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모래바람 - 최경주 연작소설
최경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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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있었던 주바일 폭동사건(폭동사건이라고 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항의 사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을 주요 사건으로, 김대위란 인물을 주요 인물로 삼아 전개하는 연작 소설이다.

 

'김대위, 조선소 소요, 거간꾼들, 여우 가죽, 어느 전기공 이야기, 사막의 모래바람,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소설을 읽으면 나이 든 김대위의 회상으로 시작하여, 다시 현실의 김대위로 끝난다.

 

각 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으면 연결이 된다.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배경이 중동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김대위라고 하여 지식인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김대위는 서술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을 하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삶이 미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참하게 그려지지도 않고, 딱 그렇게 노동자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형상화되어 있다.

 

사우디에 가서도 술을 만들어 먹고 - 아랍은 금주다 - 고된 노동이 끝난 뒤에 많지도 않은 월급을 가지고도 화투판을 벌이고, 들개도 잡아먹는 그런 모습들, 열악한 환경, 관리자들의 횡포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간다.

 

그런 삶들 속에서 더 견딜 수 없을 때 드디어 폭발하는 것이다. 이 폭발이 바로 주바일 폭동 사건이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추방되는 노동자들과 관리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강제추방이라고 해도 노동자들은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지만, 관리자들은 보직 이동만 할 뿐이다. 결과까지도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소설에서 이 점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때 중동신화를 들먹이고 대통령이 된 자가 있고,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자가 있다. 회장과 사장을 엮임했던 그들... 소설 속에서 돈에서만은 회장이 양보를 안 할 거라고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임금에, 그들의 처우 개선에, 노동 환경 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

 

그 회장에 그 사장이라고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되어 온갖 무리한 공사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각자 사연이 있지만, 이들은 아무리 가혹한 노동 환경이라도 인간적인 대우가 이루어진다면 관리직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폭동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간 이하의 상황이었기에, 인간임을 알리는 소리를 내는 것 뿐이었다. 김대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베트남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노동조건은 가혹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 두번째 소설에 조선소가 나오는데 역시 노동자들의 항의가 나온다.

 

베트남 - 국내 - 중동으로 이어지는 장소의 바뀜. 그러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디서나 똑같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장소는 다르지만 모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지만.

 

그런데... 이 항의는 소설이 전개되는 몇 년에 걸쳐 나오지만 노동조합이 있어야 해라는 말만 나오지, 노동조합을 만드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군인이 정권을 잡고 긴급조치라는 명목으로 반대하는 소리를 억압하고,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그 엄혹한 시대에 노동조합은 멀고 먼 이야기였다.

 

1970년대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시작했는데, 그런 불태움이 70년대 내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껏 노동조합을 결성해도 곧바로 들어오는 탄압과 블랙리스트...

 

그러니 소설 속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니는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들은 그때 그때 상황 속에서 대표자를 뽑고, 이들의 협상으로 투쟁을 마무리한다. 그 마무리는 늘 자본측에, 권력측에 유리한 협상이 되었고, 대표자들은 처벌을 받고 현장에서 유리되고 마는 현상이 반복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정당한 단체인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베트남이나 중동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노동조합은 제대로 결성되기 힘들었으며, 결성되었어도 온갖 탄압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전사(前史)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 힘들게 힘들게 자기들의 권리, 생존권을 지켜나갔던 노동자들이 있었음에 그나마 이정도 되는 노동 환경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하는데... 딱 여기까지다. 이런 말은 정규직들에게만 - 현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정규직들에게만 - 해당하는 말이다.

