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나 광장에서 베르니니와 만나다 - 로마가 사랑한 다섯 미술가
나윤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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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이들은 조상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을 전세계로부터 불러 모은다. 엄청난 문화유산이다. 그리스가 고대 문화유산으로 지금도 득을 보고 있다면,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수많은 문화예술품들이 남아 있어서 더 많은 득을 보고 있다.

 

그것도 미술 분야에서 이탈리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가들을 대보라고 하면 먼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든다. 이들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로마에서 활약한 작가들이다. 이들 말고도 더 많은 이름을 댈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카라바조, 베르니니, 보로미니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잘난 조상을 둔 덕분에 로마는 지금도 전세계인들이 한번씩은 들러보고 싶은 도시가 되어 있다. 로마뿐이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이 그러한 조상들로 인해 지금도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관광객들이 이러한 문화유산을 꼼꼼하게 보고 지나가는가 하면 아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휙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유산이라도 짧은 시간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감상하게 되면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런 점을 아쉬워한 작가가 로마의 '나보나 광장'을 중심으로 다섯 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많은 사진들과 그들의 일생이 흥미롭게 펼쳐져 있어서 좋다. 읽으면서 재미와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작가들을 뽑아 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더 좋다.

 

미켈란젤로로부터 시작하여 라파엘로, 그리고 카라바조, 베르니니, 보로미니를 다루고 있다. 미켈란젤로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세계적으로 너무도 알려진 사람. 예술에 대한 그의 고집,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는 교황에게도 굽히지 않는 성정들에 대해 이 책은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미켈란젤로와 다른 성정의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으로도 유명한 그가 그 그림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얼굴과 자신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

 

빛을 너무도 잘 살린 카라바조. 성당 건축부터 조각까지 능력을 발휘한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하지만 사이가 너무도 나빴다는 협조자에서 경쟁자로 변한 그 두 사람의 관계까지 이 책에서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작품 사진들, 성당 사진들을 통해 이들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를 만날 수가 있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는 책.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는 책이다. 아마도 로마에 가게 된다면 가기 전에 꼭 다시 읽고 또 지니고 가고 싶은 책이다.

 

자, 이 책에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왜곡되었다는 것.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화를 그리는 미켈란젤로. 누워서 천장화를 그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런 글을 보았더라? 생각은 안 나지만. 이 책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이 어느 것일까?

 

'흔히 추측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비계 위에 누워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가 설계한 구름다리 형태의 비계 위로는 일하는 사람들이 서서 걸어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계 위에 올라선 미켈란젤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위로 쭉 뻗은 자세로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77-79쪽)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림을 그리려면 누워서 그리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눈과 몸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런 글들이 이 책 곳곳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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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좀비스 스토리콜렉터 35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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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방대하다. 다 읽는데 좀비들이 그렇게 느리다고 표현하던데, 그만큼 읽는데도 좀비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한 구간을 가는데 천천히, 비틀비틀 그렇게 가는 좀비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좀비 소설들.

 

무려 900쪽이 넘는 작품집이다. 소재는 모두 좀비다. 주제는 소설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좀비들에 관한 소설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사람들의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욕구일까?

 

나는 왜 좀비 소설을 읽을까? 사실 좀비 소설을 읽는 이유는 영화 '월드 워 Z'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좀비들을 그렇게 무차별 학살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

 

좀비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곁에서 함께 숨쉬며, 웃으며, 울며 지냈던 사람 아닌가? 죽지 못하고 시체로 소생한 존재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단지 겉모습이 흉측하다고 좀비를 함께 해서는 안될 존재로 여기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전세계에서 좀비 소설이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좀비 소설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나? 좀비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 좀비는 과거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그것도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여기저기 찢기고 깨지고 훼손된 형상으로) 존재일 뿐이다.

 

그냥 형태만 사람일 뿐. 그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게 좀비를 파악했다. 한데, 이 소설집에 있는 '해골 소년'이라는 소설을 보면 좀비도 생각을 한다. 작전도 세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좀비가 부른 노래'라는 소설을 보면 좀비가 되어 죽지 못하는 음악가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 좀비라고 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좀비는 무엇이다고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다만, 이들은 자가증식을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서 얻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든 생각하지 못하든 좀비는 스스로 재상산(?)을 하지 못한다. 즉 생물이면 자가증식을 해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가 그렇다는 얘기) 하는데, 좀비들에게는 그것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래서 생물이 아니다. 한때 사람으로 살았지만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 존재, 좀비. 그들은 분명 위협적인 존재다.

 

이것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때, 즉 영원히 살아 있을 때 인간 사회에 닥치게 될 위험을 좀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 득시글 대는 인간들이 과연 행복할까?

 

너무도 많은 인간들로 인해 지구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옥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무서운 존재이지만 또한 죽음이 없는 세상 역시 좀비 세상처럼 무서울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을 이런 좀비 소설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총34편의 좀비 소설이 묶여 있다. 다양한 좀비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다른 좀비들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좀비들에 대한 관점도 다양해서 수많은 좀비들을 만날 수도 있다.

