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 - 교육사회학 관점
성열관 지음 / 학이시습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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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학교 교실의 모습이 떠오른다. 눈을 초롱초롱 뜨고 교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거나, 딴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엎드려 자는 아이들의 모습만 떠오른다.


상록수에서 영신이 일제의 탄압으로 교실에서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의 인원수를 제한하자, 창문에 매달려 공부하겠다고 애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이상 없다. 어쩌면 사토 마나부의 말처럼 배움으로부터 탈주하는 아이들이 많아진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책임을 학생들에게 지울 수 있을까? 학생들 개인의 심리적 요인으로, 의지박약으로, 성취 의욕의 상실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일이다.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하다. 너희들의 의지 문제야! 하려고만 해봐, 다 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기는 쉽다. 말하기는 쉽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 교육에 관계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를 담당하고 있는 기성세대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다.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당신들 책임이야 라고.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다.


교육은 한 학생도 소외됨 없이 모든 학생들이 잘 배울 권리를 보장하는 공공의 책임이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소외되는 학생들이 있다면 그것은 인권이나 교육권 측면에서 큰 훼손이다. 그러므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소외는 것은 전적으로 공교육의 책임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수업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의식적 회복 노력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단지 활성화된 수업에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 수업 소외를 인권, 사회정의, 인정, 권리 옹호의 문제로 인식하고 수업 자체가 평등의 잠재적 교육과정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 언제나 수업을 바꾸려는 행위는 변별 시스템으로서 학교를 바라보는 사회와 대결을 벌이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358쪽)


책임이 학생에게 있지 않고 공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니 사회를 이끌어간다고 하는 기성세대들에게 있음을 명확히 한 것에 이 책의 장점이 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는 것은 기존의 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예측불가능의 세계에서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학습량이나 학업 목표때문에 자연스레 소외된다는 것이다.


그런 소외를 막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는가에 대해서 번스타인의 이론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는 앞부분에 이어,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우리나라 교육 현장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교육이 이런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번스타인의 이론에서 학업에 대한 질서와 생활에 대한 질서로 학교가 운영된다고 하는데, 둘 다 잘하는 학생을 '성실'의 분류 항목에, 학업 성취는 어느 정도 이루지만 생활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을 '분리'에, 생활 질서에는 적응하지만 학업 성취에는 부족한 학생을 '간극'에, 그리고 둘 다 안 되는 학생을 '소외'라는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분류의 장점은 수업을 재조직할 때 고려할 사항을 찾기 쉽다는 것이다.(그만큼 분류는 문제를 단순하게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그래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런 단순화는 문제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왜 학생들이 생활 질서에, 또는 학업 성취에 문제를 보일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책임을 학생에게 묻게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번스타인 이론이 지닌 장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의 저자인 성열관은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당연이 당연이 되지 않음이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교육이었으니...


교실사회학적 관점 취하기

모두가 존엄한 사회를 위해 모두가 존엄한 수업을 운영하기

국가교육과정 난도를 낮추기

1교시에서 6교시까지 협력의 매개로 수업하기

절대평가를 중심에 놓기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에서 데모크라시(민주주의)로 전환하기


이 여섯 가지를 보면 학생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교육관료들이나 교사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즉,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교육관료, 교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단지 교육 분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선적인 책임은 교육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져야 한다. 이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문제를 사회에 자꾸 제기해야 할 책임은 바로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사들은 어느 정도는 수업 시간에 자는 책임이 학생에게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는 학생들을 대할 때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고. 또 그런 학생들이 수업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협력 수업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혁신학교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


다만, 교사들 역시 교육이라는 큰 체제에서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교육관료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그대로 통보하는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저자가 제안한 여섯 가지가 요원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메리토크라시가 판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런 제안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당연하지 않게도 하지 않고 있는, 이런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려고 하지도 않는 관료들. 교사들이 혁신학교 운동으로 수업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을 막기 위한 노력은 전체 틀을 바꾸지 않는 한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결코 학생들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기성세대 책임이다. 그러니 기성세대가 책임지고 한 학생도 소외되지 않는 교육이 되도록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이 시급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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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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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프롤로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이 아마도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을 테고, 또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명심하고 살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 역시 이 말을 아무런 생각없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가 있던 날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 장소를 급하게 큰 곳으로 바꿔가며 열린 토론회였다. 토론자로 함께한 나는 토론 중에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 결단을 내리자는 말을 하던 와중이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참석자 중 한분이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5쪽)

 

정말로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이다. 자신이 잘 결정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을 향해 양해를 구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장애'다. '장애'라는 말은 '장애인'과 곧바로 연결되고, 이는 곧 무언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쓰인다.

 

결정장애가 있다는 말이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해서 쓰이는 말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도 이 말에는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 쓴 사람은 혐오표현이 아니라라고 강변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혐오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자리에서 잘못을 시인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차별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일어나는 차별이 얼마나 있을까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다. 우리 모두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는 말도 한다. 그만큼 우리들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런 선량한 사람들이 의식없이 차별을 한다. 혐오표현을 한다. 그런 상황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차별인지도 모르고 차별을 행하면서 자신은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소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설 자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 다들 그게 왜? 라고 되묻기 때문이다.