 

비정규직들은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과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들에게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남들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

 

1970년대 일어났던 먼 과거, 지금은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지금도 끈질지게 계속되고 있는 노동 착취의 현장인 것이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소설은 노동조합이 건설되어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수백 수천 명이 작업하는 대규모 현장에는 건설노동조합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이 펄럭이고, 긴 스피커를 얹어놓은 노동조합 승합차가 현장을 누볐다.' (380-381쪽)

 

이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으로, 그들의 권리까지 지켜줄 수 있을 때 더 이 소설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우리 노동환경은 19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 많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마음 아프게 읽었다.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 소설에 나타난 주바일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생각하면서... 여전히 공고한 자본의 위력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고맙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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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비늘들이 모여 물고기를 감싼다. 비늘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물고기다. 어느 하나만 물고기라 할 수가 없지만 어느 하나도 물고기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게 시다.

 

  2016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었다. 수많은 시들의 비늘이 모여 현대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게 현대시다. 한 해 나온 다양한 경향의 시들을 모아놓은 이 수상시집이.

 

  비늘 한 조각

 

  심사위원인 김기택의 말.

 

  주목받는 시인만 계속 주목받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뛰어난 시인, 우수한 작품이라도 목소리가 낮으면 쉽게 묻혀버리기 쉽다. 문학상이 가진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이런 숨은 보물을 찾아 주목을 받도록 함으로써 우리 시 문학을 보다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 (180쪽)

 

  또 다른 비늘 한 조각

 

  수상 시인인 김경후의 말.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겠습니다. 텅 빈 백지처럼. (183쪽)

 

문학을 이루는 많은 비늘들을 우열로 나눌 수는 없다. 비늘들은 그들대로 다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의미를 발견해주는 것, 그것이 문학상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시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존재는 바로 독자다. 독자가 읽어야 시가 존재할 수 있다. 시인이 시에 의미를 너무 부여하려 해서는 안된다. 시인의 말처럼 텅 빈 백지처럼 시를 써야 한다. 그 백지를 채우는 것.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독자 혼자는 백지를 채우기 힘들다. 이때 독자와 시를 연결해주는 중매자, 소위 매파 역할을 평론가, 문학상이 해야 한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듯이 쉽지 않은 일이다.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사람이 남들을 연결해 준다는 일, 쉽지 않은 일이다. 책임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문학평론가들 또 문학상 심사위원들 이 중매쟁이보다 더한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 뺨이 석 대가 아니라 독자들을 시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기껏 공들여 낸 백지에 평론가들이나 심사위원이 이상한 무늬를 만들어내어 독자에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년도 수상시인은 김경후라고 한다. 잉어가죽구두외 5편이 수상작으로 결정이 되었다. 앞에서 비늘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잉어가죽구두'에 나오는 이 낱말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비늘들로 중첩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리고 수많은 비늘들이 살아가면서 떨어져 나갔지만, 그럼에도 아직 우리를 감싸고 있는 비늘들이 남아 있다는 생각. 어쩌면 시도 남아 있는 비늘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시를 읽어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잉어가죽구두

 

너덜대는 붉은 가슴지느러미

수억 년 동안 끝나지 않는

오늘이란 비늘

떨어뜨리는

노을

아래

기우뚱

여자는 한쪽 발을 벗은 채

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려 있다

 

2016현대문학상수상시집. 김경후, 잉어가죽구두. 현대문학. 2015년. 15쪽. 

 

단순하게 이 시를 그림으로 그려본다. 해가 떨어지려 하는 노을이 번진 도시 길가에 한 여자가 구두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인채 주저앉아 있다.

 

아주 단순한 그림이다. 그런데 '너덜대는'이라는 표현, 흔들리는이 아니라 너덜대는이라는 표현은 저녁까지의 삶이 결코 평안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루의 저녁이라고 해도 좋고,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이라고 해도 좋다.

 

설핏 해가 넘어갈 때 이제 휴식을 취해야 할 때 집으로 가는 길 편안한 마음으로 가야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하여 몸은 '기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걸음을 막는 무엇, 깨진 보도블록이 나오고, 그 사이에 구두굽이 낀다. 집으로 가는 길조차도 이렇듯 험난하다. 그러니 쪼그려 앉을 수밖에.

 

어찌보면 평온한 그림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이 신산한 삶을, 그것도 여성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짠한 마음이 일어난다.

