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고 한다. 구분한다는 것, 나는 다르다는 것.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그들을 내 테두리에서 밀어내는 것.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함께 살아가면서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비슷한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의 안 좋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을 찾는 눈을 지녀야 하는데,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끌은 왜 이리도 잘 보이는지...

 

  그 티끌을 침소봉대해서 마치 큰 허물을 지닌 양, 그 사람과 상종하면 안 되는 양 여기며 지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꾸만 남을 밀어내는 마음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들까지 밀어내게 된 것은 아닌지...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이유가 될 텐데...

 

정철훈 시를 읽으며, 이 시에 나오는 숱한 밀어내기를 만나면서, 그렇게 밀려나간 삶을 시에서 만나면서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밀어내는 만큼 남들 역시 나를 밀어낼 텐데...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다가는 서로 꽉 막힌,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만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철훈 시집 [살고 싶은 아침]에는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숱하게 밀려난 사람들, 아마도 시인의 가족사와도 연결이 되겠지만, 그런 밀려난 삶들에서도 닮은 점을 찾으려 한 시인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그 중에 '옷걸이가 닮았네'란 시를 읽으며 그간 내가 너무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옷걸이가 닮았네

 

여럿이 함께 걸려 있네

바지도 저고리도 같이 걸려

같이 나부끼고 같이 흔들리고

태양도 달도 같이 거기서 운행하네

옷걸이에서 지난 긴긴 밤들이 닮았네

체위가 닮고 몸이 닮고 청바지와

양말과 발바닥과 발가락이 닮았네

양말 구멍까지 닮았네

여럿이 함께 잠을 자네

발가락과 양말과 그들의 역할이 함께 있네

그들의 기능이 모두 함께 있네

끊어진 것과 이어진 것이 함께 있네

옷걸이의 세상은 무덤이라도 좋아서

무덤이 닮고 옷걸이가 닮고 티셔츠가 닮고

우리의 불그죽죽한 영혼과 거죽과 입술과

그 무엇이라도 옷걸이에서 닮았네

문순태와 김준태와 작고한 조태일이 태로 닮았네

하나의 태로, 하나의 형태로 옷걸이에 걸려 있네

광주도 모스끄바도 평양도 서울도

정말 거짓말처럼 닮았네

광주의 옷걸이가 충장로의 옷걸이와

서울의 옷걸이가 남산의 옷걸이와 닮았네

얼마나 쾌청한 지평이었으면

옷걸이가 닮을까 세상이 휘뜩휘뜩

소멸할 듯 사라질 듯 서로 닮았네

얼마나 즐거운 지평이었으면

석양이 일출과 함께 지평에 걸리고

청바지와 가을과 고양이와 하늘이

연속극과 요절복통과 흔들리는 눈동자와

수많은 요동과 사랑과 이별이 모두

하나의 옷걸이에서 나부끼네

해탈과 해찰이 지들끼리 방실방실 함께 있네

아무런 감춤이 없고 아무런 숨김이 없네

무엇이라도 무엇이 되네

여럿이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네

 

정철훈, 살고 싶은 아침. 창작과비평사. 2000년.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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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꿈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3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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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이런 비평을 만나면 절망한다. '해설'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 대학교수들이 소설에 대해서 해설을 쓸 때 왜 그리도 현학적인지. 도무지 모를 말들을 나열하면 그것이 잘된 해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학자들이라서 그런 어려운 말들이 자신에게는 쉬운 말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해설이란 그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청준 소설은 결코 쉽지 않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해설'의 도움을 빌리려 하는데, 이 놈의 '해설'이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집의 경우를 보자. 이렇게 '해설'에 쓰여 있다.

 

... 이 소설집의 텍스트들은 대개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에 값한다. 1. 탈난 세계의 한계 억압 체증 양상의 재현 가능성. 2. 탈난 세계에서 탈난 개인의 탈의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의 재현 가능성. 3. 억압의 한계 체증과 탈억압의 한계 체감 사이의 대립 상황에서 소설의 한계 체험에 대한 반성적 질문의 유효성 등 셋이 바로 그것이다. (370쪽)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언뜻 물리학 법칙 같이 정리를 해서 간명해 보이기는 하나, 도무지 '한계 억압 체증'이라든지,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을 한번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면의 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문제의식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의미와 그 서사적 형상화 양상,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과의 새로운 비판적 대화 등이 이 소설집 독서의 핵심사다. (370쪽)

 

