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시집을 읽으며 이상하게 '이상'이 떠올랐다. 이상이 쓴 '오감도' 무슨 내용인지 해석하기가 힘들고, 괴기스러운, 그러나 근대를 맞이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을 잘 표현했다고(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감도,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대의 두려움이라고) 하는데,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디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이 이상에게 반발한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들에게 이상의 시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에 불과한, 한마디로 정신이상자의 넋두리였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이상의 작품과 비슷한 작품들이 최근 시인들에 의해서 많이 창작되고 있다. '난해시, 전위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려고 했는데, 이상의 시가 근대를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했다면, 현대 시인들의 시는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삶이 더욱 불확실 시대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열쇠는 있는데, 마치 수많은 자물쇠를 가져다 놓고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아봐 하는 식이란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기만 하지만.

 

한 번에 열 수 있는 자물쇠를 찾는 사람을 천재라고 해야 하나? 백 개의 자물쇠를 주고, 열쇠는 단 하나, 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 번에 아니 서너 번에 연 사람을 실력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칠기삼이라더니, 시를 읽는데 이런 말이 통용이 된다면 문제가 있지 않나.

 

열쇠라는 말이 생각난 이유는 시집에 있는 '시인의 말'때문이다.

 

언니가 열쇠라는 것만 알았지./방 열쇠를 나눠 가지면 된다는 걸 나는 몰랐어. //내 방에선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겨우겨우 박자를 만들어내.//언니는 말했지. 이런 세계는 풀 수 없는 암호 같고,/그런 건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그건 얼마나 옳은 생각인지.//언니와 나 사이에 사는 사람들과/열쇠를 나누어 가지면 좋을 텐데.//2017년 3월 / 솔아가

 

열쇠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에게 시는 방을 여는 열쇠일 수 있다. 그 열쇠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고 싶다고 하는데, 시인이 나누어 준 열쇠가 열쇠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시인이 나누어준 열쇠는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즉 만능열쇠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인식의 열쇠일 테니...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며,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두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주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

 

  미안하지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은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41-43쪽.

 

아이들 장난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세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고 어두워도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세상을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마치 아홉 살짜리의 게임과 같다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세상은 겨우 아홉 살이 만든 세상에 불과하므로.

 

그럼에도 세상은 예측할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말하는 순간 세상은 내 말로 인해 또 변하고, 내가 행동하는 순간 내 행동으로 인해 또 변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세상. 도무지 확정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예보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16-17쪽.

  

이런 예보처럼 도대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예보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늘 미래 시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미래 시제는 결국 추측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못된 사람이라는 말의 다른 면일 수 있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못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래서 완전히 착하지도 않고 완전히 못되지도 않은 그렇게 섞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유폐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으로 나가 서로 어울려야 한다. 그런 어울림이 일어날 때 '오늘 날씨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다. 이 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밖으로 나가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시인이 주고 있는 것이 열쇠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아니 열쇠임을 알아도 맞는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문을 못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열쇠가 무슨 소용이람. 시인의 말에서처럼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 어려운 시다. 난해하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자 하나, 나는 열쇠를 받아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우리 세상은 정말로 북확실하다. 불확정성의 세계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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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마음속 108마리 코끼리 이야기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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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동화 [파랑새]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바로 곁에 있는 행복을 두고 우리는 너무도 멀리 나간다.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 행복을 찾지만, 그 행복은 늘 앞에만 있다. 다가가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 그것은 바로 외부에서 찾는 행복이다.

 

이 거리를 단 한번에 없애는 방법,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마음은 술 취한 코끼리처럼 어디로 갈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마음은 술 취한 코끼리가 아니다. 우리가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마치 술 취한 코끼리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아잔 브라흐마라는 서양 출신 승려가 쓴 마음에 관한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마음을 알면 행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아도 된다. 행복은 바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행복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마음은 불행도, 고통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커다란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마음에서 불행과 행복을 찾으면 어떤 것이 더 많을까? 아마도 행복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과 행복 중에 어느 것이 더 눈에 뜨일까? 그것은 불행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행복을 찾는 노력을 한다. 이미 자신은 행복한데 행복한 줄 모르고 행복을 찾는 것이다.

 

브라흐마는 이 책에서 이런 현상을 이렇게 말한다. 담을 쌓을 때 천 개의 벽돌을 썼다고 하자. 그 중에 998개의 벽돌은 아주 잘 쌓였다. 그런데 달랑 두 개의 벽돌이 좀 어긋나 있다. 자, 이 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담은 멋있는 담일까? 망가진 담일까?

