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시민운동
와다 하루키 외 지음, 이원웅 옮김 / 오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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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도록 해결이 안 된다. 정부 차원에서 진상규명하고 사과하고 보상을 하면 한방에 끝나버릴 일인데...정부는 이미 협정으로 끝났다고 하고, 소위 지식인들이란 자들은은 자기들 유리한 자료들만 대상으로 논지를 펼치고, 보상은 정부 차원에서는 없다고 못박고 있는 상태.

 

이게 벌써 몇 년이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엄연한 주권국가로서 국민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해주는 일은 위안부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약간의 일. 그것도 많은 압력이 있은 뒤에야 이루어진 일이니.

 

가장 중요한 일은 진상규명이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자료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료들을 종합하는 사고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제국주의는 이미 잘못되었음을 전세계가 인정했다.

 

지금 정부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의 나라 과거 정부가 했던 일이라고 지금 정부의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책임은 완전히 청산하기 전까지는 계속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안 난다. 이게 지금까기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일본 정부가 부정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미약하지만,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일본 정부에서도 사과를 한 적이 있다.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하려고 한 적도 있고. 물론 피해자들이 만족감을 느끼고 완전히 용서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는 데는 국가 간의 외교 능력도 필요하지만 자국 내 시민운동의 역할, 즉 깨어있는 시민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정부는 시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데...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또 그것이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는 쪽으로 알려져 있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운동이었지만,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여러 논의를 거쳐, 정부와도 협의를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다. 시민사회가 깨어 있을 때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일본에서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만큼 시민사회가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과 결과를 담은 책이다. 일본 편자들이 자신들이 한 일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는데, 결과는 실패다. 이 운동은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이들은 우선적으로 홍보부족을 들고 있다.

 

자신들이 하려는 취지가 왜곡되어 보도되고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위안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닌 것이 필리핀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다만, 우리나라와 대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원인을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민간에서 추진해서 정부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이 위로금을 받으면 일본 정부에 소송을 할 수 없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위로금을 받는 일과 국가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별도라는 것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고 이들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홍보부족은 피해자 당사국들에서 벌어지는 시민운동의 주체들을 설득하지 못했던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나 대만에서도 위안부를 돕는 단체가 있는데, 이들 단체들과 함께 하지 못한 아시아여성기금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시하기 전에 이런 단체들과 먼저 의논을 하고 조율을 하는 과정을 거치며 양해를 구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일은 다시 10년 전후로 박근혜 정부 때 벌어진다.

 

전후 50주년을 맞아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제국주의 시대에 벌였던 잘못들을 바로 잡고 평화로운 미래로 나아가고 싶단 생각을 했나 보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청산하는 운동을 하고, 정부에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그 일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자, 먼저 민간에서 기금을 모아 피해를 본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지원을 하고자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정부가 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사람도 있는데, 그들 역시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사과하고 보상해야 하지만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사무적인 기금은 정부에서 내고, 총리 사과문까지 동봉해서 지원금을 주겠다고, 이 일을 하면서 일본 사회에 과거의 일을 밝히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일본 국민들이 모금에 참여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게 되니 자연스레 교육적 효과도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고.

 

이렇게 일본에서 벌어진 위안부 문제에 관한 시민운동은 몇 년 지속되다가 중지하게 된다. 그리고 잊혀졌다가 2010년대 들어와 다시 한번 불거진다. 비슷한 민간기금 문제로... 참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운 것인지...

 

일본 정부는 한결같이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고 나오니, 최소한 1995년처럼 총리 사과라도 했으면 좀더 나았으련만... 일본 시민운동 단체들도 힘이 많이 떨어져 이 문제는 또 흐지부지 되고,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일어난 일을 해결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다. 그 일은 언제고 다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하여 진상규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적어도 학자들이 역사적 자료들을 찾아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후대들이 지어야 한다. 후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상들이 잘못한 일은 후손들이 마무리해야 한다. 그것이 인류다.

