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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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다. 그만큼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기도 하고. 러시아 사람 이름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러시아 이름이 자꾸만 카잔차키스 이름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자꾸만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을 까먹고 '카잔키스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카, 러시아 이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카잔차키스... 이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니)

 

그리스 사람. 그리스 문학자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고대 작가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현대 작가로 그리스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비록 발음을 잘하지 못하지만.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아주 오래 전에는 '희랍인 조르바'라고 번역이 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소설 아니던가. 그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오래 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우리나라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상,하)'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웬지 그의 삶이 내 삶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선뜻 손에 들기 망설여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책을 펼쳤는데... 한번 펼치자 책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삶을 살았구나.. 그가 얼마나 고뇌하는 삶을 살았는지,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는지를 알게 된다.

 

상권에서는 예루살렘에 간 카잔차키스까지다. 그의 삶을 추적하면 그는 이쪽과 저쪽, 즉 피안과 차안, 내세와 현세, 그리스와 터키, 그리스정교와 그리스 신화 사이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반도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마주치는 곳이다. 잘하면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장소고, 잘못하면 어느 쪽에 점령당하는 운명에 처할 곳이다. 그러니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이 이미 중간에 끼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 출신이다.

 

크레타 섬은 그가 태어나고 자랄 당시 터키의 지배에 있다가 그리스로 독립되었으며, 두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던 곳이다. 그러니 그는 태생부터 경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전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크레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다른 방향에서 크레타 독립을, 그리스를 위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크레타인임이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이런 그에게 종교와 상반되는 과학이 사춘기에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점점 자라면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순례하고, 성지를 찾아가게 된다.

 

마음을 두지 못할 때, 고뇌에 시달릴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문학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그렇게 너무나도 힘이 들 때 그는 격정에 휩싸여 글을 쓰게 된다. 이것이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의 모습이다.

 

절절한 고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지도 못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카잔차키스... 그에게 종교는 특정 민족의 종교가 아니다. 그에게 종교는 모든 사람의 종교다.

 

그는 크레타 섬 출신이지만, 그리스인이기도 하고 세계인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라는 지방에,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상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보다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의 소망이 더 잘 드러난다. 왜 예수의 고난만 강조하는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강조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이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더 넘치지 않는가.

 

그런 관점들이 상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권에서는 젊은시절 예루살렘에서 시나이 산으로 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의 영혼이 어떻게 정상을 향해 오르게 되는지... 살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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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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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noent 2019-12-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는 1월 말 개봉하는   영화 <카잔자키스>도 관심부탁드려요~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될까
오노 슌타로 지음, 김정례 외 옮김 / 에스파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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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괴물이 아니다. 그는 괴물을 창조한 인물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면 이상하다. 왜 괴물을 창조했을까? 괴물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좋은, 훌륭한, 완벽한, 쓸모있는, 아름다운 등등의 수식어가 붙기를 원한다. 창조자는 결코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더라도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신은 만족한다. 물론 그 다음에 인간이 창조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성경은 그래서 이런 괴물에 대한 이야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성경을 건드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괴물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이상한, 무섭고, 위험하고, 힘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존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괴물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괴물은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본래 잘 알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괴물처럼 행동하더라도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그러니 논의를 인간을 제외하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 책은 그렇게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부터?

 

바로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욕심에 창조에 몰두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흉측한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분명 흉측하다. 그런데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도 되나?

 

겉모습을 그렇게 흉측하다고 표현한 것은 피조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이 창조했지만 피조물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공포가 나타난다.

 

공포가 나타나면 내가 알 수 없는 존재는 괴물이 된다. 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 없는 퇴치해야 할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 책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부터 시작해서, 하이드, 투명인간, 드라큘라 등이 등장한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또는 인간의 욕망이 극한으로 표현된 것이든 이들은 괴물로 등장하고, 이들은 퇴치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런 인간의 행위들이 올더스 헉슬리가 쓴 역설적인 '멋진 신세계'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통제된다고 여기는 사회, 이 사회에서 괴물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괴물은 바로 인간이 된다. 인공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존재,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괴물을 안고 산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 가사 또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산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감이 생긴다. 이 불안감을 극도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괴물이 아닐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이런 심리적인 면을 넘어서 왜 괴물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괴물이야기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까지 추구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스필버그의 영화까지 언급하면서 우리가 괴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괴물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괴물이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없애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우리는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우주인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적'들을 미지의 존재로 가정하고,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그들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테러'에 대한 영화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다른 존재를 어쩌면 괴물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피조물은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다. 다만, 그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에서 배제된 존재, 그 존재는 괴물이 된다.