 

하여 책 제목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적확한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선량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남에게도 가급적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줄 때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이 혐오표현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줄 때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언제든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받은 차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차별을 받는 사람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지만 차별을 하는 사람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많은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그때그때 다른 자리가 된다.

 

다른 자리, 다른 때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말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수가 옳다고 해서 꼭 옳은 것도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혐오표현을 벗어나는 데에 있어선.

 

지금도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표현이 '남자가? 여자라?'라는 표현이다. 이는 어떤 행동을 특정한 성에 고정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 자체가 차별을 조장하는 불평등한 표현인데,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 표현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공감을 얻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완고한 입장이 대세다. 이들은 여전히 설 자리가 매우 좁다. 이 책에서도 다뤄주고 있지만, 자신들의 축제를 여는 데도 수많은 방해를 이겨내야 한다. 그게 방해가 아니라 폭력임을, 불법행위임을 인식시켜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제정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갈 길이 멀다.

 

이 책은 이러한 차별을 3부에 걸쳐 다루고 있다. 1부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이라고 해서, 자신의 시야에 갇혀 차별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다루고 있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이 살아온 날들 속에서 형성된 생각들이 차별에 해당함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을 고찰하는 것이 바로 2부다.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공정함 속에 담겨 있는 차별, 배제 속에 담겨 있는 차별. 우리라는 말 속에 얼마나 심한 배제가 담겨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다름을 차별로 이어가는 모습들.

 

삶 속에 스며들어 인식하지도 못하는 차별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금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2부에서 만날 수 있다.

 

3부는 그렇다면 어떻게 차별을 극복할 것인가다.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

 

  형식적 평등은 가장 기본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조치가 될 수 없다.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불평등한 조건과 다양성이 고려되는 적극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 적극적 조치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불이익을 받는 집단을 위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할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적극적 조치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201쪽)

 

자, 이제는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모든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차별이 없어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책에 나온 내용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이 일화에서 깨달을 수 있다. 역으로 이 일화를 통해서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함을, 더욱 민감한 감성을 지녀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전세계의 사회복지 학자와 현장 활동가들이 모인 세계사회복지대회라는 대규모 행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규모에 걸맞게 개막식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축사 도중, 장애인 활동가 10여명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장애인 등급제를 폐지하라!"고 외치며 기습시위를 했다. 휠체어에 탄 활동가들이 보건복지부 장관이 축사를 하고 있는 단상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경호원들은 활동가들의 사지를 들어 휠체어에서 분리하고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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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5 -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과 미술 : 갈등하는 인간이 세계를 바꾸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5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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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이다. 르네상스 미술이라고 하지만, 이 권에서는 주로 이탈리아 미술을 다룬다. 물론 이탈리아 미술이라고 하기엔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가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르네상스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했다고, 이탈리아 미술이라고 통칭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국가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도 우리가 알고 있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이 책은 서술되고 있다. 피렌체, 밀라노, 우르비노, 만토바 등등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미술이 발달하는 모습을 이 책에 담아내고 있다.

 

중세 미술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성당 건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당 건축이라는 외관뿐이 아니라 성당 안에 있는 여러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에게 미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역사를 알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들의 작품도 한번쯤은 본 것이 많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럼에도 이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테의 [신곡]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

 

문학과 미술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당대 미술가들이 단테가 쓴 [신곡]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게다가 가톨릭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신앙을 문학으로 표현한 그 작품은 너무도 친숙한 소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르네상스가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발흥했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반대로 당대는 너무도 격심한 변동기였음을, 또한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살기 힘들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종교와 예술이다. 그리고 당시는 종교와 예술이 한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음을, 이 시기의 성당 건축과 미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 상업을 주로 하는 부자들의 등장. 그 부자들이 권력까지 장악해 가는 과정. 그런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에만 머무른다면, 어떻게 예술을 후원하고, 또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치로 예술을 이용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소위 패트론이라고 예술가를 후원하기도 하고, 또 예술작품을 통해서 상업으로 돈을 벌었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특히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자신들의 상징으로 동방박사의 경배를 들었다는 것. 아마도 동방박사들이 상인이었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성경에서 상인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장면을 찾아 자신들을 합리화해야 하는데, 그 장면을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찾았다는 것. 이렇게 이때부터는 이제 부의 축적이 죄가 되지 않음을 그 시대에 나온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용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선 제단화라고 많이 언급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을, 천주교에서는 제단이라고 하지 않고 제대라고 한다고. 그래서 '제대화'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또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음을 천사로부터 전해 듣는 장면을 '수태고지'라는 이름의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성모희보'라고 한다. 이처럼 다른 용어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사진으로 많은 건축과 그림들, 조각들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직접 본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눈도 호강하는 책읽기다.

