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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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SF라는 말로 더 친숙한 환상소설을 쓴 작가가 어슐러 K. 르 귄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오즈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유명한 작가다.

 

작가 검색을 하다 보니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가 꽤 유명하다고 하고, 이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또 로버트 리버만 감독이 '게드전설: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두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꽤나 유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스시'라고 한글로만 써놓으면 참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어스시'를 영어와 함께 표기를 하면 한눈에 들어온다. 'Eerthsea'. 한 마디로 '땅바다'다. 땅과 바다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 아닌가. 결국 환상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제목이 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대표작인 '어스시' 시리즈를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 읽은 이 작품집으로도 르 귄의 작품세계를 아는데는 충분하지 않나 하는 근거없는 자만심을 가져본다. 이 작품집이 환상소설임에 분명한데, 현실을 자꾸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르 귄이 초기에 쓴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르 귄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고, 또 한편 한편을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이 중에 이 책을 산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한 편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때문이다.

 

다른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 우리는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이곳에는 없는, 또는 어디에도 없는 곳 아닌가. 오멜라스는 그런 유토피아에 대해서 아주 짧게 서술한 소설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낸다. 너무도 행복하게. 그런데 이들의 행복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자, 그런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인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인가?

 

오멜라스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희생에 대해서, 그것도 어린나이의 사람이 - 르 귄의 작품에는 남녀의 구별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겨울의 왕'이라는 작품을 보면 양성인이 나온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에 가장 늦게 발표된 작품이 1974년 작품임에도 이미 다양한 성에 대해서, 어느 특정한 한 성이 지배적인 사회에 대해서 르 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사람의 희생을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이 계약이다.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소설을 보자.

 

  그러나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464-465쪽)

 

자, 이게 유토피아의 이면이다. 감춰진 진실이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 같지만 모두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멜라스 사람들이 고민하는 지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무슨 윤리 딜레마 문제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모든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아닌가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모두'라는 말에 방점을 찍으면 전체주의로 가기 쉽다. '모두'를 '다수'로 대체하고 '다수'를 위해서 '소수'는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니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행복이 과연 행복일 수 있을까? 오멜라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몇몇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소설은 이렇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장편으로 이런 소설을 쓴다면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는 갈등들이 나오겠지만, 간략한 서술로 소설은 시작되고 끝난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들 몫이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떠나는 오멜라스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할 것이다. 사회를 바꿔야지 도피했다고. 그것이 과연 도피일까? 한 사람을 구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한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행복을 수량으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들이 지녀야 할 행복은 동등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지금 우리 사회로 바꾸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삶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쉬운 길이든 어려운 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을 했기에. 어떤 길이어도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두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이 과연 통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한 생각을 이 작품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혁명 전날'이라는 소설에서 더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혁명에 가담한 '라이아'라는 인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 없음을,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잣대로 남들의 행복을 재단해서는 안 됨을, 행복은 자신이 선택한 자유에서 나오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로 와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자, 거대한 과학기술의 시대에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세계는 너무도 멀리 와 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 때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여기에 더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혹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될까?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단 한 명일지라도 견딜 수 없는 오멜라스 사람들이 있는데, 단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수의 희생 위에 우리 사회가 지탱이 되고 있다면?

 

오멜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무엇으로 인해 지속이 되는지를 안다. 그들은 현실을 명확히 인식한다. 그 다음에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담 우리가 할 일도 명확하다. 먼저 우리 사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체계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작품집에 많은 작품이 나와 있지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이 되는 이유는 바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몫을 남겨놓고, 그 몫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좋은 소설들이 많다. 복제인간과 관련해서는 '아홉 생명'이라는 소설을,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나무 관점에서 쓴 '길의 방향'도 생각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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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집는 말들을 만나면,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 속에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란 내가 생각하는 것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외로움, 이건 홀로 있음과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있음으로해서 외로움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태형의 시집 [코끼리 주파수]를 읽다가 반대로도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디아스포라'(11쪽)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외로운 것은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외롭다? 혼자가 되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군중 속의 고독일까? 혼자가 될 수 없는 현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외로움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래, 외로움을 이해받지 못함일 수도 있다. 많은 존재들이 내 주변이 있지만, 그 존재들이 그냥 주변에만 있는 것, 그것은 아무리 많은 존재들 속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외로울 수 있다.

