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가려운 데가 있어 긁고 싶었는데, 어떻게 긁지 하는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

 

  민들레 119호가 왔다. 그리고 아픈 데를 긁을 수 있게 됐다. 시원하게. 완전히 가려움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긁을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한다.

 

  가려움이 세 군데였다. 하나는 '페미니즘'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청소년들의 자해 - 칼로 손목 긋기'였다.

 

  이번 호 기획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그렇다. 모든 운동은 모두를 위해야 한다. 소수를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를 위한다고 겉으로는 말한다.

 

정당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과 이념, 이익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모두를 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모든 운동은 모두를 위한 운동이다. 아니, 모두를 위한 운동이어야 한다.

 

이때 모두는 구성원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일, 그런 일이 있을까? '모두'라는 말을 강조하다 보면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한'은 어떤 뜻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때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에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 약한 사람,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가장 힘든 자리에 있어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한 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 99개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갖지 못해서 억울해 하는 사회가 아니라, 99개 가진 사람이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모두를 위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여성들만을 위한 운동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알게모르게 여성들이 받아온 차별들을 없애간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 운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함께 가려 한다. 물론 배제해야 할 존재는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함께 가야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차별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이렇다면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통일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통일이 반드시 평화와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들에 이번 호에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을 먼저 내는 것, 이 평화에 경제가 무시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남북이 상생하는 경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특정 단체들만의 교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교류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두를 위한 통일'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을 화두로 삼으면 우리나라에서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소년들이 생각난다.

 

많은 청소년들을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성적으로 구분된다. 이럴 때 온전한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청소년들, 그러나 소통이 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몸에 관심을 기울인다.

 

몸에 상처를 내는 순간, 자신의 몸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손목 긋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손목을 긋는 모습을 남들이 보는 순간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성적밖에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자신이 온전한 몸으로 관심을 받는다. 그것이 비록 우려와 걱정만 넘치는 관심이지만... 어른들에게 이런 관심은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관계를 맺고 싶다... 이번엔 자해를 한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이 공감을 해온다. 관계가 만들어진다. 비록 소셜미디어에서이지만... 이렇게 청소년들의 자해가 유행처럼 번져간다.

 

이 이면에는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 구조가 있다. 청소년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공부말고는 모두 하지 마라, 하니 말라는 금지뿐이지 않은가. 자기 몸조차 남들 통제에 맡겨야 하는 청소년들이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손목 긋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손목 긋기에 대해 이번 호에서 두 글이 실려 있다. (청소년 자해가 늘고 있다- 편집실, 응답 없는 시대의 행위, 청소년 자해-이수련)

 

두 글을 읽으며 다음 호에서는 좀더 논의된 글들이 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청소년들 개인의 문제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마음 속 가려움, 민들레가 긁어주고 있다. 가려움을 완전히 가시게 하는 것은 이제 내 몫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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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천국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2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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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렀다. 천국에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베아트리체다. 단테 하면 짝으로 연상되는 인물, 베아트리체... 구원의 여인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단테는 천국에 가서도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점점 다른 단계에 가서야 빛을 볼 수 있게 되지만, 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천국편에는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책 중간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유명한 인물들을 이야기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이름 없는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름이 있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스베덴보리의 책에도 나오듯이 천국에는 어려서 죽은 아이들이 천국에 있다. 이들은 세상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삶을 산 사람들, 그 사람들 역시 천국에 있겠다. 중세 시대에 쓰인 이 책에 의하면 순수하게 살면서 종교적 삶을 영위한 사람들은 비록 아주 높은 단계의 천국은 아니지만 천국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낮은 단계, 높은 단계라는 구분이 천국에서는 무의미하다. 모든 단계에 하느님의 빛이 비추기 때문이고, 이 빛은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 이것이 천국의 삶이다.

 

천국에서는 다른 단계를 넘보지 않는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단계를 넘보는 것, 이미 시기, 질투라는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옥 단계에 있는 것이지, 천국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마음이다.

