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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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이미 시작된 기술변혁의 시대에 뒤따라가기만 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적어도 이미 변하는 시대라고 인식했다면,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현대는 스마트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에 든 그 작은 기계가 우리들 삶 전반을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결제도 현금으로 하지 않는다. 현금의 시대가 카드 시대로 넘어간 지 오래지만 이제는 카드 시대로 저물어 가고 있다. 그냥 핸드폰 하나면 다 된다.

 

심지어 자신을 인증하는 것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핸드폰으로 인증을 하게 된다. 주민등록증을 제시해도 인증을 하지 못해 물건을 구입 못할 때도 있다. 핸드폰이 없다면. 그만큼 우리들 생활에서 핸드폰은 사치품,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핸드폰을 이용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원격수업을 하는데, 컴퓨터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한다. 언제 어디에서고 핸드폰만 있으면 학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더더욱 필요해진 것이 핸드폰이다.

 

실시간 수업을 하는 것도 핸드폰으로 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보수적이라는, 시대가 변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하기 시작하는 교육에서도 핸드폰은 이미 대세가 되고 있다. 핸드폰 소지를 아무리 금지해도, 학생들은 몰래몰래 들고 다닌다. 핸드폰을 걷어서 보관하고 방과 후에 준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공기계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핸드폰을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학교는 뒤처져 있다. 핸드폰에 관한 온갖 규제들이 학생들을 얽어매고 있는 상황. 그나마 코로나19로 인해 핸드폰이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도구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책 최재붕 교수의 '포노 사피엔스'는 이런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규제가 여전한 우리나라에서 이대로 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나라들은 이미 스마트폰을 이용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규제가 심해 많은 부분에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미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우리들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부터 금융까지, 심지어는 사교까지.

 

그러니 이런 현실을 읽고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 이미 전세계는 이쪽으로 가고 있다. 이게 기반한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 온라인 플랫폼이 미국이나 중국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그만큼 우리는 오프라인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라.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광통신망과 거의 모든 국민이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인해 대응을 즉각적이고 적절하게 할 수 있었다.

 

아직 빅데이터를 활용하지 않고 있지만, 방역부분에서는 이런 빅데이터를 이미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레 방역을 통해 스마트폰을 활용한 활동들이 우리들 삶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들 삶의 방식을 바꿔가고 있다.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 부분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시대를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런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최재붕 교수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람이 기계에 종속되는 삶이 아닌, 더 여유를 가지고, 좀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반으로 스마트폰 시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인류를 만났다. 그런 포노 사피엔스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를 잘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변화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는 사람 이 책을 읽어보라. 왜 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스마트폰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스마트폰이 주가 아니라 사람이 주라는 것. 사람을 위해서 스마트폰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을 위한 세상을 위한 기반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포노 사피엔스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러모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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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130호를 읽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민들레]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한 온라인 수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온라인 수업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중위권 학생들의 학력저하가 우려된다는 평가도 있는데, 이것이 본질적인 평가일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가?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빼고, 오로지 학업성취도만을 가지고 또는 수업을 하는 온라인 플랫폼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글과 비교하여 우리나라 교육방송(EBS)의 기술력이 한참 떨어진다는 말도, 또 경제력에 따라 정보 격차가 나고, 그 정보 격차와 비례해서 성적 격차가 나고 있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수업이 성공적일까? 그것이 우리가 미래에 추구해야 할 교육일까? 만남이 제거된 비대면 교육이 과연 성공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학교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로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은 학교를 폐교하기보다는, 작은 학교를 살려서 이러한 감염병에서도 최소한의 만남이 유지되는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큰 학교들을 작은 학교로 재배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교사 1인당 학생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학급당 학생수를 따져야 하고, 학급당 학생수를 15명 정도로 해서 과밀학급을 해소하고, 일대일 대면교육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적어도 이번 사태로 온라인 플랫폼에 열광하고, 그쪽으로 우 몰려갈 것이 아니라 학교 여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바람직한 학교의 모습, 교육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그런 논의를 교육부에서, 또는 교육청에서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기에 이번 민들레 130호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에 맞게 민들레에서는 '온라인 수업, 그 후'라는 제목으로 여러 글을 실었다. 온라인 수업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는 글들이다. 읽을 만하다.