 

잉어가죽구두, 세상에 잉어와 가죽이 연결되는 경우는 없다. 누가 물고기 껍질을 가죽이라고 하는가. 약하디 약한 껍질인데... 이것으로 구두를 만든다. 언제고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스스로 원한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신어야 했던 신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생활을 가리키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직면해 잠시 주저하고 있는 모습. 수많은 비늘들처럼 수많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일상의 어려움 아닐까.

 

한참 시에 대해 생각하다 잉어가죽구두를 인어가죽구두로 잘못 생각하기도 했다. 인어가죽구두는 결국 인어의 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 왕자에게 가기 위해 목소리를 잃고 발을 얻은 인어공주. 그렇지만 왕자는 멀어져만 가고 왕자에게 가기 위해 얻은 발로도 왕자에게 가지 못하는 인어공주.

 

보도블록에 끼인 구두에서 그런 왕자를 찾아오게 만든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니라 목소리를 잃게 만든 인어공주의 발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곡해일까?

 

곡해라도 좋다. 시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늘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에서 여성들의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그것을 한 편의 그림처럼 표현해내고 있는 시라는 생각.

 

잉어가 출세와 다산과 재물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가죽구두를 신었다는 것은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승승장구가 아니라 어느 순간 탁 하고 걸려 있는 상태. 세속적인 성공과 정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잉어가죽구두에서 인어발을 생각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니, 내 삶을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비늘들을 생각한다. 편안했든, 힘들었든, 행복했든, 고통스러웠든 그 많은 과정들이 하나하나 모여 비늘들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2016현대문학상수상시집이다. 뱀발을 그리자면 다른 시들도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제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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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2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폐인의 세상 이해하기 - 사회적 관계에 관한 불문율
템플 그랜딘.숀 배런 지음, 김혜리 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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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템플 그랜딘 관련 책. 자폐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른 자폐인들이 세상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숀 배런이라는 사람과 함께 썼다고 하지만 사실은 편집자가 더 많은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템플과 숀이 이야기한 것을 바탕으로 편집자가 정리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형식이다.

 

템플은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는데, 그 비유에 맞춰 이 책도 구성되었다. 막 뒤에서라는 글을 시작으로 1막에서는 템플과 숀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해주고 있고, 2막에서는 자폐적 사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3막에서는 자폐인들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한 불문율 10개를 제시해주고 있다. 물론 이 10가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명심해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은 자폐인들을 이해하고 자폐인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명심하면 좋을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꼭 자폐인만이 아니라 보통사람이라고 하는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열 가지를 보자.

 

1. 규칙은 절대적이지 않아서,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언어 그대로만 해석하는 자폐인들에게는 이것이 첫째 규칙이 될 수 있다. 상황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규칙이 적용되는 것.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설명없이 일관성 없는 규칙 적용은 자폐인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작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큰 틀에서 보면 모든 일이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맞다. 그 당시에는 너무도 중요해서 자신의 목숨만큼 크게 보이는 일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시간을 두는 일,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세상 모든 사람이 실수를 한다. 실수했다고 하루를 망쳐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티끌만 보고 욕한다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한 실수를 계속 되뇌면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실수는 실수일 뿐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 실수를 인정하고 어떻게 만회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4. 정직성과 외교적 언행은 다른 것이다. (오죽하면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안전과 같이 큰일이 아닌 경우에는 외교적 언행을 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폐인들에게는 이 항목이 꼭 필요하다)

 

5. 예의 바름은 어느 상황에서나 적절하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선량(選良-제 뜻을 잃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이라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짓거리는 참... 예의 없음도 면책특권이 있는 줄 아는 그런 인간들이 넘치는데... 자폐인들은 알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또는 인식하지 못하고 하는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들에게도 이런 행동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말이 필요없다)

 

6.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친구인 것은 아니다. (비언어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폐인에게는 이 규칙이 참 중요하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 우리나라 격언을 기억해야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나에게 해주는 충언은 듣기에 괴롭다고... 감언이설, 교언영색... 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감언이설(甘言利說)인지, 교언영색(巧言令色)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교육은 자폐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7. 사람들은 공석에서 하는 행동과 사석에서 하는 행동이 서로 다르다. (둘을 구분해서 행동을 하고, 다른 자리에서 하는 행동을 이해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도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뒷담을 하는 것은 사석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것은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공간이다. 그러니 사이버 언어폭력은 결코 사석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 명심할 것.)