 

다시 영화로 가보자. 좀비를 세상에서 없애는, 좀비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것은 사라져야 할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인간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형기의 시 '낙화'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좀비는 가야 할 때임에도 가지 않는 존재이기에 흉측한 존재를 넘어 퇴치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있을 때와 가야 할 때를 구분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람다운 사람 아니겠는가.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진실.

 

너무 두꺼워서 읽는이를 질리게 하지만 그래도 한편 한편이 단편이어서 천천히 읽으면 재미도, 생각도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좀비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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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조너선 마크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이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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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인종에 따라서 인간의 특성이 다르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인종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 나름의 합리성을 획득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인종에 따라서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서 차별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인종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피부색? 피부색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또 눈동자 색깔로 분류하는 것은? 아니면 머리카락의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아마도 머리 색깔로 사람을 분류해 흑발, 은발, 금발, 갈발(갈색머리), 홍발(빨간머리) 등으로 구분하고, 경제력과 정치력이 우세한 사람들을 주요 인종으로 하고, 나머지는 열등하다고 하면 그것을 따르겠는가? 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종구분이니, 머리 색깔에 따라서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옳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이 책은 여러 사례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다. 거기다 인종주의자들은 아직도 과학계에서 퇴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창조론자들이 과학계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한 것에 비하면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지금 세계 곳곳을 보라. 특히 우리가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자. 미국은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도 한참 동안 인종에 따라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그 차별이 1960년대에 들어서 형식적으로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은 일어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뿌리가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이 책은 인종주의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양한 사람들을 인종이라는 틀로 구별하고 틀지우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은 공식적인 과학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과학자가 접근하기 힘들다. 인문학을 통해서만 역사적, 경험적,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진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간의 변이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인종의 특징과 연결되는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루어졌다. 103쪽.

 

이 말에 이어서 그는 '인간의 차이를 인종과 차별화해오면서 우리가 갖게 된 긍정적인 지식과 양자 간의 상호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1. 인간의 집단은 주로 문화적으로 구별된다.

2. 집단들 안에서의 변이가 집단 간 변이보다 훨씬 더 크다

3. 인간의 생물학적 변이는 분리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4. 인구 집단은 생물학적으로 실존하지만, 인종은 그렇지 않다

5. 인간 집단에는 만들어진 구성요소도 있다

6. 인구 집단을 무리로 묶는 것은 임의적이다

7.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8. 인종 분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자연적인 생물학적 패턴을 반영하지 않는다

9. 인간은 유전자 변이가 거의 없다

10. 인종 문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이지 생물학적이지 않다 104-114쪽.

 

이 점을 명심하면, 우리는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 집단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인종 이론이 예측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과학이 인간 다양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학자의 전문 지식을 대체하는 데 사용할 때, 과학은 인종주의적이 된다. 인간의 변이를 연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자연적 패턴을 연구하는 것이다. 118쪽.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아니 부끄러워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창조론자들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듯이 인종주의자들도 그렇게 되는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자.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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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늦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그가 말하는 '웃음도서'로 받아들이기에는. 이 책이 나온 때는 2005년. 지금보다는 남북 관계가 좋았을 때다. 긴장에서 화해 분위기로 가던 때. 남북 교류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던 때.

 

  그런데 지금은, 좋아질 것 같았던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되어 버리고, 우리는 교류 단절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북한은 북한, 남한은 남한. 그래도 읽으면 참 경쾌하게 책이 넘어간다. 상황은 상황이지만 이 책을 그냥 '웃음도서'로 받아들이자.

 

  1997년 쿠웨이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림 일이 서울살이를 하면서 겪은 일을 쓴 책이다. '웃음도서'라는 브랜드를 걸고 책을 썼는데, 북한에 대한 비판보다는, 서울에 살면서 자신이 겪은 일화를 중심으로 책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남과 북에서 사용하는 언어 차이에 많은 주목을 하고 있는데, 생각할 것들이 제법 있다. 남과 북에서 살면서 차이를 느끼고 그것들에 대해서 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차이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것.

 

평양에서 살다 온 사람이 서울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경쾌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지금도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이 책의 수익금을 평양산원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기부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그는 비록 북한을 떠나왔지만 그것은 북한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좀더 잘 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을 앞세우지 않고 서울에 살면서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서 거부감이 크게 일지 않는다.

 

이렇게 그가 말한 것처럼 남북이 서로 교류를 활발하게 해서 그도 평양에서 서울살이에 대한 강연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책 곳곳에 남북의 언어 차이를 비교해주는 장이 있어서 남북 언어 차이도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남과 북 정상이 만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았는데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것.

