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빵집
김혜연 지음 / 비룡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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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상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없는 거라면? 가장 큰 상처는 예측하지 못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그것도 죽음이라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헤어지는 것. 그 상처의 깊이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들이 안고 살아가는 슬픔의 깊이, 넓이...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지만 여전히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문제를 단지 드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런 고통을 정치권은 외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학은 외면할 수 없다. 여전히 진행형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문학이 외면할 수 있겠는가. 시로, 소설로 그 상처를 보듬으려고 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빵'이란 이름을 지닌 빵집을 중심으로 세월호로 인해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과정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빵을 중심으로 그들이 지닌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받아들이게 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하경, 태환, 진아, 소연, 윤지 엄마, 이기호가 주요 등장인물인데, 이들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다. 모두 세월호와 관계가 있는데, 학생 윤지와 교사 영훈과 관련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군에 가서 죽은 오빠의 컴퓨터에서 캉파뉴라는 블로그를 알게 된 하경, 무작정 그 블로그에서 보인 장소로 가다가 우연히 들어간 빵집. 블로그에서 본 빵집. 빵집 주인 이기호.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지금은 아버지가 하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 그 역시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빵집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상처를 극복하고 있던 상태. 그의 친구이자 고등학교 물리교사인 영훈. 그는 수학여행 때 학생들과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약혼녀 소연을 둔 채.

 

윤지와 사귀던 태환과 가장 친했던 진아, 그리고 윤지가 뱃속에 있음을 알게 해준 빵집을 다시 우연히 찾은 윤지 엄마 등. 이들은 빵집을 통해 하나하나 자신들의 상처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빵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게 된다.

 

작가는 이 슬픔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였다고 한다. 악을 응징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다만 이들의 마음을 위무해줄 소설을 쓸 뿐이라고. 이렇게 공감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일이다. 공감의 힘이 얼마나 큰가. 공감은 공명으로, 마음과 마음이 함께 울려 결국 세상을 바꾸게 된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용히 함께 슬퍼해주는 마음, 그런 슬픔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는 마음.

 

소설은 빵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조용히 다가와 빵을 건네거나 빵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하면 된다. 함께 있어주는 것.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착한 사람들, 작가는 약한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착한 사람이 강해야 하는데 약한 사람이 되는 현실을 작가는 직시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다.

 

우연히 발견한 빵집에서 이들은 이제 치유를 시작한다. 소설은 사회부조리, 해경 문제, 구출 문제, 진상규명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받은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이게 다다.

 

그런데 여기서 울림이 일어난다. 마음 속에서 커다란 울림이, 슬픔이, 그리고 그 슬픔을 통해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게 소설의 힘이다.

 

다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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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눈에 보일까? 보이지 않는다고도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바람을 직접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소리를 듣지 않고도 바람이 분다고 눈에 보이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만큼 바람은 눈에 띄지 않지만 눈에 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무늬를 새겨놓음으로써.

 

  이런 바람의 무늬를 사진으로 담고 또 시로도 남겨 놓으면 우리 역시 바람의 무늬를 볼 수 있다. 아니 바람을 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에 사이트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들어가 '*바람'을 쳐서 검색해 보면 무려 175개의 단어가 나온다. 이 중에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도 있고 또 자연현상인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일으키는 바람도 있다.

 

이렇게 많은 낱말이 만들어졌음은 우리의 삶과 바람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서 바람을 빼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자연현상이든 인간의 일이든.

 

가령 지금 우리나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초)미세먼지만 해도 그렇다. 이 미세먼지가 온 세상을 부옇게 덮고 있을 때 우리는 바람을 간절히 바란다. 미세먼지를 날려보낼. 고마운 바람이기도 하다. 반면 미세먼지를 몰고오는, 황사를 몰고 오는 바람은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기도 한다. 또 따뜻한 바람을 기대하기도 하고, 태풍과 같은 바람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은 바람이되 우리들 마음은 다양한 감정을 지니게 된다. 같은 바람은 없다. 다 다른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우리 눈에 띄게 남겨놓는 무늬 역시 다 다르다. 그 무늬를 보면서 바람에 고마워하기도 하고 바람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 사진시집에는 많은 사진과 시가 실려 있다. 사진과 시. 디카시라고도 하고, 사진시라고도 한다. 둘을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 변별을 두기도 한다. 이 시집은 사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러니 사진시집이라고 하자.

