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살 때, 사실 시집에서 몇 편의 시를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 한 시라도 마음에 꽂히면 좋고, 그런 시가 없더라고 어느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꽂히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언어는 언어끼리 모여 형태를 이루고, 그 형태가 온전하게 내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언어 자체만으로도 다가올 때가 있다. 시란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데 정답이 있을 리가 없고, 시집을 사는 데도 정답이 있을 수가 없다. 그냥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사면 되고, 읽으면 된다. 비록 머리 속에 남아 았지 않더라도 읽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을 테니까.


  이 시집은 제목을 보고 샀다. 제목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착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텐데... 어쩌면 옛말에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이 제목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왜 욕을 먹으면 오래 살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욕을 먹는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감정을 헤아리는 섬세한 감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편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들은 오래 살 수밖에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특히 남이 욕을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순간 순간마다 마음 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음을 쓴다는 것, 자신의 마음을 다른 존재에게 내어준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화수분이면 좋겠는데, 이게 어느 순간 고갈되고 만다. 고갈되었을 때,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는 이 시집의 제목이 마음에 와닿을 수밖에. 아직 착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그렇지만 착한 사람이고 싶기에.


어떤 시에서 이 구절이 나왔을까 시집을 첫시부터 주욱 읽어가다. 이번 목표는 이 구절이 나온 시를 찾는 것이다. 읽다읽다 드디어 찾았다. '보리밭 놀이방'이라는 시다.


보리밭 놀이방


  보리밭에는 종달새가 살고, 종달새의 영혼은 나에게 날아왔다. 내가 갖고 놀다가 깨트려버린 알에서는 노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영혼은 그 흐느낌처럼 남아서 나를 둘러싼다. 점막의 세월 속에 바람이 분다. 가끔은 내 장난감이 되어준 돌멩이와 달팽이와 지렁이 들이 아직 꿈틀댄다. 나는 변하지 않았나. 착한 벌레에서 착한 사람으로


  거인들이 밭에 씨를 뿌릴 때, 나는 보리밭에서 자랐다. 해 질 녘 거인들은 기도를 하고 어린 나를 들어 올려 집으로 데려갔다. 거인과 헤어지게 된 건 보리가 자라서 익고 베어낸 후의 쓸쓸한 들판을 본 후였다. 텅 빈 속을 드러낸 채 굴러다니던 새의 알, 달팽이의 집, 말라비트러진 지렁이들. 그들의 영혼을 채워 목이 붓도록 펑펑 울 수 있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 내 손에서 예쁘게 잠자고 있던 종달새의 알, 긴 촉수를 뻗어 나를 핥던 달팽이의 혀, 기어간 자리마다 흘려놓은 지렁이의 눈물. 나는 사라져버린 파문을 움켜쥐고 생각에 빠졌다. 내 머리에 그렁그렁 울 것 같은 구름모자를 누가 씌워주었다.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나.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힘없는 사람이 되는 건 더 두렵다. 어린 시절처럼 보리밭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한다. 보리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놀던 시절. 뜻밖에도 내 눈동자에서 부화한 새가 날아가기도 한다. 아직 깨지지 않았나. 구름과 새. 아직 헤어지지 않았나.


박서영,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2019년. 70-71쪽.


어쩌면 나이 들어가면서 잃은 것. 그것은 조화로운 삶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 물론 이 세상에서도 약육강식은 존재한다. 한 생명은 다른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른 생명들을 타자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들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파괴가 일어난다. 이제는 옛것들과 이별한다. 옛것들과 이별하지 못하면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난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착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에, 이들이 있기에 아직은 세상은 살 만하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지만,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 시에 나와 있는 말 중에 '뜻밖에도'란 말처럼, 그렇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세상은 아직도 더 많은 착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직 다른 생명들과 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시인이 '뜻밖에도'라고 한 말에서 가능성을 본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무섭지만, 그렇다고 착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다. 