하여간 소설 속에 나타난 내용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파악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데, 여전히 어려운 말들이 나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또 한번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다. 자유롭기를 열망하는 개인을 억압하는 탈난 세계의 억압 기제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그 억압 기제는 허구적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억압의 구성적 상징은 어떤 서사 효과를 묘출하는가, 탈난 억압 현실에서 개인은 어떤 탈을 쓰게 되는가, 그 탈은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탈마저 억압되는 상황에서도 개인의 탈주는 가능한가, 이런 문제적 현실에서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꿈꾸고 재현할 수 있는가…… (370쪽)

 

'해설' 시작이 이렇다. 시작에서 어려운 말들이 다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현학적인 말들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다. '해설'의 앞부분도 좀 간결하고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이청준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표현방식이나 소재가 다양하기도 하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1960년대에서 70년대 창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보면 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 소설집 소설을 읽으며 몇 가지는 파악할 수가 있다.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책임은 개인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

 

첫소설 '굴레'에서부터 그렇게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개인이 그러한 굴레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굴레'를 비롯하여 오히려 제목을 굴레라고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가학성 훈련'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보너스'라는 소설. 이런 굴레에 속한 소설로 '가면의 꿈'과 '엑스트라'와 '들어보면 아시겠지만'을 들 수 있겠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성공가도를 달리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가면의 꿈'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굴레(짐)은 너무도 무거워 가면을 써야지만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가면도 쓰면 쓸수록 효용성이 떨어진다. 효용성이 덜어지는 가면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면의 꿈'

 

더 많은 소설들이 있지만, 남북관계를 의미하는 듯한 소설(새를 위한 악보 중 돌담 이야기)도 있고, 당시 비틀어진 사회 모습을 비판하는 소설 (새를 위한 악보 중 웃음 선생)도 읽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이청준 소설집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다. 결국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다. 그러니 해설에서 말한 탈난 세상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가 무어진 세상이라는 뜻이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청준 소설은 그런 세상에서 개인들이 굴레에 매여 있으며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확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

 

문제는 있는데, 그 문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궁리를 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청준 소설의 인물들이다.('배꼽을 주제로 한 변주곡'에서 이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청준 특유의 문체가 있어서 거기에 익숙해지면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편하게 읽을 수는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이청준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생각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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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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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다. 그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고른다. 소설을 멀리한 지는 꽤 되었고,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쩌면 드라마에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품들에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 자꾸만 빠져들어가게 되어서 결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

 

최근 소설들에서 요즘 삶의 모습들이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설을 읽으면서 삶을 거꾸로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 드라마 역시 소설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 둘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는 멀리하려고 하기도 하니...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번에 선정된 작품들은 내용이 다 달라서 어떤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소설에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는 작품집인데, 그럼에도 이토록 다양한 삶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중에 특별한 용어를 보고서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지돈이 쓴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소설인데, 작가 소개와 해설을 금정연의 소개에 '후장사실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후장 사실주의?'

 

사실주의니까 리얼리즘이라는 뜻인데, 후장은? 후장? 우리가 아는 장의 맨 뒤. 소위 직장 쪽인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정지돈, 금정연 등이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단다. '후장 사실주의'란 잡지도 냈다고 하는데, 읽어보기는커녕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2015년 시네21 인터뷰에 이런 글이 있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에 <눈먼 부엉이>가 당선돼 등단했을 때 정지돈이 쓴 당선소감엔 후장사실주의의 탄생설(!)이 나와 있다. “2012년 여름 오한기와 후장사실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통화 중에 우연히 나온 것으로 내가 후장사실주의를 결성하자고 말하자 오한기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후장사실주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의 패러디다.” 기성문단을 공격하고 기성질서를 파괴하길 서슴지 않았던 로베르토 볼라뇨가 20대 초반 초현실주의를 패러디해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를 결성했고, 정지돈과 오한기는 다시금 로베르토 볼라뇨의 말을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를 만들었다. 더불어 에 실린 정지돈의 글을 인용해 후장사실주의를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2409)

 

후장 사실주의?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사실주의에 똥침을! 정도로 하면 안 되겠나 싶다. 사실들은 사실들인데, 그것들을 어떤 논리적 관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배열하는 것. 그래서 사실적이기는 한데 도무지 사실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는 소설. 이 정도 아닐까?

 

이 수상작품집에 실린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보면 도시개발이 되기 시작하는 서울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 그런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지만, 소설은 기존의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여러 사실들이 나열되고 중첩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또는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낯선 느낌을 주는데, 그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이런 '낯섬'이 아닐까 한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에게는 낯선 존재이기만 한 관계들.