 

천국도 9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지옥도 9단계로 나눈다고 보면 천국과 지옥이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중간 단계로 연옥이 있고.

 

하지만 천국은 단지 지옥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된 삶, 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실천이 따라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면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 책의 천국편에서는 천국에 있는 존재들이 당시의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기독교 역사에서 1300년대가 되면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테가 이 작품을 통해 당시 부패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시작할 즈음에 지녔던 순수함, 열정 등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고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종교가 서서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이럴 때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된다.

 

단테는 당시 종교가 초기 종교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가 천국에서 만나는 성인들은 단테가 살던 당시 종교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정도(正道) 벗어났다고. 그대로 가다간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그래서 단테를 통해 경고를 하고 있다.

 

지옥과 연옥, 천국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그곳에 어떤 존재들이 있는지 알려줌으로써 더 이상 종교가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어쩌면 단테의 이 작품은 당시 권력자들이 싫어했을 수가 있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그 단초를 여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 특히 지도자라고 목회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단테 신곡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었다면 마음에 많이 걸렸을텐데... 이 작품이 단지 문학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종교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단테를 통해서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여긴다면 말이다.

 

지옥에서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이르는 여정을 통해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종교를 지니든 지니지 않든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첨언하면 서양 문화, 역사, 인물 들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게, 더 깊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배경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품. 이렇게 작품 속에 수많은 이야기, 역사, 문화가 녹아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고전이 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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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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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거쳐 이제는 '연옥'에 도달한다. 여전히 길잡이는 베르길리우스다. 그는 연옥까지는 함께 할 수 있다. 다만 천국에는 함께 갈 수 없다. 아직 그는 천국에 이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입구, 지옥의 비탈에서 통과에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입구를 지키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연옥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것.

 

다시 지옥에 떨어지느냐 아니면 연옥에서 일정한 기간을 거쳐 천국에 이르느냐는 입구에서부터 시험된다. 단테는 사후 세계를 두루 볼 수 있는 특혜를 지녔기에 연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의 이마에 p자를 일곱 개 새기게 된다.

 

이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이라고 하는데...p는 이탈리아어로 '죄'  의미하는 'peccato'의 첫글자로서, 연옥의 일곱 비탈에서 씻어야 하는 오만, 시기, 분노, 태만, 인색, 낭비, 탐식, 애욕의 죄를 가리킨다 (316-317쪽 옮긴이 주에서 - 죄는 일곱이 아니라 여덟이다. '탐식'에 빠져 있던 사람들과 '낭비'를 저지른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있다) 고 한다.

 

즉 연옥에서는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는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통상 저지르게 되는 일들에 대해서 참회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옥은 곧 현실세계다.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어떻게 녹록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연옥편에서 천국에 가는 길은 가파른 비탈로 표현되어 있다.

 

또 각자의 죄에 따라서 짐을 지고 그 비탈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육신으로 연옥을 통과해 천국으로 가는 단테도 처음에는 힘들어 한다. 길잡이인 베르길리우스조차도 길을 몰라 물어봐야 할 지경.

 

현실의 삶은 이렇게 힘들다. 또 한 비탈을 올랐다고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비탈이 일곱 개나 있다. 하나하나 다 극복해야만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

 

삶에서 순간 방심하거나 포기하거나 하면 곧장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한참을 더 여기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옥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자기 행동으로 인해 한참을 연옥에 머물러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진실한 기도에 의해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가를, 그래서 진실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함을 연옥편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테는 올라갈수록 이마에 새겨진 p자가 하나 하나 줄어들어가게 되고 비탈을 오르는데 덜 힘이 들게 된다. 그만큼 하나하나 욕망을 극복해갔다는 얘기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참는 것이 힘들다. 무언가를 할 때 첫걸음을 내딛고 그것에 성공하기까지가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한다.

