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학교 안의 인문학 1~2 세트 - 전2권 학교 안의 인문학
오승현 지음 / 생각학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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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권

 

  거울, 펜과 노트, 교복, 성적표, 책상과 의자, 급훈, 가방, 출석부, 시계, 태극기, 교과서, 게시판

 

  총 12개 사물이다. 그냥 사물이 아니라 학생들과 늘 함께 있는 학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 존재에 의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규정당하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없이 지낼 수도 있지만, 이들에 대해서 생각하면 우리들 삶에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들이지만, 그 사물들은 바로 우리들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거울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를 비춰주는 역할을 하니까 말이다. 단지 비춰주는 역할을 해서 우리를 반성하게 하면 좋은데, 비교를 하게 만들어 삶을 힘든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게 문제다.

 

이 중에 학교에서 지금은 없어진 것이 무엇일까 찾아보니, 세상에 없다. 게시판 정도가 없어졌을라나? 대부분의 학교에 사물함이 들어오고 게시판을 만들 공간이 부족해지다 보니, 게시판은 아주 적게 축소되거나 없어지거나 했다. 그것뿐이다.

 

또 있나? 급훈? 내가 알기론 많은 학교에서 없어졌다.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은 급훈도 있었으니, 세상에 그런 급훈을 버젓이 걸어놓고 교육이랍시고 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 책에서는 그래도 유교 윤리에 가까운, 전근대적인 급훈을 예로 들어 비판하고 있지만, '미팅할래? 미싱할래?'와 같은 노동을 무시하는 급훈도 있었으니... 이런 것이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교육적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

 

한데 없어지지 못한 것들, 아직도 살아남은 것들, 한때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한 것들, 교복. 성적표 등등. 그래 이것들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아마 학교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만났던 이런 존재들을 통해 각인되었을 수도 있다. 그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148쪽.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반성합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오찬호가 쓴 책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다. 반성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 [동주]의 마지막 부분에 송몽규가 절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 그래 차별에 반성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책 제목도 또 내용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다. 그래서 더 슬프게 읽었던 책이다. 제목을 쓰는데, 작가인지 또는 편집자인지의 희망이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214쪽. 한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어야 투표를 할 수 있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이 2019년에 출판이 되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투표 연령은 만18세로 하향 조정이 되었다. 이제는 생일이 지난 고3 학생들도 투표를 할 수 있다. 2020년 1월에 선거법이 개정되었다 *****

 

 

2권

교실, 도서관, 음악실· 미술실· 체육관, 탈의실, 교문, 운동장, 복도, 교무실, 화장실, 식당, 계단, 학교의 안팎

 

이번에는 공간이다. 학교 건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너무도 획일적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어느 도시를 여행해도 어느 건물이 학교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다 똑같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에서 창의성을 기른다고? 답답한 노릇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건축계의 금언이 있다. 오늘날 학교 건축은 학교 교육의 딱딱함, 획일성 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9쪽)

 

'~인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반영한 것이다라고 해야 옳다. 학교의 건축에서 창의적인 학생이 나온다는 것은, 체제에 반항하는 특출한 개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렇게 획일적인 건축물에서 무엇을 바라나? 아무리 발달한 기계들을 들여와도, 학교의 틀인 건축을 바꾸지 않으면 그게 그거인 교육이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 필요한 시설들이 다 있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12개의 시설 또는 공간 중에 여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특히 탈의실은 없는 학교가 많다. 있더라도 형식적인 학교도 많고.

 

체육복으로 갈아 입을 때, 교실에서 갈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탈의실은 있더라도 유명무실하다. 너무 멀리 있어 가기가 힘들다. 탈의실보다 더 심한 건 몸을 씻을 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한여름에 체육 활동을 하고 씻을 장소가 없어서 땀난 몸 그대로 다음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라니.

 

체육이 끝나고 다음 시간까지 10분. 씻을 장소가 있어도 씻을 시간이 없다. 시간 역시 너무도 획일적이어서 교과목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탈의실과 샤워실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교육 현실에서는.

