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
구본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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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신들이 빠진 것도 아니다. 다만 신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인간 이야기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페르세우스로부터 시작한다. 즉, 이 책은 그리스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그리스 신들이 빠질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은 모두 반인반신이기 때문이다. 신들과 인간이 관계하여 낳은 영웅들.

 

이들은 인간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신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 세계에서 업적을 이룬다. 그리고 결국 신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리스인 이야기에서는 이런 영웅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영웅,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일지도 모른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기를 꿈꿀 때 그를 영웅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데...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메두사를 처치하고 안드로메다를 구출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이룬다. 그로부터 영웅은 시작한다. 그가 그리스인 이야기 처음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 책을 그리스 역사 순으로 배치하고 싶은 작가의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헤라클레스의 조상뻘이라고 하니, 그로부터 시작하고, 그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본토의 영웅들이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인물이 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중요하게 페르세우스를 다루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같은 집안 사람이므로.

 

그리스 영웅 두번째로 미노스왕을 다루고 있다. 아마도 그리스 문명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왕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는 테세우스가 나올 수밖에 없고,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가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에 빠져 테세우스를 구해줬으나 배신당하고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되는 아리아드네 이야기가 겹쳐지고, 욕망에 눈이 멀어 괴물을 낳게 되는 미노스왕의 왕비 파시파에 이야기, 그리고 생각없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과학자-기술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이달로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생각없음.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기술은 좋은 쪽으로 쓰이지 않고 나쁜 쪽으로 쓰일 수밖에 없다. 괴물을 가두는 미로나 황소와 사랑에 빠진 왕비를 암소로 변장시키는 기술 등등은 기술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기술에 동반되어야 할 것이 '왜?'라는 질문임을 생각하게 한다.

 

미노스 다음에 테세우스다. 그리스가 사랑하는 인물, 테세우스. 그는 바로 아테네 문명을 이루는 시초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테세우스의 모험...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미로를 탈출하는 것까지.. 그 전과 그 후가 이 책에 잘 나와 있어서 그가 왜 그리스인들에게 사랑받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약간 다르게 오이디푸스가 등장한다. 인간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인 사람... 불행을 한탄하지만 비켜가지 않은 사람. 그래서 신들로부터 그의 안식처를 마련해준 땅은 대대로 번성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사람.

 

스핑크스와 대결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는 이유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을 온몸으로 겪고, 그 불행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간 사람.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된다.

 

이제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에 다가설 때다.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그리스는 문명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트로이전쟁에 나오는 세 영웅.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네이아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남긴다. 아킬레우스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영웅으로,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들은 그리스인 이야기에 중심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인이다. 그는 나중에 로마의 시조가 되기 때문에 어쩌면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로마신화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나 아이네이아스는 한 명은 승자고, 한 명은 패자이지만 자기가 정착할 곳을 찾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친다. 그 여정이 또한 우리에게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단지 그리스 영웅들을 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들의 삶에 얼마나 굴곡이 많은지, 그 굴곡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웅이 되고, 신화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냥 평범한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그런 삶을 사는 것...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리스 영웅들을 통해 우리에게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맞설 것을 독려해주고 있다. 그렇다. 유한한 인간의 삶. 그 삶을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신화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인간들이 영웅이 되고, 그 영웅이야기가 신화가 되는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인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이야기에 신들의 이야기가 겹쳐져서 그리스 신화를 읽는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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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품격 - 삶이 있는 공간이 되려면 학교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임정훈 지음 / 우리교육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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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이 발표가 되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늘 있는 일이다. 대학에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입시제도가 바뀌어도 그게 그거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우리나라 교육은 최종목표를 행복한 삶, 더불어 사는 삶, 민주적인 삶 등등을 말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삼고 있다. 그게 다다. 학교 교육을 어떤 형태로 개혁한다고 해도, 대학에 목매달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만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교육내용에 관해서는 참 많은 논의가 있고, 모든 학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고 전문가인양 이야기들을 하는데... 교육을 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별 말이 없다.

 

관심을 가질 때는 학교 천장에 있는 석면이 발암물질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운동장에 깔려 있는 인조잔디가 인체에 해롭다고 알려졌을 때 정도다. 건강에 아주 안 좋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잠깐 학교 공간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뿐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아이들이 대부분을 생활해야 하는 학교 공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기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데도. 그래서 학교 공간은 늘 제자리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한다. 낡아가니까. 

 

다른 공간 분야는 앞서 나가는데, 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다. 다른 공간과 격차가 점차 벌어진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볼 일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학생도 많아지고 있다.

 

학교 화장실, 집에 있는 화장실보다 못해도 너무 못하다. 무슨 재래식 화장실도 아닌데 냄새가 지독하다. 거기다 휴지도 없다. 비데는 말할 것도 없고. 늘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화장실을 교실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학급도 있다.

