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문학 11 - 임경업전 외
장덕순 지음 / 명문당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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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전문학 하면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 읽었다고 착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또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 읽은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대충 아는 것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다르다.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홍길동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만 해도 그냥 알고 넘어갈 뿐. 또 조웅전이나 류충렬전 같은 작품, 구운몽, 사씨남정기와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목을 알고 내용도 웬만큼 알기에 안다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서 '박씨전'도 마찬가지다.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되고, 청나라 장수를 혼내주는 도술을 쓰는 여인.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을 소설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다는 이야기.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넘어간다. 마치 다 읽은 것처럼. 하지만 다 읽어야 한다. 소설을 다 읽으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박씨전은 이시백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영웅소설의 기본 특징. 신이한 출생 아니던가. 이시백의 아버지는 출중한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이 아들은 태어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소설의 두번째. 탁월한 능력.

 

그러나 그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영웅소설의 세번째 역할. 시련과 극복. 이시백은 천하제일의 박색이라고 할 수 있는 박씨와 결혼을 한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와 결혼하는 것. 오로지 아버지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인이 박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모 중요하다. 오죽하면 박씨를 전신성형에 성공한 사례로 이야기하겠는가.

 

이 시련은 박처사라는 박씨 부인의 아버지라는 조력자를 통해 박씨가 탈을 벗으면서 해결이 된다. 개인적인 시련... 이상하게 여기까지는 박씨 부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시백이 주인공이다. 그를 중심으로 영웅소설의 모티브가 작동한다.

 

그렇다면 박씨 부인은, 우선 못생기게 태어난다. 신이한 출생. (세상에 미추가 신이한 출생의 기준이 될 수 있나, 그래서 세상에서 보아주지 못할 박색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 되는 사람은 그런 박씨의 외모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는 앞부분에서 박씨의 조력자다) 박씨 부인은 뛰어난 재주가 있다. 탁월한 능력. (비록 언급만 되고 있지만, 말이나 연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부터 박씨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련 및 극복. (남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후원에 건물을 짓고 피화당이라고 이름 짓는다. 화를 피하는 곳. 이때 화는 병자호란이다. 나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어야 한다. 이게 시련이다. 곧 조력자를 만나 극복하게 된다. 허물을 벗은 것. 미녀가 된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

 

자, 이시백과 박씨 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까지다. 이들의 시련은 모두 극복되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지만 소설이 여기서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영웅소설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나라의 문제로 확장해 가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라의 고난이 나온다. 전쟁을 겪게 되는 것. 병자호란이다. 이미 진 전쟁. 역사적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복수해야 한다. 용홀대다. 용골대 동생으로 나온다. 박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존재. 또 왕대비가 끌려가는 것을 막는다. 세자와 대군들만 청나라로 가게 된다.

 

시련이다. 극복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데려오는 것. 임경업이 사신으로 가 모셔온다.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난다. 세자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대군은 백성을 이끌고, 막내 대군은 그냥 가고 싶다고 말한다. 

 

당시는 소현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상태. 북벌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 그렇다면 누가 인정받는 왕자가 되어야 하는가? 호왕이 선물을 준다고 말해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답은 당시 지배층이나 백성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북벌? 백성을 위한 왕자는 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다. 그가 곧 효종이다. 이것이 당시 주류의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렇게 표현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임경업전]에서도 이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자, 이게 극복방법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적으로 발전을 해서 청나라와 비슷한 또는 청나라를 극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복수의 방법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같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한발 물러나 세상의 발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한데 당시 양반들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있어도 탄압당한다. 말을 못한다.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이런 모습을 [박씨전]은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임경업의 죽음... [박씨전]에서 임경업은 후반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임경업전]에서는 그 전말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그래서 [박씨전]과 [임경업전]은 함께 읽으면 좋다.

 

[박씨전]에서 그 신통력 있는 박씨가 임경업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르쇠한다.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시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관망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임경업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런 뒷이야기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임경업의 최후에 대해서 [임경업전]도 아닌 [박씨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다. 더이상의 행동은 없다.

