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언어 - 통념의 전복, 신화에서 길어 올린 서른 가지 이야기
조현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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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 받아왔던 교육을 생각하며 이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선 국어에서 신화를 가르치는 단원이 있었으면 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매 학년마다 신화가 실려 있었으면... 단지 신화만이 아니라 신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글까지 단계적으로 수록했으면.

 

의무교육을 마치고도 우리나라 신화 하면 오로지 단군신화나 고주몽 신화 또 박혁거세와 같은 건국 신화 정도만 기억하게 되는 그런 교육 말고 우리나라 신화 전반을 알게 하는 그런 교육이었으면.

 

또한 신화가 바로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표현한 것이므로, 이 책의 제목처럼 신화의 언어 또는 신화와 표현 정도로 하는 교육이 있었으면 했다. 왜 신화에서 그렇게 표현했는지를 생각하는, 단계적으로 더 깊게 고민해 보는 그런 교육을.

 

역사에서도 신화와 역사의 상관관계를 가르쳤으면 한다. 역사라는 과목이 사실의 나열로 외우기 바쁜 우리나라 현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신화는 당시 사회의 풍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신화를 통해서 역사에 접근하는 교육도 했으면 좋겠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 현실에서 실감이 나지 않는 그 먼 과거를 신화를 통해 만나게 되면 좀더 생생한 역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 다른 교과목에서는 신화를 활용한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가령 미술에서는 신화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음악에서는 이런 신화를 바탕으로 음악적 표현을 만들어보는 과정을, 과학에서는 신화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도덕이나 윤리에서는 신화에 나타나는 생활에 대해서, 사고 방식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등등 신화를 통해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조현설의 [신화의 언어]를 읽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그래도 나름 신화에 관한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모르는 신화도 많았고, 또 그 신화를 통해 다양한 접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동서양의 신화를 아우르면서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무의식과 역설, 자연과 타자, 문화와 기억, 이념과 권력'이라고 분류를 하고 있다.

 

그만큼 신화는 우리들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들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 삶의 양식, 사고 양식이 신화에 드러나 있는데, 신화를 배우지 않고 가볍게 지나쳐 온 것이 아쉬운 것이다.

 

신화는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규정해 주는 존재다.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자연스레 과거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우리를 미래로 연결해 주기도 한다. 그만큼 신화는 우리들을 결속시켜 주는 역할도 하는데, 그 결속이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서도 신화를 알 필요가 있다.

 

다른 민족을 배제하기 위해서 신화를 동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특히 중국이 하는 동북공정과 관련지어 신화나 다른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이 책 4부 '이념과 권력'에서 잘 알려주고 있다) 신화가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를 알면 그것을 방지할 수도 있게 된다. 신화는 배제가 아니라 포용, 융합을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화들이 나오지만 그 신화를 통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어서 좋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간간이 현재의 관점에서 신화를 평가하고 우리들 삶을 돌아보게도 하고 있으니, 신화는 과거에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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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의 나비 -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권장도서, 개정판
프란시스코 지메네즈 지음, 하정임 옮김, 노현주 그림 / 다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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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들로 인해 제약이 따르기도 하지만 현대 세계는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하다. 여행만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도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주, 이민이야 예전에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현대에 들어 엄청나게 늘었다.

 

사실 과거 예를 들면 미국이나 호주는 이주민의 나라 아닌가. 그 대륙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보다 지금은 이주해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경제가 힘들어지니 장벽을 쌓고 있는데, 자신들의 과거를 망각하고 있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깨진 지는 오래.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 이주민들이 정착해 살고 있지 않은가. 불법체류자들 (불법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또는 비법(非法)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 많이 쓰이는 이 용어를 쓴다) 이라고 불리는 이도 많고. 이렇게 아직도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주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이주민이라도 형편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 이야기. 물론 원인은 경제적인 문제다. 먹고살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가족 모두가. 그러나 이들은 불법체류자들일 뿐이다. 이민국의 단속을 두려워해야 하는.

