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대칭이다. 좌우가 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일도 대칭이 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쪽과 저쪽이 있으며, 할 일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쌍이다. 짝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짝이 쌍이 없는 세상은 너무도 삭막하다.

 

(중심만 너무 비대해도 그렇다. 몸통만 살찐 새를 생각해 보라. 날 수가 없다. 그러니 몸통을 중심으로 좌우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짝, 쌍이 있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음양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21세기 인공지능의 세상에 디지털이란 것도 0과 1의 짝이 아니던가. 이런 짝을 잃으면 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심이 잡힌다.

 

  짝을 잃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상실을 깨닫는 것, 슬픔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슬픔을 이겨내려는 행동을 한다.

 

시인은 시집 처음을 '슬픔에게'란 시로 시작한다. 마치 정호승이 슬픔의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임을 연상시키는 그런 시로. 시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지 때문이 아니라 /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슬픔에게' 1연)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부재 상태를 인식하는 것, 따라서 지금 없는 존재를 있게 하려는 바람, 이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러니 희망은 슬픔을 동반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슬픔은 희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슬픔에게' 4연)라고 하고 있다.

 

슬픔과 희망의 짝. 얼핏 희망은 기쁨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슬픔에서 희망이 나온다. 희망에서 슬픔이 나온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내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희망은 미래에서 현재를 움직이게 한다.

 

짝이다. 쌍이다. 희망과 슬픔의 짝. 우리들 삶을 구성하는 짝. 이 시집에서 이런 짝을 만난다. 없는 것을 만들어 중심을 잡는 행위.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어떤 중심'이란 시다.

 

     어떤 중심

 

읍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잠시 밖으로 나와

길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는데

자꾸 앞으로 넘어진다

술 탓인가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지만

여전히 몸 전체가 왼쪽으로 쏟아진다

몽롱히 살펴보니 왼쪽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

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니 비로소

다리 네 개의 의자가 된다

 

왼 다리가 내 몸의 중심이었다니

 

권혁소,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2019년. 107쪽.

 

한쪽을 없애버리려 아둥바둥 대면, 자신도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왼쪽의 부재는 오른쪽의 부재를 불어온다.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으려면 짝이 있어야 한다.

 

왼쪽에는 오른쪽이, 오른쪽에는 왼쪽이. 한쪽이 없으면 슬픔이 인다. 자꾸 넘어질 수밖에 없으니 슬플 수밖에. 그래서 희망한다. 한쪽이 있게 되기를, 중심을 잡게 되기를.

 

왼쪽이 없으면 왼쪽을 만들어야 한다. 오른쪽이 온전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째, 자꾸 우리는 너무 왼쪽을 없애려고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왼쪽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왼쪽에 대한 편견(98-99쪽)'이라는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먼저 망가져버린 왼쪽에 대해서. 단지 왼쪽만이 아니라 몸이 망가져 버린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슬픔과 희망, 짝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은 짝, 쌍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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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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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 삶임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글쓰기는 특정 사람들만, 소위 작가들이거나 학자들이거나 전문가랍시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삶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마치 연애나 결혼을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삶인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왜 글을 읽고 써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는 글쓰기의 실제 편이라고 하면 된다.

 

이렇게 글쓰기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글쓰기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또 읽기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 이 말은 안 읽었다는 말과 통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짝사랑과 다름 없다. 자기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은, 그래서 자기 마음 속에서만 끙끙거리다 끝난,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사랑. 하지만 사랑은 양방향이다. 일방이 아니다.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

 

읽기에서 끝나면 양방향이 되지 않는다. 일방적이 된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냥 자기 속에만 갇혀 있게 된다. 그래서 써야 한다. 읽으면 써야 한다. 쓰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결국 읽기와 쓰기는 샴쌍동이처럼, 또는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한 쌍이 된다.

 

읽기는 곧 연애다. 책은 사람이다. 사람의 몸이다. 몸은 우주다. 몸이라는 단일체가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우주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같은 몸은 없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 또 같은(?같은 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방금 전 나와 지금 내가 같을까? 지금 나와 조금 뒤 내가 같을까? 나는 다른 나들로 구성되어 있는 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여기서는 '나'라는 추상적인 몸을 이야기 하자) 몸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다른 존재들로 구성된 몸, 그것이 바로 우리 몸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은 늘 다른 존재들로 구성된 우주다. 그렇기에 연애를 할 때는 우주와 우주의 만남이 된다. 자신을 닫아버리면 만남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자족적인 존재는 없다. 그런 존재는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부패한다. 하여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다른 존재와 소통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연애가 시작된다.