 

작심삼일(作心三日)는 말, 결심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삼일을 넘기기가 어렵지 한번 삼일을 넘기면 그 다음에는 좀더 쉽게 결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결심을 실행하는데 첫비탈, 첫고비가 바로 삼일이라는 말로 볼 수 있는데, 이 비탈을 넘으면 좀더 가벼워진 몸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올랐다고 할 수 없다. 여전히 높고 가파른 비탈이 눈 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하지만 한번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자신감이 생긴다. 더 수월하게 실행할 수 있다.

 

우리와 비교해 생각해 보니 p자가 일곱인 것은 우리 전통에서 죽으면 사십구재를 지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곱단계에 다시 7을 곱하면 49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업보에다가 주변 사람들의 기도까지 합쳐져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때, 49일... 바로 연옥이 우리에게는 49재에 해당하지 않을까...

 

천국이냐 지옥이냐 아니면 계속 연옥이냐 하는 결정을 받게 되는 날 49일째... 그것을 49재라고 한다면 단테에게는 p자를 지워가는 비탈들 일곱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비탈 오르기를 포기하면 연옥에 계속 머무르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배경지식이 적어서 이 작품을 깊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너무도 많이 나오는 서양 문화 전통과 서양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적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신화, 성서, 이탈리아 역사와 인물, 기독교 역사 등등을 알아야만 한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을 읽을 때 지녀야 할 배경지식과 비슷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작품으로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고... 그냥 전체적인 틀을 따라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왜 단테가 이 작품을 썼는지, 그것은 계속 말하지만 지금-여기에서 잘 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옥에서 헤매고 있는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보면, 그 점을 파악하면 실천한다면 독자로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천국으로 간다. 연옥편 뒤부터 드디어 베아트리체가 나왔다. 베르길리우스와 교대해 단테를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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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17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대학 들어가기전에 <연옥>까지 읽고 아직 <천국>은 못 읽었는데...읽으려면 다시 읽어야할듯 하네요! 베아트리체가 넘 좋아서 짝사랑하는 애를 ‘베아트리체’라 불렀답니다 ㅋㅋ

2018-10-18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0-18 08:19   좋아요 0 | URL
그래서 고전인가 봅니다 ^^
 
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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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신곡"을 읽는다. 대충 줄거리는 아는,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그런 작품.

 

단테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작품이다.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고,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한다.

 

고전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요즘 세상이 과연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까 하는 생각. 너무도 많은 종교들이 있음에도 왜 세상은 갈등으로 넘쳐날까 하는 생각에...

 

중세시대 종교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스웨덴의 스베덴보리가 쓴 "천국과 지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단테 작품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 별 논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지옥편을 읽는다. 지옥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지옥에서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올라가면 상승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테가 이런 순으로 책을 썼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순으로 출판이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한다) 때문이다.

 

지옥... 사람이라면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일 것이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면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하겠지.

 

종교들은 대부분 사후 세계를 인정하고, 사후 세계가 지금 살고 있는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일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야 할 세계에서 불행하고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짧은 이 현세의 삶에서 제대로 살아야 죽어서 긴 세월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현세에서 잘 살라고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지옥이야기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권세가 있다고, 돈이 있다고, 명예가 있다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죽어서도 그럴까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지옥을 여행한다. 베르길리우스 역시 천국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사람들, 기독교를 믿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도 지옥에 있다.

 

물론 가장 낮은 단계의 지옥이고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이게 중세 시대 사람들이 지닌 인식이다. 그리스도가 나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그렇다고 이들이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에 갔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기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옥에 영원히 떨어져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들은 그리스도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협한 부분이 바로 지옥의 첫번째 단계에 있다는 것.

 

이미 그 전에 죽었기에 지옥에 있지만 이들은 이 지옥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반대로 교황이나 추기경, 수도사, 왕들은 어떤가? 비리, 배신, 음모 등을 일삼았다면 이들이라고 해도 지옥에 있을 수밖에 없다.