 

국경을 넘어 온 멕시코 이주민들에게 주어진 일은 단순 노동이다. 아버지는 목화, 딸기, 포도 수확하는 일에 종사한다. 일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니, 거주도 불안정하고 수입도 불안정하고 아이들 교육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늘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주인공인 프란시스코는 나비를 좋아하고 나비 그림을 그려 상도 받는다. 영어를 잘 몰라 학교 공부에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나비가 애벌레나 고치의 상태에 있을 때가 프란시스코 가족이 노동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갈 때이다. 그나마 없는 살림에 집이 불타기도 하고, 아이가 아파 고생도 하고, 비가 와서 일을 하지 못할 때도 있는 그런 상태. 학교에서도 영어를 잘 못해 늘 뒤쳐지는 상태. 그런 상태의 꿈틀거림, 그것이 애벌레, 고치 상태다.

 

그럼에도 애벌레나 고치는 가능성의 상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비를 품고 있는 단계다. 나비의 존재를 이미 담고 있는 상태. 프란시스코 가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가족의 유대를 잃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없애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받쳐주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애벌레나 고치 상태를 처음 본 사람은 이게 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이런 상태를 처음 겪는 사람도 이 상태에 절망할 수 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만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나비가 된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고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다. 프란시스코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힘. 또 같이 힘들어하고 같이 극복해 나가려는 가족들.

 

우리나라도 이런 과정을 거쳐왔지 않은가. 살기 힘들어서 외국으로 이주해 간 경우도 있었지 않은가. 지금은 그 단계를 지나서 외국인들이 이주해 오는 나라가 되었는데... 그 많은 이주민들 중에 프란시스코 가족과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 없겠는가.

 

(이란주가 쓴 이주민들에 관한 책, [말해요 찬드라], [아빠, 제발 잡히지 마]를 읽어 보라. 이들 역시 프란시스코와 비슷한 일들을 겪는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누가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당연히 청소년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싶다. 그런데 먼저 어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이주민들하고 만나는 기회가 많은 어른들이. 그 다음에 청소년들, 이주해 온 청소년들이 아니라 토박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이 먼저 읽었으면 한다. 이들이 이런 책을 읽고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서 간접 경험을 먼저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직 애벌레나 고치 상태에 있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일 수 있으니. 이들이 프란시스코 가족에 공감하며 희망을 지녔으면 하는 마음이다.

 

책 뒤에 이런 질문과 답이 있다.

 

Q. 이 책은 처음에 어른들을 독자로 생각하고 출판되었는데, 청소년과 아동 출판 시장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얻었을 때 놀라지 않았는가?

 

A. 사실 특정한 독자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쓸 때, 처음부터 독자들이 아이들의 눈으로, 아이들의 목소리로, 아이들의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Q. 이 책은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어느 정도가 사실인가?

 

A. 거의 90%가 사실이고 10% 정도가 픽션이다. (177쪽)

 

자, 이 책은 그러니 사실이라고 해야 하고, 누가 읽어도 좋다. 다만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은 아직 애벌레나 고치 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나비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상황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프란시스코의 상황과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애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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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소유함이 없다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내것이 아닌 것. 무소유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다.

 

  마음의 문제다. 물질이 아니다. 그러니 무소유의 단계는 소유의 단계다. 이미 있는 것을 마음이 초월해 버린 것이다.

 

  결국 무소유의 단계는 충족, 풍요의 단계다. 마음은 이미 넘치고 넘쳐 더 이상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말을 들으면 불교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십우도를 떠올린다.

 

  진리를 찾아 떠난다. 소유의 단계다. 진리를 찾는 것 자체가 이미 무소유가 아니다. 진리를 찾는다. 여기에 머물러도 소유의 단계다. 다시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무소유의 단계가 된다. 결국 무소유는 물질의 유무로 말해지지 않는다. 의식, 의지의 문제가 된다.

 

차라리 무소유의 단계는 행복한 단계다. 차라리가 아니라 진정 행복한 단계가 무소유의 단계다. 이런 무소유보다도 더 찬란한 것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극빈이라고. 극빈... 아예 없다. 소유할 물질 자체가 없다. 물질의 세계를 꿈도 꾸지 못한다. 가진 것이 없다. 바랄 것도 없다. 그야말로 텅 비어버렸다. 없다. 그것이다. 역설이다.