 

여름이면 냄새가 솔솔 교실로 들어온다. 그런 상황인데, 교실 책상과 의자는 어떤가. 몸에 맞지도 않는다. 왜 이리 재질이 좋지 않은지. 집에 있는 책상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몇 년 전, 아니 몇 십 년 전 선배들이 쓰던 책상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다.

 

비좁은 교실에서 아무 것도 없이 낡은 책상과 의자를 가구로 삼아 생활해야 하는 학생들. 한여름과 한겨울에 복도에 나가 보라. 복도는 실내로 취급되지만 학교에서는 실외에 해당한다.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곳이다.

 

오로지 통로로만 사용되는 곳, 그렇다고 낭만이 있는 길도 아니다. 주변에 볼거리가 하나도 없고, 앉아서 쉴곳도 없는 그냥 직진만 가능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운동장에 나가보면 앉아서 쉴 그늘이 없다. 휑한 운동장 뿐이다. 모든 학생들이 구기 종목을 해야 한다는 듯이 운동장에 기껏 있는 것은 축구 골대와 농구 골대뿐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오손도손 이야기할 공간은 전혀 없다. 조용히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 또한 없다. 그렇게 넓은 운동장에 있어봤자 스탠드와 스탠드를 덮고 있는 등나무뿐이다.

 

화단은 있는데 학생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냥 눈으로만 보는 공간이다. 복도에서 운동장에도 함께 할 장소는 없다. 그러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없다. 전혀 없다.

 

학교는 한번 들어오면 특별한 허락없이는 나가지 못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를 감옥이라고 한다. 교문은 굳게 닫혀 있고, 끝나는 종이 쳐야만 활짝 열린다. 하지만 이 교문을 아침에 통과할 때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감시의 눈이 여기저기서 번뜩이기 때문이다. 교문 양 옆에 서 있는 선도부 - 요즘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원시적인 이런 선도부를 두고 학생들을 지적하는 학교가 있다 - 학생들과 교사들... 이들은 학생이 어떤 얼굴로 오는지, 어떤 마음으로 오는지 관심이 업다. 오로지 교복을 제대로 입었는지, 염색을 하지 않았는지, 신발은 규정에 맞는 것을 신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학교라는 공간에 교복이라는 또하나의 규율이 덧씌어진다.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온 행태다.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학교 건물은 눈에 확 띤다. 세상에 이렇게 개성이 없을 수가. 이렇게 획일적일 수가.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속에 들어가보면 건물 배치도 천편일률적이다.

 

중앙현관을 중심으로 교장실, 행정실, 교무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어느 곳이나 그렇다. 또 교장실은 학교에서 가장 넓게 혼자 쓰는 공간이 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방적인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하다못해 같은 학년 학생이라도 다른 반이라면 아무 교실에나 들어갈 수 없다. 자기 반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급이다. 이렇게 너무도 폐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이 바로 학교다.

 

이런 학교. 혁신학교니, 교육 혁신이니 말들을 많이 했지만 학교 공간에 대한 고민, 교복에 대한 고민, 교실 배치에 대한 고민, 복도에 대한 고민, 교장실에 대한 고민, 학교 화장실에 대한 고민 - 최근엔 아름다운 화장실 만들기 운동이 있긴 했지만  지속적이지 않았다. 한때 와 하고 학교 화장실에 관심을 가졌다가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관심이 또 사그라들었다- 운동장에 대한 고민, 책상과 의자에 대한 고민 등등은 없다.

 

그냥 교과 내용, 교육 활동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작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는, 학생들이 또 교사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중요함에도 그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런 안타까움에서 씌었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을 바꾸지 않고 교육 내용만을 바꾸려고 하면 형식이 내용을 억압할 수밖에 없음을...

 

지극히 폐쇄적인 공간, 억압적인 교복, 강압적인 규율, 자치권이 없는 교실 생활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교육 내용만을 바꾸면 개방적이고 창조적이고 민주적이고 자치적인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하려면 공간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공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학교 공간이 얼마나 권위적이고 배타적인지, 비인간적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학교는 사회 다른 공간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보다 앞서가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가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과거에서 옴짝달짝 못하게 옭아매는 일이 될 것이다.

 

학교 공간이 좀더 좋아지기 위해서, 우선 학교에 색을 들여오자. 학교는 철저한 무채색이다. 색채를 조금 화려하게 칠해도 건물의 외벽만 그럴 뿐이다. 그것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건물 내부는 철저한 무채색이다. 학생들 역시 무채색이다.

 

단조로운 색깔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면 학교 공간이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모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색채의 다양함은 우선 권위를 많이 벗어던지게 할 테니까 말이다.