 

지금 일본에서는 시민사회가 많이 위축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통해 과거에 일본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이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가해국 시민들의 압력이 가해국 정부의 사과를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니,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할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실패의 기록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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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 을유문화사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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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소설 중에 두 번째로 읽은 소설. 최근에 다시 번역이 되어 출간된 책이 있지만,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 아주 오래 전 번역본으로 읽었다. 책 사진이 알라딘에 나와 있지 않으니.. 아주 오래 전에 출간된,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넬과 술라. 우리나라 말로 풀이하면 달동네라고 할 수 있는 바닥촌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그 중에서도 동갑내기 넬과 술라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이 정반대인 듯하지만 이들은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교양있는 엄마에게서 자란 넬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엄마에게서 자란 술라. 그런데도 이들은 서로 통해 늘 붙어 있고, 함께 지내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면서.

 

어린 시절 여러 사건들을 겪는데, 흑인들이 겪는 일, 특히 여성들이 겪는 일들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고 있고, 넬이 결혼하고 술라가 떠나면서 소설의 1부가 끝난다. 여기까지 함께 했던 두 소녀의 어린 시절이다.

 

2부는 10년이 지나서다. 술라가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불길한 기운과 함께 돌아온다. 술라가 돌아오고 넬은 남편을 잃게 된다. 술라로 인해 마을 사람들 역시 긴장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마치 물고기들이 많은 수족관에 상어를 넣어두면 물고기들이 더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런 장면들인데... 자유롭게 살아가던 술라 역시 한 남자에게 자신을 정착시키려 하는 순간 버림받는다.

 

그렇다. 술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삶은 정착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냥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을 자유라고 하겠지만 넬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건 두려움이다. 자신이 없을 때 자유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런 모습.

 

결국 흑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위악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그마저도 잃게 되면 바닥의 삶으로 떨어짐을 술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넬은 이미 그러한 정착하는 삶을 받아들였기에 약해 보이지만 끝까지 살아남게 되고, 술라는 반대로 강해 보이지만 속은 더 없이 여린 존재이기에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느끼며 지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여인을 중심으로 흑인 마을에서 흑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와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결코 그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만나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넬이 죽은 술라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이는 이 둘이 하나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흑인들은 가장 높은 지대에 살고 있지만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백인들에게 굽실대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 돕고 산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후일담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이들 삶을 엿볼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요양원에 노인들을 보내는 모습에 관해서...

 

백인들은 늙은이들을 내보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의 경우 그들이 가도록 하게 하는 데는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다. 혹시 어떤 이가 늙고 홀로됐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서 마루를 닦아 주거나 요리를 해주었다. 그들이 미치거나 다룰 수 없게 되었을 때에만 그들은 요양소로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221쪽)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렇게 살던 흑인들도 개발의 붐에 밀려 공동체를 잃어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젠 어떤 장소조차 남겨져 있지 않고, 각자의 텔레비전과 전화를 가지고 있고, 남의 집들에는 점점 덜 들르는 각각의 집들만 있게 되어 버렸다. (223쪽)

 

술라라는 악역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술라가 죽은 뒤 그들은 구심점을 잃고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을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공동체가 아닌 그냥 스쳐지나가는 장소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소설은 흑인 마을의 부침을 두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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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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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무슨 공포물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체를 매주 볼 수 있는 사람, 경찰이거나 의사(법의학자 포함)이거나 장의사다. 그들은 시체를 볼 수밖에 없다. 병으로 인한 사망이든, 사고로 인한 사망이든 이들 중 어느 한 쪽을 거치지 않는 죽음은 없으니까.

 

그 중에 이 책은 법의학자 이야기다. 법의학에 관해서 강의를 한다기보다는, 또 법의학자로서 부검을 하면서 만나게 된 시체들 이야기보다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죽음을 강의한다는 것은 곧 삶을 강의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메멘토 모리라고,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겠는가. 삶을 잘살기 위해서다. 즉 메텐토 모리는 카르페 디엠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유한을 인식하는 순간, 그 유한을 무한처럼 살 수 있게 된다. 죽음이라는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면 현재를 잘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기 위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법의학자로서 법의학에 관한 내용은 1부에 국한된다. 그러니 무슨 시체를 통해서 특이한 사례를, 또는 통쾌하게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책은 2부와 3부에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2부라면 3부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이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기 보다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사라져 가게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가족들과 이별을 하는 시간은 오지 않는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그냥 기계에 의존해 있다가 어느 순간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사람들 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말을 하고 세상을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점을 2부에서 보게 된다.