 

6권으로 가면 이제는 이탈리아를 벗어나는 르네상스 미술을 다룬다고 한다. 이제 미술도, 역사도 근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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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4 - 중세 문명과 미술 : 지상에 천국을 훔쳐오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4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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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권은 중세 시대 미술이다. 미술이라고 해도 주로 성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세를 아우르는 종교는 기독교이고, 성당을 중심으로 미술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시기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로마네스크 미술, 노르만 미술, 고딕 미술이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미술을 따라하려 했던 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 미술이 워낙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데에 기인하기도 한다.

 

또한 이 때 유럽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발달된 지역이 아니다. 오히려 변방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이런 유럽이 서서히 미술에서도 중심으로 떠오르는 때가 바로 중세시대인 것이다.

 

로마네스크 미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지 순례다. 성지 순례 길을 중심으로 성당이 건축되었으며, 그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졌다는 것.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산티아고 길'은 이때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는 가운데, 이런 성지 순례를 통해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황제와 교황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서로가 더 웅장한 성당을 지으려고 했던 것에서도 성당 건축이 활발해진다고 한다.

 

이 시대가 지나면서 북쪽에 있던 바이킹들이 내려와 노르만족으로 정착하면서 유럽에 자신들의 미술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시대가 된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동방의 뛰어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고,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미술 역시 새로운 면모를 띠게 된다고 한다.

 

그것을 노르만 미술로 정리하고, 이어서 고딕 미술로 정착이 된다. 지금도 고딕 성당하면 웅장함이 먼저 떠오르는데, 두 가지 면에서 고딕은 웅장하다고 한다. 우선 규모가 웅장하고, 성당 안의 색채의 화려함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여기에 소리의 웅장함까지 담보하고 있다고 한다.

 

고딕하면 그런 웅장함, 또는 뾰족뾰족함을 연상하는데, 고딕이 되는 조건이 세 가지라고 한다.

첨두 아치(뾰족한 아치), 늑골 궁륭(갈비뼈 구조의 둥근 천장). 플라잉 버트레스(공중 부벽)을 갖춰야 고딕 건축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모두 건물을 높이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첨두 아치로 인해 가해지는 압력에 더 잘 견딜 수 있었으며, 늑골 궁륭과 공중 부벽때문에 벽체에 가해지는 하중을 견뎌 건물을 더 높이 올릴 수 있었다는 것.

 

이렇게 시대가 흘러가면서 건축 양식도 변모했다고 한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4권인데, 유럽의 성당이 어떤 형태로 변모해 왔는가를 유럽 역사와 더불어 잘 알게 해주고 있다.

 

이런 성당 건축에 함께 들어가는 스테인드글래스와 기둥이나 입구에 새겨진 조각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권이 거듭할수록 아쉬운 점은 동양 미술이나 이슬람 미술에 대해서 서양 미술과 관련이 있는 것만 짧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동양 미술도 화려하게 꽃피웠을 텐데... 조금 방대하더라도 함께 다뤄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를 통해서 미술을 늘 서양 중심으로 공부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쓴 미술 이야기 책에서도 거의 대부분을 서양 미술사에 대한 언급만 있으니 좀 씁쓸하다. 1권에서는 그래도 균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서양 미술에 대해서는 자세히, 그것도 쉽고도 흥미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그 점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동양 미술사나 이슬람 미술사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통해서 알아가기로 하고... 다음은 5권이다.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간다. 우리가 르네상스는 워낙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가. 이제 5권에서 그 르네상스 시기 미술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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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3 - 초기 기독교 문명과 미술 : 더 이상 인간은 외롭지 않았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3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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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권은 초기 기독교 문명과 미술이다. 종교와 미술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 3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얼핏 보면 그리스-로마 미술에서 퇴보한 것처럼 보이는 초기 기독교 미술이 나름대로의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 미술이 시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세 중심의 로마가 몰락하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할 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종교다. 바로 현세가 아닌 내세를 추구하게 된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가려진 인체를 표현하고, 화려한 기법보다는 수수한 기법이 나타나는 때. 그래서 미술이 퇴보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그 사회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점차 민중들에게 다가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 3권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미술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 3권은 그 중에서도 초기 기독교를 다루고 있다. 로마가 망해갈 때 나타나는 미술. 도상에 대한 논쟁. 그래서 도상을 중시하는 쪽과 도상을 부정하는 쪽으로 기독교가 갈리고, 이때 많은 성상이나 기됵교 성화들이 파괴되기도 했다는 것.

 

그럼에도 변방에 세워진 수도원을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 이처럼 초기 기독교 미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성당(교회) 건축(미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탄압받던 종교에서 이제는 공식적인 종교로 공인되었고, 국교가

된 기독교에서는 자신들이 예배를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으리라.

 

기존 그리스-로마 신전은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았기에 그에 걸맞는 건물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초기 기독교 교회들이고,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다.

 

그 웅장함이나 건축적 아름다움이 지금도 명성을 얻고 있는 그 성당을 정점으로 초기 기독교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왜 퇴보한 듯이 보이는 미술이 등장했는지를 이 책을 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시도했던 것이 현대 미술에서 다시 나타난다고 하니, 미술은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4권이다. 이제는 본격적인 중세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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