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가 그랬던가. 그의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그렇다면 60-70년대 청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사람들을 키운 것은? 바로 청계천 뒷골목 또는 세운상가가 아닐까...

 

  이곳에서는 못 구할 것이 없었다고 하고,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욕망하던 것들을 은밀하게 이곳에서 얻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렇게 세운상가를 통해서 어른이 되어갔다.

 

  아니 어른들의 세계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 하던 세계를 세운상가에서 만나고, 경험하고 자란 세대들.

 

그들은 그래서 세운상가의 아이들, 또는 세운상가를 통해 사랑을 배운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청소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세운상가를 통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 청소년들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시집에는 그래서 뒷골목에서 이야기되던 것들과 대중문화가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차마 연예인이 된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저 연예인들을 우상으로 섬기던 청소년들이 있었음을...

 

이 시집 도처에 나오는 연예인들 이름은 그래서 그 당시에 욕망하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욕망이 과연 채워졌을까는 논외로 하자. 그렇게 욕망하던 것들을 통해 성숙이라는 길에 들어서게 된 청소년들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욕망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지금은 비록 비루할지라도 이들이 꿈꾸는 모습은 저 하늘 위에 있는 별과 같은 것이었으니. 그 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꿈만 꾸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같은 존재.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흑연과 다이아몬드'

 

탄소라는 같은 구성 원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너무도 다르게 느껴지는 이 두 물질을 하나로 묶어 놓은 시.

 

  흑연과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같은 구성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흑연은

원자의 결합 상태가 느슨하고

조직이 헝클어져 있을 뿐

 

그렇다면 혹 나도, 심신의 조직이

미세하게 헝클어진 관계로

광휘만을 숭배하는 이 인생의 광산 속에서

흑연을 닮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매순간, 자신의 육체를

값싼 종이의 여백과 기꺼이 맞바꾸고 있는,

캄캄한 흑연의 운명

 

같은 구성 원소? 물론 다아이몬드는 간단히 비웃겠지

같잖은 흑연의 광물적 몽상과 비약을,

그러나 닳아지는 살들이여, 난 끝끝내

흑연의 영혼으로 걸어갈 것이다

저, 노래의 다이아몬드를 향하여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6년 초판 3쇄. 56쪽.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꿈꾸는 우리 인간들 모습, 그래서 우리는 흑연처럼 살아가지만 결국은 다이아몬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다. 

 

세운상가 키드라는 그리 좋은 이름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자라서 다이아몬드처럼 인정받는, 빛나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삶의 진창에서 허덕일지라도 우리는 밝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지 않는가. 새해, 이제 그렇게 흑연처럼 살아갈지라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곳은 다이아몬드임을 이 시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올 한 해 '끝끝내 / 흑연의 영혼으로 걸어갈 것이다 / 저, 노래의 다아이몬드를 향하여'라고 한 구절처럼 그렇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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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격동기 중국 현대사를 살아온 한 노인의 이야기다. 중국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어려운 일들을 겪었는데, 그 일들을 겪는 모습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이 [인생]인데, 예전에 나온 책은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다고 한다. 중국어 제목이 '활착(活着)'이니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이니 어떤 제목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는데, 이 사람의 인생에서 중국 현대사까지 겹치고 보니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 현대사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사회가 아무리 변화가 심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사람들은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나 싶다.

 

푸구이. 지주의 아들. 젊은 시절까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개차반인 인생이다.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 젊은 지주들이 빠지기 쉬운 길에 들어서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인생 전반부.

 

도박판. 결국 인생은 도박과 같다지만 아니다. 도박판은 거짓과 사기가 난무하는 현장이다. 인생은 그런 거짓과 사기를 딛고 현실에 살아가는 과정이고. 그는 전재산을 날린다.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전락. 그나마 원하지 않게 군대에 끌려가는 푸구이. 국민당 군대. 얼마나 썩었는지 소설에서 국민당 군대의 중대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중국은 아무리 비판을 하더라도 국민당에 의해 유지될 수는 없는 법. 푸구이는 공산당에 포로가 되지만 그들은 자유의사를 존중해 준다.

