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쇼크 - 인류 재앙의 실체, 알아야 살아남는다, 최신증보판
최강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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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가 전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는 몇 년을 주기로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우리를 습격하고 있다. 습격이라는 말을 썼지만, 사실 우리가 바이러스들을 불러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각자 고유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던 생명체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져,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담이 없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담장 안에만 있던 바이러스들이 담장을 넘어서 들어오니 '신종'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밖에.

 

국지적인 질병이란 이제는 없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종간 감염이 안 된다고 알고 있던 감염병들이 종을 넘나들면서 질병을 일으키고 있다. 종들간에 굳건히 닫혀 있던 문들이 열리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 종들 특유의 자물쇠가 있고, 그 자물쇠를 열 열쇠는 종 내부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종 외부에도 열쇠가 마련된 상황이라는 것.

 

이 열쇠를 마련하는데 매개되는 동물이 있는데, 그 동물들은 예전부터 우리 인간들과 함께 지내왔던지, 아니면 최근에 인간들이 식용으로 먹는 동물들에게서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나온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바이러스는 늘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 새롭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 그것은 모른다는 말과도 통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단지 두려움을 넘어 공포로 넘어가면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2016년에 나왔던 책의 개정증보판이 나온 이유도, 메르스 공포를 넘어 이제는 코로나19로 우리 사회가 비상사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때 바이러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이 책을 다시 펴냈다고 하는데...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감염병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는데, 그것이 너무 심하게 작용하여 마스크 대란을 일으키고 결국 마스크 5부제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학교들이 개학을 연기하는 그런 재난 상황에 이르게까지 되었는데...

 

이제는 이런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이 한때 그랬지로 끝나지 않고 상존하는 시대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바이러스와 인간은 함께 지내왔지만, 그리고 공존하는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진화란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변화해 가니... 바이러스나 세균들과 인간들도 역시 위협과 공생을 통해 함께 지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이러스나 세균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듯이 세균이나 바이러스 역시 숙주인 우리 인간을 완전히 멸종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들도 사라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냥 그렇지 하고 넘어가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지나치게 공포심을 지니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때 우리게에 필요한 것은 바이러스에 대한 정확한 정보, 그리고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 및 행동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된다. 바이러스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도 도움이 되고, 그것들을 예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바이러스들이 창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구촌에서 신종 바이러스 출현 자체를 저지하는 선제적 예방 노력은 출발점, 그 선상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스 바이러스처럼 이미 바이러스 출현 경로가 알려진 경우와 달리,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어느 지역에서 어떤 경로로 나타날지 사전에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신종 바이러스 출현 배경을 제공하는 푸시&풀 여건 (산림파괴, 대도시화, 기업축산, 기후변화, 여행증가 등)을 개선하려는 발걸음은 여전히 출발선 이상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바이러스 학자들이 지구촌 야생세계에서 미지의 바이러스를 찾고 있고, 우리 주변의 동물인 가축에서 신·변종 바이러스 출현을 감시하고 있지만, 사람에게 위험이 되는 신종 방이러스를 찾아내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런 바이러스를  수집하더라도 향후 사람에게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지 판단하는 데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다. (350쪽)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데우스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에게 아직도 신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바이러스와 세균들 존재다. 인간이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면 호모 데우스가 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단계에 머물러도 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세상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바로 바이러스와 세균을 극복하는, 또는 그들과 공생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류가 절멸의 위험에 처하지 않게 이들을 적절히 예방하는 기술을 만들어야 하고, 또 이들로부터 건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행동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알아야 이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야 대응할 수 있다. 많은 것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산림파괴, 대도시화, 여행증가 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금도 산림은 파괴되고, 거기서 살고 있던 동물들이 살기 위해서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전파된 바이러스가 대도시화로 인해 밀집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지는데, 비행기나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하루 만에 전세계 퍼질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개인위생에 만전을 기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신종이라는 이름을 단 바이러스가 최근에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인간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

 

