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9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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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의 희곡 작품집이다. 약력을 보니 1813년에 태어나 1837년에 세상을 떴다. 겨우 24세. 그런데도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작품을 남겼다. 아무리 그때라 해도 지금으로 따지면 겨우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아니면 졸업을 유예하고 대학에 남아 있거나 또는 취업이 되지 않아 대학원에 진학해 있는 경우가 많은 나이다.

 

그만큼 우리들이 세상에서 자리잡는데 시일이 뒤로 미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배 이상 늘어났으니,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겠다.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떴는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도 읽히는 작품을 남겼으니...

 

<보이체크>란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정부)를 죽인 보이체크 이야기. 그런데 질투에 눈이 멀기 전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무슨 실험대상처럼 여기는 사람들. 그런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의 심성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그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분위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일은 삼가야겠다.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 작품은 완결된 작품이고, 당통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로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우리가 배운 자코뱅파의 지도자.

 

<당통의 죽음>에서 생각할거리는 바로 혁명에 대한 것이다. 혁명은 개인의 윤리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혁명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결국 혁명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통이 변절자인지 아니면 희생양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 역사적인 평가를 넘어서 이 희곡만 가지고 판단하면 당통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코뱅파는 계속 피를 요구한다. 반혁명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혁명세력 내부에서도 숙청의 바람이 분다. 정권을 잡지 않으면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혁명을 일으킨 자들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혁명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이 되고 패배한 쪽은 단두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일까? 혁명의 순간에 피를 부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혁명 이후에는 그 피를 더이상 흘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피를 부르는 혁명을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혁명이 성공한 사회에서 다시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한다면 그런 혁명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을 도외시하고 윤리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이 희곡에는 무결점 도덕주의자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그는 도덕으로 사회를 지배하려 한다. 그런데 사회가 도덕만으로 유지될까?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요소는 바로 빵 아닌가.

 

빵이 충족되면서 동시에 장미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데 도덕이 사람들 내면에 자리잡아야 하며, 최소한의 법률로써 규제가 되어야 한다. 먹을거리와 문화, 그리고 도덕과 법.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법만을 앞세워서도 도덕만을 앞세워서도 안 된다. 공자 역시 도덕을 중시했지만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덕치(德治)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시황은 법가를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이후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법가가 아니라 유가를 받아들인다. 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법가가 필요할지 몰라도 사회를 유지하는데는 유가가 필요한 것이다. 즉 법치보다는 덕치가 더 사회를 지속되게 할 수 있다.

 

철저한 윤리국가는 사람들 숨통을 막는다. 사람들을 견디게 할 수 없다. 이런 철저한 윤리는 법의 엄정한 사용을 부른다.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일탈이 허용되었을 경우에 자유롭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조화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사는 마을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산다. 도덕군자도, 법률가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또 마을에서 지탄을 받는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을 매몰차게 쫓아내거나 마을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마을의 조화는 깨지고 만다. 사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범위를 넓혀서 우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다양성. 어느 하나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는 것. 그것이 혁명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그런데 <당통의 죽음>을 보면 그렇지 않다. 혁명이 일어난 뒤 하나로 수렴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죽음을 부를 수밖에.

 

수많은 죽음으로 사회가 계속 지탱할 수는 없다. 희곡은 정신이 이상해진 여인이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프랑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가는 쪽으로 진행된다.

 

바로 다양성, 관용이 부족한 혁명 정부가 초래한 일이다. 하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혁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생각 속에 갇힌 혁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이 나아지는, 그리고 다양한 삶들이 인정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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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 지구를 살리는 어느 가족 이야기
그레타 툰베리 외 지음, 고영아 옮김 / 책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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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 그레타 툰베리가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읽다보면 그레타 툰베리가 쓴 책이 아니라 그레타의 엄마가 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인 말레나 에른만이 주요 화자로 나오고, 간간이 그레타의 말이나 편지가 실려 있다. 여기에 동생인 베아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함께 기후위기에 대응해가는 남편 스반테 툰베리 이야기도 나온다.

 

그레타 툰베리가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은 있지만,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레타의 상황을 조금은 더 잘 알게 되었다.

 

스웨덴은 복지국가다. 선진국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델로 생각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스웨덴도 한계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지국가라고 하는 스웨덴이 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많다고 한다.(143쪽)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탄소배출량 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문제가 있고, 또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우리나라보다야 편하겠지만 이곳도 역시 만만치 않은 곳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는 그레타의 주장이다. 스웨덴 정부는 이것보다 탄소배출량이 적다고 발표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정부 발표에는 문제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절반 이상이 통계에는 아예 포함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국제선을 이용하는 비행기 여행은 통계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외국에서 물품을 수입하는 화물선 운행도 통계에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국내의 적절한 임금을 피하기 위해서 수많은 제품의 생산 공장을 임금이 싼 나라에 세웠다. 그리고 그에 따른 영향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꽤 많이 감축되었다. (265쪽)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스웨덴도 이 정도인데 아예 대놓고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한 트럼프의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 친환경이라는 말을 하지만 성장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기후위기에 대해서 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나가는 듯이 언급하고 있을 뿐, 큰 비중을 두고 방송을 하거나 기사를 쓰는 언론이 별로 없다. 이 책에서 그레타가 지적한 스웨덴 언론들처럼.