 

 

1300년대 시작. 단테가 살던 시대. 이미 그 시대에 신앙의 힘은 많이 약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으로 교황이나 추기경, 수도사들이 지옥에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냥 이 직위에 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서술,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을 믿는 순간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 천국에 가는 것은 믿음을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인은 말로 존재하지 않고 행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단테가 지옥편에서 보여주는 종교관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 중에서도 배신을 일삼은 사람, 아첨만 한 사람 등은 지옥에 있다. 당연한 일이다.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정치인들, 신곡 - 지옥편을 읽을 일이다.

 

단테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지옥편에서는 우리 예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나온다. 바로 그리스 영웅들이다. 특히 트로이를 멸망시킨 영웅들.

로마는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네이아스가 세웠다고 되어 있으니, 트로이를 멸망시킨 사람들을 이탈리아 사람인 단테가 천국에 보내기는 좀 그랬나 보다.

 

이렇듯 지옥편에는 다양한 종류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나온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끝까지 간다. 흔히 우리는 지옥을 9단계로 나누는데... 밑으로 갈수록 더 큰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벌도 더 가혹하고.

 

그런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지옥편은 그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종교들이 아무리 많아도, 천국을 약속해도 정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않고 여기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 단테의 지옥편을 읽는 이유는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굳이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여기에서 잘 살면 행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따라오는 보상이라고 해도 좋고...

 

서사시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극시라고 해야 할 작품인데... 읽기에는 편하다. 그냥 시를 읽는 기분으로 주욱 읽어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엄청나게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자세한 설명없이 툭툭 나오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과 기독교 관련자들과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들을 몰라도 왜 이들이 지옥에 와 있는지는 유추할 수 있으니... 그럼 됐다.

 

책 뒷부분에 번역자가 주를 통해 해설을 달아놓아서 주를 찾아 읽으면 많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니... 그리 걱정하지 않고 읽어도 될 작품이다. 이제 연옥, 천국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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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 보는 순간 꼭 가지고 싶은 책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른다. 그냥 마음이 움직이고, 손이 움직이고, 결국 어느 새 나에게 책은 와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서 이책 저책을 보던 중, 수평선 너머란 책을 보게 된 것. 제목만 보고는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책을 쓴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 선생. 우리는 함석헌이라는 이름 뒤에 꼭 선생이라는 말을 붙였다. 좀더 높이고 싶은 사람은 함석헌 선생님이라고 했고.

 

어지러웠던 시대, 그는 우리의 등불이기도 했다. 뜻으로 읽는 한국역사부터 시작해서, 씨알이라는 말. 그렇다. 어두운 시대, 함석헌은 빛이었다.

 

그가 있어서 세상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시를 썼다고 한다. 물론 함석헌의 시는 몇 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시를...

 

읽다보니 시조라고 생각되는 시들도 꽤 많고 장시라고 해서 꽤 긴 내용의 시들도 많다. 여러 시집을 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제서야 시집을 읽으며 함석헌의 이성적인 면이 아니라 감성적인 면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냥 갖고 있어도 든든하다.

 

책이 두껍기 때문에 한 번에 읽을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몇 달을 계속 곁에 두고 있었다. 읽다 말다, 읽다 말다. 그냥 그렇게 곁에 두고만 있어도 든든했다.

 

이제 함석헌 선생은 가고 없다. 하지만 우리 곁에 그는 영원히 남아 있다. 그가 쓴 시들 중에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

 

이런 사람을 가진 사람.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아니, 나 자신이 그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이 시를 인용한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떤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마지막 숨 넘어오는 순간

그 손을 부썩 쥐며,

'여보게 이 조선을'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가졌거든 그대는 행복이니라

그도 행복이니라

그 둘을 가지는 이 세상도 행복이니라

그러나 없거든 거친 들에 부끄럼뿐이니라]

 

★ [ ]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은 육필원고에는 있지만 전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구절이라고 '일러두기'에 나와 있다.

 

함석헌, 수평선 너머(함석헌 저작집 23), 한길사. 2009년. 243-244쪽.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이 되는 사람이 있는 사회, 그렇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그런 사회지.

 

함석헌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 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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