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땅 그들의 노동에 1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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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이다. 여러 단편이 묶여 있는데, 배경은 농촌이고, 인물들은 농민들이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벗어나지 못하는 이라는 말보다는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땅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땅을 통해 생명은 지속된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땅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농민이 되지 않는다.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땅에서 벗어난 농민. 버거의 이 소설에서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대도시의 파리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이들이 살아야 할 장소는 땅을 일구며 사는 곳이다. 땅과 같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이들은 살고 죽는다. 죽음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병원으로 가는 도회지의 삶과는 다르게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죽음을 자신에게 친숙한 곳에서 맞이하고 싶어한다. 죽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오게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땅과 함께 사는 삶은 자연의 일부인 삶이다. 돈을 앞세우는 삶이 아니라 생존을 우선하는 삶이다.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기르는 가축을 도살하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렇게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여기에 어떤 수사는 필요없다.

 

이런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루시 카브롤의 세 가지 삶', '루시 카브롤의 두 번째 삶', '루시 카브롤의 세 번째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삶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 루시 카브롤, 소설에서는 별명으로 더 불리는데, 코카드리유라고 한다. 그녀의 삶을 보면 동생들에 의해 쫓겨나 살지만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간다. 그러고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루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들보다 작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이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농민(통칭 농민이라고 한다)들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회에서 비중이 더 작아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루시는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동생들에 의해 쫓겨난다. 쫓겨나지만 땅과 더불어 계속 살아간다. 땅에서 나는 것들이 루시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루시가 땅을 떠나려 할 때, 결혼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고 할 때 더이상 루시의 삶은 없다.

 

그런 삶을 위해서 루시는 돈을 모아놓지만, 돈은 도시의 속성, 자본의 속성이고, 땅과 유리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더이상 루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는 농민들이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더이상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루시의 세 번째 삶에서 환상적인, 귀신이 된 사람들이 등장해 집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이제 현실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삶은 환상 속에서 계속된다.

 

이렇게 존 버거의 '끈질긴 땅'은 땅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큼 존 버거의 소설은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모습이 지금은 많이 낯설지만 원초적인 우리들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노동에]라는 제목으로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2,3부가 남았다. 2,3부 역시 땅과 함께 살아가는 땅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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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판 인터뷰 기사가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이 박힌 돌, 쉽게 빠지지 못할 듯하다.

 

  "...추석 전에 역무원이 단속을 나왔어요. 민원이 들어왔다고 나가라는 거예요. 책을 빼서 진열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지만, 다시 집어넣으려면 시간이 엄청 걸리거든요. 전동차에 앉아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책 집어넣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하니까 한마디로 기분 나쁘게 "우리가 도와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하는 거예요." (87쪽)

 

  "빅이슈 판매원의 자립활동을 위해 서울특별시, 서울교통공사, 한국철도공사와의 협조 공문이 있어요." (코디의 말. 87쪽)

 

"예전에 인천에서 판매할 때는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죠. 한번은 구청에 책을 전부 뺏긴 적도 있어요." (88쪽)

 

빅판을 인터뷰한 내용에서 발췌했는데... 이들이 자립하기 위해서 잡지를 판매하는데, 그 잡지를 판매하기조차도 힘든 상황이다. 물론 역사 내에서 장사를 금지한 규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살기 위해서 애면글면 애쓰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쫓아내거나 물건을 빼앗은 경우가 있다니...

 

역무원들이 형편을 봐주는 경우가 있고, 협조 공문도 있다고 하는데 민원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민원... 내 불편을 감수하지 않기로 하고, 고치라고 요구하는 일. 그런데 내 편안함이 다른 사람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조금 내가 불편해도 되지 않을까? 내게는 그들로 인한 불편이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테니까.

 

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해도, 의무가 아니라고 해도,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지 않은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의무'가 아니라니...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보면 일종의 의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법으로만 사람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법보다는 윤리, 도덕이 먼저 작동하는 사회가, 인간에 대한 공감이 먼저 작동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이렇게 우리 함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면 안 될까? 내 눈에 조금 거슬리더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줄 수는 없을까? 내가 조금 불편하면 남이 조금 더 편해진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이런 생각을 했다.

