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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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가 제목이 되었다. 왜? 당연한 일이 비범한 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위관료라는 인간들이 국민들을 개, 돼지에 비유하기도 하니, 그들 눈에는 국민들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보다.

 

아니, 그들은 국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권세 있는, 소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사람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이되, 자신들과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사람인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면 주제 넘다고, 지금은 너희들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고, 오히려 이기적이라고 몰아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또는 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선에 두고 다른 것들을 먼저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 다른 것들로 사람이라는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과연 그것이 실패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친 이런 글이 있다.

 

패배를 실패로 착각해선 안 된다. 패배가 상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겼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72쪽)

 

참 좋은 말인데, 패배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파멸로 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패배, 실패하지 않는 패배를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을까?

 

노동자들은 패배하면 곧 죽음이다. 이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라고 외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싸우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패배란 곧 실패다. 이들에게 패배는 사회에서 밀려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다. 아름다운 패배.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 집단으로 보면 아름다운 패배가 될 수 있다.

 

전태일의 운동은 패배했다. 그러나 실패는 아니다. 분명하다. 전태일의 패배로 우리 사회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누가 패배라고 하는가? 우리 사회가 지금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운동 덕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아름다운 패배가 있다. 이들은 이런 패배를 통해서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집단, 관심없던 집단들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패배는 다른 국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이 책에선 '지더라도 개기자'고 했다. 언뜻보면 이해 안 되는 말이지만, 패배가 실패가 아니란 말과 같다.

 

개기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보인다. 개겨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개겨서 과연 달라지는 게 없는가. 달라지는 게 분명히 있다. 개기는 사람 자신이다. 개기면서 결심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진다. 다시 싸워야 할 때 웬만한 충격엔 흔들리지 않는다.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실패했을지언정 원칙을 지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 있는 실패가 된다. (73쪽)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내 삶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선은 있어야 한다. 그 선을 나 스스로 넘어섰을 때 패배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이점에서 정치권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 이승만 정권 당시 사사오입은 욕할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강행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세련된(?) 비례대표 위성정당이란 것을 만든 야당, 여당.

 

이들에게 패배란 실패다. 그래서 이들은 정당하지 못해도, 비록 꼼수란 소리를 들어도 성공하려 한다. 원칙을 지키고 주장하는 실패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보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이제는 없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면 과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까? 국민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이미 원칙을 잃고 자신들의 의석수만을 생각하는데... 그들에게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좋은 삶에 대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없다.

 

여기에 최근 계속 언론을 타고 있는 검찰들의 모습. 또 다른 재벌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이들에게는 좋은 삶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또는 기득권을 지켜주는 직업이 전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들만이 아니다. 곧 수능을 보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그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 직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야 한다. (194쪽)

 

이 말이 통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배제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글 한편 한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진영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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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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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제목만으로는 낯설다. 그러나 이 소설 제목인 홍까오량이 우리말로 풀면 '홍고량 - 붉은 수수'라는 것을 알고 나면 바로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 '붉은 수수밭'

 

아주 오래 전에, 정말로 오래 되었나 보다, 본 영화다. 기억에 많은 장면은 남아 있지 않지만, 화면이 온통 붉은 색이었다는 것과 이들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난다. 게다가 일본군에 의해 껍질이 벗겨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장면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는데...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세상에 1989년에 개봉이 되었다고 한다. 햐, 정말 오래 전이구나! 붉은 수수밭 하면 두 인물만 기억에 남는다. 영화 속 인물 이름이 아니라 배우와 감독. 배우는 공리, 감독은 장예모.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 헷갈렸다. 중국 사람들 이름, 한자로 읽으면 두 글자에서 세 글자라 머리 속에 잘 들어오는데, 중국 발음으로 표기를 하면 도통, 길기도 하지만 의미가 머리 속에 안 들어오니... 서술자의 아버지인, 항일기에는 아들로 나오는 또우꽌은 한자어로 하면 두관豆官이란다.)

 

모옌의 소설이라는 것, 모옌이 중국 작가로는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모옌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에게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붉은 수수밭'의 원작이라는 점이 이 소설을 읽게 했다.