 

계단 역시 마찬가지고. 폭력이다. 계단은. 몸이 멀쩡한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리를 다치거나 다른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계단은 그야말로 거대한 장벽이다. 엘리베이터가 의무적으로 설치되어 있어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우선 구석진 곳에 있고, 또 잠가 놓는 경우가 많아, 이용하려면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렇게 누구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한 것이 학교 현실이다.

 

이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학교 안의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이건 인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인데, 학교라면, 적어도 교육을 하는 장소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선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인데도 나 몰라라 한 것이 교육 당국들의 행태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다른 데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

 

머리말을 계속 인용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픈 말이기 때문에.

 

학교는 교사와 학생의 삶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깨달음으로 전해지는, 소통과 성장의 배움터여야 한다. 삶과 앎이, 생활과 배움이 겉돌지 않고 스미고 짜이는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11쪽)

 

이런 배움터가 되기 위해선 학교에 있는 시설들, 건물들이 바뀌어야 한다. 매일매일 생활하고 있는 장소가 학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바뀌어야 하는데, 지독하게 바뀌지 않는 학교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1926-2016)는 [부의 미래]에서 "기업이 시속 100마일로 가장 빠르게 변한다면, 비정부단체는 90마일, 가족은 60마일, 노동조합은 30마일, 관료조직은 25마일, 그리고 학교는 10마일의 속도로 변한다"고 했어. (115쪽) 

 

참, 마음이 아픈 지적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여전하다. 변하지 않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원격수업이다 뭐다, 이 참에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컴퓨터 또는 온라인 화상 수업을 하겠다는 것 말고는 없다.

 

오히려 이 참에 학교 건축이라는 틀을 바꾸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과감하게 줄여 밀집도를 낮추고, 지나치게 많은 수업량도 줄이고, 학교에 학생들을 위한 시설들을 더 많이 들여오고, 자율적으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은 없다. 그냥 온라인 화상 수업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구조가 바뀌지 않고는 교육 혁신은 없는데... 그러니 혁신학교 지정을 반대하는 학부모, 학생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틀은 그냥 놔두고 예산을 좀더 줘서 혁신을 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혁신이 되겠는가? 과감하게 학교라는 틀부터 바꾸는 것이 혁신일 텐데...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대다수가 거치는 학교라는 공간이 어쩌면 교육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공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 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지만, 사실 이런 책은 교육 관료들이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관리자라고 하는 교장, 교감부터, 교육청 관료들, 그리고 교육부 장관, 여기에 거의 제왕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장관들이 대통령이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 대통령이 읽어야 한다.

 

학생들 수준에 맞는 책이 아니라 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토플러의 말에서처럼 25마일의 속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관료이기 때문에 이들은 채 5마일로 안 되는 속도록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학생들도 당연히 읽어야 한다. 교사들도. 그리고 그들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하기를 기다리면 절대로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깨닫는 공부. 그래서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공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아니, 읽어야만 한다.

 

*****37쪽 유대계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는데,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나고 자랐으니, 체코 소설가라고 해야 하지 않나?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카프카가 살던 당시의 나라를 살려 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적의 소설가라고 하는데... 독일 소설가라고 하는 것은 좀 그렇다. 물론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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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세2

               - 건물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양사언 시조 초장)

조상들은 이렇게 읊었지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양사언 시조 중장)

하여 그렇게 도전, 도전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시조 종장)

