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진명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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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한 조선인 장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이때는 그냥 친일을 한 사람, 그것도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군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니...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왜 홍사익이지 하는 의문? 일본에서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저항시를 쓴 윤동주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는데, 왜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이라니...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나라 광복군을 이끈 이청천(지청천) 장군과도 관계가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기들의 가족을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연구하면 될 일이고...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아마도 동기라면 가족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 그래도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리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증거로 '전의회(全誼會)' 회보를 들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왜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는 일이 구구절절 변명한다는 느낌, 그렇게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겠다는 지사적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개인으로서 하는 행동과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평가도 다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개인으로서의 홍사익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제시대 전쟁기에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

 

개인의 품성을 논외로 하고, 그는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포로가 파견된 부대에 대해서는 지휘권이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포로수용소 총괄담당임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전범 재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은 패망했고, 자신이 명령했든 명령하지 않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잔학행위가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홍사익 중장은 억울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일본인들도 사형을 면하고, 나중에 일본 정계에 진출한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와 동남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하고, 그 책임자가 바로 홍사익 중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죄를 범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679쪽)

 

'홍 중장은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포로를 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면에서는 조금도 그의 양심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680쪽)

 

이 구절에서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은 좋은 삶을 살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홍사익 중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책임을 지려했고,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나 저자는 일본식 사고, 또는 일본식 행동에 대해서 미군이 주축이 된 전범 재판소에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논리를 앞세운 그 재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일본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잘못했다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주장의 한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놓을 수가 있다.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으로.... 이렇게 보면 일본과 더불어 미국에도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홍사익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갔고, 그 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한 우선 책임은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사익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수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 아렌트 말대로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수레바퀴가 오는 길에 있는지, 그 수레바퀴를 미는 쪽에 있는지, 또 수레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철학을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읽으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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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cWine 2021-11-0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06 15:41   좋아요 1 | URL
어느 정도는 홍사익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요즘.


  기가막힌 말들의 잔치. 이 말들이 실현이 되었다면, 공허한 울림만 남기지 않고 현실에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있지 않았을텐데.


  사회적 재난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남들로부터 보호하려 장벽을 쌓는다.


  함께라는 말, 더불어라는 말이 말로만 존재하고, 생활에서는 분리, 보호, 방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선진국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몇 사람들은 우린 선진국이다라고 즐길 수 있겠지만, 더더 많은 사람들은 선진국은 말로만 존재할 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먼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 해고는 죽음이라고, 해고된 이후에 사회에서 삶을 유지하게 하기보다는 개인이 제 삶을 유지하게 만든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온몸에 가시가 돋고 남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할 뿐이다.


최승호 시집을 읽으며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부르도자 부르조아)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장면(늦게 도착해 본 광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마을'이란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달고 살고 있지 않은지.


마을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 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 밤엔 장자를 읽으리라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2011년 재판 6쇄. 81-82쪽


평화로운 사람이 '문을 걸고',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과연 평화로운가? 이 평화는 언제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을 걸고, 돌담을 높이 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이때 평화로운 사람은 힘이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힘든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평화로운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하는 사회, 문을 걸지 않고, 돌담을 높이 쌓지 않고 한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마을.


말로만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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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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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SF소설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최근 과학이론을 소설적으로 가공해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 개연성, 필연성이 느껴지는 소설, 또는 시공간은 환상적이지만 읽으면서 우리 현실을 느끼게 하는 소설을 기대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무려 5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합리성을 찾으려면 번번이 실패하게 만든다. 그냥 그때 그때 상황을 벗어날 뿐. 그 상황 속에서 우리 현실을 찾으려 해도 실패하게 된다. 그런 것은 없다. 없기 때문에 낄낄거리며 읽다가도 이게 뭔가 싶은 마음이 든다.


우회 도로 건설 때문에 집이 철거 위기에 처한 아서 덴트, 그리고 우회로를 만들기 위해 지구를 파괴하는 우주적 사건. 둘이 겹친다. 아서 덴트는 이 위기에서 포드 프리펙트로 인해 우주를 여행하게 되고, 살아남게 된다.


포드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들이 히치하이킹을 통해 우주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야 할 거라 기대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건들이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일어난다.