 

읽으면서 영화는 이 소설의 첫번째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소설은 첫번째 부분을 중심으로 하면서 그 사이 사이에 빈 시간과 사건을 다른 부분에서 채워주고 있다. 홍까오량 가족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서술자가 고량주를 만들어 파는 집의 자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동네에는 수수로 술을 만들어 파는 일을 주업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홍까오량 가족 하면 지식인 계열의 집안도 아니고, 또 권세가 있는 집안도 아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아니니 도덕, 윤리, 체면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이들은 자신들 감정, 욕망에 충실한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옭아매려 하는 일제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옌 소설의 장점이라고 하면 환상적인 장면들이 나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미신적인 요소들, 민중적인 요소들, 또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이것에 더해서 모옌 소설은 좀 수다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 수다스럽다는 말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들려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점을 여러 가지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하겠지만,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소설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1장은 '붉은 수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개가 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이면 너무도 친숙한 장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은 영화 속 장면이나 인물들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어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에서 표현된 것을 넘어서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서술과 소설의 서술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영화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으니, 그 감추어진 것을 찾는 재미가 소설 읽기에서 발동될 수 있다. 영화를 보았더라도 이 부분은 그래서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2장은 '고량주'다. 과거 회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1장 사건 당시도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시간이 겹쳐진다. 그럼에도 주인공 집안에서 주인공인 또우꽌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 1장에서 빠진 부분이 2장에서 채워지는 것이다.

 

3장은 '개들의 길'이다. 개들의 길. 항일을 하던 시기, 사람들의 삶이 개들의 삶과 비슷하기에 이렇게 표현했나 했더니, 개들의 길.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보통 때라면 장례를 치러 다른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했으련만 그것이 불가능하고, 또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야생 개가 되어 시체들을 먹으며 지내는 장면.

 

그야말로 참혹한 장면이다. 시체를 뜯어먹으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개들과 그를 지키려는 애들의 싸움. 이렇게 마을은 평상시의 삶을 잃어버린다. 사람도 개들도...

 

4장은 '수수 장례식'인데... 1장에서 2년 정도 경과했을 때를 기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간은 다시 1장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은 자주 겹치고, 사건들은 순서대로 나오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 섞여 있음이 바로 중국인들이 항일의 어려운 시기를 거쳐 왔음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 민중들의 모습이 나온다. 주인공인 위잔아오와 또우꽌은 팔로군에도 국민당군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둘을 다 불신한다. 다만, 팔로군 쪽에 좀더 마음이 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민중에게는 또다른 억압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소설에서 항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갈등을 벌이는 팔로군과 국민당군, 그리고 이 둘에 거리를 둔 민중들을 보여주고 있다. 항일 전쟁 시기라고 해서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민중들의 삶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장은 '이상한 죽음'이다. 그 시기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이 표현되어 있다. 지금도 일본은 난징에서 자행한 학살을 부인한다고 한다. 그들은 그냥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점을 민중의 시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작은 향촌인 이 마을에서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장에서 5장까지 동일한 인물, 동일한 지방, 비슷한 시기가 나온다. 어느 하나를 읽으면 다음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모두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결코 짧지 않은 소설이지만 흥미롭게 읽힌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과 비슷하게 일본에게 맞서는 시기를 거쳐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소설을 통해서 전쟁이 일으키는 비극을 알게 되니, 식민주의 정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러한 제국주의로 인해 인류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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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를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전에 학창시절에는 일기 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적는 일기를 교사가 검사하는 것은 인권침해일 텐데, 그런데도 일기 검사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하루를 반성하라고?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정리를 하라고? 날마다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활을 자세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들의 반복같지만 일기를 쓰려다 보면 그 비슷한 날들 중에서도 내게 특별한 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스레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냥 지나쳤던 일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한 문장 정도로 그쳤던 일기에 구체적인 표현들이 더해지면서 점점 길어지게 된다. 그만큼 자신의 생활이 다양해지게 된다. 아니, 삶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학생 시절에 그렇게 학교에서 일기를 쓰라고 강제했는지도 모르겠다. 좋게 생각하자. 학생들의 사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이 무척 풍부함을 깨달으라고 일기를 쓰게 했다고.

 

왜 일기 타령이냐고? 최승자 시집 제목이 '즐거운 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집은 절대로 즐겁지 않다. 우중충하다. 죽음이 넘쳐나고 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삶의 비극이다.

 

하루의 죽음은 밤이다. 밤에 일기를 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행위다. 물론 제목이 된 '즐거운 일기'는 그런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일기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밤. 죽음. 정리.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은 시작. 끝이 아니라 시작.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또다른 시작. 하여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계속나아가야 한다. 끝을 알면서도 가야 한다. 그게 비극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

 

누구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삶에서 조연에 머물고 만다. 자신은 주인공처럼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삶을 보면 조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주인공처럼 살아야 한다. 그것도 비극이다. 주인공이 아닌데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삶이라니...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이런 평범함이 바로 우리 삶 아니겠는가. 일기를 통해서 삶의 작은 부분까지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듯이, 우리들 평범한 삶에서도 충분히 주인공과 같은 삶이 있고, 절정에 이르는 삶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그러므로 최승자의 시 '비극'이란 시에서는 삶의 자세를 읽어야 한다.

