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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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많을까? 그다지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하루하루의 생활에 빠져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삭막한 삶이라고 할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름다움도 우리들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듯이, 삶에 여유가 없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들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살아간다는 말보다 살아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삶이 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느끼는 삶은 우리들에게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 말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심미안 수업이라고 하지만 딱히 어떤 비결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우선은 경험해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경험이 아니라 두번 세번 네번 반복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꾸 경험해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식만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장소성이 중요하다. 어느 장소에서 경험하느냐가 중요하다.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분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국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국악 하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기는데, 국악을 직접 현장에서 들었을 때 그것도 한옥에서 하는 공연을 보았을 때국악이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 이것은 바로 그 장소와 아 름다움이 접목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책으로 아무리 보아도,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미술관에 가서 또는 전시회에 가서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 자신의 눈으로 현장에서 봤을 때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건축의 경우에는 이런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건물에서는 데이트가 잘 된다는 말. 좋은 건물이 내뿜는 그 무엇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이에 사람들이 있을 때와 추한 것들 사이에 있을 때 사람들 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품들에서도 이러한 아름다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 하는 역할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자신의 외부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선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자신의 삶에 여유를 두어야 한다. 삶의 여백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러니 심미안을 기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책임을 두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개인이 삶에 여백을 둘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여백을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채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 도처에 있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심미안이 길러질 수 있다.

 

이 책, 심미안 수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지만, 사회 역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서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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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 - 임승수의 방구석 경제수업
임승수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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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질문을 한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 그러면 공산주의요! 하는 대답이 곧장 들려온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일텐데, 또는 전체주의일텐데, 쉽게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고 말을 한다. 같은 층위에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데 말이다.

 

여기에 분단된 나라에서 살다보니 우리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었던 나라에서, 공안 검사들이 꽤 힘을 발휘했던 나라에서, 지금도 종북이라는 말이 상대를 옭아매는데 더없이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상대가 되는 체제는 자본주의다. 이렇게 개념을 명확하게 해야 논쟁이 된다.

 

이념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어떤 체제가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나를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좀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상대를 억압하고 억누르고 없애기 위해서 하는 토론이 아니라.

 

따라서 이 책은 소중하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들 개념을 정리해주고 있고, 왜 이런 체제를 옹호하는지를 두 인물을 통해서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소유와 오평등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장점과 단점, 사회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짚어주고 있다. 두 체제가 완벽하지 않다. 세상에 완벽한 체제는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삶에 유리한 쪽으로 체제를 바꾸어나갈 뿐이다.

 

따라서 어느 고정된 체제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두 체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좀더 나은 체제로 수렴되어야 한다.

 

주장은 마음껏 발산되어야 하지만 삶을 통해서 수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수렴된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사회주의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주의에서 실현했던 제도나 또는 이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라고 해도 모든 것이 민영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을 민영화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극소수에게만 부가 집중되고 소외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도 위협받는 지경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요소와 사회주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두 체제가 갖는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제목이 된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체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무시할 수 없지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자유라는 개념이 흘러가는 것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 체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우리들의 삶에 어떤 체제가 더 좋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어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처럼 버젓이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책의 구성이 청소년들이 두 체제를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두 체제에 대한 기본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찬반, 사회주의에 대한 찬반, 그리고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이 느껴진다.

 

꼭 어느 체제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절충도 가능하다. 세상은 이렇게 두 체제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며 우리들 삶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체제는 적어도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 생각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몫이겠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책읽기에 응모해 당첨되었다. 덕분에 잘 읽었다. 우리학교 출판사,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꾸준히 내고 있다. 청소년들이 지혜로워지는데 도움이 되는 출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좋은 책 꾸준히 많이 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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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 시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 시로 나타난다. 그렇다. 우리 삶이 시가 될 수 있음을 박성우는 자신의 시를 통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읽으면서 우리들의 생활을 만난다. 이미 떠나온 농촌의 삶도 만나고, 가족도 만나고, 그리고 소소한 것들에서 큰 의미를 만나기도 한다.


  시란 너무도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자기들끼리 즐기라고 접어두는 존재가 아니라, 도처에서 시를 발견하고, 또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음을 박성우는 자신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를 보자. 참 짧다. 그런데, 그렇지! 하면서 맞장구를 칠 수 있다.


   칫솔과 숟가락


내 속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칫솔과 숟가락이다


박성우, 웃는 연습. 창비. 2020년 초판 4쇄. 11쪽.


늘 내 입속을 들락거리는 존재.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에 세 번은 꼭 드나드는 존재가 바로 칫솔과 숟가락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보다 적게 들락거리기도, 또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기도 하겠지만, 입속, 누군가의 입속을 이렇게 자주 드나들면서 구석구석 살펴보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시를 읽으면 아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그래, 이것이 시지. 이렇게 내 생활 속에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숟가락이 바깥에 있던 존재를 나에게 가져다 주고, 내 속으로 집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래서 숟가락은 외부와 나를 하나로 연결해 주어 내게 더하기의 역할을 한다면, 칫솔은 내 안에 있던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빼기의 역할을 한다. 


이제는 나에게 필요없는 것들을 꺼내는 것. 덕지덕지 불필요한 것들을 지니고 있지 말라고 하는 것. 그러니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속으로 직접 날라주는 숟가락과 내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을 밖으로 직접 내보내주는 칫솔만큼 내 속을 잘 아는 존재들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하기와 빼기의 조화!


기가 막히다. 늘 손에 쥐고, 내 입 속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는 이 존재들이 이렇게 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할 줄이야. 이런 시들이 제법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시들만 있지는 않다. 박성우 시인이 만나는 사람들이 시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사건들도 시에 나오고.


