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리더십 Color Leadership
신완선 지음 / 더난출판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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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도자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통솔자도 아니고... 앞서가는 사람, 이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냥 리더라고 하자. 남을 이끄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조직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리더는 어디에도 있어야 한다. 사람이 몇이 모여 일을 할 때에는 누구나 똑같은 역할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좀더 큰 짐을 진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을 리더라고 하자.

 

그렇다면 리더는 참으로 중요하다. 어떤 조직에도 있어야 할 존재라면, 리더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서 그 조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수시로 바뀌는 정치판을 생각해 보자. 자기 정당만을 이끄는 리더가 있고, 자기 정당을 사회 발전의 중심이 되게 이끄는 리더가 있다. 아니면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리더가 있다.

 

정당에서 어떤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는 명확하다. 자기 정당, 자기 욕심만을 챙기는 그런 리더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당이 원하는 리더는 사회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 발전을 위해 정당을 이끌 수 있는 리더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리더가 좋은 리더일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리더가 필요하듯이 경제 분야에서도 리더가 필요하다. 경제 분야는 리더에 따라서 흥망이 결정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교육 분야에서도 리더가 중요하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종 분야에서 리더가 하는 역할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연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또 나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 책을 보면 답은 명확하다. 모든 사람은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다. 리더가 한 가지 특성만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의 리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를 일곱 가지 색깔로 정리해 놓고 있다. 그래서 칼라 리더십이다.

 

빨강(서번트 리더십), 주황(브랜드 리더십), 노랑(사이드 리더십), 초록(파워 리더십), 파랑(슈퍼 리더십), 남색(비전 리더십), 보라(변혁적 리더십)

 

각 색깔에 맞는 특징들, 유형들, 그리고 그런 리더들의 사례가 이 책에 실려 있다. 또 책 앞부분에는 자신이 어떤 리더에 해당하는지를 측정하는 수단도 있어서 직접 자신의 성향을 살필 수도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한 가지 특징으로 제한하지 않아서 좋다. 사람은 단 한 가지 자질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여러 특성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 자질이 좀더 강하냐 하는 것이다.

 

강함을 살리고 약함을 보충하면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 또 조직의 성향과 사회의 상황을 살펴서 자신에게 맞는 리더십을 함양하고 발현하라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그러므로 리더십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회나 조직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이 개인도 역시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리더이다.

 

그러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이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라는 말에 있다.

 

리더십에 대해서 아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개인이, 조직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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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침묵하는 사람, 큰 사람이다. 말도 아닌 말을 너무도 큰소리로 내는 사람, 말에 대해서 책임도 지지 못하면서 자신을 점점 수렁으로 빠뜨리는지도 모르면서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작은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

 

  원칙은 아름답다. 원칙은 있어야 한다. 세상에 원칙이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는가. 그렇다고 원칙만 지켜서는 안 된다. 원칙만 지키면 고루해진다. 변화에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 세상에서 원칙을 지켜야 할지, 원칙에 융통성을 두어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 그런 때에 있다.

 

그런데 과연 원칙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합의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각자 자기 말만 한다. 자기 말이 원칙이란다. 그 원칙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원칙을 지키는데 최소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내로남불'만 존재한다. '내로남불'이 횡행한다. 자기가 행하면 원칙에 융통성을 준 것이고, 남들이 행하면 원칙을 위배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원칙을 지키자고 하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루쉰 글이 생각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침묵할 것. 그냥 헛웃음만 웃을 것.

 

유용주 시집 제목을 보며 요즘은 침묵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도 많은 말들이 커다랗게 날아다니고, 그 말들이 바위가 되어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

 

말들, 그것을 가짜뉴스라고 해도 좋고, 남을 비방하는 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말들이 칼이 되어 날아다니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들이 수많은 말의 칼에 상처를 입어 여기저기 나가떨어지고 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도 돌려준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 침묵할 것. 이제는 '크나큰 침묵'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말보다는 행동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유용주 시집, 오래된 시집이다. 절절하다.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집.. 이렇게 시인의 마음이, 말이 절실하게 묻어나오는 시집, 오랜만이다.

 

침묵이 필요한 시대에 유용주 시집에서 '종(鐘)'이란 시를 본다. 수많은 말들 중에 이렇게 종소리처럼 우리 마음에 울림을 주는 소리가 필요하다고.. 바로 그런 소리들이 크나큰 침묵이 아닐까 하고.

 

 

진저리치며

진저리치며

내 너에게 달려갔으나

싸늘한 새벽 하늘

빈 골짜기 바람 한움큼 만나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얼마나 긴 오장육부를 쥐어뜯어야

이 울음 끝이 나는가

내 육신 굳어 바위가 되고

바위 부스러져 재로 변할 때까지

이 노래 멈출 수 없다

이 피울음 그칠 수 없다

 

유용주, 크나큰 침묵, 솔. 2002년 1판 4쇄. 38쪽.

