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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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의 50년 전에 나온 이 책이 (1973-1974년에 쓰여졌다고 하니)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에. 이렇게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여기에 이 책은 출발-일-귀향이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민 노동자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민 노동자들이 귀향을 하더라도 그곳에서 계속 살기는 힘들어진다는 사실. 결국 그는 다시 이민 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음에.

 

유럽을 배경으로,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유고슬리비아,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이,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로 와 노동자로 지내게 되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담은 존 버거의 책(사진-장 모르)이다. 그의 책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충격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이는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몇몇 구절들을 통해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의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 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 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한 이민 노동자들은 불사(不死)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 - 일하는 것 - 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64쪽)

 

섬뜩하고도 슬픈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일들이 과연 먼 과거의 일인가? 지금 우리나라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노동력이라는 틀에 맞춰진 존재 아닌가. 그들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지는가. 그냥 추방해 버리면 그뿐이지 않은가. 지금도 그런데... 살기 위해서 온 그들에게 해준 것은 단지 그들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뿐. 나머지는 아예 모르쇠를 하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민 노동자(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다. 이게 신자유주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다.

 

이런 이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가 없다. 조직화된 저항은 곧 추방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은 대부분 이주해 간 나라에 순응한다. 자신들의 상태가 결코 '비정상'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비정상'임을 깨닫게 된다.

 

'정상적인' 것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행동, 즉 '비정상적'이며 '극단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을 통해서이다. 그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해서 그 정상성이 박탈되어 버리고 나면,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느낌은 그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그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체로 확장되어 나간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가까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정상적인' 것들이 나 자신의 얼마만큼을 부정하거나 속박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104쪽)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것이 바로 세계화된 자본이 추구하는 것이다.

 

'각국 정부나 다국적 기업들은 지구 전체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정책을 짜고 있으며, 일시적인 이민 노동자로부터 얻어내는 자본주의의 이득은 상당한 것이다.' (111쪽)

 

이런 자본의 간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자신이 있는 곳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런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주어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데... 이런 상상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틈을 발견해 내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게 된다.

 

'사람의 시각의 지평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든간에, 그의 상상력은 경계선을 모르는 법이다. 자기 마을 밖으로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한 남자라도… 저 멀리 별나라까지 닿을 수 있는 상상의 세계 전부를 창조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도 사람은 세계의 다른 쪽 끝을 꿰뚫어볼 수가 있다.' (135쪽)

 

그럼에도 자기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옮기려고 해도 어렵다. 특히 이민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으로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기가 또 요청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만큼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삶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이들은 '비정상'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노조를 결성하기도 하고, 파업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개인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지만 이민 노동자 전체로 보면 '정상'적인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비정상'이었음을 알려주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미래가 있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서 어떤 헌납을 한다는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의 지속성만이 아니라(그 헌납이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포함될 수도 있다), 자기가 믿고 있는 가치의 지속성을 말한다. 그 희생은 미래에 인정을 받고 용납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지금 제공되는 것이다. 그 희생이란, 사실은 미래에까지 그 지속성이 확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전통을 향해서 이루어진다. 그 전통의 내용은 신의 뜻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 가족의 재산에 대한 희망, 국가의 운명, 혁명의 필요성 등 여러가지로 변한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모두가 그 속에서 재확인을 구하고 있다.' (187쪽)

 

이민 노동자에게는 이주해 간 나라에서는 이런 지속감을 느끼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이주 노동자들은 지속감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가족에게서 찾는다. 가족들의 현재 행복을 위해서 그들은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하는 것은 미래라기보다는 현재의 가족들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서 자신과 가족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믿음을 지니려는 마음도 있기에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외국으로 노동자들을 보냈지만, 이제는 외국에서 노동자들이 들어온다. 그들이 이 책에 나온 것과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책은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오레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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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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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한 해 젊은 작가들이 어떠한 주제로 어떻게 표현을 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책이다.