이건 옛날 말

자연은 

도전의 대상이 아닌

정복의 대상

경외의 대상이 아닌

투기의 대상이 된 지 오래

건물보다 낮은 뫼가 어디 한둘이던가

구름을 허리에 두른 건물들이

하나 둘 세워지고 세워지고

위로 위로

다시 아래로 아래로

뫼와 땅이 깎이고 파이고

건물은 깊어지고 높아지고

지구는 점점 더 얇아지고

사람들 삶은 더더 힘겨워지고


인류세라는 말에

왜 바벨탑이 떠오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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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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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인생, 인생과 시다. 살아가는 데 시가 우리 곁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언어가 우리들을 떠날 수 없듯이, 시 역시 우리들을 떠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시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시들을 통해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또 내가 살아온 인생을 통해 다른 시들을 만날 수도 있다. 어렵지 않게, 시는 그렇게 우리의 인생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제목만 보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결국은 시다. 아니 인생이다. 시는 인생이다. 인생은 시다. 이런 은유를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풀어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은유. 숨어 있는 비유 아닌가. 그 숨어 있는 것을 찾는 것. 우리는 인생에 답이 없다고 한다. 사실 정해진 답은 없다. 인생에 답이 없기 때문에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비유로 답할 수밖에 없다.

 

비유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의미들은 읽는 사람이, 살아가는 사람이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생은 시다. 또 시는 인생이다. 그리고 시는 언어다.

 

여기서 시가 언어라면 시는 품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품사에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은가. 수많은 언어들을 품사라는 틀로 구분을 한다. 분류를 한다. 어떤 언어든 어떤 품사에는 속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떤 삶이든 어디엔가는 속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시와 인생을 어떤 틀에 넣으려고 하지만, 그 틀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틀에도 저 틀에도 속할 수밖에 없다. 한 언어가 여러 품사에 속하듯이, 인생 역시 여러 인생들이 중첩된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이런 다양한 삶을 시와 함께 이야기해주고 있으니, 시를 읽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시를 품사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시는 품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말을 아홉 개로 분류하는 데, 언어는 어느 품사에 속하지만, 어느 하나가 아니라 여러 품사에 속하기도 하는 것. 시는 이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는 생각. 그러니 시는 바로 우리 인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시는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이다. 뼈대다. 근간이다. 한 대상을 표현하는 말을 줄이고 줄여서 중심만 남긴 것이 시다. 또 우리들 삶을 어떤 실체로(명사)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체언이다. 내 삶을 대신해 주기도 하고(대명사), 내 삶에서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하는지(수사)를 생각하게도 해준다.

 

하지만 시는 용언(동사, 형용사)이다. 시는 움직인다. 내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쉴 새 없이 변한다. 시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삶이 살아가는 행위(동사)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형용사)를 생각하게도 해준다.

 

그래서 시는 수식언(관형사, 부사)이다. 우리들 삶을 꾸며준다. 그냥 삶이라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삶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역할을 시가 하기도 하지만, 시는 우리들 삶에서 감칠맛이 있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어떤(관형사)과 어떻게(부사)라는 말을 통해 우리들은 삶에 다양한 것들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은 결국 관계언(조사)이다. 관계를 통해서 더욱 드러나게 된다. 홀로 띄어쓰지는 못하지만, 조사가 없는 우리말을 생각해 보라. 말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말들과 말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말(조사). 시는 우리들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를 통해서 수많은 관계들이 맺어지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있으니.

 

그렇지만 시는 독립언(감탄사)이다. 사람들은 이 책의 말미에 이야기하고 있지만 죽음을 통해 사라진다. 영속하는 인간은 없는 반면 시는 영속한다. 시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자신만의 생명력을 지니고 독립해서 살아간다.

 