 

   비극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09년 초판 24쇄. 85쪽.

 

왜 비극일까? 비극은 뛰어난 개인이 세상과의 불화를 통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극의 주인공은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병신 같은 죽음' 이 아니라 '위대한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의 사람에게 죽음은 그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병신 같은 죽음'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죽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주인공처럼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기를 쓰는 이유는 자신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다. 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내가 세상과 불화한다면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렇게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일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즐거운 일기'가 되지 않겠는가.

 

'즐거운 일기'라는 시와 전혀 상관없는 일기와 죽음, 일기와 비극에 관한 짧은 생각이었다. 시는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시를 읽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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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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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편견 없이 읽기는 힘들다. 그동안 내게 쌓여 있던 배경지식들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들, 들었던 것들, 보았던 것들,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이 이미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내 시각을 고정하고 있다. 이런 시각의 틀에 맞지 않는 책은 끝까지 읽기 힘들다.

 

책읽기도 그런데, 정치체제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우리가 흔히 보수다 진보다라고 편 가르기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보수도 진보도 사람들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하는 사상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살게 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는데 그 방향이 다를 뿐이라고 하면 되는데,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것이 바로 이런 이념이다.

 

여기에 더 심한 것이 바로 남북 관계다.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경색 국면으로 가고, 한창 전쟁 발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평화체제로 가기도 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남북관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리 긴장이 고조되어도 전쟁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지니고 일상생활을 유지해 가고 있다. 아무리 북한의 침략 위협 운운해도 사람들의 삶은 평온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북한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알 수가 없다. 철의 장막, 죽의 장막, 인의 장막보다 더 강한 것이 바로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다. 그 장벽을 깨뜨리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노력을 한 사람을 오히려 종북좌파라고 몰아부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추방한 것이 남한의 모습이라면, 자본주의를 선전하려는 사람이라고 추방당하는 것이 북한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남과 북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가려져 있을 뿐이다. 가릴 뿐이다.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흘리거나 또는 사실을 왜곡한 정보만을 유출할 뿐이다.

 

사실보다는 온갖 추론과 상상만 난무하는 것이 남북관계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관계를 볼 때는 아주 특이한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다. 내 눈에 있는 안경 색깔에 맞춰 그 사회가 보인다. 남한도 북한도 그러한 안경을 아직은 벗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우리나라 사진기자 출신이지만 미국 영주권이 있는 진천규가 북한을 단독 취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단독취재라? 북한이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진천규는 이것이 편견임을 보여주고 있다. 단독취재를 하면서 그는 평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자유롭게(?-완전히 자유롭게 취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안내원이 늘 따라다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존의 취재와는 다르게 꽤 자율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취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에도 들어가 보고, 지하철도 타보고, 버스도 또 산책도 하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기록을 했다.

 

그가 느낀 것을 하나로 정리하면 평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또 미국의 대북제재 이후 어렵게 살아서 얼굴에 궁색함이 가득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그들의 삶에 만족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진천규의 사진이나 글에서 평양 사람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겠는가.

 

북한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이 책에서 진천규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나름 자유롭게 취재를 하면서 북한의 실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남과 북이 하루 빨리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 체제를 마련하여 함께 교류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자유롭게 교류를 한다면 서로가 지녔던 편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체제가 달라 막혀 있는 교류의 길을 풀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왕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도 이룰 수 있다. 통일을 잠시 뒤로 미루더라도 남과 북은 서로를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고(유엔에 동시 가입이 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세상에 세상 어느 나라도 거의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데, 말이 통하는 단 하나의 나라만 여행을 할 수 없는 세상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오해를 쌓고 그 오해가 쌓이고 쌓여 서로를 불신하면서 계속 담을 쌓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담을 허물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쌓였던 오해도 풀리게 된다. 그런 오해를 푸는 디딤돌로 이 책은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진천규는 또 통일TV라고 하여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는 방송을 하려고 한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를 안경 없이 바라보고 만날 때 통일의 시간도 조금 더 빨라질 것이다. 이제 평양과 서울의 표준 시간은 같다고 한다. 시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도 함께 갈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평화로워야 하니까 말이다. 북한에 대한 편견을 덜어버릴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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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1

             - 쓰레기


쓰고 남은 것들은

순환이었다

똥이 쌀의 다른 이름이듯이

부산물은 

다른 산물들을 위한 밑거름

자연의 혈관을 도는

원활한 순환


어느 순간

부산물은

쓰레기가 되어

쌓이고 쌓여

자연의 혈관을 막아

순환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니

만성 고혈압인 자연


인류세라는 말에

자연의 동맥경화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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