 

굳이 대상을 선정하지 않고 동등하게 이야기해도 될 텐데, 대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설이 있다. 임현이 쓴 '고두(叩頭)'.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땅에 조아림이란 뜻을 지닌 이 소설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반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못은 모두 남들이 한다. 나는 그들의 잘못때문에 거기에 휩쓸렸을 뿐이다. 그렇게 책임회피를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 소설이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이러한 태도는 사회가 발전하는데 걸림돌로 작동한다. 오로지 자기 합리화를 자행하는 인물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충격을 준 소설은 '눈으로 만든 사람, 호수-다른 사람, 그 여름'이다. '눈으로 만든 사람'은 심사평에서 '징그러운 소설'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충격적이다.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일, 근친상간에 대한 암시 이런 것을 떠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기는 너무도 힘듦을 소설은 주인공 강윤희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 소설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등장인물들을 모두 이름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 딸, 작은아버지가 아니라 이름으로 호명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이름이 거의 불릴 없는 것에 비하면 소설은 가까운 가족이라도 이만큼의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니... '눈사람'이 아니라. 작가는 눈사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눈으로 만든 사람처럼 위태위태하다. 서로가 서로를 함껏 껴안을 수가 없다. 한껏 껴안는 순간 상대를 녹이고 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억압과 폭력이 행해졌는지를 굳이 이름을 부르는 표현으로, 또 '눈사람'을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폭력적이 될 수 있음은 '호수-다른 사람'에서 볼 수 있다. 여성들이 얼마나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또 피해자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친절한 남자를 보아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그 속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해야 하는 여성 인물의 모습은 특이하지 않다. 지금껏 우리 사회가, 주류를 이루는 남성 문화가 여성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관성이 없다는 둥,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믿을 수 없다는 둥 하면서 여성들을 또다른 피해자로 만들어 가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을 읽으면 섬뜩하다.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진실은 여성들이 남성들은 생각할 수 없는 피해를 알게 모르게 입고 있으며, 그것들이 그들의 정신에 깊숙히 박혀 그들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정작 자신이 피해를 당할 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 이 두 소설에 비하면 '그 여름'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여성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은 동성애도 이성애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굳이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서로에게 끌려들어가는 마음의 움직임,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성애자들 역시 그들의 사랑에 이성애자와 같은 제약이 있고,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으며 사랑의 부침이 있음을 이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치 첫사랑에 대한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빨려들어가는 세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소설들 역시 나쁘지 않았다. 젊은 작가들,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잘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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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되는 두 시다. '길찾기' 또는 '집찾기'라고 할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닌 시. 그러고 보니 이 시집에는 '찾기'가 많다. 숨바꼭질, 숨은그림찾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직소퍼즐 등

 

  삶 자체가 찾기 아니겠는가? 삶을 찾아서 가는 여정. 그 여정은 죽음으로 끝난다. 그래서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찾을 수밖에 없다. 찾는데 어떻게 찾나? 내 발자국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 발자국은 이미 내가 지나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찾기는 내가 지나온 곳이 아니라 갈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찾기에 나서는 신발을 멀리 던지면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신발을 너무 멀리 던지면 길을 잃고 만다. 시 제목처럼.

 

그렇다면 너무 멀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발자국도 아니면 어떻게 '찾기'를 해야 하나? 자칫하면 찾지 못하고 빙빙 돌거나 제때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는 이 시집 제일 앞에 있는 '시인의 말'이 바로 시다. 찾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고 생각했지/창밖으로는 꽃들이 지나갔는데//언제까지고 계속될 듯한/한낮이 있어서//언제든 제대로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여전히 나는 의자에 앉아 있고/다음 정류장은 보이지도 않고'

 

그렇지만 찾아야 한다. 그런 '찾기'를 보여주는 시가 바로 '신발을 멀리 던지면 누구나 길을 잃겠지'와 '발자국을 지나다'라고 생각한다.

