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뒤에 실려 있는 해설을 인용한다. 이것이다. 무언가 중심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말자. 제목이 '사춘기'다. 질풍노도의 시기.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시기. 논리보다는 좌충우돌, 자신이 무슨 말을, 무슨 행위를 했는지도 잘 생각하지 않는 시기.

 

  시집 제목이 '사춘기'인데, 시집을 읽으면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시인은 시인이고 나는 나다. 시인이 무슨 이야기를 분명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이 생각에 매여 있다. 그렇게 시집을 읽어간다. 그러다 문득 길을 잃었음을, 도무지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사춘기 시기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를 명확하게 설명하라고 하는 꼴이라니... 이건 아니다. 그렇게 시집을 덮는다. 마침 해설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는, 아니 의미가 아니라 일목요연한, 한마디로 이 시의 주제는? 과 같은 그런 의미는 찾지 말라는 말을 읽고, 안도한다. 그래, 뭐 있겠어. 그냥 시집을 읽으면 되는 거야. 무의미 시도 있는데 뭐... 이렇게 스스로 위로를 한다.

 

이 책은 당신의 편집증을 피해 가고 싶어한다. 모든 언어가 하나의 완고한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미 중심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자이다. (141쪽)

 

사춘기를 대하듯 이 시집을 대한다. 하나의 완고한 의미, 그것 포기한다. 그냥 읽는다. 그렇게 여럿이 한 시에 중첩되어 있다고 느끼고 만다. 그래 명료하지 않은 그 무엇들이 이렇게 겹겹 쌓여 시를 이룰 수도 있지 뭐... 그렇게...

 

그럼에도 한 시... '문은 안에서 잠근다'는 시. 문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존재다. 문을 밖에서 잠글 때는 주로 사춘기 이전이다. 사춘기 이전에 문은 밖에서 부모들이 잠근다. 이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문은 안에서 잠근다. 밖에서는 열려고 하지만 안에서 기를 쓰고 잠든다. 나만의 것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나만의 세계에 있고 싶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전히 잠그지는 않는다. 밖과 연결고리를 남겨 놓는다.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에 매여 있지 않는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반발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나는

  썼지만 그는 때때로 아, 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반동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받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문이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16년 초판 9쇄. 57-58쪽.

 

안과 밖, 나와 그, 글과 그, 글과 나... 여럿이 하나로 섞여 있다. 하나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것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하나에서 분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나, 그는 그, 글은 글. 이렇게 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문을 잠그는 주체, 문을 여는 주체는 바로 나다. 나는 그렇게 세상의 중심이 된다. '사춘기'는 이렇게 내가 안에서 문을 잠그기 시작할 때 시작한다.

 

이것도 중심 의미를 파악하려는 언어는 표현의 전달이라는, 소통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 행위다. 에고... 여전히 말은 소통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랴. 무의미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 개정증보판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로 가는 여행이 가능할지? 빛보다 빠른 물체를 만들 수 있다면 타임머신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시공간에 얼마나 많은 시공간이 겹쳐져 있다는 것인지, 우주 여행이 과연 가능할까 등등 많은 의문이 일어나곤 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던지, 과학자들도 영화를 보면서 과학에 대해서 생각을 하나 보다. 정재승이라고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과학자가 젊은 시절에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초판은 1999년에 나왔다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이 책에 나오는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347쪽)고 했는데... 지금 과학기술에 비하면 좀 오래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단지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만이 무어의 법칙을 따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 컴퓨터와 관련된 기술 또 과학기술이 20년 전에 비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서는 스마트폰이 전세계인의 손에서 사용될 줄 몰랐을 거고, 당시 플로피 디스켓(아마 이게 무엇인지 지금 청소년들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이 쓰이던 당시에 그것보다 크기는 작지만 엄청난 양을 저장할 수 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가 쓰이고 있는 지금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심지어는 화성에서 생활하는 영화(마션)까지 나왔으니 지금 읽으면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감을 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나오는 과학에 대한 탐구를 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지금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을 수도 있다. 중국은 달의 뒷면을 촬영하여 보내주고 있기도 하니, 과학기술의 발달 역시 무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조금 오래 되었더라도 이 책은 영화에 나오는 과학적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점이 영화를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따분한 사람, 오로지 실험실에 박혀서 연구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덤으로 알려주고 있고.