 

갈수록 정이 없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참지 못하는 모습. 자기 일이 아니라면 상관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규정대로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보기 좋은 대로만 살 수 있을까? 내 불편을, 내가 보기싫어함을 잠시 참으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이번 호다. 마음이 좋지 않은데, 이번 호에서 앞부분 글, 식물에 관한 글을 통해 마음이 좀 편해졌었는데... 그렇게 식물처럼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서지 않지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가진 것이 많으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위해 조금은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회이면 좋겠다는 생각.

 

유튜브 채널에 <하이머스타드>가 있다고 이번 호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유튜브 채널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식물들처럼,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나서지 않아도 우리 삶에 도움이 되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우리 사회를 좀더 밝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빅판 인터뷰를 통해 마음에 박힌 못들이 이런 사람들, 이런 활동들(특히 빅이슈 텍스트란에는 이런 글들이 많다)로 인해 조금씩 빠져나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립하려 애쓰는 빅판들에 대한 일들이 많이 알려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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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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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이라는 말이 책 표지에 적혀 있다. 혐오의 시대. 상대가 매우 잘못했고, 그 잘못을 비판했음에도 고치지 않았을 때 미움이라는 감정이 싹튼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혐오는 원인을 명확히 찾아내기가 힘들다. 어떤 식으로 감정에 자리잡아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냥 나온다. 근거없는 미움. 아니 사랑 없는 미움이라고 해야겠다.


비판과 비난이라고 하면 혐오는 비난이다. 그냥 비난할 뿐. 특히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상대가 몰락했으면 하는 감정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혐오다.


혐오의 말, 혐오 행동이 앞설 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눈뜬다고 했던가. 이 비슷한 말이 고야 그림에 있다고 기억하는데, 혐오 앞에 이성은 자리잡을 수가 없다. 그만큼 혐오는 이성으로도 논리로도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고치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혐오 발언이나 혐오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는 타인의 관점으로 다른 대상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지니게 된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남들을 자신만의 눈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런 재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 그래서 그들은 혐오 발언이나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혐오가 판치는 사회는 이렇게 성찰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찰 없는 사회가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어떤 두려움? 자신이 잘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다른 존재들이 빼앗아 갈 거라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자신을 더욱 꽁꽁 닫아걸게 만들고, 남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막아버린다.


그래서 두려움은 혐오를 부추기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여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다. 이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의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여러 근거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책 원래 제목은 '두려움의 군주제: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다. 자신이 결정하기보다는 다른 존재가 결정한 것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군주제다. 이런 사회는 닫힌 사회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벽을 쌓고 교류를 하지 않는. 그러면서 근거도 없는 비방, 혐오,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디 미국 사회뿐만이겠는가? 이 책에 나온 수많은 혐오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니... 남 나라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런 혐오가 왜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분석하고 알려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우리는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혐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 바로 어떻게 혐오 없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제시하는 방향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분석은 이제 됐다. 실천해야 한다.


가정에서,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사회가 불안하면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불안은 개인 삶의 불안정으로, 좋은 삶을 살기 힘들다는 두려움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했으니,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택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회가 두려움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최소한의 정의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286쪽)고 한다. 그 열가지 역량은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286쪽-288쪽을 참조하면 된다.