 

영웅소설의 마지막은 대업을 이룬 다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잠자는 듯이 죽었다는 표현.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도 앞과 뒤는 이시백이 주인공이 된다. 박씨는 중요한 역할을 못한다. 다만, 소설의 중간,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다음에 신통력으로 활약하는 박씨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라도 여성 영웅을 등장시키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된 상태에서는 이런 여성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박씨전의 뒷부분에서 박씨가 그다지 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더이상 여성들의 힘을 살려줄 수가 없는 상태.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박씨전은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이런 여성 영웅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나중에 난세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여성들이 삶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일상에서의 여성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이 사회는 덜 발전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박씨가 겪었던 일들을 과연 지금 여성들이 겪지 않고 있는가? 이들도 박씨처럼 허물을 벗든지, 아니면 자신을 이해해 줄 조력자를 만나든지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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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으며 '성(聖)과 속(俗)'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성스러움과 속됨이라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구름 따먹는 소리와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시인 약력에 보니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2003년에 나온 시집이니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들이 꽤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이 바로 속됨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현실에서 초월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충실한 사람만이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이상의 세계, 초월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이상을, 초월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 구름 따먹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냥 허공 중에 흩어지는 말을 할 뿐이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현실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런 현실에서 초월의 모습을,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집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시들이 많다. 시인은 서로 다른 존재들에게서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낸다. 이런 표현들이 바로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어떤 장기 기증자'라는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는 사람을 연상한다. 하지만 아니다.이 시에서 말하는 장기 기증자는 낡은 트랙터다. 자신의 부품을 다른 기계에 주는 낡은 트랙터를 장기 기증자에 비유하고 있다.

 

농사 기계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이렇듯 시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삽'이라는 시도 그렇다. 심고 캐내는 일. 씨앗을 심거나 울혈을 빼내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삽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성화(聖化)'란 시가 있다. 성스럽게 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속된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일까? 시의 맨 마지막에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 똥이올시다'(118쪽)라고.

 

이렇듯 속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것들을 이상적인 자리로 끌어올리는 시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 삶이 바로 성스러워야 한다. 성스러움은 특정한 공간에 또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시인이고 시다. 이런 시들을 만나면 현실이 더 성스러워진다. 우리들 일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한 시를 더 보탠다. 명심해야 할 시.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히나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시다. 이 시는 그래서 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씨앗을 심는다. 그런데 그 씨앗을 품지 못한다면 파내어버린다.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다시 작은 토립자(土粒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

그 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

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은 땅은 갈아엎기 힘들다

쟁깃날이 튄다 부러져나간다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콘크리트 밭에 사람들 우거지듯 늘 점령군 같은 잡초만이 빼곡히 자랄 뿐이다

그건 우리를 비웃는 땅의 조용한 테러이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장기집권체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흙이, 사람의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년. 105쪽.

 

땅을 갈아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잘 갈아엎지 못한 땅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신이 '묵은 땅'인지, 그래서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황량한 황무지'로 남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듯이 우리들 삶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들 삶이 현실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즉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한 시만 더 이야기하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시, '물 위의 발자국'(74쪽)이라는 시. 한번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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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시인선 19
황형철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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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만큼 도대체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달리는 차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제동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 제동장치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발전이라는 환상에 휩싸여 있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한 순간 바이러스가 또는 다른 것들이 친다. 사정없이. 이건 몰랐지 하면서. 너네 한번 당해봐라 하는 듯이.

 

몇 년 간격으로 '신종'이라는 이름을 단 바이러스들이, 질병들이 나오고 있다. 부작용이다. 항생제가 듣질 않는 슈퍼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기존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변종을 일으켜 기존 약으로는 잘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것도 특정한 지역, 특정한 연령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전연령대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반응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집중한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이.

 

황형철 시집을 읽으며 제목 '사이도 좋게 딱'이란 자연스럽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내 탓 네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서로 보듬고 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함께 함. 시집에서 두 시가 지금 상황과 더불어 마음에 남았다. 물론 시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시에서 그때 그때에 맞는 상황을 발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다저녁 무렵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진도 팽목항의 어느 현수막에서)

 

기교나 수사 따위에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분하고 답답한 마음 알아주는 것

내 일인 양 가슴이 저미어 다름없이 흔들리고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하는 것

정작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 주는 것

시시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시란 그런 것

정치도 그런 것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44쪽.

 

시가 그런 것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치도 그런 것이라는 것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읽으며 다시 떠올리게 됐다.

 

그래 정치란 무엇인가? 어려운 사람, 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보듬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을 주는 사람 아닌가. 네 탓 내 탓 공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정치인 아니겠는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기교나 수사를 남발하는 말들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정말로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사람, 조용히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흔히 하던 말인 '밥 한번 먹자'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가족이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격리 대상자들에게 이 말, 밥 함께 먹자라는 말,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겠는가.

 

  밥 한번 먹자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23-24쪽.

 

식구(食口)라는 말. 함께 밥을 먹는 입. 그런 식구. 격리 대상자가 되면 식구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한다.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함께 먹지 못한다. 하물며 식구가 아닌 사람임에랴. 그만큼 감염병은 우리에게 많은 제약을 준다.