 

우리는 두 개에 주목해야 하는가, 아니면 998개의 다른 벽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마음이라는 넓은 곳에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 왜 아주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행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단 말인가. 오히려 더 많은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브라흐마가 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수많은 행복들에 주목하자. 이 행복들에 주목한다는 것은 욕심의 자유가 아니라 욕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욕심의 자유는 자신의 욕심을 채울 자유를 의미하고, 욕심을 채운다는 것은 늘 결핍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결핍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하면 나는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진만 빠지고 절망에 빠지기만 한다. 그러니 욕망의 자유는 곧 불행으로 가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해서 가는 불행에의 자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다. 욕망을 없앤다는 것은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핍이 없겠느냐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마음 속에 있는 다른 행복들에 눈이 가기 시작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행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그것들로 인해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이 때 행복은 마치 화수분처럼 써도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니 욕망의 자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화수분을 얻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나, 문득 문득 내 삶에 대해서 불만이 이는 것은 결핍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는 아직도 욕망의 자유를 버리지 못해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욕망의 자유에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 나아가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사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물론 다른 구절들도 다들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지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갈수록 덜 자주 실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255쪽)

 

실수를 덜하기 위해서는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아, 내가 잘못했네 하고 인정하는 순간, 실수는 불행에서 행복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된다. 젊은 시절에는 실수한 줄도 모르고 지낸다. 그래서 실수를 해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더 빨리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실수를 줄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한 실수들을 깨닫는 순간 다음에는 그런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는 무엇일까?

 

이 책에는 세 가지 질문이 나온다. 옛이야기를 빌려 말하고 있는데...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보살핌과 배려. (169쪽)

 

너무도 당연해서 당연하게 잊고 지내는 일들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그저 편하다는 또는 가깝다는 아니면 바쁘다는 이유로 이 세 가지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서 행복해지기는 힘들다.

 

이 세 가지와 함께 하는 것은 행복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와 함께 하지만 늘 나와 함께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네 사람의 아내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인데...

 

죽음까지도 함께 하는 아내는 첫 번째 아내였다. 그렇다면 아내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 첫 번째 아내는 '카르마(업)'이다. 두 번째 아내는 '가족'이고, 세 번째 아내는 '재산'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네 번째 아내는 '명성'이다. (293쪽)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 죽음에 이르러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네 아내를 통해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데...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서 욕망의 자유에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 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단지 알게 되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게 브라흐마가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뱀발

 

이 책에는 아주 재미 있는 제안이 있다. 202쪽에 말에 세금을 매기자는 제안. 직접 책을 읽어보라.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지금 국회를 보면 더더욱.

 

또 이 책에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슷한 브라흐마가 겪었던 일화가 있다. 슬픈, 이렇게 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입시를 위해 공부 외에 다른 것은 뒤로 미뤄두어야 하는. 그렇게 행복을 계속 남겨두기만 하는 삶에 대해. (221-224쪽에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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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디드 범우고전선 4
볼떼르 지음 / 범우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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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남들이 [깡디드]를 인용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읽게 된 책.

 

어떤 계몽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당시 유럽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고, 전쟁이라든지, 돈에 대한 욕심, 종교적 타락, 사기 등을 깡디드가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니, 당시 사회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도라도에서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많이 갖고 온 깡디드가 그 돈으로 자신과 관계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는 하지만,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그 돈을 보고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비판.

 

여전히 신분 질서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있고, 세상은 낙관적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에 사람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먹고 살 것은 스스로 마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 책의 끝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깡디드가 삶에 대한 답을 얻으려 노승에게 갔다가 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가해 보이는 노인에게 들은 말.

 

일을 하고 있으면 세 가지 커다란 불행이 우리에게서 멀어지지요. 그것은 즉 권태, 타락, 궁핍이랍니다. (176쪽)

 

그렇다. 현란한 탁상공론은 필요없다.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의존도 또 신에 대한 믿음도 많이 사라진 시대, 깡디드에 나오는 성직자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들이니, 종교의 타락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깡디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린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라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깡디드가 도달한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손으로 노동을 해서 자립하는 삶. 그 삶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쟁의 비참함을 서술함으로써 전쟁을 비판하고, 돈을 보고 덤벼드는 온갖 사기꾼들을 서술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타락한 성직자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종교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성에서 쫓겨나 시작된 여행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끝나는데, 뀌네공드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과정, 결국 돌아오게 되지만, 돌아온 다음에 깡디드는 다른 존재가 된다.

 

허황된 관념을 좇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적어도 일을 하면 권태, 타락, 궁핍은 멀어지게 할 수 있을테니. 그러나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적어도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자유의지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 어쩌면 볼테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장소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정치가들의 책무이고, 지식인들이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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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0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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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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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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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는 과학소설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들이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많이 다가왔는데...

 

이 소설 [아이, 로봇]은 로봇소설의 고전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아주 오래 전에, 1940년대에 쓰인 작품이니 얼마나 오래 된 작품인가. 그때는 컴퓨터가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지금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또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기고, 지금은 인간들이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도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 8대(단위를 나타내는 말을 고르기가 힘들다. 기계를 나타내는 '대'라는 말을 쓰기도 그렇고, 사람을 지칭하는 '명'이라는 말을 쓰기도 그렇기 때문이다)의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책의 순서대로 읽으면 로봇의 발달 순서를 알 수 있게 짜여져 있다.

 

우선 이 소설에서는 유명한 로봇 3원칙이 나온다. 로봇들이 거부할 수 없는 원칙 세 가지. 이것들이 지켜져야 인간들이 기계에 종속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과연 그럴까? 이 3원칙이 잘 지켜져도 인간들이 기계에 종속당하는 일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웃으면서도 무언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데서 알게 된다.