지금 신종 바이러스를 옮기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박쥐들 이야기가 있는데, 이 책은 어떻게 해서 박쥐가 신종 바이러스를 옮기는 주 역할을 했는지, 왜 코로나19에도 박쥐가 의심을 받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박쥐가 인간에게 복수심을 품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 것을 잘 알지만, 한번 퍼지기 시작한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은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니 조심해야 한다. 결국 서로의 영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질병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 참에 우리들의 생활도 돌이켜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감염병에 대해서 신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많은 질병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공포심을 지닐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라고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개인들 위생 수칙에서부터 생활방식과 더불어 각 나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폭넓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19, 사그라들기를 바라며, 또다시 이런 혼란을 겪지 않도록 많은 준비를 해야 함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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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조이스를 읽기 시작하다. 물론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그가 쓴 소설 중에 '더불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었고, 그 여세를 몰아 '율리시즈'를 읽어보기로 하다.

 

  그리고 읽다. 그냥 읽다. 상·중·하 세 권. 예전 판이다. 사다 놓은 지 꽤 오래. 아마도 20년은 넘었나 보다. 책 밑에 써놓은 것을 보니 95년과 96년에 구입했다. 알라딘 상품 넣기에 이 책을 치면 이미지가 없다. 그만큼 오래 된 책이란 소리.

 

  산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상권을 읽다가 나머지를 구입한 듯. 분명 헌책방에서 구입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때는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물론 상권만 읽고 나머진 읽지 못했다. 어려웠기 때문.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나이도 먹고, 소설을 읽기도 꽤 읽었다고 했으니, 다시 읽어보자 하고 읽은 것.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10년이 걸렸는데, 나는 이 책을 다시 잡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 책이 남아 있는 것이 용하다. 

 

읽었지만 여전히 난해하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것이 다행.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없을 정도다. 내용 이해가 되어야 리뷰를 쓰지. 

 

야, 이런 작품을 세계적인 명작이라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비평가를 밥벌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던지, 아니면 그 소설에 나타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냥 읽고 만 것일 뿐.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지만, 율리시즈라는 이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으로 바꾸면 오디세우스 또는 오딧세이다.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서울시교육청에서 오디세이 학교도 운영하고 있는데, 모험을 통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교육이라고 하는, 그런 학교.

 

제목에 딸린 각 장들에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배경이 함께 나온다. 즉 호머가 쓴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10년 동안을 방황하지만, 이 율리시즈에서는 단 하루 방황을 한다.

 

멸망한 트로이를 떠나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10년. 그동안 엄청난 모험을 겪는 오디세우스. 이 소설에서 그에 해당하는 인물은 블룸이다. 그리고 텔레마코스에 해당하는 인물은 스티븐이고. 스티븐 디덜러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스티븐은 제임스 조이스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블룸은 누구인가? 블룸은 유대계 아일랜드인. 더블린이라는 장소에 고착된 인간이 아니라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생활이 그랬으니까. 그들은 아일랜드인이자 아니기도 했으니... 스티븐이 블룸과 연결되는 것은 조이스가 아일랜드라는 민족성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소설은 스티븐과 블룸, 둘을 중심으로 더블린이라는 공간에서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진행하고 있다.

 

소설과 오디세이에 나오는 내용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좋다고 하는데,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율리시즈]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마지막 페넬로페 장에서 보면 오디세이에 나오는 페넬로페와 율리시즈에 나오는 몰리 블룸은 정숙한 면에서는 정반대다. 그러나 부부로 지내는데는 일치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면만 주제로 살리고 나머지는 조이스 마음대로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는 많은 기법들, 또 표현방식의 다양성이 나타난다는 것. 번역하면서 그 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여기에 다양한 언어들이 나오는데, 가히 언어와 표현기법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읽을 실력도 안 되지만 영어만으로 읽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다양한 언어들이 쓰이고 또 너무도 많은 신화적,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자동기술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표현기법까지.

 

따라서 이 책의 주석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불행히도 나에게는 주석본이 없다. 그때 그 책은 구입하지 않았나 보다.

 

범우사 옛날 판 해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92년 초판 4쇄다.)

 

이 작품이 품은 상징적 함축미는 우리들로 하여금 작품을 몇 번이고 거듭 읽게 한다. 어떤 독자가 [율리시즈]를 한 번 읽은 다음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조이스는 여덟 번을 더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독자는 여덟 번 이상을 읽었어도 알 수가 없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405쪽)

 

이 말에 위안을 얻는다. 한번 읽어서 이 작품을 알면 그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온갖 파행이 난무하는 이 작품을! 한번 읽고 이해하다니!!