 

몇 년 전에 이런 말이 돌았다. 이부망천(離富亡川)이라고. 무슨 사자성어 같지만, 만들어낸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말. 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이라는. 경제적으로 하위에 있는 사람들이 살려고 이주해 온 곳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떠올린 것은 김영승 시인의 이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에서 그런 가난, 극빈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가난한 삶. 그것도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과 자신의 가족을 빈번하게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집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그 말도 안되는 사자성어 흉내낸 말이 떠오르게 된다.

 

오죽하면 그런 가난한 삶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표현한 시를 '잘못 쓴 시'라고 하겠는가.

 

  잘못 쓴 시

 

내일은 한로

아름다운 날

또 보름 있으면 상강

검은 돌에 낟가리에

찬 이슬 내리겠네

하연 서리 포근하겠네

 

단풍 들고 눈 내리고

온누리 수레바퀴마저 꽝꽝

얼어붙으면

 

불 지피리 부지깽이 들고, 생솔가지 마른 장작

보릿짚 볏짚 마른 삭정이 탁탁

아궁이 앞에 앉아 고즈넉이

아랫목 화롯가에 앉아 그림자처럼

 

썰매 타러 나간 아들

기다리겠네

 

보글보글 된장국 뚝배기 올려놓고 귀신처럼

손끝 매운 고운 아내

 

바느질하겠네 뜨개질하겠네 쌩쌩 부는

겨울 바람

 

고구마 깎고 국수 삶고

 

얼음 깨고 얼개기를 뜨면 (얼개미 : '어레미-바닥의 구멍이 굵은 체'의 사투리) 

새까맣게 튀는 새뱅이 (새뱅이: '생이'의 사투리. 토하 土蝦)

 

초가지붕 처마 밑엔

고운 솜털 한 줌 참새,

 

밤은 깊겠네.

 

김영승,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나남. 2013년 재판 1쇄. 21-22쪽.

 

한폭의 수채화를 보든 듯한 느낌을 준다.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단계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 목가적이다. 전원시라고 할 수 있는데, 제목이 '잘못 쓴 시'다.

 

현실은 절대로 이렇지 않다는 것. 무소유가 아니라 극빈이다. 가난하기에 이런 일이 없다. '월 175,300원의 그 임대료가 벌써 / 두 달째 밀렸네 /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 말렸네, 극빈'('극빈' 중 일부. 52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삶에 고난에 찌들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가난은 시인이기에 겪는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맞지만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무소유의 경지가 아니라 극빈, 자신을 말리는 극빈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시인은 그런 삶을 이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이런 목가적인, 참으로 따스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시를 '잘못 쓴 시'라고 하지. 시인의 다른 시집 제목처럼 '반성'해야 한다.

 

누가? 바로 우리가... 우리 모두가. 극빈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극빈이 아니라 '무소유'의 경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런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실행하는 지방도 있고. 적어도 사람들이 '극빈'에 처해 '말라가지 않도록' 하자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시가 '잘못 쓴 시'가 아니라 '잘 쓴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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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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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작품이 지닌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로 '함께 또 따로, 따로 또 함께'라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모습을 그린 소설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이 참 매력적이다.

 

이 소설 빼앗긴 자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처럼 없는 곳이 아니라 있는 곳이다. 번역을 '빼앗긴 자들'이라고 했는데, 영어 제목이 The Dispossessed로 되어 있어서 일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우라스에서 아나레스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니 쫓겨난 사람들이 맞겠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빼앗긴 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우라스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아나레스를 얻었고, 또 아나레스에서 오도주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도주의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아나레스에는 원칙적으로 소유를 하지 않는다. 이때 소유라는 말은 돈을 주고 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면 된다. 사회가 공급할 수 있을 한도 내에서. 돈이라는 개념이 없다. 필요하면 가지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냥 주면 된다. 선물의 개념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들의 삶은 소유라기보다는 점유다. 필요할 때 점유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그런 생활방식. 그러니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이해하면 소설을 더 잘 즐길 수 있다.