 

로봇... 복제인간... 자, 우리는 또다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들을 괴물로 여기고 퇴치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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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7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의 말을 보자.

 

  나는 평생 밀핵시(密核詩)를 추구해 왔다. 밀핵시란 시에서 의미의 밀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려는 시도다. 이것이 우리 시의 약점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밀핵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요소시(要素詩), 일자일행시(一字一行詩)이며, 그 궁극의 형태가 일자시(一字詩) 일명 절대시다.

 

무의미시(김춘수)에서 날이미지시(오규원)란 용어도 있었는데, 이제는 밀핵시 또는 일자시다. 단 한 글자로 시를 이루는 것. 언어를 없애고 없애 결국에는 의미만 남게 한다는 것.

 

'알'이다. 줄이고 줄여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알. 알은 핵이다. 핵은 고도로 농축되어 있기에 터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수다스런 말이 아니라 하나로 응축된 말.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 그런 시를 일자시, 절대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 '서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이렇게 말한다.

 

서시

 

그 날이 그 날 같지만

오늘은 어저께가 아니다.

내일은 오늘이 아니다.

무엇이고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 새롭지 않은 것은 없고

시간 속에서

색이 바래고 때묻지 않은 것도 없다.

새 것도 없고 새 것 아닌 것도 없는

기묘한 현실의 얼개 앞에서

감각과 생각은 여간 무디지 않다.

묵은 것에서

새 싹 가려내는 연습.

새 것에서

영원한 모습 찾는 연습.

동시에 우리말에 새 생기 불어넣는 연습.

그리하여 생긴 것이 이 시집이다.

 

성찬경,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버스. 문학세계사. 2005년. 12쪽.

 

말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응'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같은 '응'이지만 긍정도 될 수 있고, 부정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의문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말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을 한다. 그렇다면 단 한 글자, 그 한 글자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는 단 하나의 글자들을 한 행으로 배열한 시가 있다. 제목은 '해'다. 그리고 '해/달/별/땅/빛/김/참/물/불/흙/넋/피/숨/몸/맘/말..../힘'으로 끝난다. 단 하나의 글자들이 '해'라는 제목으로 시를 이루고 있다.

 

이 단 한 글자들은 해라는 절대 존재와 동격이다. 그러므로 동격들인 낱말들이 행을 이뤄 시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한 글자들이 시를 이루다가 이제는 제목만 남는다. 제목이면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맨 끝부분에 실린 '똥'과 '흙'이라는 시가 그렇다. 똥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냥 똥 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이미지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독자에게 시를 넘기고 있다. 당신의 상상으로 시를 채워가라고.

 

'흙'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인 '흙'을 보강해주는 것은 두 쪽에 걸친 여백이다. 넓은 여백. 흙은 땅처럼 우리에게 어떤 장소를 제공한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다. 그러니 무슨 표현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백지면 된다. 이를 미술과 시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백지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건져내는 것, 이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게 바로 시가 된다. 절대시다. 무슨 말을 주절주절 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많은 시대, 시도 수다스러워지는 시대... 노시인은 시의 말을 줄이고 줄여 나중에는 한 글자로 줄여나갔다. 일자시, 절대시의 세계로 나아갔다. 우주는 넓다. 무한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우주도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 시는 그렇게 우주의 빅뱅만큼이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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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이웃
양혜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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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용이 어둡다. 현실에서 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어두침침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잠깐 희망의 빛이 비추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리는 그런 삶이라니...

 

약한 존재끼리 서로 도우며 서로 기대며 살면 좋으련만, 약한 존재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다수의 약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소수자라고 해도 좋다. 소수자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자다. 이들은 힘이 없어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배척당하는 삶을 산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을 원하지만 소설은 결코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둡다. 무언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자꾸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내용이 이리도 어두운데, 작가는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에서도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 몇몇 소설에서 약자들이 자신을 가해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폭력이 그것을 의미한다면, 결코 이들은 약하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소설집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 '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고요한 이웃, 요나'가 그렇다. 소수자에 해당하는 삶을 살지만 이들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아니다. 물론 폭력이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몸부림도 없다면 그것은 더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작가의 말이 그래서 마음에 다가온다.