 

이번 호를 열면서 엮은이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삶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교육을 둘러싼 논의는 '입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5쪽)

 

교육과 입시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시하고 있는 현실, 그래서 아이들의 건강보다도 입시를 생각해서 등교 개학을 하는 나라. 등교 수업을 해서 교육의 본질에 다가갔으면 좋았으련만, 입시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등교 수업이 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가?

 

이 중에 정형철의 '장기 비상시대의 교육'이란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마음에 새겨둘 말이다.

 

  재난의 정도에 따라 분명 고려하고 가늠해야 할 상황은 있겠지만 '만남의 교육'은 결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교육적 지향이다.

  코로나 상황을 기회로 삼아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교육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오로지 온라인 기반 비대면 교육으로 모든 교육적 논의를 몰아가려는 시도가 넘쳐나고 있다. '미래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교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지우는 일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근본적인 논의 없이 온라인 교육의 확대만으로 장기 비상시대의 교육을 대비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심도 있는 교육 콘텐츠가 마련된다 해도 비대면 교육이 지니고 있는 한계는 명백하다. (30쪽)

 

앞으로 코로나19와 같은 사태가 또 오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한다. 이제 코로나19와 같은 사태는 일회적인 재난이 아니라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사태를 기회로 삼아 교육을 바꿔나가는 논의를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민들레 130호에서는 그런 논의의 시작이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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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3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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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마워 하면서 더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금 우리나라를 보자. 3D업종이라고 하는 데에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고마워 하는가? 아니면 없는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하는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전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결혼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역시 차별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오랜 전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도살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 먹기 위해서 북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양수척, 화척, 재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살게 했다. 함께 살게 했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차별이었다.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회에서 격리해서 그들만의 공간에서 지내게 하는, 자신들은 그들이 생산한 물품과 잡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고, 멸시했다. 그것이 고려 시대에 동물을 도축하는 과정이 이랬다고 서긍이 전한다고 한다.

 

잡을 때는 먼저 네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넣고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가르는데 위장이 다 끊어져서 똥과 오물이 흘러넘친다. 따라서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서긍, <고려도경> 권23 '도축' (140쪽)

 

이렇게 고기조차도 제 맛을 모르게 먹던 사람들이 백정들의 도움으로 제대로 맛을 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워 해야 하는데, 그들을 오히려 천시하고, 자신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조선시대에는 군대조차도 소를 잡지 못했다니 하니 그 한심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수척, 화척, 재인 등등은 백정으로 용어가 통일된다. 일반 백성으로 대우하겠다는 의도로 백정이라는 말을 쓰도록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멸시받는다. 하다못해 노비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

 

소는 그냥 짐승이 아니라 극락의 태자.

그러므로 소를 잡는 일은 극락에 가고자 도를 닦는 일이다, 따라서 소를 잡는 백정 또한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믿음은 백정들에게 하나의 구원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도 그냥 부르지 않고 하늘나라 왕자라고 소 우牛를 붙여 '우공태자'라 불렀다. 소를 잡는 칼도 영험한 칼로 여겨 소중히 대했고, 소를 잡기 전에는 늘 몸가짐도 정결히 했다. ... 백정들은 하늘에 오르면 왼쪽이 극락이, 오른쪽에 지옥이 있다고 믿어 왼쪽을 특히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소를 잡을 때도 왼손만 썼다. (151쪽)

 

천시받던 그들의 대표적인 예가 중종반정에 참여한 당래와 미륵이라는 사람이다. 특히 당래는 벼슬까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 결국 다시 강도짓을 하게 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공신이 되어도 또 벼슬을 해도 백정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천시받던 백정들이 가끔 집단적으로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이 되는 것은 일제시대에 벌인 '형평사'운동이다.

 

이 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강상호의 이야기를 통해서 백정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양반임에도 백정들의 권리를 위해 평생을 살았던 강상호. 그가 받은 멸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의 백정들이 와서 그를 저세상으로 보낼 때의 모습을 보면 강상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상호와 같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평등이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을 추구해야 함을 백정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 지금 우리 시대에 '백정'들은 없는가? 주위를 살펴보라. 우리 주변에 아직도 '백정'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런 차별을 바꿀 수 있는 행동. 그것이 사회를 조금 더 평등한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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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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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을 생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아니 용서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자가 많은 세상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냥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용서가 어디 그리 쉽게 되는 것인가? 조금 시일이 흘렀지만 영화 '밀양'을 보라.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가? 자책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분노에 빠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을 겪고 겪은 다음에 살인자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들고, 그 살인자를 만나 용서하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이미 살인자는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에게? 신에게? 이런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피해자의 엄마.