 

쉐벡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행성을 배경을 교차로 선택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아나레스를 떠나는 쉐벡으로부터 우라스에 도착한 쉐벡. 그리고 아나레스의 장면들은 과거 장면들이다. 우라스는 쉐벡이 겪는 현재이고. 이렇게 아나레스와 우라스가 교차하면서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읽어가면서 점차 쉐벡의 행동, 그리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내게 된다.

 

우라스에서 착취를 없애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저항하던 사람들에게 제공된 아나레스라는 행성. 그들은 척박한 아나레스에 정착해 살아가는데, 그런 아나레스의 삶은 아나키즘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는 없고 점유가 있는 그런 생활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이게 르 귄이 지닌 장점이다. 세상에 완벽이란 닫힌 공간이다. 르 귄은 닫힌 공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벽이라는 말과 통하기도 하는데... 인물들은 끊임없이 벽을 통과하기를 추구한다.

 

쉐벡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그는 넘어서고자 한다. 벽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뼛속까지 오도주의자인 것이다.

 

(이 오도주의에 대해서는 아나키즘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오도란 사람이 쓴 책을 중심으로, 그 사상을 중심으로 건설해 낸 별이 바로 아나레스고 그들을 움직이는 사상이 바로 오도주의다. 오도에 대해서는 르 귄이 쓴 다른 소설 '혁명 전날'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도주의자들이 모두 오도주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그 주의에서도 이상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권력의 벽을 쌓는다.

 

이 소설에서는 사불이라는 인물이 그런 권력의 벽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불만이 아니라 주인공 쉐벡의 어머니인 룰락 역시 벽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해도 그 사회가 마냥 행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나레스 행성을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들이 자랄 수 없는 먼지투성이 행성. 여기서는 물질적인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물도 부족하고 가뭄이 들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아질 것이라 믿고 견뎌낸다. 서로 일하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하지만 이 아나레스에도 힘든 일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고, 식량 고갈이 문제가 될 때 식량을 탈취하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 역시 갈등을 겪고 있는 것. 다만 이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그 자체로 자족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그래서 기껏해야 우라스에서 오는 화물선으로만 교류를 하는 (그것도 화물선이나 우라스인들은 벽 바깥으로는 나올 수도 없다) 그런 아나레스에서 쉐벡은 우라스로 간다.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

 

이유는 자신의 우주(물리)이론을 공유하고 싶은 것. 더 발전시켜 확정짓고 싶은 것. 그리고 우라스를 보고 싶은 것. 그가 도착한 곳은 아나레스와는 달리 식물들도 잘 자라고 각종 동물들도 있으며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우라스의 중심부다.

 

그는 우라스의 지배층 사이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 우라스에서도 오도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무력으로 진압당할 때 함께 있으면서 테라 대사관으로 피신해 다시 아나레스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풍족함을 희생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우라스. 그들에게 아나레스는 이상향이겠지만 쉐벡은 명확히 한다. 아나레스에도 고통이 있음을... 그것을 함께 해 나가고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오도주의임을.

 

하여 소설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를 보여준다.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그런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아나레스인인 쉐벡을 통해서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이 그림처럼 완결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그곳에는 여전히 자유에 따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에 대한 고통도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음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쉐벡이 헤인 인이지만 아나레스에 내려 함께 살고자 하는 케토에게 하는 말... 그 말에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가 들어 있단 생각이 든다.

 

"아나레스에 가면, 일단 나와 함께 벽을 뚫고 걸어가면, 그러면 내 생각에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책임이 있고 당신도 우리에게 첵임이 있지요.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선택권을 지닌 아나레스 인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선택권이란 안전한 것은 아니에요. 자유는 결코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437쪽)

 

아나키즘을 그냥 무질서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 소설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성과 사랑, 남녀의 역할, 일자리 배분 문제, 주거, 교육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권력 문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 등등을 소설 속 아나레스를 통해 아나키즘 사회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무슨 주의로가 아니라 문학 속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으로 경험할 수 있으니...보통의 유토피아 소설과는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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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외로움을 견디는 나이 아름다운 청소년 9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재경 옮김 / 별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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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소설을 읽다. 청소년 소설이다. 배경이 환상적인 세계가 아닌 바로 현실이다. 미국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주인공.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남들과 똑같이 살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고민하는 청춘이다. 그냥 미국 고등학생처럼 차에 미치거나 여자에 미치거나 남들처럼 지내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평범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생각이 많은 주인공은 일상의 평범함을 견디지 못한다. 남들에게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혼자 지낼 수도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남들과 지내기도 한다.