 

하나하나 읽으며 생각할거리다 많다. 아주 오래 전 다닌 학교와 지금 학교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 정말 비극이다. 이 비극이 지속된다면 학교 교육이 성공할 수가 없다. 이제 교육 내용도 중요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교 공간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여기서부터 교육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이 시작점은 누구에게나 만족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교육관료들, 교사들, 학부모들, 학생들 모두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학교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교장부터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교장이 학교라는 공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하니까. 그만큼 공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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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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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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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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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먼저 다가온 밀란 쿤데라의 첫작품이라고 한다. 소설 끝에 '1965년 12월 5일에 마침'이라는 글이 있다.

 

1965년이면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그만큼 공산주의가 많이 희석되던 시대라는 얘기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서서히 변해가던 때, 두 시대에 걸쳐 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소설에 나온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로브, 코스트카'가 각 장의 제목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나'라는 관점을 취해 자기 입장에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이 네 사람이 모두 한데 얽혀 있게 되는데, 읽어갈수록 이들의 관계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주인공은 루드빅이라고 할 수 있다.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지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루드빅은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농담 - 그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남들은 절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 세상에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있던 그 시대에 트로츠키 만세를 글로 썼으니 -으로 인해 전락하게 된다.

 

농담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인데, 그는 그 농담으로 인해 증오심을 품게 된다. 바로 자신을 심판한 제마넥에 대한 증오, 그 증오를 덮을 수 있었던 루이체와의 사랑, 그러나 그는 자기 처지에서 루이체를 사랑한 것이지 루이체 처지에서 사랑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결국 루이체가 떠나고, 그 이유를 나중에 코스트카에게서 듣게 된다.

 

그만큼 젊은 시절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가면,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사회주의에서 -또는 공산주의라고 해도 좋으리라 - 원하는 인간상을 자신의 모습에 실현시키기 위해 사는 삶, 그것이 밖에서 또 멀리서 보면 참으로 우스워보이는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농담이 아닌 치열한 삶일 수밖에 없음을 루드빅이 겪는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루드빅의 경험과 같이 야로슬로브가 하는 일, 민속음악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가는 것 역시 자신들에게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야로슬로브의 아들인 블라디미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이 현대적인 것에 열광하는 것 역시 가면 속의 삶일 수 있다는 것, 무엇이 가면을 벗어던진 삶인지는 결국 모른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모든 것을 농담으로 처리하는 것도 역시 위험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직된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으므로, 이 소설은 당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의 모습을 비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면 뒤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 그렇지만 과연 가면 뒤에 자신의 얼굴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루드빅도, 야로슬로브도 그리고 헬레나도 마찬가지다.

 

헬레나, 아마도 평생을 가면 속에서 살아야 할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마넥에게 반해 결혼했고 확고한 공산주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여자. 제마넥이 시대의 변화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고 자기 신념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제마넥에게 복수하려고 자신에게 접근한 루드빅에게 마음을 주고 결국 욕망을 받아들이게 되는 여자.

 

루드빅은 복수를 위해 헬레나를 이용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 일은 환영에 불과했다고 깨닫게 된다. 마치 야로슬로브가 평생을 추구했던 민속음악이 사그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결국 루드빅이 농담으로 편지에 쓴 글로 인해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엮이게 된다. 엮이게 되면서 체코의 당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사회가 우리가 사람답게 - 이 사랍답게란 말,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답이 없다- 살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모두가 하나로 흘러가는 사회는 분명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웃음이 사라진 사회라는 것이니 그런 사회는 꽉 막힌 사회다.

 

반대로 농담만 난무하는 사회도 분명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만 대할 뿐이다.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관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농담이 통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사람 사이에서 농담이 통한다는 얘기는 서로 소통이 된다는 얘기다.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에서 농담은 치명적인 위험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루드빅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던 첫 여자 친구 마르케타에게 농담을 편지 내용으로 써 전락하게 되듯이.

 

그런데 읽으면서 묘한 생각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쿤데라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사회'를 농담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그래서 마르크스의 그 농담이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치명적 농담이 세계사적 사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루드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그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농담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말을 교조적으로 그대로만 따르려는 사람들이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농담일 거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전체의 흐름 속에서도 개별적인 흐름은 존재하니, 그런 개별적 흐름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전체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소설에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가 떠올랐고. 화두 중에 부처를 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불손한가. 그러나 이런 말들을 불교를 모독하는 말이 아니라 불교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말들로 받아들이고, '벽암록'이니 '무문관'이니 하는 책으로 엮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가 무엇입니끼?' 라는 질문에 '똥막대기'라고 대답해도 용납이 되는 종교. 그것이 직설적인 욕이 아니라 돌려서 말하는 농담, 즉 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권고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농담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그러므로 농담으로 인해 한 인생이 확 바뀌는 사회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회다. 소통이 안 되는 사회다. 그렇다고 소통이 안 되는데, 모든 것을 농담이었어라고 눙치는 사회는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을 한 루드빅은 아주 사적인 편지에서, 그것도 자신의 여자친구에게만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한 것이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어 처벌하는 사회는 문제지만, 반대로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눙치는 사회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공격이고 자신을 위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 점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관계, 각자 '나'로 등장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들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잘 엮여 한 편의 소설을 이루고 있다. 쿤데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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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오래 된 시집이다. 1996년이면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 아닌가.