 

8. 자신이 언제 사람들을 싫증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바로 관계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 나를 중심에 놓되, 나만을 생각하지는 않아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9. '어울린다'는 것은 주로 외모나 말과 관련된다. (자폐인들이 옷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최소한 장소에 어울리는 외모, 또 말을 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것.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도 사회생활에 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

 

10.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은 자폐인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 그것이 어찌 자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일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이렇게 자폐인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불문율이다. 하지만 자폐인들은 이것들을 배우는데 꽤 오랜 시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니... 성공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템플과 숀이 다른 자폐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여러가지로 배울 것이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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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건강한 위험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글이 실렸다. 학교라는 공간과 위험이라는 말, 여기에 건강한이라는 말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학교는 우선 위험을 제거해야 하는 공간이고, 위험이라는 말에는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 이미 들어 있으니, 학교와 건강한과 위험이 한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도 이상하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면 안된다. 학교는 미래를 살아갈 세대를 가르치는 곳, 아니 그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미래가 어디 탄탄대로로만 연결되어 있던가.

 

세상이 온실 속이던가. 누군가가 끝까지 다 보호해주는 공간이던가. 그렇지 않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왜 학교는 안전해야 하는가? 학교에서 위험은 꼭 사라져야 하는가? 아니다. 위험이 사라진 학교는 더 위험하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사고를 막기 위해 온갖 일을 한다. 모든 교육활동에 안전교육이 실시된다. 실제로 안전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안전교육은 혹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환으로만 실시된다.

 

학교는 책임이 없다. 교사는 책임이 없다는 절차만은 꼭 거친다. 왜냐? 아이들이 다치면 모든 책임을 학교, 교사에게 묻는 풍토가 만연돼 있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활동을 하다보면 다치는 경우도 나올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지 않는다. 안전교육을 했느냐, 임장지도를 했느냐, 사후 처리는 어떻게 하느냐 등등으로, 사고가 나면 다른 교육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뒷처리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니 건강한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에 건강한 위험은 없다. 오로지 사고만 있을 뿐이다. 이 대담에는 놀이전문가와 서울시교육감도 참여하고 있는데, 공허한 울림으로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청은 절대로 학교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학교에서 처리하길 바라고, 또 사고가 일어난 학교에 주의 조치를 할 뿐, 사고가 교육활동에 따를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학교든 교사든, 교육청이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고, 형식적인 절차만 갖추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학교에서 건강한 위험을 배울 수 있을까'란 말은 너무도 공허할 뿐이다. 그럼에도 민들레에서 이런 좌담을 연 이유는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앤절라 핸스컴이 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란 글을 보면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많이 하지 않은 까닭에 신체능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당연하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학생들이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도록 한다고 하는데... 사고가 날까봐 두려워서. 어떻게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신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상태에서 아이들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아프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 그들은 성장통을 겪고 있고, 그것은 성장에 꼭 필요한 일일텐데, 그 성장통을 '병'이라는 이름으로 낙인 찍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중2병 환자일까,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만나는 길, 학교 상담실에서 만난 아이들의 우울'이란 글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아이들이 지내는 곳, 학교, 그곳이 절대로 건강한 공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 이런 학교의 모습은 너무도 위험하다.

 

위험을 피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더 위험한 공간이 바로 학교다. 위험을 회피해서 더 위험해진 학교... 아이들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없는 공간이 학교가 되니, 점점 더 위험해지는 것이 학교일 수밖에 없다.