 

그러나 여러 번 읽을 시간이 없다. 여력도 없다. 다만 머리 속에 율리시즈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을 새겨놓고, 그들이 하루동안 방황한 내용, 그리고 온갖 기법을 기억하기로 한다.

 

혹 알겠는가. 더 세월이 지나 다시 읽고 싶어질지. 그만큼 오디세이만큼 많은 방황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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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0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03-10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로는 오뒷세우스가 이타카를 떠나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20년이 걸리는걸로 알고 있어요~~
트로이전쟁이 10년 걸렸고 전쟁이 끝나고 온갖 우여곡절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다시 10년이 걸리거든요^^
호메로스는 그렇게 서술했는데
율리시즈는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꼭 율리시즈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2020-03-10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20-03-1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쓰고 싶었던 댓글을 페넬로페 님께서 벌써 써주셨군요. ㅎㅎ
이렇게 오래된 책을 오랜만에 읽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저는 요즘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소개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영상 제작에 필요한 온갖 그림들을 찾다 보니, 마침 어제는 오뒷세우스가 전쟁에 참전하려고 아타케를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나오더군요.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20년 만에 이타케 섬에 당도했을 떄의 모습을 담은 그림도 찾아냈습니다. 예전에도 <오뒷세이아>를 필사하면서 많은 그림들을 찾아냈지만, 그때 찾아낸 그림들은 동영상을 만드느라 뒤져본 그림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더군요. 암튼 하루, 이틀이면 오뒷세이아를 소개하는 영상을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한데, 그 영상에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언급하는 걸 빼놓기 어렵더군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소개하는 동영상 주소를 덧붙여봅니다.
https://youtu.be/rQ2h6W4VJf8

페넬로페 2020-03-10 14:34   좋아요 1 | URL
oren님의 오뒷세이아 동영상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하나의 작품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하는 것에 무한한 존경을 표합니다^^

oren 2020-03-10 14:59   좋아요 2 | URL
<오뒷세이아>를 소개하면서 이런저런 곁다리 재료들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데, 예를 들자면 조니 뎁이 등장하는 <캐리비안의 해적>,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도 포함시켰답니다. 그런데 <오뒷세이아> 얘기를 자꾸 하다 보니, 결국 까마득한 옛날에 제가 읽었던 ‘월탄 박종화 선생님이 번역한 <삼국지> 얘기도 꺼내게 되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읽었던 온갖 아동문학까지도 끄집어 내게 되더군요. 가령, 이런 식입니다....
* *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만큼 흥미진진한 모험담도 찾기 어려우며, 제가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좋아했던 이야기가 바로 ‘오뒷세이아‘를 닮은 이야기들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주인공이 끝없이 낯선 곳을 떠돌며 수많은 모험과 고난을 겪는 이야기 말이지요. 어쩌면 제가 어릴 때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이야기들, 가령 <보물섬>, <15 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 일주>,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라딘의 요술 램프>, <신밧드의 모험>, <정글북>, <톰 소여의 모험>, <로빈슨 크루소> 등등이 모두 『오뒷세이아』의 머나먼 자식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 *
그런데, 영상을 만들자니, 결국 20년도 아니고, 무려 50년쯤 전에 읽었던 그 까마득한 옛날에 봤던 책들의 ‘이미지‘까지도 일일이 다 찾아내야 되더군요. 그런데 제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70년대에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옛날의 책의 모습은 아니더군요. 어찌나 서글프던지요...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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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참 복잡한 사람이구나, 카잔차키스란 사람은 이란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영혼의 구제를 위해 모험을 떠나는 사람과 같다.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가 도달한 길이 어디일지는 모르겠다.

 

육신을 벗어던지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지만 육체없는 영혼이 가능하겠는가? 반대로 영혼없는 육체란 빈껍데기에 불과할텐데... 육체와 영혼의 합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에 이를텐데, 그 길이 만만치가 않다.

 

소설이지만 사실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실제로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만났기 때문에, 또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이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가 조르바에 관한 글을 완성했을 때 편지 한 통이 온다. 그 편지 내용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조르바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것, 그것은 조르바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라는 것을.