 

최은미의 '근린'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한 공간에 같은 시간에 모여 있지만, 이들은 육체적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들은 서로 닫혀 있다. 몸은 가깝고 마음은 먼 상태. 그래서 '근린'이라는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이 제목이 가까이 지내지만 서로 낯선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낯섬은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주인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 또는 사람들.(이장욱, 우리 모두의 정귀보.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한 집에서 지내더라도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열어보지 못하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지내야 함을 어느 가정에 보모로 들어가 지내는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손보미의 '임시 교사', 함께 지내더라도 이해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윤이형의 '루카'. 그리고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

 

일곱 편의 소설들이 각기 다른 내용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 다른 삶들을 엿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역할을 하게 하지만, 공통적으로 현대인들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가깝지만 결코 가깝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새로운 용어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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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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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니 온당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그것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혐오 표현, 혐오 행동을 세계적으로 범죄로 취급하고 있는데,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 역시 혐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강하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걸핏하면 미국을 본받자고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시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차별받는, 혐오당하는 존재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흑백 분리가 철폐되었지만 현실에서 흑인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주변부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백인의 폭력에 희생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놓고 흑인을 폭행하는 백인 경찰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대다수의 흑인이 사는 동네는 할렘이다. 도시에서 공동화된 곳. 그곳에는 마약과 폭력이 넘쳐난다. 백인들은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미국 흑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들이 그런 삶을 원하겠는가. 원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볼드윈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프고, 그가 외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글. 두 편 모두 흑인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흑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주장들이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씁쓸하지만, 이 주장을 피부색에만 적용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면 '혐오 표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조카에게 쓴 편지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백인처럼 되려고 애쓸 까닭은 없다. 그들이 너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가정에는 근거가 없다. 내 오랜 친구야, 정말 끔찍한 사실은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아주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너는 그들을 받아들이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으므로. 과연 그들은 아직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있고, 그 역사를 이해하기 전에는 덫에서 풀려날 수 없다. (27쪽)

 

늘 강자로 살아온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주변에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들만이 있을 뿐이므로.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볼드윈이 조카에게 백인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르고 있음으로. 아는 네가 우위에 있는 것이므로. 너는 더 잃을 것도 없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길도 흑인들에게는 험난한 길임을 조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자(백인이다. 문맥상 보면)들은 네 형제들이다. 네가 잃어버린 어린 형제들이다. 만약 <통합>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다면 이런 뜻일 테다. 우리 형제들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 도피를 그만두고, 현실을 바꾸기 시작하도록 우리가 사랑으로 강요해야 한다는 것. (28-28쪽)

 

그런데 백인들은 여전히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그들 주변은 왜곡되어 있다.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흑인이다. 그 짐을 흑인들이 기꺼이 져야 한다고 볼드윈은 말한다.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흑인들만의 나라를 미국에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의 권리 향상이 이루어진 것도 흑인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이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백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이 나온 지 60년이 되어가는 지금 미국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이 책에서 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몇몇 내용을 인용한다.

 

교회에는 진실로 사랑이 없었다. 증오와 자기혐오와 절망을 가리는 가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성령의 거룩한 힘은 예배와 함께 끝났고, 구원은 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나는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은 신을 믿는 <우리>에게만 해당되었고, 백인에게는 전연 해당 사항이 없었다. (66쪽)

 

대학을 나와도 버젓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던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기 흑인 민권운동에서 목사들이 많았던 이유라고 한다. 볼드윈 역시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 점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도 볼드윈의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명심해야 할 말이다.

 

예속된 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미개척의 힘과 마주하기 위하여, 도덕적 무게를 지니고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재 신성시되는 것에서 풀려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과 고뇌와 범죄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해 온 대부분의 전제를 버리는 것이다. (72쪽)

 

그들의 조상이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들이었다는 미신, 그들이 최고로 위대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전시에는 무적이고 평시에는 현명했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멕시코인과 인디언과 다른 이웃이나 약자들을 언제나 명예롭게 대했다는 미신, 미국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력적이며 미국 여성들은 순수하다는 미신. 니그로들은 그런 미신을 믿기에는 백인 미국인들을 너무나 잘 안다. (140쪽)

 

자신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자신을 걸 수 없는 사람은 단순히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미합중국은 니그로에게 자유를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적이 없었다. (122쪽)  

 

이런 백인에게 흑인들의 처지를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서로를 증오에 빠뜨리는 폭력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의 방법으로. 볼드윈의 이 말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분쟁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살 수 없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잃을 것 없는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든 제일 위험한 피조물인 이유다. 그런 사람이 열 명이나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 명이면 족하다. (109쪽)

 

자신의 상태를 견딜 수 없지만 심한 억압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꿀 능력도 없는 사람은 항상 부도덕한 권력자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126쪽)

 

백인이 해방되는 대가는 도시와 시골, 법 앞과 정신 속에서 흑인이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134쪽)

 

증오를 쏟아부으며 당신의 목을 짓밟는 자를 마주 증오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영적 회복력이 필요하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증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큰 기적에 가까운 통찰과 관용이 필요하다. (138쪽)

 

유한한 지구다. 우주 역시 무한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일 뿐, 우주 역시 유한하다. 그렇다면 유한한 공간에서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면 좋지 않겠는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가 다른 존재들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부색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름도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됨을 다시금 생각하는 글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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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28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으려고
빌려 놓았는데 아직도 민기적거리고
있네요.