 

연애가 시작되면 자신을 열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연다. 모험이다. 전존재를 건 비약. 그것이 연애다. 이렇게 연애를 시작하면 늘 만나던 상대에게서 같은 모습만 보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새로움의 발견. 그것의 지속. 이것이 연애다. 새로움이 발견되지 않는 연애, 파탄난다.

 

읽기는 그래서 연애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되 늘 새로움을 찾아낸다. 이런 모험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읽기가 그렇다. 이런 읽기에는 반드시 쓰기가 따른다.

 

연애를 하다 보면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함께 살고 싶어진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어진다. 무언가 새로운 존재를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읽기에서 쓰기, 연애에서 결혼, 그리고 출산. 이렇게 비유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출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다른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가 아니더라도 함께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가 그렇다는 얘기다. 읽기와 쓰기가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

 

그렇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쓰고 싶어진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쓰고 싶어진다. 잘 쓰기 위해서 더 읽고 싶어지고, 더 공부하고 싶어진다. 그런 즐거움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처음부터 읽기, 쓰기의 즐거움이 글에서 뚝뚝 떨어진다.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는구나, 정말 즐기고 있구나, 그런 즐거움을 우리와 나누려고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하면 사람들 표정이 밝아진다. 너무 좋아 보인다. 잘 읽고 잘 쓰는 사람, 인생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그냥 취미가 아니다. 삶이다.

 

그러니 읽고 쓴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자 통쾌한 일이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책. 책 내용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읽어보면 안다. 읽기와 쓰기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또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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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1-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로 쓰기 위해서 읽는 타입인데,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가진 작가네요. 읽기를 연애와 결혼으로 비유하다니 신선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0-01-07 08: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 된 시집을 읽다. 1989년에 나온 시집이니 벌써 30년 전이다. (처음은 1989년에 나왔지만 내가 읽은 시집은 1996년에 인쇄된 10쇄본이다. 많이 찍어낸 것을 보면 꾸준히 읽혔다는 얘기다)

 

  30년.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그 긴 세월. 그러나 시는 30년 정도는 거뜬히 버텨야 한다. 30년도 못 버티는 시가 어떻게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황조가나 서동요 같은 아주 오래 된 시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데, 겨우 30년이라니... 윤동주 시나 김소월 시도, 또 육사의 시도, 백석의 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데 30년 전 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주 오래 전 시는 기억하고 있는데, 또 60-70년대 시 중에 몇은 기억하고 있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나온 시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다.

 

시하고 멀어진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읽은 경우가 많아서,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시가 마음이 아니라 머리에서부터 먼저 사라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시들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도무지 시인들의 잠꼬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시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가 삶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 꼭 독자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3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읽으며 시인은(또는 시는) 어떠해야 하나를 생각한다.

 

시인은 '詩 혹은 길 닦기'라는 시에서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로 이야기하는 시론(시인론)이라고 할 수 있다. 

 

  詩 혹은 길 닦기

 

그래, 나는 용감하게,

또 꺾일지도 모를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詩는 그나마 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

아니 길 닦기이다.

내가 닦아나가 다른 길들과

만나야 할 길 닦기이다.

 

길을 만들며,

길의 흔적을 남기며,

이 길이 다른 누구의 길과 만나길 바라며,

이 길이 너무나 멀리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누군가 섭섭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와주길 바라며.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6년 초판 10쇄. 13쪽.

 

이게 바로 시다. 또 시인이다. 결코 혼자 가서는 안 된다. 시는 만나야 한다. 누군가 따라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시들, 계속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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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인권 에세이 - 구정화 교수가 들려주는 살아 있는 인권 이야기 해냄 청소년 에세이 시리즈
구정화 지음 / 해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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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인간이 지닌 권리라는 의미일텐데, 인권이란 말을 쓸 때는 이상하게도 인간이 지녀야 할 권리라는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권리라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인권 보장이라든지, 인권 실현이라든지 여전히 인권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지점까지 가는 길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인권은 여전히 미지의 권리이다. 인권, 인권 하지만, 인권은 도처에서 유린되고 있다.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에게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책이 나왔다. 청소년들이 누려야 할 인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자, 인권이란 개념에는 청소년, 어른, 남자, 여자 또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쓰인다는 의미는 없다. 인권은 보편적이다.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그러니 학교에서 학생 인권과 교권이 충돌한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학생 인권이 보장되고 실현된다면 교권과 충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권은 내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권리만큼이나 다른 사람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이 동등하다는 인식과 실천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실 밖 인권 교과서를 표방하는 이 책은 단지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인권의 전반적인 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