 

만남에서 헤어짐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소설 속 화자는 성장해 간다. 그는 자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완전한 자유에, 조르바와 같은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받았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생략)' 462-463쪽.

 

이런 조르바의 말을 들으며 화자는 자신을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463-464쪽)

 

이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날아가고 싶지만 끈은 놓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끈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날려고 하는. 그러면서 자신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존재.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한없이 자유로운 조르바란 인간을 만나 자신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이다. 사람이 제공한 행복.

 

그래서 조르바는 화자에게 사람책이 된다. 그는 비록 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펜대를 지닌 인간에게 쓸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또한 삶을 성찰하고 다른 삶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사람책.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만나 자신이 지닌 펜으로 그의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책이 하는 역할이다.

 

그걸 깨닫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351쪽)

 

자, 이런 사나이에게 조국이란 윤리란 명예란 미래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오로지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살아간다. 자신의 의지로.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일을 할 때는 그 일에만 몰입한다. 다른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게 한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요리를 할 때는 요리에, 춤을 출 때는 춤에, 사랑을 할 때는 사랑에... 몰입한다. 자신을 그것에 일치시킨다. 이리저리 요량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살아간다. 현재를. 그러니 거창한 이념이나 윤리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펜대를 지닌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재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늘 손익을 계산하는.

 

하여 조르바의 삶은 화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비록 그가 조르바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조르바라는 사람책이 준 영향은 상당하다.

 

반대로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조르바를 욕망에만 충실한 인간으로 좁게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만 충족하면 그것이 사람인가? 짐승이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르바가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도덕의식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는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한다. 수도사들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부정적인 생각이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조르바는 이들을 골탕먹이지만 선량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으로 그들이 피해 입을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또한 말로는 여성을 암컷이라고 비하하지만, 그 여성들을 대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 여성들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여성들 또한 목적으로 대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과부의 사건에서 그런 조르바를 알 수 있고, 오르탕스라는 전직 매춘부와 지내는 모습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행위하는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것이 다른 사람의 피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조르바의 자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그는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또 윤리니 돈이니 하는 것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 역시 조르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구도의 방황을 한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 조르바. 다시 읽으며 나는 얼마만한 줄에 매여 있는 연(鳶)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줄을 끊어버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길게는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 이것도 조르바가 보기엔 펜대에 얽매인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같은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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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연 지음 / 비룡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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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상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없는 거라면? 가장 큰 상처는 예측하지 못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그것도 죽음이라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헤어지는 것. 그 상처의 깊이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들이 안고 살아가는 슬픔의 깊이, 넓이...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지만 여전히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문제를 단지 드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런 고통을 정치권은 외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학은 외면할 수 없다. 여전히 진행형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문학이 외면할 수 있겠는가. 시로, 소설로 그 상처를 보듬으려고 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빵'이란 이름을 지닌 빵집을 중심으로 세월호로 인해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과정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빵을 중심으로 그들이 지닌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받아들이게 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하경, 태환, 진아, 소연, 윤지 엄마, 이기호가 주요 등장인물인데, 이들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다. 모두 세월호와 관계가 있는데, 학생 윤지와 교사 영훈과 관련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군에 가서 죽은 오빠의 컴퓨터에서 캉파뉴라는 블로그를 알게 된 하경, 무작정 그 블로그에서 보인 장소로 가다가 우연히 들어간 빵집. 블로그에서 본 빵집. 빵집 주인 이기호.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지금은 아버지가 하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 그 역시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빵집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상처를 극복하고 있던 상태. 그의 친구이자 고등학교 물리교사인 영훈. 그는 수학여행 때 학생들과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약혼녀 소연을 둔 채.

 

윤지와 사귀던 태환과 가장 친했던 진아, 그리고 윤지가 뱃속에 있음을 알게 해준 빵집을 다시 우연히 찾은 윤지 엄마 등. 이들은 빵집을 통해 하나하나 자신들의 상처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빵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게 된다.

 

작가는 이 슬픔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였다고 한다. 악을 응징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다만 이들의 마음을 위무해줄 소설을 쓸 뿐이라고. 이렇게 공감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일이다. 공감의 힘이 얼마나 큰가. 공감은 공명으로, 마음과 마음이 함께 울려 결국 세상을 바꾸게 된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용히 함께 슬퍼해주는 마음, 그런 슬픔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는 마음.