 

여기서 위화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 중국은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부패한 국민당 치하의 중국은 아니다. 장점이 많았던 공산당.

 

'은혜 갚는 건 포기하자. 대신 해방군이 잘해준 건 절대 잊지 않기로 하자.' (105쪽)

 

이 문장에 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난봉꾼에서 착실한 농군으로 돌아온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삶.

 

마냥 평범한 삶이 지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세상일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푸구이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고 겪게 되는 문화대혁명의 모습은 중국 사회주의가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당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실행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람들 삶의 행복은 거대한 목표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나온다. 푸구이의 삶은 그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가족이 함께 살아단다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이런 행복이 끝까지 유지되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러한가?

 

푸구이는 가족들을 모두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낸다. 그리고 늙은 소와 함께 늙어간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듯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는 말이 있다. 어떻게 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하는 그런 삶들.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길흉화복을 겪게 되겠는가. 그 어느 것도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잘나간다고 마냥 우쭐해서도 안 되고, 지금 힘들다고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푸구이 노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위화 특유의 경쾌한 문체, 빠른 전개로 한 노인의 인생이, 한 가족의 삶들이 소설 한 편에 실려 있다. 극심한 슬픔을 동반하는 장면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그의 소설 전개는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그리고 비관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겨내는 등장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라는 듯이. 그래 우리네 인생에는 이렇들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어느 하나만으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우리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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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시집이다. "눈물이라는 뼈'

 

  우리 삶에 눈물이라는 액체가 삶을 더 단단하게 하는 뼈와 같은 고체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아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이야기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던데, 그만큼 눈물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른 시집인데, 읽다가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박혔다. 이 시에서 제목으로 나오는 별이 '명왕성'인데, 한때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불렸던, 하지만 지금은 행성에서 뻴셈을 당한 별.

 

그 별에 대한 시 구절 중에서 '이곳은 뺄셈이 발달한 나라'('명왕성에서' 부분. 71쪽)라는 시구.

 

더하기, 곱하기만 우대받는 사회에서 빼기, 나누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괄시받은 우리나라에서 이 시구를 보자 '눈물'도 역시 뺄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의 3부는 '명왕성에서'에서 시작해 '명왕성으로'로 끝난다.

 

그만큼 시인에게 명왕성은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는데... 명왕성이 행성에서 빠졌다는 것, 또 명왕성의 영어 이름이 pluto라는 것, pluto는 하데스의 다른 이름이니 곧 저승의 왕을 뜻한다. 저승이다. 이승에서 빼기가 된 세상. 곧 명왕성이다.

 

저승은 곧 이승을 생각하게 하므로 '명왕성에서 명왕성으로'는 '저승에서 저승으로'가 아니라 '이승에서 이승으로'로 읽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토대로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뺄셈이라고 생각한다.

 

빼야지만 더할 수 있다는 것. 눈물 역시 흘려야지만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더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빼기에 해당하는 눈물은 삶을 더하는 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떠나지 않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여기에 뺄셈으로 인한 덧셈이 나온다. '고독에 대한 해석'이라는 시에서 빼기가 어떻게 더하기가 되는지 알 수 있다. 

 

  고독에 대한 해석

 

구석기 시대 활을 처음 발명한 자는

한밤중 고양이가 등을 곧추세우는 걸

유심히 보아두었을지 모른다

 

저 미지를 향해

척추에 꽂아둔 공포를 힘껏 쏘아올리는

직선의 힘을

 

가진 적이 많아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울음이

가진 적이 없어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만 같은 울음에게

활을 겨누던 시간들이

흐른 후

 

19세기 베를린에 살던

부슈만 씨도

한참이나 관찰했으리라

기지개를 쫘악 펴고 일어난 길고양이는

일평생 척추에 심어둔 상처로 성대가 트인다는 것을

 

버림받은 이가 버림받은 이에게

마음 여린 이가 마음 여린 이에게 내밀었던

덥썩덥썩 잡았던 손목들이

싹둑싹둑 잘려나갈 때

 

세상 만물이 궁수처럼 흔들림이 없고

사방 천지가 온통 과녁뿐이란 사실이

단지 참혹했을 때

 

그는 집에 돌아와

울음이 그칠 때까지 주름상자를 접고 접어

오로지 탄식만으로 발성하는

아코디언을 발명하게 되었으리라

 

김소연,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10쇄. 110-111쪽.