 

외로움은 결국 이해받지 못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외로운 식당'이란 시도 마찬가지다. 식당이 외로울 수가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받아들고 있는데... 그런데도 시인은 '외로운 식당'이라고 했다. 왜? 홀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홀로 있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도 자신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로운 식당

 

초행이라 길 찾기 바쁜데도

길가 음식점 간판에 눈길이 머뭅니다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싶어 찾아든 식당

빈자리 하나 잡기도 쉽지 않군요

그 틈새에 겨우 끼어

돌솥밥 한상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손님들 뒤쪽으로

기러기탕 백숙 육회

이 집 특별식 메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라니

멀건 하늘처럼 끓고 있는 탕 속에서

보글보글 날고 있는 기러기들

먼 길 떠나는 날갯짓 소리는

사람들 시종 떠들어대는

온갖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불륜이라도 저질렀으면 하고

측은해집니다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아까 올려다본 흐린 하늘의 기러기떼가 아니었으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뻔했습니다

 

김태형, 코끼리 주파수, 창비. 2011년. 98-99쪽

 

시끌벅적한 식당을 외롭다고 표현하고 있다. 차라리 조용한 상태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홀로 바라본 하늘의 기러기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있지만 자신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리 모두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 갈수록 우리는 더더 외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스마트폰 시대에 더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육체는 비록 혼자만의 공간에 있을지 몰라도 전자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있는 상태. 전혀 홀로일 수가 없는 상태. 따라서 외롭다고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이 아닌 상태.

 

초연결상태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째 우리는 외로움마저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하는데... 이 시를 통해 뭔가를 그리워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에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책이름 '군중 속의 고독'. 이것을 이처럼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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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임헌영 지음 / 소명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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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담론이, 그래서 미시사라고도 하고 생활사라고도 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연구 방향도 거대한 흐름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로도 많이 흘렀고.

 

그렇다고 미시사로만 역사가 구성되지 않는다. 이런 미시사들이 모여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역사 연구는 학자들이라는 전문가 속에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결국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고 미래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니까 미시와 거시가 함께 잘 어우러져야만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소소한 세계만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흐름만 표현할 수도 없다. 거창한 흐름 속에서 소소한 일상들이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이 책은 그런 작품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평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 소설에 나타난 정치 현실 또는 작가들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평론을 통하여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지금-여기'일 터이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를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라고, 자신은 이런 작품들을 이렇게 읽었다고. 단지 읽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데, 그동안 읽지 않았던 작품들도 꽤 등장한다. 아주 오래 전 작가라고만 여기고 묻어두었던 작가들, 그냥 그런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작가들의 작품도 나온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읽고 싶어지게 한다.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선구적으로 비판했던 작품은 남정현이 쓴 '분지(糞地)'다. 미국을 이렇게 대놓고 풍자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 필화 사건에 휘말렸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 작품만 기억하던 나로서는 남정현이 '허허선생' 연작으로 우리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풍자라 함은 비꼼인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비꼬아 그 사람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군림했던 미국과 또 그에 추종하던 사람들을 풍자한 남정현의 소설은 당시 우리 사회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이야기할 때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 때 문학적으로 어떤 장치를 이용해 표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작품뿐만 아니라 최인훈의 작품도 마찬가지고... '총독의 소리'나 '주석의 소리'를 보라. 얼마나 당대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지. 이렇게 많은 작가와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읽은 책들에서 다시 주목하는 작가가 이병주인데... '지리산'의 작가로만, 또 보수적인 작가로만 알고 있던 이병주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박정희에 대해서 꽤 비판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 그런데도 이병주를 1970년대 이전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해준다. 물론 이병주는 박정희와도 잘 어울렸지만 5.16쿠테타 직후 감옥 생활을 하게 되어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반감이라고 해서 다 소설이 되지는 못한다. 그는 많은 자료를 모아 5.16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소설은 역사가 아니지만, 소설을 통해서 역사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는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소설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데, 그 작업을 이병주가 했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역사가 아닌 소설, 그래야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이다.