 

내 죽음을 의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엄사라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그런 활동을 인정하는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병원(또는 요양원)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확증해주는 사람이 바로 의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런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하여 죽음을 확인해주는 그런 구조에 대한 비판보다는 죽음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소설가 이문구를 예로 (내가 혼수상태가 되거든 이틀을 넘기지 마라. 소생하지 않으면 엄마, 동생 손잡고 산소호흡기를 떼라. 절대 연장하지 마라. 화장 후에는 보령 관촌에 뿌려라. 문학상 같은 것 만들지 말고 제사 대신 가족끼리 식사나 해라. 나는 이 세상 여한 없이 살다 간다. - 242쪽) 들고 있는데... 그처럼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인다면 죽음에 있어서도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부에서는 그래서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죽음,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지만, 유한한 생명은 우리는 그 유한성을 인정해야 한다. 유한한 삶을 인정하는 순간, 유한 속에서 무한을 추구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도 그렇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그래서 시체를 검안, 검시하는 법의학자 이야기로 시작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잘살 수 있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바로 이 순간 충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끝부분에 있는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좋은 말이고,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란 특별하지 않다.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열심히 사는 삶일까?

...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그리고 자주 해야 한다.

... 둘째, 죽기 전까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 즉 꿈꾸고 있던 일을 해야 한다.

... 셋째, 내가 살아온 기록을 꼼꼼히 남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줄 자산이 있어야 한다. ... 넷째, 자신의 죽음을 처리하는 장례 등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경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를 바란다.

... 다섯째, 지금 건강하다면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67-26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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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영화 '기생충'이 떠오른다. 아마도 '지층'이라는 말 때문에 그러리라.

 

  시에 등장하는 화자가 살고 있는 곳은 반지하도 아닌 지하, 즉 지층이다. 땅 밑에 있는 방. 그 곳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이야기가 시집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니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계단의 끝. 86-87쪽)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흔히 계단하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데, 시를 읽으며 이상하게도 계단은 내려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상태. 결국 벼랑이다. 끝이다. 그래서 슬퍼진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아예 지하에 살고 있는, 지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지만, 어디 그러한가. 주인공 중 한 명이 결국 반지하에서 지하로 들어가게 되는 것. 시인의 표현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희망이 있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시집을 읽으며 몇몇 시를 보면서 인간 세상의 단절과 다른 존재들의 연결을 생각했다.

 

인간의 세계가 우리를 단절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무덤 사이에서'(42-45쪽)란 시에서 시인은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라는 것은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고 시인이 표현하고 있듯 다른 존재와 소통을 하고 연결이 되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를 무덤 사이에서 깨닫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죽음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 이후에야 연결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이러한 연결이 너무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가 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런 연결을 보여주는 역할을 시인이 하고 있다.

 

'불꽃'(145쪽)이란 시다.

 

불꽃

 

  이 광장에 시위가 한창인데 바리케이드 한쪽에서 노인이 신문지를 수의처럼 덮고 잠들어 있다 노숙견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와 수의 바깥으로 삐져나온 노인의 손을 핥는다 노인의 깊게 파인 손등에 내리쬐는 저 불꽃이야말로 세계와 삶에 대한 고요한 항의다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11쇄. 145쪽. 

 

광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정작 한 켠에는 소외된, 광장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 그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런 그에게 개 한 마리가 다가온다. 개와 사람이 연결이 된다.

 

연결이 되는 상태, 이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함께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좀더 포근해질 수 있음을 광장에서 커다랗게 외치는 항의가 아니라 이러한 연결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삶에 대한 고요한 항의'라는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단절된 외침이 아니라 서로를 견디게 해주는 이러한 연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 '겨울 아침'(174쪽)이란 시를 읽으면 이런 연결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음을, 다만 우리가 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광장으로 사람들이 나가는 것은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다. 나만이라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라는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광장에서도 나만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라는 나로 인해 소외된 또다른 존재들이 있음도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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