 

이 시에서도 무언가가 빠져나가야지만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뺄셈을 통한 덧셈이다. 이런 뺄셈으로 가게 하는 것, 뺄셈을 인식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고독 아닐까. 고독은 그래서 뺄셈이 도달한 극점이고, 이 극점에서 다시 더하기가 시작된다.

 

고독의 끝. 어쩌면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을 내딛는 것, 처절한 또는 과감한 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빼기는 0으로 또는 마이너스(-)로 가지 않는다. 무언가가 다시 태어난다. 만들어진다.

 

더히기, 곱하기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가 아닐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빼기에 대해서, 나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진실이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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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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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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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대하여
김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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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그리 편한 책은 아니다. 문학평론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책도 아니고, 철학책도, 시류를 비판하는 책도 아니고... 어떤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 솔직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도서십진분류표에 따라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 책 속에 여러 내용이 들어있을 때는 더 그렇다.

 

책을 쓸 때 저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다. 목적이 없더라도 글이 자신에게 왔다고 하는 저자들이 있더라도, 대개는 어느 한 분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분야, 저 분야에 모두 속하는 책들이 나올 수 있다. 아니 나와야 한다.

 

세상 일이 그렇듯이 어느 한쪽으로 반듯하게 잘리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참 다르게 이해되기도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 편향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도 한사코... 나는 불편부당한 사람이라고, 내 글은 불편부당하다고,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자신에게 여러 편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공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양, 글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떨어지는 양 그렇게 여기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도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려 한다. 이 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을 반대 편에 놓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봐라, 난 이 쪽에 있다. 저들과 다르다. 이렇게 자신을 자리잡게 하기 위해 상대를 설정한다. 특히 이 상대는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보다 못한, 아니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역시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끌어들인다.

 

이들을 이 책에서는 비체 -非體-(앱젝트abject) 라고 한다.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쓰레기가 되는 존재라고 한다. 이들을 자기 바깥에 규정함으로 자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러운 것, 즉 내가 배제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를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를 지킨다는 말을 '정체성'이라고 하면 이런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내 '정체성'은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올바름이고 정당성이 있다. 그런데 '정체성'이란 상대를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긍정적이고 도덕적, 올바름, 정당성이 있으려면 상대는 이 반대에 있어야 한다.

 

상대는 나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존재가 앱젝트(비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이런 존재들을 찾아낸다면 바로 '빨갱이, 친일파'일 것이다.

 

제목이 되는 글은 바로 이런 논의에서 나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오지 않은 '전후 戰後')

 

차분히 읽어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우리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체들을 동원했는지, 그것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즉 나는 나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나 역시 복잡한 여러 존재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나를 우리와 묶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길이 바로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체성' 논의는 우리가 비판하는 파시즘과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다. 국가주의가 문제라고 하지만 '정체성'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국가주의' 논리에 함몰될 수 있다.

 

결국 '네 칼로 너를 치리라'라는 말은 같은 논리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말이다. 굳이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괴물과 싸우는 이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네 칼로 치다보면 자연스레 자신도 같은 처지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나를 보는 것, 철저하게 나를 인식하고 상대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상대를 비판하기는 쉬운데 자신을 돌아보기는 힘들다. 내 밖에 있는 적을 상정하고 적을 공격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을 공격하는 자신이 적과 같아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나 역시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고 한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분류하는 적과 나를 가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고민을 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제기, 받고,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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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요 맛난거 많이 드십시오^^ㅋ

kinye91 2019-02-0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카알벨루치님도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데이지 크리스토둘루 지음, 김승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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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다. 이 말이 먼저 나온다. 우리나라 교육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떤 답이 있다는 말인지... 최근에 'SKY 캐슬'이란 드라마가 이야기 중심에 서 있나 보다.