홀로 우뚝 선 존재,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으며 마음 속에서부터 감탄사를 내게 된다. 아, 와, 어, 의식하지 않아도, 의도하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 버리는 말들. 시는 그렇게 우리들 마음에서 또다른 언어가 되어 밖으로 튀어 나온다. 하여 시는 결국 품사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은 결국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이다. 그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고, 시는 그런 인생들을 모두 담고 있다. 시 속에서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을 찾아내면 우리 인생은 더 살 만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시와 인생, 인생과 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아니, 시가 멀어지는 시대, 시는 결코 멀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생각하자. 그리고 시를 읽자. 시를 읽는 일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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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5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박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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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젊었을 때 쓴 책이라고 한다.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을 잃고, 그 사랑에 대해서 쓴 글. 참 격정적이다. 사랑에 빠지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늪에 빠져 도무지 빠져나오질 못한다고 하는데, 단테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9살에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24살의 나이로 죽는다. 그런 베아트리체의 모든 것이 단테의 온몸에 스며든다. 단테의 모든 것이 베아트리체에게 향해 있다. 그의 눈은 언제 어디서고 베아트리체를 찾아낸다. 그런 그가 베아트리체와 제대로 이야기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신적 사랑이라고 하는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 것과도 거리가 먼데, 그럼에도 단테의 사랑에는 육체가 빠져 있으니, 뭐라 말하기 힘들다. 다만,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담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그 시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나뉜 부분은 어떤 구절부터 시작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쓴 시를 해설하는 쪽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고 하지만, 이미 단테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뛰어난 시인이 자신의 사랑을 시로 쓰고, 그에 대한 해설도 했으니, 젊은 시절의 작품이라 나중에 단테가 부끄러워했다고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렇게 사랑을 시로 표현하는 일,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마도 단테가 쓴 신곡을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는 것이 더 좋겠다. 왜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는지를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단테가 쓴 '새로운 인생'을 읽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만, 보카치오(우리가 알고 있는 [데카메론]을 쓴 사람)가 쓴 '단테의 생애'를 읽을 수 있다는 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단테란 사람에 대해서 좀더 알아갈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단테가 라틴어로 작품을 쓰지 않고 당시에는 속어라고 하는 피렌체어로 작품을 쓴 이유를 나름대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한글로 작품들이 창작되는데 꽤 시간이 걸렸듯이 유럽에서도 라틴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신들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기를 망설였다고 하는데, 단테는 피렌체어로 당당하게 작품을 쓴 것이다. 그래서 단테가 더 위대해졌는지도 모르지만.

 

어째서 [희극]과 같이 대작이자 그렇게 고상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을 이전의 다른 시인들처럼 라틴어로 쓰지 않고 피렌체 방언으로 썼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두 가지 주된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첫째로 동료 시민들과 다른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두루 소용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둘째로 ...실제로는 라틴어로 작품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곧 중단했는데, 아직 젖을 빨고 있는 사람들의 입속에 빵껍질을 넣어주는 것은 헛된 짓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로 작품을 다시 시작했고, 속어로 이를 계속 써나갔다. (181쪽)

 

([신곡]의 원래 제목은 '희극'이었는데, 1555년 베네치아에서 원래의 제목 앞에 '신성한'이란 형용사가 붙은 훌륭한 판본이 나오면서 '산성한 희극', 즉 '신곡'이라는 제목으로 굳어지게 되었다(150쪽 주)고 한다)

 

이 말이 꼭 맞다는 것은 아니지만, 첫번째 이유는 공감이 된다. 두번째 이유는 단테의 위대함보다는, 단테가 시대를 읽는 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유가 될 것이고.

 

이렇듯 보카치오는 단테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답게 단테에 대해서 자세하게 잘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단테를 알아가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 로세티라는 화가의 생애가 덧붙어 있는데, 그것은 단테가 쓴 '새로운 인생'을 로세티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가 영어로 번역한 작품에, 또 단테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있기에 이 책에는 로세티의 생애까지 실려 있다.

 

하여 단테가 쓴 젊은 시절의 작품,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을 잘 알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읽는 재미에 보카치오가 쓴 '단테의 생애'까지 읽을 수 있기에 [신곡]을 읽으려는 사람들, 이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좋겠다.

 

덧붙이는 말

 

보카치오의 글 중에서 왜 시인들의 대관식에 ..월계수 잎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한 글이 있어서... 흔히,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에서 월계관의 유래를 이야기하는데, 보카치오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작가답게 다음의 이유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월계수는 주목할 만하고 현저한 세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 나무가 결코 벼락을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 셋째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매우 향기롭다는 점이다.