 

지나가면서 인사치레로 했던 말. 언제 밥 한번 먹자. 이 말이 이렇게 소중한 말일 줄이야. 이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이야. 새로운 질병으로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지금. 다시 예전처럼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식구들끼리 예전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밥을 먹는 때가 오기를...

 

그래서 모두가 자연스레 사이도 좋게 딱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많아지기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지금... 봄은 봄이어야 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 생활에도 봄이 오기를... 황형철의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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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 -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김동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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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 가령 집안일 같은 것, 또 소비자가 스스로 하는 일들, 표를 키오스크라는 기계에서 자신이 직업 끊거나 주유소에서도 기름을 직접 넣는 것. 이것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동을 해서 우리들 삶을 좀더 편안하게 해주고 있지만 결코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책은 '유령들'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지는 말. 마치 유령처럼 취급당하는 대학 청소노동자들, 특히 민주노조에 가입한 청소노동자들을 유령취급하는 대학이나 또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 노동이든 유령 노동이든 당연히 그냥 노동이라고 불러야 하고, 그런 노동을 하는 사람은 노동자라고 해야 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근로의 권리와 의무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이 천대받아서는 안 되는데... 과연 그런가?

 

노동자이되 노동자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노동이되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아야 하는 노동, 그것이 바로 청소노동이다. 아침에 출근하루 때 보면 쓰레기로 덮여 있어야 할 거리가 깨끗한 것을 보게 된다. 이미 청소노동자들이 새벽에 나와서 치운 것. 왜 이들은 이렇게 일찍 일을 해야 할까?

 

우리들 인식이 아직도 이들 노동을 정당하게 대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로 인해 깨끗한 환경이 유지되고 우리들이 기분좋게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노동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보일 때는 더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이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찡그리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외관이 지저분해 보인다고 (청소하는데 그럼 어떻게 외관이 깨끗할 수가 있지? 건물에 이물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청소 안 했다고 뭐라 하는 족속들이 그것을 치우는 사람에게 무어라 한다. 치우면서 외관이 지저분해졌을 뿐인데) 또 냄새난다고 (이들 몸에 밴 냄새 때문에 저들이 냄새 없는 환경에서 지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걸어올라가란다. 이런 청소 도구들을 지니고 어떻께? 이렇게 이들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일 때가 많다.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바로 자기들 눈에 보일 때는 이렇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게다가 대학가에서 시험 때가 되면 강의실에서 자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들이 자고 있을 때 강의실 청소를 하면 대뜸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강의 시작 전에는 청소를 마쳐야 하는데, 학생들이 자고 있으면 안 할 수도 없고, 하기도 힘든 상태.

 

이 책은 이런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 대학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반으로 쓴 대학 청소노동자, 그냥 청소노동자라고 하기보다는 민주노조에 가입된 청소노동자들 이야기.

 

이들을 대하는 용역업체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늘 갈등하는 관계임에 틀림없으니, 그런데 원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고용하는 대학의 태도는 참 문제가 많다. 청소노동자들을 좀더 편하고 싸게 이용하기 위해서 이들은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을 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은 자신들과 관계없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임금을 대학에서 지불하면서도 용업업체에 떠넘긴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나마 괜찮다고 해야 하나?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용역업체 편을 들어 민주노조를 와해시키려는 행동을 한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대학과 용역업체와 사용자 편을 드는 노조가 삼위일체가 되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노조를 와해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들의 노동은 그림자 노동처럼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 아니라 당당한 노동이다. 임금이 지급되어야 하는, 그림자 노동이 아니라 보이는 노동, 실체 노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제대로 된 노동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유령 취급을 당한다.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들로 여긴다. 당연히 노동조건 또한 열악하기 그지 없다.

 

대학이라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답게 이들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에도 신경쓰고, 이들이 적합한 조건 속에서 당당하게 노동을 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우는 고사하고 특히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존재로 더더욱, 이들을 해체시켜 말 잘듣는 노조만을 존속시키려 한다. 대등한 존재로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발생한다.

 

모 대학에서 일어난 민주노조 출범부터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 먹먹해진다. 민주화가 되었다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공약까지 한 정권에서, 그것도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도 여전히 비정규직에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유령처럼 지내야만 하는 청소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들이 아직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는 현실에 아무리 눈 감으려 해도 이들은 유령이 아니라 인간임을 보여주는 이 책. 그래 우리가 쾌적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령처럼 일을 하는이 아니라 마치 우렁각시처럼 일을 하지만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그들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때문에 작가의 말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비리에 눈감고, 약자를 억누르는 사회에서 정의는 움트지 않는다. 죽은 진리의 전당에서 지식인이 태어날 리 만무하다. 그런 곳에서 학생도, 교수도 어차피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에는 무관ㅅ미하다. 그들에게 피억압자들의 운명을 맡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오로지 짓밟힌 자들끼리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나는 억잡자들의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아직 그들이 이겼다고 보지도 않는다. 억압자들만 승리하는 세상에서 피억압자들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이 있어야 저항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억압자들의 실패를 보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피억압자들의 역사가 억압자들의 기록으로 새롭게 덧칠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민주노조 파괴는 현재진행형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썼다. (303-304쪽)

