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자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자기가 말할 때가 아니라 녹음해서 들리는 자기 목소리를.

 

  참 낯설다. 저것이 내 목소리라니... 아닌데... 내가 말하면서 듣는 목소리와 다른 매체에 녹음되었다가 들려오는 소리는 다르다. 내가 모르던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막말을 하고, 그 소리를 녹음해서 듣는다면, 내가 막말을 할 때 듣는 소리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녹음 한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막막할 때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을까? 이것이 내 목소리라는 것을 모르고 들을 때 나는 그 막말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까?

 

궁금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막말들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경주의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읽다가 '비어들'이란 시를 발견하고,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비어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린다

입안은 저승이다

 

저승은 거울 속에 있다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거울 앞에 서 있는 그는

잠시 저승을 엿본다

 

오직 그의 한 눈만이

입안의 저승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 눈은 아직 이쪽에 있으므로

저승의 언어는 입안에 있다

 

입을 닫으면

저승은 닫힌다

 

지금 저승은 저곳의 세계가 아니라

이곳의 언어다

 

거울은 우리에게 저승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물성이다

우리의 눈은

거울 속 입으로 걸어가는

이승의 언어다

 

언어가 피해갈 수 없는 저승은

그 사람의 입안에 있다

침묵처럼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년. 72-73쪽.

 

'들'이란 말이 붙었으니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말일 테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비어'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이 이 정도일 거라고 추측했다. 날치를 뜻하는 말인 비어(飛魚)는 아닐 것이고, 시의 내용으로 말과 관련된 낱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한자어를 같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을 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세 낱말이 모두 해당될 듯하다.

 

비어 01(卑語/鄙語):「1」점잖지 못하고 천한 말. ≒비언02(鄙言).

                          「2」대상을 낮추거나 낮잡는 뜻으로 이르는 말.

비어03 (飛語/蜚語):  근거 없이 떠도는 말

비어04 (祕語): 비밀스러운 말. 범죄자들이나 비밀 단체 요원이 남몰래 자신들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쓴다.

 

이 풀이를 참조해서 시를 읽어보면 입안이 지옥이라는 말은 우리가 뱉은 말들이 지옥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입안에 있는 컴컴해서 보이지 않는 심연, 그곳이 지옥일 수 있다는 것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지옥을 보지 못한다. 지옥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하다.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을 그 자리에서 듣는 것으로는 지옥을 볼 수 없다. 그 말을 뱉은 순간을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다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옥을 볼 수 있다. 눈 앞에 보이지 않던 지옥이 눈 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지옥은 부정하기 쉽다. 한 눈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한 눈으로만 본다는 것, 지옥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옥을 닫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 지옥을 보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 지옥이 있음을, 그 지옥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옥 문을 활짝 열고 온갖 비어들로 지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기 몸 속에 난 엄청난 지옥을, 그 지옥으로 초대하는 온갖 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정치가들...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들...

 

이들은 자신의 입안에서 나온 비어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할까? 그래서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반대편에서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생활에서 거울을 볼 수 없다면, 굳이 그것이 거울이라는 물체여야 할까? 거울은 도처에 있지 않은가. 바로 자신 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거울을 보지 않게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눈을 뜨고 거울을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막말들, 갑질들-여기엔 비어들이 한몫 한다-이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김경주 시 '비어들'을 읽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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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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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은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할일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인생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계절로 치면 겨울이리라. 시간으로 치면 자정에 가깝거나 자정을 막 지났거나. 예전엔 자정이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었지만 요즘은 막차가 연장된 관계로 자정이 넘어서야 하루가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이 시집 제목, 겨울밤 0시 5분이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바치는 노래라고 해도 좋겠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나이든 삶에 대한 시가 많다. 황동규 시인이 1938년생이고, 이 시집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고희라는 말, 예전부터 희귀했다는 나이 70이 이제는 별 것 아닌 나이가 되었지만 사회에서는 한발 물러나 이제는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끝일까? 아니, 시작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살아온 날보다는 분명 적을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나이니까 말이다.

 

시집에서 그런 감정이 담긴 시어를 발견했다. '다행이다' 그래 지금껏 잘 살아왔잖아, 그것이 비록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온갖 굴곡을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랴.

 

인생 70. 겨울이 아니다. 가을이라고 해야 한다. 열매를 맺고, 잎새를 떨굴 나이. 잎새를 떨군 맨몸으로 세상에 설 나이.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법칙이니...

 

지금껏 살아온 것,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처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2013 년 초판 8쇄.  115쪽.

 

무성한 잎을 떨구고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것들이 드러날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 다시 내가 만나왔던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것. 나이듦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를 읽으며 내 늙음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반추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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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통계와 역사에 문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생의 마지막 풍경
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이 흥미로워 읽은 책.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한다. 두번은 경험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르는 것, 아니 알 수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죽음인데... 이것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이 아닌가 한다.