 

  그럼에도 요즘 시들보다는 눈에도, 마음에도 잘 들어온다. 그래서 더 좋게 읽었다.

 

  읽다가 불현듯 정의당과 고 노회찬 의원이 생각났다. 그들을 생각나게 한 시...

 

  정현종의 '앉아 있는 건 귀중하다'란 시다. 예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지금 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정의당 당원이 더 늘고 있다고 한다. 정의당에 대한 지지도도 높아지고 있고. 그만큼 국회에서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얘기가 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비어 있는 자리,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자리는 앉아 있을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지금처럼 국회가 하는 일 없이 제 이권만 챙기는 상태에서는.

 

 앉아 있는 건 귀중하다

 

앉아 있는 사람이 앉아 있는 건

귀중하다

그 사람이 일어나 사라질 때

그건 분명해진다

더이상 앉아 있지 않을 때를 위하여

앉아 있는 건 귀중하고

이제 아무도 없는 자리를 위하여

앉아 있는 건 실로 귀중하다

저 무(無)의 탄생을 위하여

그 풍부한 역동을 위하여

저 비어서 생생한 공간을 위하여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건

귀중하다

그 사람이 일어나 사라질 때……

 

제41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1996년. 157쪽.

 

앉아 있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 자리는 참 추해진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기간을 다 채워야만 할 때 그 자리는 더 추해진다.

 

시간이 흘러 추함이 일상이 되고, 다시 자리에 앉을 사람을 뽑을 때 누가 덜 더러운지만을 따지게 되면 앉아야 할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앉지 못한다.

 

앉을 수가 없다. 이미 더럽혀진 자리,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이전투구를 벌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 또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앉을 의자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과거 속으로 흘려보낸다. 미래를 과거에 묻어버리기도 한다. 앉아 있던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느끼게 하는 지금... 이 지금이 미래에도 지금처럼 마음에 와 닿아야 하는데, 그 시간이 참 길다...

 

긴 시간 동안 앉아 있지 않을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 마치 자기가 그 자리의 주인인 양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앉는 자리...

 

삼년이면 상도 다 치르는데... 앉을 자리에 이상한 사람이 앉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고 노회찬 의원이 생각나고, 다시 2년 뒤 정의당이 지금 지지율대로 국회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그들이 과연 앉을 자리에 앉는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면...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지금부터 생각하다니... 참... 정현종이 쓴 '앉아 있는 건 귀중하다'는 시... 쉽게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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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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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근대화를 이루는 시대와 같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어린시절에 경험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트리니나드 토바고...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백인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라에서도 빈민가에 해당하는 미겔 스트리트... 여기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모음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표현된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미겔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 도시에 푹 절어 살고 있다.

 

도무지 전망이 없는, 희망이 없는 그런 나날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서 어떤 윤리를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기가 막히게도 도덕하고는 거리가 먼, 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불우한 상황이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또한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이긴 하지만 이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여섯 명의 인물들(소설의 서술자를 제외하고, 각 인물은 하나의 장을 차지하고 있다)은 각자의 개성으로 살아간다. 이들 중에서 죽게 되는 사람도 있고, 동네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동네에서 살아간다.

 

그냥 그렇게, 별다른 희망 없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해트일 것이다. 해트는 처음부터 등장해 마지막까지 등장한다.

 

소설의 서술자인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지막 장 바로 전이 바로 '해트'에 관한 장인 것을 보면, 그가 미겔 스트리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고, 도박을 좋아하는 그, 여자를 멀리했던 그가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감옥에 가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고, 해트가 감옥에 가게 되는 순간,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서술자는 아이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던 것에서 어른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전망 없는 이 동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동네에 계속 머무른다면 난폭해지고 결국 알콜 중독이나 여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됨을...

 

서술자의 어머니는 이 동네를 떠나라고 한다. 떠날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유학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

 

참으로 슬픈 것은 개천을 떠난 용은 결코 개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개천은 그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곳이라는 점.

 

이 미겔 스트리트라는 소설이 나이폴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면, 그가 얼마나 이 동네를 떠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기 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 동네는, 또 동네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지워버려야 할 동네이자 사람들인 것이다.

 

그점이 느껴져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며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건조하게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940년대 후반 트리니나드 토바고, 특히 빈민가였던 미겔 스트리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주인공이 이곳을 떠나야만 했는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ㅡ 우리는 마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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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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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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