 

서울대,고대, 연대를 영어 앞 글자를 따서 이름도 찬란한 하늘, SKY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데, 이 대학들 중에서도 의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드라마라고 한다. (사실 이야기만 들었지 잘 보지 않았지만 내용은 대충 짐작이 가니...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무슨 창의융합, 배려, 관계지향, 민주시민, 공동체 그런 역량이 필요하고, 또 포함되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지...

 

그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는 마치 다 끝낸 것처럼 다음부터는 공부하고는 멀어지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인가?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은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오기 쉽다.

 

정말 답이 없다. 학교는 거대한 입시 기관이 된 지 오래고, 학교만으로는 부족해서 학원이 입시 기관으로 학교 위에 덧칠되어 있고, 이런 학원으로도 모자란지 무슨무슨 컨설턴트(사람들 참, 무언가 일을 할 때 외국어 잘 쓴다... 마치 있어 보이는 양)라고 하여 그 위에 또 덧칠이 된다.

 

여기서 지식이든 역량이든 어떤 것이 교육되는지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좋은 교육은 좋은 대학에 보내줄 수 있는 교육이다. 혁신학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대두되는 것이 - 통계가 잘못되었다든지, 잘못 인용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 학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학력이라는 말은 진학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며, 진학이라는 말은 곧 좋은 대학에 얼마나 학생을 많이 보냈느냐로 결정이 된다. 여기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느냐, 그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저한 결과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것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교육과정은 핵심역량 강화, 학생의 배움 중심 교육, 창의융합 교육, 공동체 정신 함양 등 좋은 말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지식위주의 교육은 안 된다고, 프로젝트 위주의 수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교육과정을 이루고 있는 기본 지침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영국 교육과정을 비판한 책이고, 그것도 2013년도에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지금 교육과정이 2015년에 개정된 것이고, 이때 영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교육과정을 참조했다고 하니,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대해 생각하는 참조 자료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론적 배경-> 적용 사례 -> 왜 미신인가?라는 세 과정을 통해서 일곱 가지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일곱 가지 미신을 먼저 살펴 보자. 아니 미신이라는 말보다는 신화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미신이라는 말에는 이미 좋지 않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신화라는 말에는 좋음이라는 의미가 함께 하고 있으니.  

 

지식보다 역량이 더 중하다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다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이 교육 현장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역량이 어떻게 발휘되지?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역량이 발휘될 수 있나? 또 학생 주도의 수업이 가능해지려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무런 지식도 없는 학생들에게 체험 해 봐라 토론 해 봐라 하면 무엇이 나오지, 제자리에서 겉돌거나 너무도 얕은 수준에서 학습이 끝나지 않나. 뭐가 있어야  전이가 되고,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검색을 하지... 새로운 교육이란 과거를 몽땅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지식 위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위대한 과학자 뉴턴이 왜 위대한가?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 시작했기 때문인가?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위대한 과학자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77쪽)

 

스마트폰만 있으면 더 많은 지식이 검색되는 시대, 손 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지식 운운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검색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지? 많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검색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검색하는 것이 같은가? 아마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조목조목 자신의 근거를 들어서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사회 경제적 차이가 교육에서도 그대로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많은 지식을 쌓고 학교에서 이런 학습을 하는 아이들과 가정에서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학교에서 이런 학습을 하는 아이들은 출발점부터 다를 뿐더러 결과도 분명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주교육, 평등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 이 점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무엇이 불평등을 없앨 수 있는 교육인지...

 

하여 저자는 학교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핵심 지식을 정리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수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지식을 체계화 해서 교육해야 한다고, 그것이 먼저 시행되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습자 중심, 프로젝트, 체험 활동, 역량 강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또한 지식과 역량은 따로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명심하라고 한다. 교육현장에서 결코 지식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교육에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사회적으로 방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가상 현실이 되게끔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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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0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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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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