 

세상이 발달하게 만든 것은 상상과 과학이 아닐까 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같이 상상이 과학을 이끄는가, 과학이 상상을 이끄는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둘은 함께 할 때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단지 상상이라고 했던 것들이 과학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과학은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더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상과 과학은 우리 세상을 발전으로 이끄는 두 힘이고, 이 둘이 잘 드러나 있는 매체가 바로 '영화'다.

 

영화는 상상과 과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화란 예술 자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화가 우리에게 이렇듯 가깝게 다가오게 된 것에도 과학기술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영화의 내용을 이루는 것들 중에 과학과 관련이 안 된 것이 거의 없으니,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영화는 과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지금은 말이 안 되는 내용이 영화에 나오더라도 이것이 영원히 말이 안 된다는 말은 될 수 없다. 과학자는 지금 영화를 지금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비과학적이라고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몇몇 과학자들은 영화에 나온 상상을 기반으로 자신의 과학을 발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다시 상상은 과학을 추동하여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화는 이 둘의 모습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훌륭한 영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참으로 많은 영화들, 그리고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이 책에 나온다. 딱딱하게만 여겨온 과학을 일상으로 데라고 왔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과학에 대해서 가깝게 여기게 해주는 책이다. 과학을 실험실 또는 책상 위의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고.

 

여러 군데서 나오기도 했지만 우리가 뀌는 방귀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 방귀를 참으면 몸에 좋지는 않다는 것(236쪽)도 나오지만, 방귀로 연료를 개발할 생각으로 징용자들에게 억지로 고구마를 먹이고 ...방귀를 수거했다는...일제시대 일본군들의 만행도 나오니...(234쪽)

 

과학이 이처럼 어렵지 않다는 것,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에서서 과학이 실현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승기의 시네마법정
홍승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영화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은 학년말에 시간 때우기로 소비되는 재료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때 학교에서 소설책을 읽으면 공부 안 하고 뭐하고 있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50-60대가 된 사람들 학창시절이 그러했으리라. 이와 비슷한 일이 영화에도 일어나고 있으니, 영화를 학교에서 보면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한다는 소리를 들으리라.

 

소설과 영화. 시간을 죽이는 그런 재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을 많이 읽고 자란 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듯이, 영화를 많이 보며 자란 세대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단 증거 또한 없다.

 

하긴 요즘은 영화도 지겨워서 못 본단 소리가 나온다. 뭐,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이나 걸리는 영화를 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못지 않게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제공하고, 다방면으로 유익할 수 있는 매체이다. 어떤 목적을 지니지 않고 영화를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융합이든 통합이든 이런 말 대신에 그냥 영화를 보면 아무 생각없이 시간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 마음 속에서 어떤 울림을 받든, 아니면 도대체 왜 이딴 영화를 만든 거야 하고 비판을 하든, 또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비평하든, 영화 내용에 대해서 생각을 하든, 감독의 표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보태든 어떤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매개로 하여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된다. 자연스레 융합, 통합이 된다. 이 책은 그런 영화의 속성 중에서 '법'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가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일은 법정에 가지 않는 것이겠지만, 법정에 가지 않기 위해서도 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영화 속 많은 주인공들은 이렇듯 법과 마주치고 있다. 그런 마주침을 통해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총 6부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성'에 관한 것에서 거대 권력과 제도로, 그리고 인권, 표현의 자유로 나눠 영화를 통해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온 법정이나 또는 법과 관련 있는 내용을 설명해주면서 법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기에 영화와 법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쟁점을 잡아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다음에 시간이 많이 흘러 더 많은 쟁점들이 나왔겠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내용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판결이 바뀐 것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 의식이 변해서 옛날 법체계에 불과해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도 우리 역시 겪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 간접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만 많은 영화, 많은 사례들을 다뤄서 조금 소략하다는 느낌이 있는데, 이를 좀더 집중해서 자세히 풀어나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반인들이 법에 접근하기 쉽게, 법을 무슨 딴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 법조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하는 행동이나 대사 중에 실제 법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들을 알려주고 있고, 주를 통해서 자세한 사항을 안내해주고 있다. 아마도 그런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면 더 많은 참고자료를 찾는 수고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각 영화와 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글이 끝난 다음에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어떤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시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첫시부터 마지막시까지 그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에 대한 옴니버스식 진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무언가 시적이라기보다는 산문적인 그런 시들. 그러나 읽고 나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그런 시들.