여기에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냥 우연히... 우연, 우연, 우연... 이 우연들이 겹쳐 필연이 된다. 그렇게 아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가 죽어야 할 때가 올 때까지.


4권까지 우주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에 휩쓸리는 아서 덴트와 포드, 자포드 비블브락스, 트릴리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5권에서는 주인공이 확실히 정리된다. 아서 덴트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진다.


방대한 우주에서도 지구와 같은 행성은 찾을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인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아서는 지구와 가장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찾아 정착하려 하지만 그도 쉽지 않다. 여기에 포드로 하여금 우주의 음모가 진행되게 하고...


그냥 재미로만 가던 내용이 5권에 이르면 무언가 찡한 여운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성을 자극한다고 할까.


어디에도 어떤 시간에도 살아갈 수 있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여야 하지만, 히치하이킹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고향은 필수적이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은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돌뿐이다.


히치하이킹이 무엇인가? 여행이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여행. 이 여행의 끝은 고향으로의 돌아옴이다. 그래서 고향이 존재해야지만 히치하이킹이 의미 있어진다.


만약 고향이 없어진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다. 떠돎이다. 방랑, 정처없는. 율리시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방황을 했고, 아이네이아스는 고향을 잃었지만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결국 돌아옴으로 귀결된다. 돌아옴이 없는 여행이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인류도 우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린다. 우주로 나아가려고 한다. 왜? 지구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들의 삶터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또 지구가 위기에 처했기에 인류가 살아갈 또다른 고향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소설에서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아서 덴트는 방황하고 지구를 그리워한다. 그는 분명 지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다중우주에서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 작가가 그 가능성에 주목했다면 이 소설의 결론이 지구 파괴로 끝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수많은 은하계 또는 다른 우주 행성 중에 인류가 살아가는 행성이 있고, 아서 덴트는 그곳에서 잘살아가게 서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지구가 없어진다면, 인류가 살아갈 삶터는 우주 어디에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행성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어찌 다른 행성에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불가항력이라는 말처럼, 인류 스스로가 아니라 천체 법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다면 그때는 아이네이아스처럼 또다른 행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 행성에서 인류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히치하이킹을 하든, 우주선으로 정상적인 여행을 하든, 그렇게 되겠지만, 이소설에서처럼 지구가 파괴된다면, 어디로 가든 견딜 수 없게 된다. 아서 덴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사랑하는 사람 펜처치처럼 우리 인류에게도 그런 삶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여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냥 우연이 겹치는 그 우연성에 쉽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권에 와서는 무언가 찡한 느낌을 받는다. 지구로 돌아왔지만 지구가 다시 파괴되어 버리는 순간. 그 순간 지구에 머무는 아서 덴트.


그렇다. 이 소설은 SF소설이라고 하지만 다른 SF소설과는 다르다. 상당한 우연들이 겹치고, 황당무계한 도저히 현실과 연결지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인생임을 생각하게 한다.


인생이 과연 필연으로만 이루어질까? 우리 인생을 생각하면 수많은 우연들이 모이고 겹치지 않는가. 나중에야 그것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우연들을 빼버리게 되지만, 그 과정은 수많은 우연들의 겹침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우리가 목적한 대로만 되지 않음을, 우리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도 함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이라는 여정을 히치하이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았던 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과정. 그럼에도 히치하이킹에는 늘 함께 하는 존재가 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철저하게 혼자라고 생각해도 가만히 보면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소설은 우리 삶의 우연성을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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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09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꽂아놓고 감상만 하고 있는 책인데...
이 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kinye91 2021-12-09 17:3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1-12-12 16:48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제가 뒤늦게 백신 맞고 부작용인가,....
꽂아놓고를
꽃만 놓고 감상하고 있다고 읽었어요^^;;