1. 생명, 2. 신체 건강, 3. 신체 보전, 4. 감각, 상상, 사고, 5. 감정, 6. 실천 이성, 7. 관계, 8. 인간 이외의 종, 9. 놀이, 10. 환경 통제


이것들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회라면 상호 존중, 이해, 협력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이런 일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어느 기간 동안은 공공 복무를 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군대조차도 의무가 아닌 미국에서 누스바움은 공공업무에 모든 사람이 종사해 봄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생각, 공공선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좀 실현불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공공업무에 모두가 종사하지 않더라도 누스바움이 말한 교육이나 예술을 통해서, 또 지역 사회의 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공공선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지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희망적 자세 아닌가 한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 선출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만나고 있다. 이때 우리가 어떤 후보를 선택해야 할지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후보가 아니라 '희망'을 주는 후보, 혐오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하는 후보를 선택하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타인을 혐오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에게 연민을 지닌,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어떻게 그들과 지내야 하는지, 어떤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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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26 0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혐오의 근원에 두려움이 있다는 말 ! 공감합니다.

kinye91 2021-10-26 10:26   좋아요 1 | URL
두려움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르기 쉬우니, 혐오를 통해 자신들의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누스바움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어떤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한다면, 혐오 사회로 가지는 않겠지요.
 
-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김홍모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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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먹먹함이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밀려왔다.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

 

왜 그들이 차가운 물 속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7년이 지나가는 데도 여전히 진실은 미궁 속에 있다. 미궁을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지만, 그 실을 일부러 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도무지 미궁 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정권이 바뀌고 다시 또다른 정부를 구성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세 정부를 거치면서 세월호 사건이 점차 잊혀져 가고 진실은 그렇게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정말로 그래서는 안되는데... 어째서 제대로 진실을 규명하지 않을까?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는데, 말을 잘 들었다는 이유로 죽었는데, 정작 그들이 억울함을 풀어줄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세월호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생존자들, 그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아픔이 얼마나 심한지를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읽을 때와 비슷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더 먹먹하게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생존자들에 대해서도 나라에서 제대로 해주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생존자를 인터뷰해서 만화로 표현해 낸 이 책은, 세월호 생존자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준다. 생존자 당사자만이 아니라 생존자의 가족들도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생존자, 딸 안나, 딸 나연, 부인 이렇게 네 명의 시각으로 내용을 전개함으로써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 모두의 고통이 되는데, 이를 치유하는 첫단계는 진실 규명이다. 진실을 밝히고 그에 대한 치유를 시행해야 하는데, 첫단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생존자들과 그 가족, 그리고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현실.

 

이 책과 더불어 김탁환이 쓴 [거짓말이다]를 읽으면 좋다. 두 책 모두 세월호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보람보다는 더 많은 고통 속에 빠져들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있다. 이 만화를 보면 그 실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 고통이 사그러들게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시간이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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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미래 세대. 자연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존재할 거의 영속적인 존재라면, 미래 세대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아갈, 즉 우리가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속성을 유지시켜 줄 존재다.


  이렇게 자연과 미래 세대는 통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없다면 인간도 존재하기 힘들고, 미래 세대가 없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를 영원히 존재하게 할 두 존재인데, 과연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답은 부정적이다. 마치 현재가 전부인양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누군가는 지구의 절반을 자연의 영역으로 남겨두자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자연의 영역까지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미래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자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살아갈 다른 사회적 영역도 남겨두기는 커녕, 그들의 영역도 우리가 끌어쓰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김명인의 시집 [꽃차례]를 읽다가 '리프트'라는 시와 '꽃밥 가까이'라는 시를 만나 자연과 미래 세대가 따로가 아니라 함께임을 생각하게 됐다. 자연이 파괴될수록 미래 세대도 살아가기 힘들어질텐데...


우리를 영속되게 해줄 존재들에게 우리가 어떤 자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이 시들을 통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프트


산꼭대기로 산꼭대기로 밀치며 밀고 오던 인파들이

쉼 없이 퍼올리던 눈의 함성들

슬로프를 굴리던 힘찬 발들 어디로 갔나

정적을 태우고 허공 중에 멈춰 선 리프트 아래로는

이 빠진 줄 몰랐을 잔디밭 비탈이

붉은 잇몸을 드러낸 채 가파르게 흘러내린다

나는 여기서 봄을 보낸 적이 없으니

지난겨울을 전생처럼 들춰보는 것

저 속살은 그러니까 오리털 파카나 방한 바지로

겨우내 가려놓았던 설원의 상처거나

이별의 흉터리라, 넘어지면

벼랑까지 굴러갈 것만 같았던

눈사람의 자취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산줄기가 닳도록 왕왕대던 스피커 아예 입 다물었다

녹음의 계절이 여기선 사막 같다

삭막한 꽃들을 활짝 피웠거나

리프트 기둥 타고 칡넝쿨 바짝 치켜들었다 해도

한 철에만 열리는 축제의 깃발 저들이 어떻게 대신할까

추위를 불 지피던 화창한 웃음소리 어느새

따가운 햇살 속으로 잦아들었다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년. 70-71쪽.