 

소설은 빵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조용히 다가와 빵을 건네거나 빵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하면 된다. 함께 있어주는 것.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착한 사람들, 작가는 약한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착한 사람이 강해야 하는데 약한 사람이 되는 현실을 작가는 직시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다.

 

우연히 발견한 빵집에서 이들은 이제 치유를 시작한다. 소설은 사회부조리, 해경 문제, 구출 문제, 진상규명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받은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이게 다다.

 

그런데 여기서 울림이 일어난다. 마음 속에서 커다란 울림이, 슬픔이, 그리고 그 슬픔을 통해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게 소설의 힘이다.

 

다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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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눈에 보일까? 보이지 않는다고도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바람을 직접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소리를 듣지 않고도 바람이 분다고 눈에 보이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만큼 바람은 눈에 띄지 않지만 눈에 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무늬를 새겨놓음으로써.

 

  이런 바람의 무늬를 사진으로 담고 또 시로도 남겨 놓으면 우리 역시 바람의 무늬를 볼 수 있다. 아니 바람을 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에 사이트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들어가 '*바람'을 쳐서 검색해 보면 무려 175개의 단어가 나온다. 이 중에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도 있고 또 자연현상인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일으키는 바람도 있다.

 

이렇게 많은 낱말이 만들어졌음은 우리의 삶과 바람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서 바람을 빼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자연현상이든 인간의 일이든.

 

가령 지금 우리나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초)미세먼지만 해도 그렇다. 이 미세먼지가 온 세상을 부옇게 덮고 있을 때 우리는 바람을 간절히 바란다. 미세먼지를 날려보낼. 고마운 바람이기도 하다. 반면 미세먼지를 몰고오는, 황사를 몰고 오는 바람은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기도 한다. 또 따뜻한 바람을 기대하기도 하고, 태풍과 같은 바람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은 바람이되 우리들 마음은 다양한 감정을 지니게 된다. 같은 바람은 없다. 다 다른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우리 눈에 띄게 남겨놓는 무늬 역시 다 다르다. 그 무늬를 보면서 바람에 고마워하기도 하고 바람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 사진시집에는 많은 사진과 시가 실려 있다. 사진과 시. 디카시라고도 하고, 사진시라고도 한다. 둘을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 변별을 두기도 한다. 이 시집은 사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러니 사진시집이라고 하자.

 

사진과 시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사진은 시를, 시는 사진을 품어 더 깊고 넓은 파장을 일으킨다. 이 둘이 각자 다른 파장을 일으키다 서로 합쳐 또다른 파장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한다.

 

바람이 다른 존재에 자신의 무늬를 새겨놓듯이 이 사진시집은 우리 마음에 새로운 무늬를 새겨넣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십진법의 세계에서 1+1=2라는 자명한 공식이 이진법의 세계에서는 1+1=10(2)이 된다는 사실.

 

그렇다. 자릿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형식적인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인 결합을 하게 되는 것. 이 시집을 읽으며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오른쪽 사진을 보자. 제목이 심원(心願)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다. 두 개의 공기. 그러나 이 공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이 담겨 있을 것이고 물은 다시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 물에는 사람 마음의 무늬가 있을 것이고.

 

여기서도 바람이 나온다. 이 바람은 물과 공기와 사람과 하늘을 하나로 이어준다.

 

보란듯이 강하게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시인은 사진과 시를 통해 바람의 무늬를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눈으로 쉽게 볼 수 없는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데, '바람의 무늬'라는 제목을 '마음의 무늬(心紋)'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사진시집을 읽으며 내 마음의 무늬를 연상했다고나 할까.

 

덕분에 이 '바람의 무늬'를 통해서 내 마음의 무늬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됐다.

 

코로나19로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 이 어려움이 가시도록, 우리가 잘 이겨내도록 마음을 담아 기원해 본다.

 

덧글

 

알라디너인 ure*님이 보내주셨다. 덕분에 좋은 시간 가질 수 있었다. 너무도 고맙다. 또 이 사진시집을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신 작가 강미옥 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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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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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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