 

내가 쓰는 소설은 오색찬란한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하게 치장한 예쁜 인형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에 가깝다. 그 사람들은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너무 작은 그들의 목소리는 몸을 굽히고 귀를 바짝 대야만 들을 수 있다. 힘센 사람들은 어디서든 할 말 다 하고 하지 않은 일을 부풀려 표현하기도 하지만 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겪은 일마저 말 못 하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작은 사람을 품으려 애쓴다. 온몸으로 사람이 사람을 품고 안는 세상. 나는 그것이 '소설'이고,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라 생각한다.  (262-263쪽)

 

그래서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를 그리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냥 죽어지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소수자임에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를 응징하거나(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에게 반항하게 된다.(고요한 이웃, 요나)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소설도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살려고 애쓰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붉은 머리 리카온에 대한 그 감정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 세상 살아가기에 보통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게 돈을 벌어도 빚이 줄지 않는 상황이거나, 간신히 자신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상황이기 쉽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세상이 잔혹하지만, 환대가 멀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환대가 있어야 한다. 환대가 불가능한 세상은 서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환대가 사라진 세상이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반항, 그들이 폭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포기가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폭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폭력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렇게 폭력으로 치닫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음울한 세계는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세상이면 안 된다. 그런 세상, 어둠 속, 약한 존재, 소수자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도록 소설은 만들고 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고맙게 잘 읽었다. 어두운 삶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을 환대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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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시집 뒷편에 쓴 후기를 인용한다. 이 후기에 박영근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민중, 혹은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이며, 가야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다.
  이 시집의 끝에 나의 스승 한분이 당신의 첫시집에 쓰신 말씀 한구절을 적어놓는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어둠과 절망을 제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새삼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온다. 
 
1997년 10월, 인천에서 박 영 근
 
이 시집이 나온 것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막 처했을 때일 것이다. 한창 성장을 구가하던 나라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던 때.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시대로,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박영근 시인은 노동현장의 치열함을 시로 쓰기도 했다. 본인이 노동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동현장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노동시라고 하는 것이 꼭 노동현장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다. 1958년생이면 전쟁 직후에 태어나 우리나라가 발전할 때, 경제적으로는 농촌이 파괴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고,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일반 민중들은 살기 힘들어지던 때. 정치적으로는 독재가 판치던 시대.
 
이 시대에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터. 시인은 이런 시대에 시를 통해 진실되게 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일, 분수를 아는 일. 우리 모두가 이렇게만 살면 어찌 차별이 있고, 억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남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런 특기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시인 약력을 찾아보니 2006년에 돌아가셨다. 채 5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 이 세상이 그리도 살기 힘들었던가. 아니면 시인처럼 자신도 남도 속이지 못하고 분수를 알며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에겐 견디기 힘든 세상이었던가.
 
시인이 저 세상에서 내려다보는 지금 이 세상이 그때보다는 더 좋아졌어야 하는데...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인용한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낡은 흑백 필름 속 같은 곳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내가 보인다
 
한편의 시를 쓰려면
몇밤을 불면으로 때우는 나를
바겐세일도 하지 못해
백화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나의 상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베스띠 벨리 막 화장을 끝낸 마네킹의 얼굴도 보인다
 
TV 뉴스 속에선 한총련 아이들 최루탄처럼 구호를 터트리고
내 귀엔 환청처럼 들리고
대낮 뜨겁게 타오르던 해가
페퍼포그 연기 속에서 복면을 한다
 
꽃들이 일제히 모가지를 꺾고 파업을 했는가
 
부러진 뼈와 두개골 사이로 새파란
억새를 키우고 있는 공장 위로
기억이 모가지를 부러뜨린 채
하늘을 향해 굴뚝을 세우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그래 가자
가자
저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들이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
 
박영근,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작과비평사. 1997년. 92-93쪽. 
 
어둡다. 이상하게 과거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듯한 느낌. 미래로 가려 하는데, 그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 세상에 은행나무들이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동의 시대, 노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뜻인가? 그럼에도 노동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는 가동이 멈춘 공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는 또 무엇인가. 87년 유월 항쟁을 이야기하는가? 유월 항쟁으로 인해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의 현실, 민중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래서 한총련은 여전히 시위를 하고 있으며, 노동자이자 시인인 나는 백화점 문턱을 넘을 수 없고, 공장에선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는데...
 
공장을 멈춰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만 피폐해졌지 않은가. 그런 시대를 겪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맘에 걸린다.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다.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는 말은 결국 그 녹슨 고철덩어리들을 노동의 힘으로 다시 가공해 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노동자들의 삶이 유월 항쟁으로 이룬 것처럼 이렇게 녹슨 고철들을 새로운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것,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노동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이 계속 해야할 일이라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을 시인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 멋대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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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