 

이 영화 이청준이 쓴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영화였는데... 이 책은 이런 용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용서가 무엇인지 살핀 다음 용서의 종류를 살피는데... 용서의 종류에는 자기 용서, 대인 관계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가 있다고 한다. 용어를 보면 대략 어떤 용서인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개인적 용서도 힘든데, 대인 관계적 용서에서 정치적, 형이상학적 용서는 더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용서에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기억'이 작동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246=247쪽 참조)

 

그런데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서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또한 용서를 하면 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용서는 재반복 될 뿐이라는 것.

 

기억하지 않으려 한 용서들이 폭력을 계속 부르고, 학살을 계속 불러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진실도 권력을 쥔 자들이 왜곡하거나 은폐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용서에도 전제가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 용서가 있지만, 그런 용서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용서일까? 나를 대리해서 신이 용서를 할까? 영화 '밀양'이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용서는 당사자가 우선 되어야 한다. 피해자 본인이 아니라면 피해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피해를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용서여야 한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른 존재들을 용서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를 또다른 피해로 몰아가는 것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4장 종교와 용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가면 가해자가 뻔뻔해 질 수 있다. 왜 용서를 안 해주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용서를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교환일 뿐이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댓가를 바라는, 즉 빚을 주고 받는 채무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용서가 아니다.

 

이만큼 용서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추구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도 없다. 조건적인 용서는 이미 주고 받는 무언가가 있기에 용서라고 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적 용서'를 하나의 기준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기준조차 없으면 안 된다. 무조건적 용서를 기준으로, 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해-피해자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좀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용서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정으로서의 용서에는 가해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반성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가해를 감추는 장막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수동태로서의 용서. 우리 문법으로 하면 피동형으로서의 용서라고 해야 하나. 성경에는 수동채로 당신은 용서받았다고 나온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가 아니라 당신은 용서받았다다. 용서받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실하게 다가가야 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용서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태도 변화로 피해자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일본과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려고 하는 일본의 자세때문이다. 일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이 한 행위를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핸 장치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 우리나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합니다'가 아니라 '일본,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용서는 우선 피해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가해자에게서 오지 않는 용서는 변화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는, 과거를 망각한 용서일 뿐이라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용서를 피해자에게 구하기 전에 자신들이 진실을 밝히고 성찰하고 참회하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란 말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조건적 용서이겠지만, 무조건적 용서가 그냥 덮어놓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용서는 어렵다.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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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다. 그런 말도 있고.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그 아름다움을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자신이 좀더 권력을 지녔다고 권력이 없는 사람을 막 대하고, 자신이 돈이 좀 많다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다면 그 과학기술이 무슨 소용이랴? 오히려 디스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 과학기술의 발전보다도 먼저 사람을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과학기술을 떠나서 사람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반성해야 한다.

 

말로는 사람이 먼저다, 우리는 국민을 위한다,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 모두가 서민을 위한 정책이다라고 하면서도 실상 따져보면 있는 자들을 위한 일이 많다.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 결코 행복하지 않다.

 

사람을 도구로, 수단으로 생각하고 대우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니까.

 

기본소득 논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회구성원이 되어서 생존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기본소득 논의의 중심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이다. 정희성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첫시 '당신에게'를 읽고 이런 생각이 더 들었다.

 

부처가 그랬다고 하던가. '천상천하 天上天下 유아독존 唯我獨尊'이라고. 이건 나만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다 존귀하다는 것이다. 개인은 모두 천상천하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것.

 

정희성 시인의 시를 보자.

 

  당신에게

 

세상에는 이름 모를 신이 많다

나는 자신이다

어쩌면 당신도 신

당신이라는 이름의 신인지 모른다

 

정희성, 흰 밤에 꿈꾸다. 창비. 2019년. 10쪽

 

과연 시인이다. 나도 신, 당신도 신이다. 나는 자신, 당신은 당신. 우리 모두는 신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낮추어서도 또 자신만 높여서도 안 된다. 동등한 존재. 존귀한 존재. 그런 신들의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였으면 좋겠다.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온다. 코로나19로 힘들던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고통 받는지 이번 일을 통해서 잘 알게 됐다. 그래서 모두들을 위한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위기였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가는 기본 출발점,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는 출발점에 섰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이 아니라 '당연히' '당신도 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신'으로 대해야 한다. 나도 신, 당신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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