월계관을 씌우는 영광을 만들어낸 옛 사람들은 이들 세 가지 속성이 시인들과 승리한 황제들의 덕행과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첫재로 사철 푸른 잎은 이미 월계관을 쓴 사람들이나 앞으로 쓰게 될 사람들의 업적이 항상 살아남으리라는 점에서 그들의 업적이 가져다준 명성을 예증한다고 여져겼다. 둘째로는 이들의 업적이 너무나 막강해서 질투의 불이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영속하는 '시간의 번개'도, 하늘의 번개가 이 나무를 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업적을 날려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업적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를 듣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덜 주거나 고마운 마음을 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흡족하고 향기를 발할 것이라고 옛 사람들은 말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들 월계관이 우리가 아는 한 거기에 걸맞은 업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합하는 것이다. (167-168쪽)

 

이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 역시 마음에 든다. 그래야 계관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지. 음악, 태양의 신인 아폴론을 들먹이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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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주 시인 20주기 추모시집이란다. 지금은 20주기하고도 또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도 김남주 시인의 20주기에 우리는 시인이 그리도 겪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건을 겪고 말았다.

 

  세상이 나아진 것 하나 없다는 소리를 해야 했던 그 시절. 그리고 촛불. 정권 교체... 나아지나? 나아지겠지. 나아져야지. 의문형에서 기대하는 말로, 기대하는 말에서 당위의 말로.

 

  당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말. 이 말은 지금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의 육체는 묻혔지만, 그의 시는 살아서 우리 곁에 남았는데...

 

  2014년 사건이 우리 곁에 남으려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는 책임을 지고,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물 속으로 잠겨들어가는 배를 보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속수무책이었던 우리들이, 2020년 코로나19라는 질병 앞에서 또다시 속수무책이다. 그냥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할 뿐이다. 국가는 없다. 사회는 없다. 오로지 개인이 마스크 꼭 쓰고, 거리 두기 하고, 가능하면 집에 있어야 한단다.

 

출퇴근 시간 전철, 버스 한 번 안 타본 사람들처럼 이야기한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마스크 빼고는 어떤 방역지침도 통할 수 없는 것이 대중교통일텐데... 빨리 들어가라고 저녁 시간 때 배차를 줄인단다. 먹고 살기 위해서, 정말로 살기 위해서 저녁까지, 밤 늦게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생각을 해보았나 싶다.

 

그냥 일찍 들어가라고 하면 다들 고맙다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고 할 줄 알았나? 들어가려 해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움직이지 않으려 해도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움직이지마. 가만히 있으라고. 어째 많이 들어본 말인데...

 

그때 그 말과 지금 그 말은 분명 다른 말인데... 들리는 말은 그 말뿐이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좋은 세상 쪽으로 나아왔던가? 이 생각을 한다. 김남주 추모시집을 읽으며, 시인이 꿈꾸었던 자유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시인이 꿈꾸었던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힘들어도 사과 반쪽씩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인지.

 

김남주 시인을 그리워하게 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김남주 시인을 추모했는데, 그 중에 '만인의 물봉'이라는 시를 인용한다.

 

  만인의 물봉

                       - 김인호

 

순박한 청년의 미소 카랑카랑한 육성

만인의 물봉 당신은

망월동 묘역에 그저 잠들어 있지 않고

중외공원 청송녹죽 시비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속에도 있고

고추를 따는 노인의 굽은 그림자 속에도

신사동 맥코이 호프집 팝콘 그릇 속에도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유행가 가락 속에도 있고

 

넘기는 네루다 싯귀 속에도 있고

지리산 빗점골 너럭바우 위에도

광화문 광장 유민이 아빠 곁에도

밀양 송전탑 위에도 있고

 

언제 어디나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이면

빛나는 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려가는 당신은

만인의 물봉

(물봉: 김남주 시인의 애칭)

 

김남주기념사업회 엮음, 자유의 나무 한 그루, 문학들, 2014년. 35-36쪽.

 

그래, 김남주 시인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가 꿈꾸던 세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니 이루어진 다음에도 그는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가 심은 '자유의 나무 한 그루'의 그늘에서 우리가 쉴 수 있도록.

 

2020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 김남주 시인을 그리며,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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