 

(이병주가 쓴 작품인 ['그'를 버린 여인], [그해 5월]을 읽어보면 소설 속 인물로 표현된 박정희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밖의 다른 인물들도.)

 

여기에 더불어 박화성과 한무숙이라는 작가에 대한 글을 통해 우리 소설에 대한 지식의 폭을 좀더 넓힐 수 있다.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나라 현실을 잘 반영한 소설들을 들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사회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활인이자 정치인이다. 정치가 그들의 삶에서 사라질 수가 없다.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정치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들을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파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지금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관심이 있으면 찾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관련짓게 된다. 우리가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인간은 원초적으로 경제인이지만 정치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런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통해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하는 듯하다.

 

평론집, 안 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만큼 문학에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소설을 읽어 봐야겠다는, 소설이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어, 소설을 통해서 나를, 우리 사회를 발견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뱀발

 

이 책을 읽으면서 지식나부랭이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가족관계를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박화성의 아들이 천승세인것, 그리고 한무숙과 한말숙이 친자매지간인 것. 여기에 한묘숙이라는 자매가 있는데, 이 분의 활동에 대해서도 찾아보게 되는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임헌영 평론가가 남정현, 이호철, 최인훈과 어울리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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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의제 민주주의, 이대로 될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 결국 선거다. 내 의견을 대신해 줄 사람을 뽑는 투표. 그리고 끝.

 

  아마도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이렇게 투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정말 민주주의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내 의견을 반영해 줄 거라 믿고 투표했는데, 정작 국회에 가서, 지방의회에 가서, 또 지방자치단체장이 되어 내 의견과 반하는 정책을 펼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아무런 대책없이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려야지. 국민(주민)소환제도가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길거리로 나서는 일이나 또는 법에 호소하는 일밖에 없는데, 법에 호소하는 일은 우리 일을 법에게 넘겨주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좀 그렇고 -지나치게 거대해진 사법 권력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것도 조심해야 한다-, 길거리에 나서는 일은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게 대의제 민주주의가 지니는 문제다. 대의제라고 하지만 과연 대의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대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대처 방법이 없는 것이 지금의 대의제다. 이것을 보완하겠다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자고 했지만,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기껏 만들어 놓은 대의제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다. 그것도 겨우 30석에만 적용하는 무슨 한계를 정한 비례대표제도.

 

그것도 묘수라고 하는 꼼수를 쓰는 정당이 있으니 민의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의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녹색평론에서 우려하는 점도 이 점이다.

 

제대로 대의를 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대의제 민주주의로만 정치체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숙의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말도 있고, 준연동형이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그것도 비례대표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지금 현실에서는 대의제를 없앨 수는 없으니...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대의제를 보완할 수 있는, 대의제가 말 그대로 대의가 될 수 있도록,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한다.

 

아니면 대의제와 더불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하고. 선거 때만 주권자가 되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녹색평론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감염병 확산이 잘 마무리 되면(그렇게 되어야 한다) 4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이 대표적인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과연 내 의사를 잘 대변하는 사람, 정당을 선택할 것인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번 호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글은 채효정의 '문재인 정권 3년을 돌아본다'다. 촛불로 인해 탄생한 정부가 이제 임기 반환점을 넘어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라톤으로 따지면 이제부터 제 속도를 유지해야 할 때다.

 

남 눈치를 보면 자기 속도를 잃는다.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달려 나가야 하는 때... 정부도 마찬가지다. 마라톤에서 페이스 메이커가 어느 지점까지는 이끌어주지만, 그 이후는 자기 힘으로 달려야 한다. 자신의 속도로, 자신이 계획한 대로.