 

  시인은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내고 있다. 시집 제목도 "껌"이다.

 

  우리가 "껌"을 얼마나 천대하고 있는가. 사실 자신의 외로움, 두려움을 가장 잘 달래주는 존재가 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껌을 무시하거나 홀대하고 있다.

 

"껌 값밖에 안 돼." 별것 아니라고 하는 말에도 이렇듯 껌이 달라붙는다. 달달하기에 씹기 시작하는 껌, 그러나 씹다보면 단물이 다 빠지고 질기고 질긴 고무만 남는 그런 껌. 이 껌을 시로 불러내다니.

 

      껌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도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뻘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김기택, 껌. 창비. 2011년 초판 6쇄. 28-29쪽.

 

"껌"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니, 시를 읽으며 미켈란젤로를 떠올렸다. 조각을 할 때 자신이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들어 있는 형상을 끄집어낼 뿐이라고 했다는 그를.

 

김기택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스쳐지나가듯이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응시는 곧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있는 형상을 끄집어냈을 뿐이라고 한 것은 결국 돌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는 얘기와 다름 없을 테니까...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은 결국 나와야 할 내 몫의 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유전자지도에 그려진 내 얼굴 모양·본능 모양·성격 모양처럼 정확한 내 '꼴',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그 꼴값이다. 의식적으로 변화하려 하기보다는 그 '꼴'이 불러주는 그대로 받아적으려고 했다. (126쪽)

 

시인은 세상 모든 것에서 자신을 보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존재들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의미들이 시인의 마음에 상응하여 언어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나오게 된 언어를 독자인 나는 또다른 언어로 만나고, 그 언어를 통해서 존재의 마음에 또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세상은 이렇게 시를 통해서 거대한 공감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  하여 시를 읽는 내내 마음에 어떤 큰 울림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1-26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2 - 영혼과 꿈을 그린 40인의 화가들
이성희 지음 / 컬처라인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한번에 주욱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책을 구입하다 보니, 1권을 구입한 지 꽤 지나서야 2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림이나 문학이나 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특히 릴케란 시인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시인이니,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라는 제목은 문학과 그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릴케의 시가 많이 인용되는 것은 아니다. 릴케보다는 오히려 그림에서 떠오르는 시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고 하는 편이 좋다. 가령 정선의 박연폭포라는 그림에서는 김수영의 폭포란 시를 떠올린다던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는 허수경의 시를 떠올리는 것이 그렇다.

 

이렇게 그림과 문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림이나 문학이 하는 역할이 그것 아니겠는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우리에게 다시 불러내 보여주는 것. 그렇게 때문에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1,2권 합치면 총 40명의 화가들이 나온다. 이 말은 거의 40편에 해당하는 시를 만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림도 보고 시도 읽고 또 그동안 놓쳤던 것들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이렇게 이 책은 우리에게 조금 찬찬히 세상을 살아가도록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화가는 바로 김기창이다. 어렸을 적 병을 앓아 청각을 잃은 화가. 청각을 잃고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그림을 통해서 그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김기창을 다루면서 나오는 시가 바로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란 시다. 마지막 구절이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시.

 

'왜 사냐건 / 웃지요'

 

순수한 그런 것이다. 이성으로 계산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표현하는 것.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런 '바보'들로 인해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부분은 그래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빠른 사람, 교활한 사람만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숨가쁜 속도, 똑똑하고 자만으로 가득 찬 프로 9단들이 설치는 속고 속이는 세상은 참으로 살벌하고 불행한 세상이다. 죽임과 죽음의 문명이다. 오늘 우리에게 순박한 바보의 미학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211쪽)

 

이들에게 '왜 사냐건' 하면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할 것이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 속으로 온갖 궁리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그러나 순박한 바보들은 그냥 웃는다.

 

많은 것을 재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그림과 시를 통해서.

 

저자가 말한 '죽임과 죽음의 문명'에서 지금 우리는 벗어났는가? 벗어났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런데... 왜 자꾸 그런데?라는 생각이 들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우리와 함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한다. 예술은 그래서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