 

우선 로봇 3원칙을 보자.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로봇에게 위험이 되는지, 또 인간들이 이 3원칙으로 인해 늘 로봇을 잘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 3원칙으로 인해 로봇에게 이용당하고 속기도 하는지가 소설 속 로봇의 이야기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같이 로봇을 거부하는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들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소설집 마지막에는 이 3원칙에 더해서 하나의 원칙이 더해져야 함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역자 후기에서 아시모프가 나중에 0원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0원칙은 '로봇은 인류가 위험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별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니 말이다. 환경 파괴와 같은 경우.

 

처음 '로비'라는 로봇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사람과 로봇이 이렇게 서로를 위하면서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것에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로봇만 존재한다면, 인간들이 굳이 인간보다 힘도 세고, 빠르고, 판단도 좋은 로봇을 거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스피디'라는 로봇에 가면 로봇 3원칙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즉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인, 또는 그 상황에 가장 알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로봇이 나온다. 인간의 자율성과 로봇의 자율성이 차이나는 간격인데, 이 간격은 곧 메워지게 된다.

 

생각하는 로봇이 나오고, 이 로봇이 자신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로 인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큐티'라는 로봇인데, 이 로봇은 자신의 추론을 활용하여 신을 만들어내고, 자신은 예언자가 된다. 마치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로봇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로봇에 이어서 대장 노릇을 하는 로봇(데이브)도 나오고, 이번에는 거짓말하는 로봇(허비)도 나온다. 그런데 로봇이 거짓말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 인간을 위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지만, 그것이 극한으로 가면 자존심이 강한, 즉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로봇(네스터 10호)도 나온다.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지금의 인공지능과 같은 로봇이 나온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심지어 우주선까지 만들어내고 원격조정하는 로봇(브레인). 지금 우리가 꿈꾸는 인공지능 시대를 소설은 이렇게 앞서서 구현하고 있다.

 

이미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로봇 다음에 올 로봇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인 로봇이다.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그러나 인간보다 더 깔끔하게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로봇(바이어리)이다. 시장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로봇까지 나오니... 어찌 이 소설을 과거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상상하고 또 현실로 만들어내는 로봇이 많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로봇들로 인해 일어날 문제점도 선취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연구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을 위한 사회를 위해서 아닌가.

 

그러므로 이 소설에 나오는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해 봐야 한다. 너무 무서운 상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또 인공지능 시대를 무작정 거부해서도 안 되지만, 적어도 발생할 위험에 대해서는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런 토론 주제로 이 소설은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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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질 듯, 좋아질 듯,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이상하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서로 웃으면서 만나도 그 다음 만남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만나면 해결될 듯 하면서도 결코 해결을 하지 않는다.

 

  웃음 속에 수많은 계산이 들어있는지, 서로의 셈법이 다른 것인지, 평행선은 지속된다.

 

  핵을 폐기한다고 했다. 순차적이든, 전면적이든, 완전한,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약속한다고 했다. 그러마고, 믿는다고, 그래서 이제는 평화롭게 지내자고도 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해 왔던 통상적인 군사훈련이라고 계속 실시하고, 한쪽에서는 평화 분위기를 깨는 행위라고 정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포탄을 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대화 단절, 만남 단절. 그럼에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하고 있으니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른 경우, 어느 쪽에 판단 기준을 두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다시 지지부진한 상태에 돌입했다.

 

다른 할일도 많은데...

 

전기철의 시집 [로깡땡의 일기]를 읽었다. 로깡땡의 일기가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기도 하고,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깡땡이 낯설다. 시집에서 주를 달아놓기를 샤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냥 그렇게 로깡땡에 대해서 넘어가고... 다음 시를 통해 지금 우리 현실을 읽어낼 수가 있다. 

                      

 

북한 핵에 관한 감상

 

  너와 나 사이에 위험한 물건이 있다. 너는 한사코 그 물건에 손을 대려 하지만 나는 너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너는 화가 치밀어 나를 밀어낸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네 얼굴에서 무언의 땀방울이 더 위험하게 떨어지려는 찰라, 꽃은 어떻게 피는가를 생각했다.

 

  위도와 경도의 정확한 지점에 피는 꽃의 스캔들을 추적하고 거리와 진폭, 시간을 연산하지만, 답은 소수점 몇 자리로도 떨어지지 않아

  위험한 물건은 그대로 위험한 채로 너와 나 사이에 있다.

 

  이렇게 위험한 물건을 버려야 할 것인가, 모른 채 할 것인가. 너와 나 사이에 꽃은 필 것인가.

 

전기철, 로깡땡의 일기. 황금알. 2009년. 76쪽.

 

우리가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너와 나 사이에 꽃이 피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위험한 물건은 당연히 버려야 하고, 그 위험한 물건을 마음 놓고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때 너와 나 사이에 꽃은 당연히 필 것이다.

 

그 꽃을 우리 모두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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