 

온갖 재잘거리는 소리에 묻혀 진작 들어야 할 둔중한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말을 줄이고 귀를 열어야 한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그때서야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게될 때까지 종은 피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제발 제대로 된 소리를 들으라고.

 

말들의 시대... 말이 돌덩이가 되어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대. 말이 칼이 되는 시대... 그래서 침묵은 약자들만이 지닌 도피처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우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종소리를 듣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원칙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내게 원칙이 있는가? 이 원칙을 지킨 상태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침묵 속에서 완성된다.

 

이 시집 3부에 실린 구멍 연작시들... 1편부터 13편까지 마음을 절절히 울린다. 아, 이렇게 내 마음에 구멍을 내는 시. 그 구멍을 메우게 하는 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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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0
존 바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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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환상적인, 신화에 버금가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신화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할까?

 

'키메라'  양, 사자, 뱀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는 신화속 괴물. 벨레로폰에게 퇴치된다고 신화에는 나와 있는데... 이런 키메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어쩌면 문학 아닐까? 작가는 이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목은 "키메라"인데, 이 소설집에는 '두냐자디아드, 페르세이드, 벨레로포니아드'라는 세 소설이 있다. 제목에 키메라는 나오지 않는다. 키메라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괴물이라면 이 소설 역시 세 신화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키메라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쉽게 접근하려고 해도 불을 내뿜어 사람들을 물리치는 키메라처럼 소설은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처럼 단순 명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낭패를 당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키메라는 하늘 위에서 화살을 쏘아 물리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너무 가까이 들어가서는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나무들은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듯이 헤맬 수밖에 없다.

 

멀리서 봐야 한다. 신화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으려고 한다. 그래도 희미하긴 하지만... 숲 속에서 그냥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두냐자디아드'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차용한 작품이다. 세헤라자드가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야기로 왕을 변화시키는 내용.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일야화다. 하지만 소설은 세헤라자드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동생인 두냐자데가 서술자이다.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은 여성을 죽인 남성을 처벌하려고 한다.

 

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하지만 남성의 관용으로 자신들의 행위가 계속 이어져 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행위와 그 행위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의 차이. 그 차이를 찾아내야 하는 이야기꾼.

 

소설은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겉보다는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야기꾼인 세헤라자데를 서술자로 삼지 않고 동생인 두냐자데를 서술자로 삼은 까닭은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이미 아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기법, 이 소설은 첫번째 소설에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소설과 세번째 소설은 이야기 속 이야기로 계속 관계를 맺는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웅과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물이 행하는 차이가 서술되고 있다.

 

영웅인 페르세우는 40이 되어 이미 늙어버린 자신에게 환멸을 갖는다. 신화 속에서 머무를 때는 영웅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영웅성을 찾아가는, 그러나 결코 그것이 완결되지 못하는 과정을 '페르세이드'에서 펼쳐보이고 있다면, '벨레로포니아드'에서는 페르세우스와 다른 길을 가는 영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벨레로폰 이야기를 비틀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 영웅을 추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어쩌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려고 하는 행동 속에서 영웅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신화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다양한 이야기가 중첩되게 만들고 있는 작품이다. 여전히 숲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나무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다. 더 고민하면서 생각하면서 다시 읽는다면 숲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을런지...

 

이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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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상에 제정된 작가는 행복한 작가다. 적어도 자신을 기리는 후배 문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작가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문학계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 문학상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몇 안 되는 문학상 중에 '박재삼 문학상'이 있다.

 

  사실, 이 수상집을 보기 전까지는 있는지도 몰랐다. 박재삼만 알았지, 그를 기리는 문학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지용이나 이상, 김소월에 비하면 박재삼은 후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대에 속한 시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있다니...

 

박재삼에게는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나 역시 그 시를 배웠고... 이런 그를 기리는 시집이니 그가 시도한 시적 성과를 어느 정도 이룬 시인에게 문학상이 주어진다고 하겠다.

 

첫회 수상자는 이시영이다. 짧은 시부터 사회 문제를 다룬 시까지 폭넓게 써온 시인이다. 그가 첫회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납득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수상자 말고도 다양한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박재삼이 지냈던 사천에서 활동하는 시인들 가운데서 박재삼 사천문학상을 따로 수상하고 있다. 그 수상 시인의 자선 대표작이 실려 있어서 문학상이 전국에서도 또 시인이 활동했던 지역에서도 의미를 지니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상집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는 이홍섭의 '등대'라는 시를 소개한다. 이렇듯 삶은 무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 그 뒤에 남겨진 것이 나를 안내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등대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제1회 박재삼 문학상. 실천문학사. 2012년. (이홍섭, 등대 전문) 117-118쪽.