 

교과서에서 다루기 힘들었던 것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인권 감수성을 키운다고 하는데...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인권은 알면 알수록 좋기 때문에, 자꾸 이야기 해야 한다. 하여 이 책은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1장과 청소년이 지녀야 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2장, 사회 이슈로 살펴 보는 인권을 다루는 3장,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권 전반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청소년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에 장이 끝날 때 부록으로 세계인권선언과 UN아동권리협약, 우리나라 헌법,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등을 실어 놓아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권은 완성형이 될 수 없다. 이미 완성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인권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것, 그래서 늘 살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이렇게 인권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나라는 자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인권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어쩌면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교과서는 이런 책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삶일지도 모른다. 우리들 삶을 통해서 인권 감수성을 키우고, 인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또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인권은 일회성이 아니다. 삶을 통해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반성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 삶의 지침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 속에 있는 실천, 그것이 인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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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강병철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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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다.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 먼저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 주인공의 삶에 자신의 삶을 대입해 보기도 한다. 감정이입은 물론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잘살게 되기를 바란다. 소설의 결말이 행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소설 속에서나마 이루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희망을 실현하려고도 한다. 소설이라는 문학 갈래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이 소설과 같이 전개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 그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이게 소설인 줄 아니? 와 같은 말을 한다. 그만큼 소설과 현실은 같지 않음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다.

 

현실과 다름에도 소설은 감동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반추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도 한다. 적어도 소설은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이 소설집 역시 그렇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겪어온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다. 주요 배경은 충청도다. 물론 충청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병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면 외국까지 나가니 말이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충청도 사람들이다.

 

충청도 하면 제일 먼저 말이 느리다는 것이 떠오른다. 느릿느릿한 말투. 하지만 소설은 빠르게 전개된다. 문장도 길지 않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충청도와 반대되는 문장 서술이다. 또 소설에서는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학교를 다녀도 고등보통학교 정도에서 그친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은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전면에 나서서 자기 주장을 펼치기 보다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던 사람들.

 

총 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는데, 시대 순으로 소설이 나열되어 있다. 일제시대, 1960년데, 그리고 정황상 2000년대. (나팔꽃, 한머리, 숨소리)

 

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겪는 일, 일제 말에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라는 교육 속에서 그래도 졸업장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학생들. 그럼에도 민족감정은 남아 있어서 조선인을 비하하는 일본 학생을 폭행하기도 하는 학생들.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친일을 하지도 않는.

 

주인공은 이런 학교 생활을 거쳐 학병으로 전투에 참여한다. 소련군과의 전투. 탈출. 조선으로 들어와 해방이 된 조국을 맞이하게 되는 그들.

 

얼핏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팔꽃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팔꽃은 해가 있을 때만 피는 꽃 아닌가. 소설의 끝부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숨어 있다가 일제히 고개를 드러낸 나팔꽃들이 한꺼번에 댕강댕강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함도 가시지 않는다. 완전히 끝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100-101쪽)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도 민중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좌우 대립을 거쳐 전쟁을 겪게 된다. 두번째 소설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박정희 독재가 막 시작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업화가 되어가는 그 때 충청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소소한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에서는 한 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이 속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사의 이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산업화되어 가는 농촌 마을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과정, 딸이라고 해서 차별을 받는 모습,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여기에 간간이 노근리 학살 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자신의 말을 잃고 사는 민중들. 여기에 그래도 말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의 누나. 하지만 이 누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할지는 모른다. 아마, 하지 못했으리라. 딸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억압을 받아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다고 결말을 내지 않고, 그냥 그렇게.

 

마지막 소설에서는 삼청교육대 사건이 나온다. 아니 학교 폭력 문제라고 해도 좋다. 학생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모습을 서술하는 가운데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한때 주먹을 좀 썼다는 아버지. 이 아버지가 삼청교육대 경험을 한 것. 결국 세상이 바뀌어도 민중들은 계속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세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어떤가? 민주화되었다는 지금 과연 민중들의 삶은 나아졌는가? 민중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혹 민중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답시고, 제 이익을 목청껏 외치는 자들이 여전히 판치고 있지는 않은가.

 

소설을 읽으며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낸 민중들의 삶을 만나며, 지금 우리 삶을, 우리 민중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 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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