 

사진과 시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사진은 시를, 시는 사진을 품어 더 깊고 넓은 파장을 일으킨다. 이 둘이 각자 다른 파장을 일으키다 서로 합쳐 또다른 파장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한다.

 

바람이 다른 존재에 자신의 무늬를 새겨놓듯이 이 사진시집은 우리 마음에 새로운 무늬를 새겨넣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십진법의 세계에서 1+1=2라는 자명한 공식이 이진법의 세계에서는 1+1=10(2)이 된다는 사실.

 

그렇다. 자릿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형식적인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인 결합을 하게 되는 것. 이 시집을 읽으며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오른쪽 사진을 보자. 제목이 심원(心願)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다. 두 개의 공기. 그러나 이 공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이 담겨 있을 것이고 물은 다시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 물에는 사람 마음의 무늬가 있을 것이고.

 

여기서도 바람이 나온다. 이 바람은 물과 공기와 사람과 하늘을 하나로 이어준다.

 

보란듯이 강하게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시인은 사진과 시를 통해 바람의 무늬를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눈으로 쉽게 볼 수 없는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데, '바람의 무늬'라는 제목을 '마음의 무늬(心紋)'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사진시집을 읽으며 내 마음의 무늬를 연상했다고나 할까.

 

덕분에 이 '바람의 무늬'를 통해서 내 마음의 무늬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됐다.

 

코로나19로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 이 어려움이 가시도록, 우리가 잘 이겨내도록 마음을 담아 기원해 본다.

 

덧글

 

알라디너인 ure*님이 보내주셨다. 덕분에 좋은 시간 가질 수 있었다. 너무도 고맙다. 또 이 사진시집을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신 작가 강미옥 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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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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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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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 11 - 임경업전 외
장덕순 지음 / 명문당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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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전문학 하면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 읽었다고 착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또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 읽은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대충 아는 것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다르다.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홍길동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만 해도 그냥 알고 넘어갈 뿐. 또 조웅전이나 류충렬전 같은 작품, 구운몽, 사씨남정기와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목을 알고 내용도 웬만큼 알기에 안다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서 '박씨전'도 마찬가지다.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되고, 청나라 장수를 혼내주는 도술을 쓰는 여인.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을 소설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다는 이야기.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넘어간다. 마치 다 읽은 것처럼. 하지만 다 읽어야 한다. 소설을 다 읽으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박씨전은 이시백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영웅소설의 기본 특징. 신이한 출생 아니던가. 이시백의 아버지는 출중한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이 아들은 태어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소설의 두번째. 탁월한 능력.

 

그러나 그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영웅소설의 세번째 역할. 시련과 극복. 이시백은 천하제일의 박색이라고 할 수 있는 박씨와 결혼을 한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와 결혼하는 것. 오로지 아버지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인이 박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모 중요하다. 오죽하면 박씨를 전신성형에 성공한 사례로 이야기하겠는가.

 

이 시련은 박처사라는 박씨 부인의 아버지라는 조력자를 통해 박씨가 탈을 벗으면서 해결이 된다. 개인적인 시련... 이상하게 여기까지는 박씨 부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시백이 주인공이다. 그를 중심으로 영웅소설의 모티브가 작동한다.