 

등대... 나를 인도하는 불빛. 그러나 나는 떠나야만 한다. 그렇게 떠나갈 때 불빛을 뒤로 하고 떠나갈 때..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갈 때... 후회가 밀려오겠지만, 후회도 곧 삶.

 

후회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후회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

 

후회들을 무슨 만장처럼 거느리고, 뒤로 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영원히 머무를 곳에 도달할 때까지... 그때까지 후회 속에서 머무르지 않으리라.

 

후회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그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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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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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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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이다. 요즘에 500쪽이 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 힘든 일이다. 시간을 내기도 힘들고, 우선 두께에 질려 책을 펼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끝까지 읽게 된다. 중간에 그만두기가 힘들다. 읽으면서 계속 명작이군! 명작이야!라는 말을 하게 됐다. 흥미진진하게, 다음에 어떻게 전개될까, 결말이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공간은 정신병원이다. 정신병원하면 미쳤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미쳤다는 말, 보통에서 벗어났다는 말, 다른 말로 하면 독특하다고 하는 말로 바꾸면 이들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정신병원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미쳤다고만 하면 그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미쳤다기보다는 조금 다를 뿐인 경우가 많은데... 물론 아주 심한 경우야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 치료란 것이 격리나 어떤 물리적 절제술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콤바인이라고 불리는 정신병원. 이 정신병원에 있으면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진다. 나빠져서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된다. 나오는 경우는 죽어서 시체가 되는 길 뿐이다.

 

이런 곳에 아주 독특한 사람이 온다. 아니, 기존 관념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주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브롬든(그는 추장으로 불린다.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이다)의 눈으로 맥머피와 랫치드 수간호사 사이의 갈등이 펼쳐진다.

 

랫치드 수간호사. 아마도 우리 사회로 치면 수구쯤 되는 사람.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 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모두 정신이상자이며 이들은 자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독재자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전기충격요법에 이어 전두엽 절제술까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수간호사. 하다못해 의사들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니...

 

치료라는 이름으로 전횡을 일삼는 사람이 바로 이 랫치드 수간호사라면 이 수간호사에 맞서는 사람이 바로 맥머피다.

 

정신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활달하게 들어오는 맥머피... 그를 브롬든은 특이하게 본다. 그런 특이함 속에서 그는 병원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 오로지 수간호사의 명령에 따르도록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아니라 환자만이 있는 병원... 사람이 아니라 국민만이 있는, 그것도 충량한 국민만이 있는 독재자의 나라와 비슷한 상황.

 

이런 사회에서는 웃음이 없다. 맥머피가 우스운 이야기, 행동을 해도 처음에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웃지를 않는다.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웃음을 빼앗긴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환자로 살아가게끔 강요받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맥머피다. 수간호사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하나하나 고쳐가려 하는 그의 모습은 환자들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환자들은 자신들이 수동적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 간다. 그 깨달음 속에서 그들은 작은 일탈도 감행하고... 하딩 같은 사람은 그 의식을 끝까지 지닌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하찮은 존재, 너무도 작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브롬든이 서서히 자신의 힘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맥머피가 비록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되지만 그가 한 행동들이 패배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식물인간이 된 맥머피... 그것을 볼 수 없는 브롬든. 브롬든은 베개로 맥머피를 질식시킨다. 랫치드 수간호사에게 반항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표본으로 그를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롬든은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이제 그는 무기력한 환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맥머피라는 사람으로 인해 자각해 가는 과정, 결국 자기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맥머피가 병원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병원에서 퇴원한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병원은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수간호사의 힘이 많이 줄어들었고, 또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 병원을 사회로 치환하면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에게 대항해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 끝나면 퇴장해야 한다.

 

만약, 맥머피가 계속 살아서 수간호사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면 다른 환자들에게는 자신들에게 명령하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독재자만 쫓아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독재자를 물리치자고 한 사람이 계속 있어서도 안 된다. 독재를 물리치는 화살을 어떤 한 사람이 쏠 수는 있지만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사회가 변한다.

 

그 점을 이 소설은 말해준다. 소설 제목이 "뻐꾸지 둥지 위로 날아간 새"다. 여기서 뻐꾸기 둥지는 속어로 정신병원을, 맥머피는 뻐꾸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521쪽 해설에서)

 

정신병원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바꾸어 놓은 맥머피... 이 소설을 사회로 치환해서 읽으면 참으로 생각할 것이 많다.

 

어쩌면 독재자들은 또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작고 여린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지, 당신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자격이 없다고, 나만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는지... 우리 주변에도 랫치드 수간호사 같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지... 우리 역시 이 소설 속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냥 환자로 머물지 않았는지...

 

맥머피와 같이 외부에서 온 사람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맥머피를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모두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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