 

그렇지만 한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말했던 '멀다고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말. 평양과 서울이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면 평양에 '류경 호텔'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버드나무가 많아서 평양의 이름을 '류경'이라고 한다는 것. 우리는 두음법칙을 적용하여 '유경 호텔'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두음법칙이 아닌 '원음법칙'을 사용해서 '류경 호텔'이라고 한다는 것. '류경'이라는 이름이 왜 평양에서 쓰였는지를 알게 된 수확도 있는 책이다.

 

2탄은 그렇게 가볍게만 읽을 수는 없다. 북한을 떠나오기 전에 평양에서 지낸 일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겁게 쓰지 않았지만 읽는 사람은 무겁게 읽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살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또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것도 가족을 두고 떠나 왔기에.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북한의 실생활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그래도 평양시민으로 살았다. 그가 권력의 최상층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 그들도 뇌물이 있고, 불륜이 있고, 술도 마시며, 친구들과 음식점에서 함께 하는 시간도 있다는 것. 그것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해도.

 

이런 저런 점을 살펴도 이 책들은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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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폭풍의 시대 - 치명적 신종, 변종 바이러스가 지배할 인류의 미래와 생존 전략
네이선 울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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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우리 인류는 앞으로 우리에게 판데믹(팬데믹이라고도 한다)이 여러 차례 올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냥 당장 닥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기에 들어가는 돈의 몇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투자만 하고 있었을 뿐.

 

그 결과가 무엇인가? 현재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판데믹이 올 거라고, 그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결과가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비극이다.

 

판팬데믹을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 잠시 통제가 풀리니 수천 명이 모여서 몸을 부딪치며 즐기는 현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코로나19를 말하는 모습. 마스크가 중요함에 대해서는 더이상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데도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어떤 대통령.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판데믹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겪지 못한 질병이 나타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다. 그러다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공포에 빠지고, 정치권은 어떤 대응책도 내놓지 못한다.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란 기껏해야 봉쇄다. 격리과 봉쇄. 그러나 헌신적인 의료인들이 나타난다. 의료인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질병은 점차 사그러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질병은 사라진디. 퇴치된 것이 아니라.

 

이런 공식이 되풀이 된다.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비슷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런데도 우리는 기존에 겪었던 감염병들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냥 대응방식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련되어졌을 뿐. 그 질병을 예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또다시 판데믹을 겪고 있다.

 

판데믹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한다. 현대는. 우리들 편리한 생활이 감염병을 순식간에 퍼뜨릴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도로망의 확충, 교통수단의 개발, 장기이식과 수혈을 할 수 있는 의학기술, 생태계 파괴 등등이 이런 조건이다. 우리가 빨리 세계 전역으로 갈 수 있듯이, 우리들과 더불어 세균과 바이러스들도 세계 전역으로 빠른 시간 안에 퍼져 간다.

 

그리고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하고 무분별한 동물고기 섭취로 인해 동물이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우리 몸에 들어온다. 이것들이 변종을 일으켜 사람 간에 전염이 되는 순간, 판데믹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네이선 울프가 쓴 이 책,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네이선 울프는 판데믹을 예방하기 위해 기구를 조직하고 그에 대한 활동을 하고, 또 수많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판데믹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 우리에게 다가올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이런 경로를 거쳐 판데믹을 유발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은 인간과 돼지와 조류가 동거하는 농장에서 재편성될 수 있다. 돼지는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받아들일 수 있고, 철따라 이동하는 철새들을 비롯하여 온갖 조류의 바이러스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철새들은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를 통해 직접 혹은 간접으로 돼지를 감염시킬 수 있다. 조류에서 옮겨진 새로운 바이러스가 돼지와 같은 가축의 체내에서 인간 바이러스들과 서로 영향을 미칠 때 예상되는 결과 중 하나가, 인간 바이러스의 일부와 조류 바이러스의 일부를 지닌 완전히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자연항체로도, 그리고 과거에 유행한 인플루엔자 계통의 백신으로도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 217쪽.

 

인간과 동물, 특히 야생 포유동물의 긴밀한 접촉에서 새로운 판데믹이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상적인 예측 시스템이 완성되기 전이라도 이런 형태의 접촉을 줄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방식을 바꿔가야 한다. 319쪽.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320쪽.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321쪽.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무엇하고 있었나 싶다. 도대체 인간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꾸준히 이야기되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모르쇠로 일관해 오다니...

 

코로나19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런 전조는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 네이선 울프와 같은 사람이 계속 판데믹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을 뿐더러, 더 빨리, 더 많이 이동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냈고, 또 더 많은 동물들과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가. 또 너무도 많은 야생동물들의 생활터전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게 하고, 또 그들을 잡는 과정에서, 또 날것으로 먹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인간에게 없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인간의 몸으로 옮겨놓지 않았던가.

 

그렇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 나올 것이다. 치료제도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또다른 바이러스들이, 박테리아들이 우리를 판데믹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감염병을 단지 치료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다른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생활방식. 그것이 필요하고, 거기에 대한 전세계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293쪽에 보면 이 책은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읽은 책은 2015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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