최근 위스콘신에서 또다시 총에 맞은
세 아이의 아버지 뉴스에 충격을 받았
습니다...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합니다.

kinye91 2020-08-29 09:50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경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안타까워요. 어떤 형태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
 
파우스트 박사 2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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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서...

 

1권의 막바지에 악마와 계약하는 장면이 레버퀸의 글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이에 레버퀸은 이제 대단한 작품을 낼 것이며, 사람들은 열광에 빠질 것이고, 그는 정점에 올랐다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이런 예상에 맞게 소설은 전개된다. 다만, 레버퀸이 급작스레 죽지는 않는다. 레버퀸은 치매 상태에 빠진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 과정까지에는 두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악마와 계약할 때 레버퀸에게 금지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순간 그는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두 죽음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레버퀸이 정점에서 몰락하는데 일조하는 죽음이다. 소설 속 화자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슈베르트페거와 조카 네포무크. 결국 이 두 죽음은 그를 치매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파멸의 과정을 2권에서 풀어가고 있다.

 

이런 줄거리, 대부분 유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줄거리로 괴테라는 유럽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이미 쓴 파우스트 이야기를 또 쓴다는 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레버퀸이라는 천재 음악가를 통해 토마스 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뭘까? 그게 소설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계속 해야 할 질문이다.

 

이 책 작품해설에서 번역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작품만큼 난해한 작품이 없다고. 그래서 작가인 토마스 만도 이 작품을 이렇게 읽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토마스 만 자신도 이 소설의 난해성을 의식했는지 한 가지 독법을 추천했는데,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독해서 전체적인 개요를 조망하고, 작품의 결말을 다 아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기를 권했다. 시간이 있는 독자들은 그렇게 읽는 방법이 최선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음악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에서 비교적 길게 언급되는 다양한 음악 작품의 해당 부분들을 직접 들으면서 소설을 읽어 나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528쪽)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기도 힘든 이 작품을 두번 세번 읽을 독자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긴 소설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한 방법. 시대와의 관련성을 찾아보는 것.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전개를 연결짓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을 너무도 도식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고, 작가의 논설로 읽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망명기의 토마스 만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해 온 문명국가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 정권과 같은 극단적인 야만 세력이 등장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나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반인간적 핼위를 자행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토마스 만은 바로 이 문제와 정면 대결하기 위해 근현대 독일 정신의 전통과 독일인의 정체성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집필을 결심했다. (510쪽)

 

그러나 이것은 창작동기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독일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서술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꼭 작가가 말하고 있는 창작동기와 연관지어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해설을 작품에 도입하면 작품은 레버퀸은 독일이고, 독일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국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한때 성공했지만, 결국 파멸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도식 사이사이에 있는 많은 은유들, 표현들, 등장인물들의 갈등 등을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때는 작가가 제시한 읽기 방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줄거리는 다 안다. 결말도 안다. 이것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이미 '파우스트 이야기'에 내재되어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그 결말을 내기 위해서 중간중간에 작가가 어떤 장치를 했는지 그것을 찾는 읽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

 

우선 이 소설은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거기다 온갖 음악 지식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곳곳에 숨어 있는 독일적인, 또는 유럽적인 비유,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을 꿰고 있어야만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난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난해한 작품이지만 '파우스트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꿈꾸기에 이런 이야기가 계속 우리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야기가 말해주고 있다.

 

이는 한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한계 내에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소설의 주인공인 레버퀸이 대단한 작품을 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작품을 내기 위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극심한 두통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인간적인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생각해 보라. 잠시 동안의 성공. 그러나 그 성공이 독일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가.

 

작품을 얻는 대가로 레버퀸이 밝은 세상을 잃고 심한 두통을 얻었듯이, 독일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던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치매 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 빠진 레버퀸이 치뤄내야 할 결과는 그가 악마과 계약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던 결과. 그 결과는 결코 행복일 수가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 결국 우리가 무리하게 추구하는 일이 사랑과 행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레버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길고 난해한 작품이지만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겠단 생각을 버리고 그냥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면 읽을 만하다. 그 다음에 더 생각나면 천천히 읽으면서 더 많은 이해를 추구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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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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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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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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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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