봄이나 여름에 스키장 근처를 지나가 보면 황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겨울에 북적이던 사람들로, 하얗게 쌓인 눈으로 가려졌던 상처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마치 학창시절 머리가 길다고 이발기계(일명 바리깡)로 한줄로 깎였던 머리처럼.


보기에도 좋지 않지만, 자연으로 보면 자신의 신체 일부가 뭉텅 잘려나간, 또는 깎여나가는 일. 그런 상처를 다른 풀들, 꽃들로 애써 감춰보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떻게 겨울에 인간들이 채운 그곳을 대신할 수 있을까?


자, 겨울이 한 철이라 슬픈가? 아니면 나머지 세 계절을 황량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자연이라 슬픈가? 우리가 자연과 함께 하는 방법이 어떤 일일까? 그들의 영역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지만, 자연과 우리가 영원토록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생각해 봐야 한다.


    꽃밥 가까이


세상 모든 밥벌레들은

한 끼니 제 밥상 가까이 다가앉기 위해

얼마만큼 수고 속으로 내몰리는가

제 힘으로 밥상 한번 차려보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이 꽃 저 꽃 기웃대는 벌들도

예 아니다 싶으면 한참 동안 허공 맴도는데

서른세번째 회사에 이력서 바치고 축 처져

고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일 막(幕) 내리기 전

서둘러 밥그릇 생(生)에 나를 알선시켜야 한다

생계라고 사로잡는 게 눈먼 일당이라면

허방에 거미줄 쳐놓고 빈 손금이나 더듬는

이 애벌의 시간도 간절하게 절절하게

씨앗을 품고 파종의 때 기다리는 중,

모래는 눈물 따윈 간직하지 않으니

낮잠 늘어지게 재워둔

깔깔한 햣바닥이나 깨워 하늘 사막까지

핥으며 가볼까, 온몸에 가시 세운

선인장 깔고 앉아 거기서라도 터 잡아야지

나비의 일터가 꽃이라면

쑥밭이라도 좋으니 내게도 꽃 이울 터전을 다오

일생일대의 호접무(胡蝶舞) 펼쳐보일

무대에서 자꾸만 밀쳐내는 건

이 환한 봄날이 뉘게나 꽃 시절 아니므로!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년. 84-85쪽.


자연의 일부를 우리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놓은 '리프트'라는 시와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꽃밭에서 먹을거리를 찾지 못해, 쑥밭이라도 좋다고 절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드러난 이 시에서 어떤 공통점이 느껴진다.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미래를 살아갈 존재들의 영역을 많이 침범하고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할 영역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하여 화창한 봄날에 꽃을 즐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온몸에 가시 세운/ 선인장 깔고 앉아' 거기서라도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절규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 우리들 생활을. 


우리는 영속할 존재이기 때문에, 영속하기 위해서는 현재에서 마치 미래는 없다는 듯이 모두 써버리면 안 된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미래 세대들의 절망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우리가 그들을 어루만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이제부터라도 해야 한다고 자연과 미래 세대들이 계속 신호를 주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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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24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창, 올림픽 지난지 4년 후 지금은 어떠한지 kinye님 글 읽으며, 훼손은 빠르고 복구는 느리다가 생각나네요..

kinye91 2021-10-24 14: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훼손은 빠르고 복구는 느리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순식간에 벌어지지만, 그 자연이 회복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요, 자연과 인간이 공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같은 감염병 시대도 자연훼손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할테니까요.

2021-10-24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4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