 

너무도 두렵기에 회피하고 싶은 것, 그것에 관해서 의사인 저자가 이야기해주고 있다. 죽음을 늘 곁에서 지켜본 의사가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죽어가는 모습에 대해, 죽음이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철학적인 사색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아니 죽음을 연장하기 위한 의학기술의 발달과 그 속에서 죽음을 연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피할 수 없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의학기술이 무척 발달해서 연명치료가 가능해진 이 시대에... 과연 그렇게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최선인가? 이 질문에 저자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는데... 그렇다고 안락사를 찬성하느냐 하면 당당하게 찬성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환자가 더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 이르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주장은 한다.

 

그렇게 해서 의사가 본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죽음의 모습이 이 책을 이루고 있다. 안락사 문제까지 다루고, 병원을 떠나 사이버공간에서 죽음이 논의되는 현실까지 다루고 있는데...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죽음의 정복을 이야기해왔고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죽음이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 모두가 침묵을 지키면 죽음은 더욱 막강해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수많은 죽음의 면면을 되살려야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죽음은 훨씬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장애를 덜 겪고 외로움도 덜 느끼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없애버려야 하는 측면이 하나 있다. 바로 소통의 부재이다. 우리가 겪는 죽음이 진정으로 이 시대에 걸맞은 죽음이 되려면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고 교실에서, 술집에서, 식당에서, 뒷마당에서,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병원에서도 진지하고 차분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430-431쪽)

 

이 말이 제목 뒤에 붙는 말이 될 것이다. 두렵지만 이야기해야 할 것.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잘 죽는 것, 그것은 바로 잘 사는 것이다.

 

여기에 기반을 두고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치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 생각해야 한다.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 죽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저자는 죽음에 대해서 시간-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야기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면,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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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2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과 상상력 - 나무 인문학자의 숲 산책
강판권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숲을 보고, 나무를 보고, 또 나무를 보고 숲을 보고, 그러다가 사람을 보고, 삶을 보고...

 

숲을 여행한 기록이다. 우리나라 멋진 숲들을 찾아 거닐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냥 마음을 비우면 된다. 저자는 '마음의 소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인 '소도'를 마음에 만든다면 어떤 일을 겪더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숲에는 온갖 나무들이 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모두 예쁘게 곧게, 크게, 굵게만 자란 것은 아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주변에 따라 비틀리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하고, 구멍이 나기도 한다. 그런 나무들을 저자는 볼품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나무들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치열하게 살아간 아름다움. 그리고 자신은 구멍나고 죽어가더라도 주변 다른 생명들이 자신에게 깃들게 하는 나무들. 또 줄기 기둥에 커다란 구멍이 났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기도 한다.

 

나무는 독불장군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울린다. 그렇게 나무들이 어우러질때 숲이 만들어진다. 숲은 그리고 또다른 생명들을 받아들인다. 바로 인간들. 자신들을 파괴하는 인간들을 숲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 또한 자연의 섭리인 양 받아들인다.

 

저자가 책 곳곳에서 한 말 중에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인간은 나무 없이 살 수 없지만 나무는 인간 없이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인간의 쓸모에 의해 나무들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또 좋다고 소문난 곳, 곧 인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들이 발길에 의해 숲은 파괴되고, 나무들은 몸살을 앓는다. 그래도 나무들은, 숲은, 다른 생명들은 인간들을 받아들인다.

 

숲에서 나무에서 그런 함께 살아감을 배워야 한다.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강건함도, 장애물을 피해가는 유연함도, 다른 존재에 기대어 사는 모습도, 죽어서도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에서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숲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나무를 보면서 우리 삶을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숲들, 나무들...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또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나무는 치유의 기능을 한다.

 

그런 나무와 숲에 대한 이야기... 책의 끝에 실려 있는 '맺음말'에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우리가 나무를 아끼고 숲을 아끼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숲을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할일이 '나무 이름표 달기'라고 생각한다. ... 나무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바로 이름에 있기에 나무 이름표는 중요하다. 그런데 나무 이름표에 넣어서는 안 되는 정보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효다. ... 대학 캠퍼스는 숲을 학습의 장으로 삼기에 아주 적합하다.  (268쪽)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무 이름표, 중요하다. 산에 가도 또는 수목원에 가도 나무들에 이름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일까 하지만 알아볼 수가 없다. 물론 나무나 다른 꽃들의 이름을 찾는 사이트도 있지만, 직접 내 눈으로 본 그 나무나 꽃들에 이름표가 붙어 있다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또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이다.