 

소설은 첫부분에서 이런 나이 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아이들은 아직 배운 게 없어서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런 능력은 나중에 생긴다. 아이가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고 무리를 찾아 허둥지둥 돌진한다. 클럽, 팀, 동호회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남들과 똑같이 입기 시작한다. 혼자 튀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10쪽)

 

우리가 흔히 사춘기라고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다. 자아의식이 생기는 때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생기면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려 할 텐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남들 속에 묻히려 한다. 또래 사이에서 튄 행동은 금물이다. 그냥 함께 휩쓸려 지낸다.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아니,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은 이와 반대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울리는 흉내는 내지만 진정으로 어울리지는 못한다.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거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이 오언은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주인공인 오언의 부모님은 자식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 튀지 않고. 그냥 그렇게 무난하게 살기를. 오언 역시 가정에서 부모님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고민 속에서 허우적 대는 오언에게 한 사람이 다가온다.

 

나탈리다. 이미 자신의 길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아이. 이 나탈리와 어울리면서 오언은 많은 고민을 떨쳐내기도 하지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사랑과 우정. 청소년기에 맞닥뜨리는 요소다.

 

남녀간에 육체적인 접촉이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미국 고등학교 남학생들은 몸을 중시한다. 대부분 여학생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오언 역시 나탈리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단순한 육체적 접촉으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접촉은 사랑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 나탈리에게는 명확한 선이 있다. 이 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오언은 방황을 하고.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함 속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만난 나탈리. 그 전에 나탈리와 처음 바닷가로 놀러 갔을 때 장면, 이 장면에서 깨달은 것이 나중에 오언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작동을 한다.

 

우리는 인생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생은 답이 아니니까. 인생은 문제다. 그리고 각자가 답이다. 우리 앞에 바다가 있었다. (62쪽)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만 완전하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탈리와 두번째로 바닷가에 간 다음에 오언은 방황을 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언이 스스로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에 관련된 일은 함께 결정해야 하는데... 나탈리는 그 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차분히, 꾸준히 준비를 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점을 나탈리가 출연하는, 또 나탈리가 작곡한 곡이 발표되는 발표회장에서 오언 역시 깨닫는다. 그가 흘리는 눈물. 그리고 다시 나탈리와의 만남. 여기서 오언은 결정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

 

그렇다. 인생은 문제일 뿐이고 답은 자신에게 있다. 부모가 대신 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때 자신은 고립된 자신이 아니다. 함께 해야 할 사람들, 여기에는 부모 역시 포함이 된다. 아직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부모들을 재단했지만, 문제를 꺼내놓자 해결책이 마련된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행위인지를 오언의 대학 입학에 관한 표현에서 알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꺼내놓아야 해결될 수 있음도.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렇게 오언은 자신의 길을 간다. 열일곱. 외로움을 알게 되는 나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야 할 나이. 이 외로움을 견뎌냈을 때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주인공이 창조해 낸 소언이라는 곳. 나탈리는 이미 오언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혼자... 그러기에 그곳에 방문객을 받으라고 한다. 그것이 오언에게 맞는 삶이라는 것. 굳이 그들과 똑같이 살려고 하지 말라고 나탈리는 충고한다.

 

이렇게 나탈리와 오언은 자신들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짧은 소설이고, 외적갈등보다는 내적갈등이 더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앞날을 고민하는 청춘이라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오언에게는 공감을, 나탈리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고 감탄을 하면서.

 

르 귄의 대표작을 '어스시(Earthsea)' 시리즈로 꼽기도 하는데, 땅과 바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언은 바다에 가서 인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힘을 주는 존재인 나탈리의 성이 필드다. 땅을 딛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 청춘들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런 낱말을 통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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