두 분의 소장 책이시네요.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보고 추천받은 책이라 친근합니다. kinye님 당선 축하드려요^^

mini74 2021-12-09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1-12-09 17:32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쎄인트 2021-12-09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12-09 17:3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12-09 18: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kinye91 2021-12-09 21:1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12-10 05:3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scott 2021-12-10 00: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 합니다 ^^

kinye91 2021-12-10 05:3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라일락과 깃발 - 노부인이 전하는 어느 도시 이야기 그들의 노동에 3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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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의 노동에' 3부다. 1부는 땅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땅에서 어떻게든 생명을 얻으며 살아간다. 2부에서는 땅에서 떠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히 땅을 떠나지는 못한다. 이제 3부는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사람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은 부모세대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쥬자와 수쿠스는 땅과 더불어 살아본 적이 없다. 물론 쥬자는 약간 다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염소 젖을 짜고 닭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은 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쥬자는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땅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여성은 땅과 관련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이 소설 인물 중 한 사람인 헥토르는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경감으로 퇴직을 앞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즉 땅과 함께 살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땅과 유리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아내가 알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헥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이다. 생명력을 상실한 삶.

 

수쿠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고향에 가고자 하지만 결국 가지 못한다. 그에게 돌아갈 고향은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뿌리뽑힌 삶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 오게 된 사람들의 자식인 2세대들은 이제 돌아갈 고향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든지, 부랑자나 범법자가 되든지 한다. 마치 땅과 붙어 있으면 누구도 죽일 수 없지만, 땅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게 되는 안타이오스처럼, 그들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땅에서 떨어져 나온 삶들이 온전하지 못함은 남녀를 구분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존 버거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한다. 죽은 이들이 모두 배에 모여 자신들의 삶을 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소설의 환상적인 마지막 장면... 작가는 이렇게라도 뿌리뽑힌 삶들을 위로하고 싶었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 도시화 되면서 사람들 삶이 땅과 점점 멀어지고, 그런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몇 십 년에 걸쳐 사람들이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존 버거는 '그들의 노동에' 3부작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땅에서 멀어지는 삶이 우리들에게 고난을 준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으니, 다시 땅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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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로파에서 그들의 노동에 2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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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 [그들의 노동에]3부작 중 2부다. 1부가 '끈질긴 땅'이라는 이름으로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였고, 그들이 땅에서 분리되기 시작함을 루시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2부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서서히 땅에서 멀어지며 도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 우리나라 60-70년대에 농민들이 땅에서 분리되어 도시로 와서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빈민이 되어가는 모습을 버거의 소설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다.


1부가 이문구 소설을 연상시킨다면 2부는 이문구 소설에서 벗어나 조세희 소설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산골에서 살지만 도시의 삶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시와 산골의 삶에 다리를 걸치게 되는데, 곧 이들은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2부의 제목이 된 '한때 유로파에서'이다.


산골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뿜어내는 유독가스들로 인해 숲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을 사람에 비긴다면 오딜이 사랑했던 사람이 공장에서 죽어가고, 또다른 사람은 다리를 잃게 된다.


산업노동이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거나 장애로 만들고 있는데, 자연 파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피폐하게 함을 그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시대 변화는 어쩔 수가 없다. 오딜은 아버지와 자신이 자란 환경을 사랑하지만 도시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은 도시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벗어나 도시로 간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는 아직 돈이 전부는 아니다. '보리스, 말을 사다'라는 소설에 그 점이 잘 드러나 있는데, 비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보리스지만, 그는 도시라 할 수 있는 카페에서 차값을 대신 내주는 등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이용하는 사람은 도시 사람들이다. 그를 이용해 집을 얻으려는 도시 출신 부부가 나오는데, 이렇게 땅과 유리된 삶은 결국 이용당하고 만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게 되거나 (아코디언 연주자), 산골에 들어와 살지만 결국 도시에서 가게를 차려 살아가게 되는 삶(우주비행사의 시간), 도시 부부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되는 삶(보리스, 말을 사다)이 2부에서 펼쳐진다.


땅과 유리되어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사람들. 세상은 그렇게 변해왔다. 지금은 도시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땅과 유리된 삶, 흙을 밟아본 기억이 산에나 가야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이 소설에서는 아직도 풋풋한 풀냄새, 흙냄새가 나고 있지만, 그런 냄새와 더불어 매캐한 공장 냄새도 함께 나고 있다. 그 매캐한 냄새가 풋풋한 냄새들을 누르기 시작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3부는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겠지. 씁쓸하게도 우리는 땅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버거의 3부작 소설은 어쩌면 우리가 땅을 잃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러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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