 

정부도 마찬가지다. 전 정권이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 준 것이 1-2년이라면, 이제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은 오로지 이번 정부의 능력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자신들이 내세웠던 공약이 무엇인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공약을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대의제 민주주의에 걸맞는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점검해서 적어도 공약의 3/5 정도는 실현되었다는 자체 평가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했는지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왜 이 정부를 국민들이 선택했는지, 국민들이 지닌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 점검을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과거에 했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또 처음에 지녔던 마음을 되새겨야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서는 안 된다. 채효정의 글과 같은 비판을 읽으며(들으며) 자신들의 정책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쓴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 그리고 실행할 수 있는 손과 발을 지닌 정부였으면 좋겠다. 그런 정부라야 대의제 민주주의로 운용되는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녹색평론 171호를 읽으며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정치, 경제, 생태, 환경 등등... 내 삶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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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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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참 복잡한 사람이구나, 카잔차키스란 사람은 이란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영혼의 구제를 위해 모험을 떠나는 사람과 같다.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가 도달한 길이 어디일지는 모르겠다.

 

육신을 벗어던지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지만 육체없는 영혼이 가능하겠는가? 반대로 영혼없는 육체란 빈껍데기에 불과할텐데... 육체와 영혼의 합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에 이를텐데, 그 길이 만만치가 않다.

 

소설이지만 사실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실제로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만났기 때문에, 또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이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가 조르바에 관한 글을 완성했을 때 편지 한 통이 온다. 그 편지 내용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조르바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것, 그것은 조르바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라는 것을.

 

만남에서 헤어짐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소설 속 화자는 성장해 간다. 그는 자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완전한 자유에, 조르바와 같은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받았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생략)' 462-463쪽.

 

이런 조르바의 말을 들으며 화자는 자신을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463-464쪽)

 

이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날아가고 싶지만 끈은 놓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끈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날려고 하는. 그러면서 자신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존재.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한없이 자유로운 조르바란 인간을 만나 자신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이다. 사람이 제공한 행복.

 

그래서 조르바는 화자에게 사람책이 된다. 그는 비록 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펜대를 지닌 인간에게 쓸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또한 삶을 성찰하고 다른 삶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사람책.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만나 자신이 지닌 펜으로 그의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책이 하는 역할이다.

 

그걸 깨닫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351쪽)

 

자, 이런 사나이에게 조국이란 윤리란 명예란 미래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오로지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살아간다. 자신의 의지로.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일을 할 때는 그 일에만 몰입한다. 다른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게 한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요리를 할 때는 요리에, 춤을 출 때는 춤에, 사랑을 할 때는 사랑에... 몰입한다. 자신을 그것에 일치시킨다. 이리저리 요량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살아간다. 현재를. 그러니 거창한 이념이나 윤리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펜대를 지닌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재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늘 손익을 계산하는.

 

하여 조르바의 삶은 화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비록 그가 조르바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조르바라는 사람책이 준 영향은 상당하다.

 

반대로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조르바를 욕망에만 충실한 인간으로 좁게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만 충족하면 그것이 사람인가? 짐승이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르바가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도덕의식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는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한다. 수도사들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부정적인 생각이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조르바는 이들을 골탕먹이지만 선량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으로 그들이 피해 입을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또한 말로는 여성을 암컷이라고 비하하지만, 그 여성들을 대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 여성들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여성들 또한 목적으로 대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과부의 사건에서 그런 조르바를 알 수 있고, 오르탕스라는 전직 매춘부와 지내는 모습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행위하는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것이 다른 사람의 피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조르바의 자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그는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또 윤리니 돈이니 하는 것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 역시 조르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구도의 방황을 한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 조르바. 다시 읽으며 나는 얼마만한 줄에 매여 있는 연(鳶)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줄을 끊어버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길게는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 이것도 조르바가 보기엔 펜대에 얽매인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같은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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