이러니 누가 뭐래 해도 아직 이 세상에서 '뜻밖에도' 우리는 이런 착한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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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20년 2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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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산문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제목이 된 구절은 '고아'란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고아'란 말에 부모가 없다는 뜻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고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다보면 우리들 삶이 어쩌면 고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그것도 너무도 급격하게 과거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단절된 현대인들의 삶이 바로 고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인데...예전에 자연과 더불어 지내던 삶에서 자연과 완전히 단절된 삶도 모자라, 이제는 멀쩡한 자연까지 죽이는 일을 하는 정치권들의 모습에서 '고아'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이 개발될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불도저라 불리던 김현욱과 건축가 김중업이 쓴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우리 사회는 김현욱의 주장처럼 변해왔고, 그에 따라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갈 때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함께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더욱 달라질 수가 없다. 아니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더욱 안 좋은 쪽으로. 우리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그래서 제목 뒤에 따라오는 글이 더 중요하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157쪽)

 

이렇듯 이 산문집은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많다. 글들이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으로 내려온다. 마음에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이게 바로 글의 힘이다.

 

제목을 약간 비틀면,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읽는 인간의 탄생은 주체적 인간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고, 이때 주체적이란 말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박준 산문집을 읽으며 이 제목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으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로 뒤에 오는 말과 함께 해야 한다.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 '같이 읽으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이 될 수 있다.

 

'고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이것은 바로 운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런 공감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고아'란 글을 포함해 많은 글들이 이렇게 마음에 들어온다.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이 들고, 글을 통해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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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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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슬픔, 분노. 어찌 세상이 이토록 나아지지 않는지.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데, 노동으로 삶을 잃어야 하다니.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이 과로로 숨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경제력이 세계 몇 위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나라에서, 그 나라를 지탱하게 해주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노동으로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잃고 있는 현실.

 

택배 노동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도 닥친 일이다. 이들은 고3이 되면 현장학습을 나간다. 노동과 학습이 연계된 활동. 예전에는 노동자 대우를 받아 월급을 받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실습 명목으로 월급이 아닌 수당만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들에게 가해지는 노동강도가 너무 세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학교는 학교대로 취업률로 지원을 받으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학생들에게 쉽게 학교로 돌아오라고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부모들 또한 마찬가지다. 다 그런 거지 뭐, 라는 말을 하면서 참으라고 한다.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극단적인 길이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특성화고 출신 사람들이 많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이 개인 탓인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 보라.

 

무언가 결핍이 있는 학생이 특성화고에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어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 받아서는 안된다. 특성화고는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아이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이런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고, 또 그들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토대를 마련해 줘야 한다.

 

토대도 마련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 이들이 학교와 사회 양쪽에 걸쳐 있다고 어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 상황을 고쳐야 한다. 적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지은이는 제목을 이렇게 붙였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알려고 하지 않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제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존재하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여전히 학력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특성화고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오히려 이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들도 엄연히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임을,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함을.

 

특성화고 출신들이 모여 노조를 만들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자신의 전공과는 동떨어진 취업을 많이 하고 있음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겪고 있는 차별들에 대해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결국 알려고 하지 않는 아이의 죽음일 것이다. 이대로 우리가 계속 외면한다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제는 더이상 이런 아픔이 일어나지 않게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부끄러웠다. 나 역시 알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의 죽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살려고 하는 노동, 정말 살게 하는 노동이어야 한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노동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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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21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긴 하지만,,,,평생 주부로 사셨던 엄마는 항상 저에게 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자연스레 커서 언제가는 나도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한국을 떠난지 10년이 넘어서)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자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어요. 극단적인 육체노동정도만이. ˝노동˝이라는 생각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동의 신성한 가치와 다양한 종류로 이루어진 노동에 대한 바른 인식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20-10-21 08:44   좋아요 0 | URL
‘노동‘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예전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노동이고, 그러한 노동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요.
 
미래는 오지 않는다 - 과학기술은 어떻게 미래를 독점하는가
전치형.홍성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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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미래(未來)'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한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다'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판치는 이 시대에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그것도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런 주제로 책을 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지금은 과학기술의 시대고, 과학기술이 미래를 이끌 거라는 것에 의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부터 시작하여 나노기술 등등. 과학기술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장미빛 환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미래를 디스토피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책 표지에는 또다른 말이 있다. '과학기술은 어떻게 미래를 독점하는가'라는 이 말을 통해 저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과학기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미래를 완전히 예측하고 이끌어서 우리에게 가져올 거라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어, 과학기술에 비판적이지 않은 현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빠져, 모든 문제를 과학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렇게 호도해 가는 집단들이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과학기술에서 일어난 예측들이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니 예측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예측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기술도 의도한 바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 조건들이 융합되어 있는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은 늘 상반되는 주장을 한 집단들이 서로 자신들이 한 예측이 맞았다는 주장을 하게 하기도 한다. 그만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인 것이다.