 

학교에는 건강한 위험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패해 볼 수 있는 위험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다. 그게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결승점을 향해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부모도, 교사도, 그리고 사회의 모든 기성세대들도.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기성세대들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 권재원이 쓴 '당신은 꼰대입니까?'를 읽어 보라.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꼰대들이 있는지.

 

위험을 제거해준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는 그런 '꼰대들 천국'이 우리 사회 아닌지... 나 역시 그런 꼰대들 중 한 사람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 민들레 124호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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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는 특별하다 - 템플 그랜딘의 자폐성 뇌 이야기
템플 그랜딘 & 리처드 파넥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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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템플 그랜딘의 책읽기. 자폐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물론 고기능 자폐인들에게 더 해당이 되고, 정도가 심한 자폐인들에게는 템플 그랜딘과 같은 행동을 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책은 자폐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폐증이 병명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단조차 받지 못하던 시대에서 심리적인 질병으로, 그래서 냉장고 엄마와 같은 말이 나왔던 시대로 있었다고 하는데...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자폐증도 뇌와 유전자의 문제로 점점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는 것, 다만 여전히 생물학적인 문제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 정확히 진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 점점 더 발달해 가는 과학으로 인해 자폐증의 생물학적 원인도 명확히 밝혀질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완전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밝혀졌으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는 구분해야 한다고 하지만, 자폐증도 이제는 상관관계를 넘어 뇌와 유전자의 인과관계 쪽으로 가고 있으니 자폐증 치료에 더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한다.

 

템플 그랜딘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둘로, 언어적 사고와 그림 사고로 나누었었는데, 최근에 여기에 한 가지 사고를 더해 패턴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 자신의 사고에 따라서 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으니,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체계화한다면 사람들에 따라 교육방식도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여전히 그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이 책에도 나오듯이 학교 교육은 이름표 붙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표 붙이기, 다른 말로 하면 낙인찍기, 또는 낙인효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폐인이야 아스퍼거야 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이름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름에 맞게 대우해 줘야 하고, 그 이름에 따라서 기대를 접는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던가. 그래서 그들이 지닌 강점보다는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템플 그랜딘은 이름표 붙이기에서 벗어나 약점을 보완하는 교육보다는 강점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너무도 쉽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왜 굳이 못하는 것을 잘하게 하려고 할까?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면 되지 않는가. 전국민이 수학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적어도 비슷한, 아니면 정부가 정해 놓은 이해되지 않는 어떤 수준까지 꼭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자폐 스펙트럼(요즘은 용어가 이렇게 바뀌었단다)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아닌가.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표준적인 수준에 도달하거나 넘어설 수는 있어도 모든 면에서 표준적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분야에 뛰어난 능력은 발휘할 수 있어도, 그 표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기 더 힘든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이 잘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들이 잘하는 일을 하고, 이들이 못하는 일은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서로 함께 일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 풍요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템플 그랜딘은 하고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 가면 우리나라 교육에도 해당되는, 읽으면 슬픈 그런 구절이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강연을 할 때에는 확실하게 자폐 스텍트럼에 속하는 듯 보이는 사람이 많다. 전국을 돌면서 학교에서 강연을 하다보면 또 이런 비슷한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아이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학교에서 이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하기 때문이다. (251쪽)

 

똑같아야 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 교과과정에 있는 것을 꼭 다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그 많은 교과목에서 모두 일정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일을 충분히 잘 할 수 있고, 사고 패턴에 따라서 학교 교과과정은 익숙한 과정이 될 수도 너무도 힘든 과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템플 그랜딘은 말한다. 왜 똑같아야 하지? 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을 배워야 하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자신에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지 않아도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어 일찍부터 절망에 빠지는, 강점이 많음에도 수학때문에 도태되는 학생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파왔다. 꼭 수학때문은 아니라도, 성적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에고, 이게 무슨 저주받을 짓인지...

 

자폐인의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템플 그랜딘의 책을 읽으면 함께 살아가야 함을, 다양한 사람들의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 그렇게 우리는 살아야 한다. 각자 다양하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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