이런 시들 중에서 '나이'란 시. 정말 먹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거부해도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먹을 수밖에 없는 것. 먹으면 먹을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한번 먹으면 뱉어낼 수 없는 불가역적인 존재. 어떤 이들은 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겨우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도 있었으니,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렇지만 이것을 현명하게 활용하면 정말로 좋은 대접을 받게 해주는 존재. 추함을 넘어 원숙함이 되게 하는 존재. 바로 나이다. 시를 보자.


   나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


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

둥글둥글 살아간다는 것


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박성우. 웃는 연습. 창비. 2020년 초판 4쇄. 82쪽.


이렇게 나이 먹어갔으면 좋겠다. 아니다. 먹는 게 아니라 들어갔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나이에 젖는 것, 그것이 물들듯이, 나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지 않고 나이 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


그래, 나는 이제 나이 들어가야 한다. 자연스레 나이가 내게 들어와 나를 물들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심에서 멀어지지만 남들에게 가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 부드럽게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렇게 나이 들어가야 한다. 물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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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건축으로 살펴본 한국 현대사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33
서윤영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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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삶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의식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집이 없는 설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은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건축이 물론 집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집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 형태가 우리들 삶을 옥죄고 있기 때문인데.. 이 책 끝부분에 18. 도시화란 이름으로 아파트가 어떻게 우리 삶에 들어왔고, 우리들 주거 형태의 기본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임대아파트 문제까지 섞이면(5.세그리게이션:강남 개발) 우리 현대사에서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건축은 어떻게든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책 첫부분(1.건축이란 무엇인가?)에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건축의 자리는 제3선이라는 말. 건축이 1선이나 2선에 서서는 안된다는 것. 건축은 사람들을 보조하는 자리인 3선에 서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3선에 있어야 할 건축이 1선 역할을 해서 우리들에게 위압적인 존재로 다가오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1선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들의 행위를 담을 만한 공간(24쪽)이라고 한다. 2선은 사람들의 행위를 받쳐주는 스트리트 퍼니쳐(street furniture-거리에 놓인 가구와 비슷한 개념)라고 한다. 그 다음이 바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그래서 광화문 광장이나 청계 광장, 또 서울시청앞 광장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건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광화문 광장).

 

여기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소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용산과 이태원이다. 군대의 주둔지로 자리매김 되었던 용산과 외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인 이태원은 예전부터 그런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는 것. 그것을 '지니어스 로사이(그 장소의 본래적 성격, 다시 말하면 땅의 정령이라는 의미-40쪽)'라고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 현대로 들어오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한 장소가 발전하면서 임대료가 올라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개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4. 젠트리피케이선)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은 공동화되는 도심이 다시 활성화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특정 집단만이 이익을 올리는 현상으로 변질된 것이 우리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젠트리피케이션은 서로가 살 수 있는 공생의 모습이라는 것. 이런 쪽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어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계층별 주거분리를 의미하는 세그리게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아파트가 대중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계층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에 평수로 분류되기도 하는 계층화가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특히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계층별 주거 분리를 막기 위해 소셜믹스라고 계층별 주거 혼합을 하는 형태의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여겨야 하는데, 아직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건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 이주민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생기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그런 곳들을 다루는데 (6. 모자이크 도시, 9. 철거민과 스쾃운동)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현대사의 흐름과 건축을 연결지어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잘못된 건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7.남영동 대공분실. 9. 철거민과 스쾃운동)

 

건축이 권력에 봉사한 경우. 부끄러운 건축의 역사를 빼놓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통해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 비극적인 일. 바로 붕괴다. 건물의 붕괴(8.와우아파트와 삼풍백화점). 우리는 대형 붕괴 사고를 몇 번 겪었다. 성수대교 붕괴도 건축이 겪었던 비극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빨리빨리와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고 지었던 건물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이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이 책은 청소년들이 건축에 쉽게 접근하도록 쓰여졌다. 읽으면서 건축과 우리나라 현대사를 연결지을 수 있어서도 좋다. 무엇보다도 건축은 건축가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건축은 바로 우리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

 

하여 건축은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빈 공간에 사람들의 삶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건축을 남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라고 여기게 하는 역할을 이 책은 충분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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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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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싯다르타.


우선 싯다르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부처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제목을 보고 부처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을 읽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싯다르타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인물은 싯다르타는 부처와 다른 인물이다. 부처와 만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부처가 진리를 말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니 부처와 이름이 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무어라고 했나.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말에 의존해야 하는가? 글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중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지 않았는가? 말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살아온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부처의 말을 달달 외운다고, 어느 때고 부처께서는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우쳐야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친구였던 고빈다로부터 부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부처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독일의 작가에 의해 소설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의 과정은 치열하다. 너무도 어렵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은 그 목표와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사문이 되고 결국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 머물지 않고 또 길을 나선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를 이루는데 그가 겪는 일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일, 재산을 불리는 일에 참여하여 향락에 빠지는 일 등이다. 세속적 욕망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젊은 싯다르타가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일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 강가에서 나름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자, 무슨 일을 겪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 어떤 사랑보다도 끊기 힘든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맹목적 사랑. 이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을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떨쳐내지 못하면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즉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어쩔 수 없어한다. 온갖 고뇌를 겪은 후에야 자식을 놓아줄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또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못난 존재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 싯다르타에서는 개를 넘어서 돌멩이도 나라는 존재와 같다는 인식이 나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모든 존재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서로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 여기에서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다양한 모든 존재들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에 있으니까.


이렇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소설로 쓴 것이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고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진리는 진리 추구라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들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옆도 보고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 그래서 싯다르타는 강가에 머물면서 강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강은 어느 하나의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든 소리들이 강의 소리에 들어 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꼭 불교라는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 소설, 또는 한 사람의 성장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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