 

그렇게 지내다 보면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결국은 우리가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파리기후협정에서 채택한 섭씨 2도 목표를 달성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의 연쇄반응을 막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 ... UN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 남은 시간은 정확히 18년 157일 13시간 33분 16초다 (188-189쪽)

 

이 책이 2018년에 쓰였으니까 일년 정도가 더 지나간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데,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과학기술의 힘을 믿는 사람이 많다. 그 과학기술의 힘으로 지금의 기후위기를 불러왔음에도.

 

이렇게 이 책은 기후위기에 대응하자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내용과 더불어 그레타 툰베리 가족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그레타 동생인 베아타 역시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서 어떤 소리를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뒤에보면 '미소포니에'라는 증상이라고도 한다는데... 여전히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라고 한다.

 

그레타 역시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다. 그래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레타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들이 기후위기에 더 민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들은 남들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감각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네 가족이 모두 기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스스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행기 안 타기다. 현대 교통수단의 총아인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몇 시간이면 갈 거리를 몇날 며칠에 걸쳐 가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비행기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열차에 비해 너무도 엄청나서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비행기 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또 이들은 자연스레 채식으로 가게 되고 페미니즘이나 인권운동에도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해 기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 나서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특히 왜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를 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레타 툰베리 자신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타의 민감성은 지구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민감성을 지닌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 단지 생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까기 나아가야 하는데... 내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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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세트 - 전4권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김홍모 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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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헌법 전문에 나오는 민주화 운동은 4.19다. 아직 5.18과 6월 민주화 운동은 아직 헌법 전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4.3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5.18에 대해서는 여전히 악의적 중상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니, 지금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룬 시점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헬기 사격에 관한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을 만화로 기획하고 출판했다.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좀더 다가가기 쉬운 방법은 없을까? 그런 고민으로 시작된 작업이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그저 만화라는 양식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만화작가들의 시선으로 본 민주화운동이야기입니다'(4쪽)라고 책을 낸 취지를 말하고 있다.

 

4명의 만화가가 참여했는데... 김홍모 작가는 제주 4.3을, 윤태호 작가는 4.19를, 마영신 작가는 5.18을, 유승하 작가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참여 했다.

 

  제목을 보면 제주 4.3은 '빗창'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제주 해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제시대에 해녀투쟁과 해방후 4.3을 연결지어 표현했다. '빗창'은 해녀들이 전복을 딸 때 쓰는 도구라고 한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억압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슬프게 전개되고 있다.

 

  이 만화를 보면 친일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념의 대립이 무고한 사람들을 옭아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가 흘렸던 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사일구'라고 숫자가 아닌 한글로 제목을 달고 있다. 현재와 과거를 엮어서 4.19가 일어났던 시대,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과 지켜본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5.18은 제목에서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무리 얘기해도'라는 제목이다. 현재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어쩌면 젊은 세대들이 매체의 영향으로 잘못된 관점을 지니게 된 경우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얘기해도 잘못된 관점을 지니고 있으면 바꾸기가 힘들다. 확증편향이라고 자신에게 맞는 정보만을 찾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증편향을 공고하게 하는 매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 환경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 '1987 그날'이라는 제목. 박종철과 이한열이 등장한다. 만화는 1986년부터 시작한다. 상계동 철거민들과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촛불시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통령을 평화적으로 탄핵하여 정권교체를 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숙하게 된 과정에는 4.3으로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수많은 피들이 흘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화라는 매체가 흥미를 유발하고 읽기를 수월하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또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한 전달이 글로만 전달할 때보다 접근하기 편할 때도 있다.

 

읽다라는 표현과 보다라는 표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매체를 이용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어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것보다도 읽다(보다)보면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도 있는 작품들이다.

 

자칫 잊기 쉬운 역사. 그 역사가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화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알려주는 이 작업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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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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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뇌졸중에 걸린다면? 생각할 수가 없다. 뇌졸중에 걸리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건 단지 그 사람이 표현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 책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뇌졸중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더라도 생각을 하고 느낌을 계속 지니고 있다는 것을.