이렇게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제목을 달고 책을 낸 이유가 무엇일까? 미래 예측이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은 현재만 살지 않는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이유는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함께 끌어들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된다. 그러니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미래가 온 순간, 미래는 현재가 되어 버리고,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일방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일은 문제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미래를 독점하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보자.


... 이 책의 제목은 요즘 미래 담론에서 흔히 보이는 확신, 즉 미래를 곧 일어나고야 말 객관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주관성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이 책은 미래를 하나의 담론, 즉 해석과 비판과 논쟁이 필요한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들은 데이터만이 아니라 세계관과 이념을 담고 있으며, 서로 주도권을 놓고 경합합니다. 그러므로 각종 미래상에 대한 꼼꼼한 독해가 필요합니다. (8쪽)


...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우선 우리의 미래 담론이 과학기술 중심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오늘날의 미래 담론은 과학기술이 거의 독점하고 있습니다. (8쪽)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또한 우리가 과학기술의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는 데 그다지 유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 과학기술은 그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경로와 방식으로 성공하거나,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이유 때문에 실패합니다. (9쪽)


"미래는 오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통해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미래에 대해 말할 때 사실 우리는 현재를 놓고 다투고 있다는 점입니다. (10쪽)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람과 집단은 모두 특정한 종류의 과학기술과 특정한 형태의 사회를 옹호하고 그러한 방향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11쪽)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과학기술이 또는 과학자들의 예측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됨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읽으면서 예전에 월드컵에서 승자를 예측했던 문어 파울이 떠올랐는데,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의 예측 결과가 침팬지의 예측 결과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수긍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은 끝부분에서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고 꿈꾸는 것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야 미래를 꿈꾸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미래 예측은 CEO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현재와 불편한 미래를 포용하면서도 희망을 키우고 연대를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실천을 위한 미래 시나리오 작업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대한 이런 상상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면서, 현재 삶과 노력에 의미를 더해줍니다.

  우리는 미래 예측에 홀리는 대신에 바람직한 미래사회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나눠야 합니다. 이런 얘기는 우리가 걸어온 역사에 대한 고민과 성찰에 근거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토론과 협의를 반영해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과학기술이 열어주거나 미래학이 예측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04쪽)

 


서문에서 한 말이 끝부분에서 다시 정리되고 있다. 우리의 미래를 특정인들의 담론에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 미래는 우리 모두가 참여하면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이들의 말을 명심하자.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양상들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단지 과학기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도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오히려  인문학이 더욱 필요함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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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6 - 초기 자본주의와 르네상스의 확산 : 시장이 인간과 미술을 움직이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6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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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자본주의와 르네상스의 확산을 다루고 있는 6권이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유럽으로 확산되는 시기. 플랑드르라고 하는 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에서 미술이 화려하게 꽃피우는 시기. 다시 이들과 이탈리아가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역사와 관련지어 미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플랑드르에서 미술이 발달하게 된 것은 상업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다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도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미술이 발달하고.

 

특히 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술이 변모해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유화다. 유화로 인해 회화가 더 화려해지고 깊어졌음을 이 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화가는 뒤러다. 그를 통해서 화가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지니는 개인이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이 융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이 역사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유럽에서는 종교와 관련이 있던 미술이 이제는 상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쪽으로 변모해 감을, 그리고 이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화가라는 직업이 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벽화 중심의 회화에서, 나무 패널에 그리던 방식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변모해가고, 또 기술의 발전으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이 등장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뒤러의 경우를 통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복제하는 일이 생겨났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저작권법과 비슷한 행위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근대 예술의 모습이 이때 등장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림이 이제는 이익을 남기는 행위가 될 수 있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그런 시대의 변모를 잘 읽은 사람이 뒤러라는 것, 근대적 화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근대 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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