 

그렇다면 박씨 부인은, 우선 못생기게 태어난다. 신이한 출생. (세상에 미추가 신이한 출생의 기준이 될 수 있나, 그래서 세상에서 보아주지 못할 박색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 되는 사람은 그런 박씨의 외모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는 앞부분에서 박씨의 조력자다) 박씨 부인은 뛰어난 재주가 있다. 탁월한 능력. (비록 언급만 되고 있지만, 말이나 연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부터 박씨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련 및 극복. (남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후원에 건물을 짓고 피화당이라고 이름 짓는다. 화를 피하는 곳. 이때 화는 병자호란이다. 나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어야 한다. 이게 시련이다. 곧 조력자를 만나 극복하게 된다. 허물을 벗은 것. 미녀가 된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

 

자, 이시백과 박씨 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까지다. 이들의 시련은 모두 극복되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지만 소설이 여기서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영웅소설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나라의 문제로 확장해 가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라의 고난이 나온다. 전쟁을 겪게 되는 것. 병자호란이다. 이미 진 전쟁. 역사적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복수해야 한다. 용홀대다. 용골대 동생으로 나온다. 박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존재. 또 왕대비가 끌려가는 것을 막는다. 세자와 대군들만 청나라로 가게 된다.

 

시련이다. 극복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데려오는 것. 임경업이 사신으로 가 모셔온다.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난다. 세자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대군은 백성을 이끌고, 막내 대군은 그냥 가고 싶다고 말한다. 

 

당시는 소현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상태. 북벌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 그렇다면 누가 인정받는 왕자가 되어야 하는가? 호왕이 선물을 준다고 말해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답은 당시 지배층이나 백성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북벌? 백성을 위한 왕자는 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다. 그가 곧 효종이다. 이것이 당시 주류의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렇게 표현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임경업전]에서도 이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자, 이게 극복방법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적으로 발전을 해서 청나라와 비슷한 또는 청나라를 극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복수의 방법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같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한발 물러나 세상의 발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한데 당시 양반들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있어도 탄압당한다. 말을 못한다.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이런 모습을 [박씨전]은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임경업의 죽음... [박씨전]에서 임경업은 후반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임경업전]에서는 그 전말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그래서 [박씨전]과 [임경업전]은 함께 읽으면 좋다.

 

[박씨전]에서 그 신통력 있는 박씨가 임경업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르쇠한다.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시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관망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임경업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런 뒷이야기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임경업의 최후에 대해서 [임경업전]도 아닌 [박씨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다. 더이상의 행동은 없다.

 

영웅소설의 마지막은 대업을 이룬 다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잠자는 듯이 죽었다는 표현.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도 앞과 뒤는 이시백이 주인공이 된다. 박씨는 중요한 역할을 못한다. 다만, 소설의 중간,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다음에 신통력으로 활약하는 박씨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라도 여성 영웅을 등장시키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된 상태에서는 이런 여성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박씨전의 뒷부분에서 박씨가 그다지 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더이상 여성들의 힘을 살려줄 수가 없는 상태.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박씨전은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이런 여성 영웅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나중에 난세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여성들이 삶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일상에서의 여성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이 사회는 덜 발전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박씨가 겪었던 일들을 과연 지금 여성들이 겪지 않고 있는가? 이들도 박씨처럼 허물을 벗든지, 아니면 자신을 이해해 줄 조력자를 만나든지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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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으며 '성(聖)과 속(俗)'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성스러움과 속됨이라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구름 따먹는 소리와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시인 약력에 보니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2003년에 나온 시집이니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들이 꽤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이 바로 속됨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현실에서 초월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충실한 사람만이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이상의 세계, 초월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이상을, 초월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 구름 따먹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냥 허공 중에 흩어지는 말을 할 뿐이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현실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런 현실에서 초월의 모습을,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집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시들이 많다. 시인은 서로 다른 존재들에게서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낸다. 이런 표현들이 바로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어떤 장기 기증자'라는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는 사람을 연상한다. 하지만 아니다.이 시에서 말하는 장기 기증자는 낡은 트랙터다. 자신의 부품을 다른 기계에 주는 낡은 트랙터를 장기 기증자에 비유하고 있다.

