩나물이랑

비지찌개 청국장찌개

콩으로 쑨 메주가

간장 된장이 된다고

어질고 착했던 게

팥쥐 아닌 콩쥐여서

마음이 풀렸어요.

 

이문구,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 창비. 2009년 초판 8쇄. 87쪽.

 

아이였을 때와 어른이 되었을 때 이렇게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 전래동화와 연결지어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 시를 읽은 아이들, 다시 콩과 팥에 대해, 콩쥐와 팥쥐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까 한다.

 

또 다른 시 한 편... 이렇게 깊게 들어가는 동시를 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 정말 연륜이 묻어나는 동시라는 생각이 드는 시.

 

  갯벌에서

 

다들 잘 알 거야

갯벌에 난 수많은 구멍이

게와 조개와 소라들

숨구멍이란 것쯤

하지만 이 땅덩이의

땀구멍인지도 몰라.

사방 팔방에서 밤낮 없이

석유랑 천연 가스랑

온천수 광천수 지하수 뽑아 올리고

금광 은광 동광 철광 탄광

온갖 광물 캐어 내고

몰래 더 깊이 뚫어서

핵폭탄 실험도 하고

한시도 그냥 안 놔두니

어디로 진땀을 흘리며

그 아픈 걸 참아 내겠어?

 

이문구,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 창비. 2009년 초판 8쇄. 83쪽.

 

★ 내가 갖고 있는 이 동시집 판본에는 '사방 팔방에서 밤낮 없이/석유랑 천연 가스랑'이란 구절이 두 번 나온다. 아무래도 오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구절을 두 번 반복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한 번으로 줄여 인용했다.

 

햐,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시다. 그래, 갯벌에 있는 구멍이 우리 몸에서 땀을 배출하듯이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개발 열풍을 배출하는 구멍일 수도 있다는 것.

 

이렇게 자연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시. 다음에 올 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렇게 동시로 표현한 것. 이문구 작가의 대가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도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한 그가 이렇게 동시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줄이야...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시가 하나도 없다. 하나하나 다 과거를 불러오면서도 막연한 회상에 빠지게 하지 않고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이 동시집, 작가 이문구가 우리에게 남겨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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