 

신발을 멀리 던지면 누구나 길을 잃겠지

 

저녁 강에 던져진 꽃들이

오늘, 강기슭에

낱장의 꽃잎으로 떠오르고

 

신발을 멀리 던지면 누구나 길을 잃겠지

 

모레톱에 찍힌 발자국에는

지난밤 큰 물고기를 물가까지 끌고 나온 수달이 있고

들쥐를 쫓는 너구리가 있고

황조롱이 한 마리 앉았다 날아오르고

 

나는 아직 젊어서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들을 꽃잎이라 불러본다

나는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한다

 

아직도 지나가야 할 발자국이 많다고

떠오른 낯장의 꽃잎들

 

집에 가려면

더 많은 발자국들의 쇠락을 겪어야 한다

 

박진이, 신발을 멀리 던지면 누구나 길을 잃겠지. 걷는사람. 2019년.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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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을 지나다

 

  돌아가야 했다 길을 잃었을 때는 가장 가까운 발자국을 찾으라고 할머니가 어두침침한 말투로 일러주었었다

 

  평생을 강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모래톱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은 생김새가 비슷했다 신발을 던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만 맨발에 흙을 묻히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웬일인지 나는 강으로부터 더 멀어져 있었다

 

  수달 너구리 새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면 해가 지겠지 나는 강이었다가 꽃잎이었다가 발자국이었다가

 

  겁(怯)이라면 수백 번 수천 번 나를 지나간 겁(劫)이라 하겠다

 

박진이, 신발을 멀리 던지면 누구나 길을 잃겠지. 걷는사람. 2019년. 78쪽.

 

나 홀로 가지 못한다. 다른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미 내가 갈 곳을 간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흔적, 발자국을 따라 가면 집으로 갈 수 있다.

 

집찾기, 길찾기. 인간만의 힘으로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과 함께 할 때 찾을 수 있다. 신발을 너무 멀리 던지지 말자. 주변을 살펴보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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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인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1
랠프 엘리슨 지음, 조영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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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계속된다. 동지회에 가입해서 그는 승승장구한다. 자신이 기획하여 사람들을 조직하고 이끌어낸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편지를 받는다. 조심하라고? 백인들이 너를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그러다 위원회에서 비판을 받고 할렘의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는다. 여성문제에 대한 연설을 하는 쪽으로 옮긴다.

 

여기서 흑인 문제보다 더 열악한 것이 여성문제다. 여성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 백인여성들이 다수다. 그것도 이런 운동을 하는 흑인 남성에 관심을 가진.

 

흑인 여성들은 여성운동에서서 뒤처져 있다. 앞으로 나서기가 힘들다. 그들은 이중으로 억압받고 있다. 흑인이라는 인종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 이 둘이 그들을 함께 억누르고 있다. 그러니 흑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흑인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백인 여성들의 우월감, 또는 흑인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그런 모습들이 소설에서 묘사가 되고 있는데, 그 당시 백인 여성들이 또는 남성들이 흑인 남성을 보는 관점 중의 하나가 성적 대상으로서의 흑인 남성이었을 것이다. 지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흑인 남성은 성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로 여겨지는 그런 편견.

 

그러다 다시 할렘으로 돌아온 주인공. 왜냐하면 그가 조직했던 할렘의 조직들이 붕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일했던 클리프톤이 경찰에게 사살당했을 때 그는 장례식을 조직한다. 그러나 동지회에서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에게는 흑인들의 시위가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

 

그들은 흑인들이 자신들을 넘어서는 위상을 지니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지도에 따르기를 바랐을 뿐. 동지회라고 평등을 추구하는 조직에서도 이럴진대, 주인공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흑인지도자, 선지자를 자칭하는 폭력을 선동하는 라스와 함께 일할 수는 없다. 라스 역시 그런 폭력으로 백인들의 위상을 공고하게 할 뿐이다. 맹목적인 폭력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더 어려움을, 오히려 백인들이 흑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할렘가는 폭동에 휩싸이고, 방화, 약탈, 폭행, 총기 난사 등등...이는 흑인 사회를 궤멸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지하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는 주인공.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남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억압받는 상태를 이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꽤 많음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는 존재하지만 그의 존재를 대부분 힘있는 백인들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할 때만 그의 존재가 소환된다.