 

농사 기계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이렇듯 시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삽'이라는 시도 그렇다. 심고 캐내는 일. 씨앗을 심거나 울혈을 빼내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삽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성화(聖化)'란 시가 있다. 성스럽게 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속된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일까? 시의 맨 마지막에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 똥이올시다'(118쪽)라고.

 

이렇듯 속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것들을 이상적인 자리로 끌어올리는 시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 삶이 바로 성스러워야 한다. 성스러움은 특정한 공간에 또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시인이고 시다. 이런 시들을 만나면 현실이 더 성스러워진다. 우리들 일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한 시를 더 보탠다. 명심해야 할 시.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히나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시다. 이 시는 그래서 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씨앗을 심는다. 그런데 그 씨앗을 품지 못한다면 파내어버린다.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다시 작은 토립자(土粒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

그 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

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은 땅은 갈아엎기 힘들다

쟁깃날이 튄다 부러져나간다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콘크리트 밭에 사람들 우거지듯 늘 점령군 같은 잡초만이 빼곡히 자랄 뿐이다

그건 우리를 비웃는 땅의 조용한 테러이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장기집권체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흙이, 사람의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년. 105쪽.

 

땅을 갈아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잘 갈아엎지 못한 땅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신이 '묵은 땅'인지, 그래서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황량한 황무지'로 남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듯이 우리들 삶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들 삶이 현실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즉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한 시만 더 이야기하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시, '물 위의 발자국'(74쪽)이라는 시. 한번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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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시인선 19
황형철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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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만큼 도대체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달리는 차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제동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 제동장치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발전이라는 환상에 휩싸여 있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한 순간 바이러스가 또는 다른 것들이 친다. 사정없이. 이건 몰랐지 하면서. 너네 한번 당해봐라 하는 듯이.

 

몇 년 간격으로 '신종'이라는 이름을 단 바이러스들이, 질병들이 나오고 있다. 부작용이다. 항생제가 듣질 않는 슈퍼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기존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변종을 일으켜 기존 약으로는 잘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것도 특정한 지역, 특정한 연령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전연령대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반응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집중한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이.

 

황형철 시집을 읽으며 제목 '사이도 좋게 딱'이란 자연스럽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내 탓 네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서로 보듬고 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함께 함. 시집에서 두 시가 지금 상황과 더불어 마음에 남았다. 물론 시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시에서 그때 그때에 맞는 상황을 발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다저녁 무렵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진도 팽목항의 어느 현수막에서)

 

기교나 수사 따위에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분하고 답답한 마음 알아주는 것

내 일인 양 가슴이 저미어 다름없이 흔들리고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하는 것

정작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 주는 것

시시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시란 그런 것

정치도 그런 것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44쪽.

 

시가 그런 것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치도 그런 것이라는 것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읽으며 다시 떠올리게 됐다.

 

그래 정치란 무엇인가? 어려운 사람, 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보듬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을 주는 사람 아닌가. 네 탓 내 탓 공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정치인 아니겠는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기교나 수사를 남발하는 말들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정말로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사람, 조용히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흔히 하던 말인 '밥 한번 먹자'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가족이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격리 대상자들에게 이 말, 밥 함께 먹자라는 말,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겠는가.

 

  밥 한번 먹자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23-24쪽.

 

식구(食口)라는 말. 함께 밥을 먹는 입. 그런 식구. 격리 대상자가 되면 식구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한다.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함께 먹지 못한다. 하물며 식구가 아닌 사람임에랴. 그만큼 감염병은 우리에게 많은 제약을 준다.

 

지나가면서 인사치레로 했던 말. 언제 밥 한번 먹자. 이 말이 이렇게 소중한 말일 줄이야. 이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이야. 새로운 질병으로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지금. 다시 예전처럼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식구들끼리 예전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밥을 먹는 때가 오기를...

 

그래서 모두가 자연스레 사이도 좋게 딱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많아지기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지금... 봄은 봄이어야 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 생활에도 봄이 오기를... 황형철의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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