 

학교 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아니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나무맹, 식물맹, 꽃맹이 되는지 모른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오랜 시간을 생활하는 그 장소에 나무들과 꽃들이 많은데 제대로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그냥 없는 것처럼 모르고 지나간 경우가 너무 많지 않나. 철들기 시작할 무렵, 청소년기에 학교 교정에 앉아 나무들을 바라보는 여유를 지닐 수가 있나? 학교에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대학 캠퍼스에는 웬만한 숲들이 있다. 그 숲에 제대로 된 이름표를 붙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는 대구 시내 몇몇 공원에 나무 이름표를 달았다고 한다. 어떤 것들이 이름표 속에 들어가 있을까? 바로 이것이다.

 

이름의 의미, 상상력을 키워주는 신화, 관련 시들 (269쪽)

 

좋다. 이런 이름표들이 곳곳에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선 학교에서라도 이런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학생들과 나무를 찾고 이름을 알고, 그 나무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 정리해서 나무 주위에 이름표를 만들어 놓는다면 자연스레 상상력뿐만이 아니라 감수성도 풍부해지지 않을까 한다. 그런 것이 바로 교육 아니겠는가. 저자가 주장한 것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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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1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민들레 121호를 읽다.

 

  여러 주제의 글이 실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호칭 문제가 기획되었고, 가족, 양육, ADHD, 발도르프,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실려 있다.

 

  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호칭 문제로 많이 갈등을 하니 민들레에서도 이에 대해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기획으로 잡은 것을 보니.

 

  공자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했다. 즉,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잘못 썼을 때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들을 떠나서 언어 중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더 문제가 된다. 호칭에는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 호칭에 따라서 위계가 결정이 되기도 한다.

 

'너의 성별을 불러주겠다(이라영)'는 글에서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39쪽)고 했는데, 어찌 성별뿐이겠는가. 학력, 경제력, 지위, 나이에 따라서도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은 작용한다.

 

누구나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다. 중력의 법칙이다. 말이 자꾸 내려간다. 그만큼 상대를 자기보다 못한 존재, 낮은 존재로 파악하게 된다. 아무리 말로는 평등하다고 해도 이미 호칭 속에 불평등이 들어 있으니, 그 말을 쓰지 않는 한 이런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위라고 생각하면 말을 높인다. 부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말은 이미 높여서 나간다. 그러면 자연스레 위계가 작동한다.

 

이렇듯 호칭은 사회적 위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친척간에도 작용을 하니, 주로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과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이 차이가 난다.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부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말을 높이게 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의 동생에게도 '도련님, 아가씨'라는 높임말을 사용한다. 반대로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겐 중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아내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아내의 남자 형제는 모두 '처남'이다. 그뿐이다. 손위 여자 형제는 '처형'이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린 여자 형제는 '처제'다. 그냥 위아래를 구분하는 한자어를 썼을 뿐이다. '-님'이나 '아가씨' 또는 '서방님'과 같은 말을 쓰지는 않는다.

 

호칭의 불평등... 관계의 불평등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여성가족부에서도 이런 불평등한 호칭을 어떻게 고칠지 의견도 모으고 있지 않나.

 

이런 친척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 가장 평등해야 할 부부간에도 호칭에서는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에도 지적하고 있듯이 (33-34쪽)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하면 어떤 관계를 떠올리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은 관계를 떠올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연상연하에서도 남자가 나이가 많을 경우는 '오빠'라고 여자들이 부른다. 여자가 나이 많을 경우에는 처음에는 '누나' 그러다가 곧 '너'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꽤 인기를 끌었던 노래, '내 여자라니까'에 나오는 가사. 호칭 문제의 문제, 성별의 문제를 잘 드러낸 가사 아닌가 싶다.

 

'...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 너라고 부를께 뭐라고 하든지 /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께 / 너라고 부를께 / 뭐라고 하든 상관 없어요 / 놀라지 말아요 / 알고보면 어린 여자라니까 ...' (이승기, 내 여자라니까 부분)

 

예전엔 별 생각없이 흥얼거렸던 노래, 많이 부르고 즐겼던 노래, 그러나 지금 호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이 노래 가사 역시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제기, 호칭에서의 남녀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가사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호칭에 대해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곳이든 많이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수평문화를 추구한다면 우선 호칭에 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호칭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한때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교사와 교육청 관료들 사이의 호칭을 '-쌤'이나 '-님'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과 '쌤' 사이 -한희정)

 

문제제기는 좋았으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고,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호칭을 문제삼고, 그것도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 지시한 모습으로 제시한 것은 수평 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중론이었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에서 그 문제를 없던 것으로 했지만...

 

그렇지만 문제제기는 옳다. 그렇게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가장 평등한 관계를 보여줘야 하는 교육기관에서 불평등한 호칭이 난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 바람직하다. 사회에서 계속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그런 논의과정 속에서 감춰져 있었던 불평등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말해졌다는 것, 언어로 등장했다는 것,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민들레 121호'에서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기획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아이들과 관련해서.. 좀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ADHD문제 아닌가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얘 혹시 ADHD 아냐?"라는 말의 무게 -김경림'의 글을 참조할 만하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나, 어쩌면 그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좀더 많은 연구,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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