 

백인의 필요에 따라 또는 백인의 욕구를 대변하는 흑인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하는 존재, 그런 존재임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특히 억압받는 존재에게는 더욱 그렇다.

 

백인 지배 세상에서 백인처럼 되고자 그들을 무작정 따라하는 그룹. 그들은 분명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런 그들이 있어야 대다수 흑인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소수다. 몸도 마음도 백인화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남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특히 약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축에 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그것이 쉽지 않다. 동지와 적을 구분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동지의 탈을 쓰고 함께 하는 적도 있고, 자신보다 더 선명한 구호를 가지고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적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지하로 스며들었음에도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음을 이 구절을 통해 보여준다.

 

'내가 낮은 주파수로 여려분을 대변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373쪽)

 

현대 미국에서는 플로이드 사건과 같은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미국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국가로 여전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이 소설은 유효하다. 아직도 흑인들은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출세한 흑인 일부분. 여전히 굶주리면서 언제 경찰의 총에 맞을지 모르는 대다수 흑인. 여기에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흑인 여성들...

 

인류는 여전히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이 하고 있는 일 대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이 서로를 구분하여 차별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이성적인 인간?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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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인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0
랠프 엘리슨 지음, 조영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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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엘리슨, 처음 들어보는 작가. 하긴 미국 작가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다른 책을 읽다가 이책에 대한 내용을 보고 읽어보고 싶어졌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니. 투명인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니다. 투명인간 류의 소설이 아니다. 미국 흑인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떠한지를 남자 주인공을 통해서 보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잘해서 장학금을 받는 주인공. 백인들이 그를 초대한다. 연설이 훌륭했다고, 다시 그 연설을 들려달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간 곳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배틀로열과 그를 모독하는 백인들의 괴롭힘이다.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마냥 갖고 놀아도 되는 존재로만 인식한다. 그에 합당한 돈을 주면 된다는 식. 장학금이라는 것도 그들이 베푸는 시혜에 불과하다. 위에서 아래로 철저하게 차등을 둔,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그럼에도 자신들의 관용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

 

그런데 주인공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에게 잘보이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 설립자 친구인 이사를 안내하는 일을 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잘보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두 가지 실수를 한다. 그것이 실수일까?

 

백인 이사에게 흑인들이 사는 집을 보여주고, 그 집에서 겪은 일을 듣게 하는 일이 실수? 또 흑인들이 주로 모이는 술집에 어쩔 수 없이, 백인 이사는 위스키를 달라고 재촉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가 알고 있는 술집은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간 것이 실수라고?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그 일로 인해 대학에서 퇴학당한다. 흑인 총장에게서. 취업을 알선받는 것처럼 속아서. 결국 흑인 총장은 피부만 흑인이지 살아가는 방식은 백인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백인보다 더하다.

 

파농 말에 의하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 것이다. 아니다. 이 소설의 흑인 총장은 이 말을 뒤집어야 한다. 그는 하얀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이 하얗게 된 것이다. 하얘지고 싶어서 자신의 출신을 잊고, 오로지 백인들의 구미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는 존재.

 

그것을 깨닫지 못한 주인공. 감지덕지하며 대학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로 북부로 떠난다. 북부에서 드디어 그들의 위선을 알게 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직도 그는 백인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우연히 길거리로 쫓겨나는 흑인 노부부를 보면서 그는 연설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동지회에 가입하게 된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동지회.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새로운 이름을 그들에게 받는다. 이제는 하얗든 꺼멓든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일하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제목인 '보이지 않는 인간'답게 주인공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존재하되 남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지회에서 이름을 받았음에도 소설에서는 그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아니 불린지는 몰라도 독자인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게 그만의 문제일까?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난 플로이드 사건을 보라.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람 목을 눌러 질식해서 죽게 만든 경관들. 그 경관은 백인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흑인은 안전하지 못하다. 하나의 존재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 2권 연보를 참조하면 이 소설은 1945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2권으로 넘어간다. 1ㅡ2권 세트로 책이 묶여 있으면 한 번에 쓸 수 있어서 좋을텐데, 그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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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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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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