 

'그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알아야 한다. 프리드리히 구스타프 에밀 마르틴 니묄러(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가 했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했다. /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들을 숙청했다. /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 책은 이렇게 니묄러의 말을 생각하게 해준다. 결코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내 이야기임을 생각하라고.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다행히도 대학에서 직접고용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는 책이다. 고압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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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0-02-2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령들˝ 꼭 읽기도 하겠고, 여러 기관 신청도서에 신청해놓겠습니다!

2020-02-28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 소설에서 다룰 만하다고 여기는 작가 10명을 선정해 그의 소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나타난 작가가 꽤 많은데 그 중 10명을 추리는 것도 일일텐데, 그들의 소설에 대해서 세계 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더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책에 나와 있는 작가들이 우리나라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많고 좋은 작품도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소설가들은 한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말이 좀 그렇다면 소설의 경향을 대표하거나 주도한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런 작가와 작품들을 선별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으니, 로쟈, 이현우의 설명을 따라가면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황석영 편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로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대의 핵심적인 모순에 대해서, 본질에 대해서 파악하고 그 문제를 파고드는 소설을 써야 한다. 그것이 현대소설이고 소설가의 역사적 책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에 소설과는 다른 것이다.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잘 쓰는 사람들은 많다. 굳이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면 시대의 핵심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여러 제약 때문에 단편으로는 곤란하고 장편으로 확쟁돼야 한다. (173쪽)

 

이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10명의 소설가와 소설을 골랐다고 생각하는데, 여덟 번째인 이문열까지는 평가나 생각이 조금 다르더라도 그래도 한 시대의 대변하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인성과 이승우에 대해서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문열과 비교하기 위해서 작가와 작품을 선정했다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1950년대에서 시작한다. 소위 전후문학이라고 하는 소설들... 손창섭을 다루고 있다. 이견이 없다. 손창섭이 전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암담한 생활을 잘 그리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니까. 이 시작부터 로쟈는 장편소설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단편은 삶이나 시대의 어느 한 면만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그 시대의 핵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손창섭은 장편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이런 한계는 다음 작가들에게서도 이어진다. 60대를 열어젖힌 최인훈에게서도 같은 한계를 그는 발견한다. [광장]은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해당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시대적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필요한데, 로쟈가 다루고 있는 작가는 이병주다. 사람들 사이에서 저평가된 작가라는. 그의 작품 [관부연락선]을 대상으로 해방전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책의 내용은 그것보다는 이병주라는 작가를 재조명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했다는 김승옥, 리얼리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 황석영을 다루면서 1960-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들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나온 소설들은 단편이라서 한계가 있다고 하고, 장편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김승옥은 기독교로, 황석영은 역사소설로 나아간 것이 아쉽다고 하고 있다.

 

독재자를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이 부분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이런 [당신들의 천국]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 사회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소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경제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한 독재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결과 경제성장은 이루었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이 드러나고, 그것을 표현하는 소설이 필요해진 것.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 내용은 리얼리즘이지만 표현은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자본주의 모순을 다룬 장편소설이 나와야 하는데...

 

성장소설로 넘어가게 된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지식인 계층이 된 것. 교양이 필요한 시대. 소위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성장소설이 등장하고 많이 읽히게 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것이 이문열이고 [젊은 날의 초상]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떠난 관념에서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음 두 소설가는 이런 이문열의 성장소설과 비교하기 위해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인성의 아주 낯선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와 이승우의 [생의 이면]

 

아버지 부재의 이문열이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한 성장소설을 썼다면 이인성은 살아있는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썼고, 이승우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없는 부재 상태에서 성장하는 소설을 썼다고.

 

이렇게 로쟈는 넓은 의미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리를, 사람들의 삶을 추구하는 소설들에서 이제는 가정에서 자아를 형성해가는 소설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세계문학과의 연관성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점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 속에서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가령 성장소설이라는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 이문열, 이인성, 이승우를 예로 들면 이문열에게서는 괴테이야기를, 이인성에게서는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를, 이승우에게서는 헤세와 지드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다. 그밖에 황석영에게서는 고리키를, 김승옥에게서는 토마스 만,이병주에게서는 발자크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로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문학과 연결지어 우리들 시야를 더 넓혀주고,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소설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소설(소설가)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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