 

뇌학자인 질 테일러가 어느날 뇌졸중에 걸렸다.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과정을 느끼면서 뇌졸중이 왔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연락을 해야 하는데 뇌기능이 상실되어 몸을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뇌혈관이 터졌는데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 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기억과 언어에 문제가 생긴다. 물론 행동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연락을 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기억해야 하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전화를 걸었어도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다행히 연락이 되고 지인이 찾아와 병원에 가게 된다.

 

뇌수술을 해야 한단다. 두개골을 절개하는 일.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놓아두었을 때 또다시 뇌졸중이 올 수도 있고 그때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결국 수술하기로 한다. 그리고 수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좌뇌를 쓸 수 없을 때 우뇌가 작동함을, 그리고 우뇌를 통해 평안함을 경험하게 된다. 언어로 세상을 인지하는 것에서 그림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자폐증을 앓던 템플 그랜딘이 그림으로 생각한다고 하던데, 그것이 우뇌를 이용한 생각법이겠단 생각이 들었다.

 

평온을 유지하는 상태. 이를 열반에 든 상태나 몰아의 경지에 이르른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좌뇌가 활발히 활동할 때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좌뇌는 언어를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다시 과거 자신의 모습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평온한 상태를 굳이 다른 상태로 옮길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질 테일러는 자신의 좌뇌를 살리기로 한다.

 

단계적으로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과거의 자신을 살리게 된다. 이런 과정이 결코 짧지 않다. 8년이란 시간을 통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얻게 된 성과인 것이다.

 

이렇게 뇌과학자의 뇌졸중 경험기를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됐다. 우선 회복하기 위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것. 뇌가 손상되었을 때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또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들도 표현만 못할 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이들을 대할 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녀서는 안 되고 잠시 아픈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 부정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이들을 만나지 말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만나야 한다는 것.

 

여기에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구성되어 있어 얼핏 두 명의 인간이 한 뇌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이 두 뇌가 뇌량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하고 있으니,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는데 이런 뇌의 기능을 알면 많이 도움이 된다는 것.

 

뇌졸중. 어느 순간 찾아올 수 있는 질병이지만 인간의 뇌는 가소성이 있다는 것. 결코 불가역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뇌과학자가 자신이 경험한 뇌졸중에 대해 쓴 책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가 있다.

 

우리 인간이 우주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질 테일러라는 뇌과학자의 경험기를 통해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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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서 주목할 주제는 두 가지다. 두 가지지만 하나로 연결이 될 수 있다. 원인과 결과라고 할 수도 있고, 함께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기후위기와 코로나19사태다. 기후위기로 인해 생태계에 교란이 생기고,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결국 인간이 초래한 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기후위기에 대해서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청소년들 중에 등교 거부를 하면서 기후위기 문제에 대처하라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고, 기성세대들 가운데서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기후위기가 코로나19라든가 또는 대홍수, 산불, 지진, 가뭄 등등으로 우리에게 이미 다가왔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후위기는 없다는 식으로 막 나가는 정치인도 있고,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후위기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임에도 그것을 자꾸만 부정하면 이번 코로나19보다도 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이번 호 표지가 마음을 울린다. 이미 우리는 지구를 생명체에 비유하여 가이아라고도 하는데, 이번 호 표지에 있는 문구는 '기후야 그만 변해 우리가 변할게'다. 그렇다. 다른 존재 탓을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변해야 한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진 기후가 우리에게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항의를 한다. 그 항의를 더이상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올해 그 항의의 결과를 톡톡히 코로나19를 통해서 겪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코로나19는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교육부터 시작하여 생활하는 방식까지 확 바꿔놓은 것이 코로나19인데... 이번 호에서 교육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이야기하고,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주고 있다.

 

그렇다. 온라인 학습 환경을 구축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교육이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교육이 무엇인가, 왜 학교가 필요했는가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또는 교육의 본질, 여기에 사람의 몸이 지닌 특성이나 배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온라인 교육 환경이 갖추어졌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이번 호에서 '관계와 공간이 변화한 상황에서 학습시간과 학습내용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김성우, 온라인 학습과 새로운 교육의 상상력) 문제제기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김성우는 이 글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어떻게 온라인 교육으로 기존의 교육을 지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의 질서와 기술적 토대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온라인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나누어줄 것인가'를 넘어 변화하는 삶의 지형 속에서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한다. '온라인 교수학습'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재구조화 속에서 교육의 본질과 과정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대체제'가 아니라, 기존의 교육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도약대이다. (100쪽)

 

지금 등교개학을 했다. 어떤 학교는 학생들이 접촉을 막는다고 쉬는시간도 없앴다고 한다. 9시부터 1시까지 4시간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게 과연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일까? 이렇게까지 하면서 등교개학을 해야 하나?

 

마찬가지로 온라인 수업도 오프라인 수업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와 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을 해야할지 교육의 근본, 학교의 존재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한다.

 

민들레 129호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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