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 월급사실주의
김의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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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나온 첫번째 소설집이다. 현실은 점점 팍팍해져 가는데, 그런 현실을 과연 문학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나? 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문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를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집.


작가들이 우리 현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읽는 사람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희망을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희망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찾기를 또는 위안을 받기를 바라고 썼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저 현상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후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것, 동시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11-12쪽)


어떤 현상인가? 팍팍한 현실이다. 이를 '새로운 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무어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이라는 인식이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점점 양극화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작가들이 모여 각자가 바라본 현실을 작품으로 썼다.


이 소설집에는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양한 직업들이 나오지만 공통된 점은 이들 모두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작품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이, 비록 이 작품집이 2023년에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전세 사기라 할 수 있는 일을 겪는 인물,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부동산을 잡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발표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셋집도 마음 놓고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마음 놓고 살(파고 사다의 살이 아니라, 거주한다는 의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다.


말보다는 실행, 이것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인데... 집값 안정,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내 집이 아니라 내가 빌려 살 집도 구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얘기해야 한다. 기껏 빚내서 빌려 산 집(특히 전세)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들, 이 소설은(정진영, 숨바꼭질) 그나마 돈이나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으니...


젠세나 월세도 얻지 못하고 2호선 전철에서 자야 하는 배달 일을 하는 주인공 (주원규, 카스트 에이지)는 더욱 힘든 처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게으르냐면 그것도 아니다. 배달일을 하고, 밤에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한다. 그는 오후 3시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잘 집도 없고 애인의 집에서도 자지 못하고 결국은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몇 시간 동안 자기 위해 첫차를 타는 인물에게 어찌 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탓이 아님을, 그것이 네 선택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현장 실습을 나간 학생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런 현장을 선택한 것도 너니까 그건 너의 자기주도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여정, 섬광)


과연 자기주도권일까? 환경이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 아닐까? 그 현장이 열악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 그렇게 된 환경에서 과연 자기주도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자기주도권 (다른 말로 하면 주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을 지니라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개인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압력을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소설은 제시할 수 없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최영의 소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에서 만나보게 된다. 같은 카페에 있는,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 속해 번역일을 하는 사람과 영상 번역을 하는 사람, 단행본을 번역하는 사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다른 번역일을 하는 환상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이들은 같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속에서도 다른 이의 일들에 환상을 품고 있다. 물론 자신이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이렇게 비슷한 환경 속에 녹아 있는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오해를 하고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없어도 곧 대체 가능한 존재들 아닌가.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학습지 교사 등등. 


첫소설에 나오는 '우리는 순간접착체 같은 거네요?'(35쪽)라는 말이 마음에 아프게 와닿았다. 필요할 때만 쓰는. 그러나 늘 함께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


순간접착제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계급proletariat'가 합쳐진 말이라고)가 되겠다. 즉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고 확산시키는 사회. 아파트 단지에 있던 벤치와 나무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듯이 그렇게 한 순간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그럼 이런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지? 다른 건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못된 것이 내 잘못만이 아님을. 또 우리는 이렇게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할 문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월급사실주의란 말에 어울리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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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제 이 시집은 헌책방에서 구하든지,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한다. 


  서정춘 시인이 젊은 시절에 한 것처럼 어쩌면 이 시집을 빌려다 한 편 한 편 손으로 써야할지도 모른다.


  필사. 시를 읽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쓰면서 그 시를 읽고 또 쓰면서 생각도 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절판된 시집, 찾아서 필사를 하는 것도 시를 읽는 한 방법이 되겠다.


필사하기가 힘들다면 그냥 읽으면 된다. 어느 도서관에든 있을 테니까. 나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왜 미리 구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를 읽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죽편]을 만난 것이 그렇게 일찍은 아니니까, 서정춘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가능하면 이 시인의 시집은 다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번 시집도 역시 짧다. 서정춘 시인은 긴 시를 쓰지 않는다. 언어를 다듬고 다듬어서 시로 내보낸다. 그렇다고 모두 짧지는 않다. 이 시집에 무려(? 서정춘 시인의 시라면 무려라는 감탄사가 들어갈 수도 있다. 다른 시인들에게는 그것도 짧은 시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두 쪽에 걸친 시가 하나 있다. '기러기'라는 시다. 


하지만 다른 시들은 모두 한 쪽에 들어 있으니, 특히 제목이 된 '귀'라는 시는 한 문장이다. '귀'가 무얼까?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달이다. 하, 낮달. 


                              귀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서정춘, 귀, 시와시학사. 2005년 초판 2쇄. 9쪽.


이게 다다. 가끔 낮에 보이는 달. 그 달을 보고 시인은 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귀라고 표현했다. 참신한 표현. 이렇게 두드러지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또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은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들리지 않는 소리조차도 들으려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존재들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열린 귀,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열린 사회다.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찬가지로 시인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또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들, 또 들으려 하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존재가 아닌가 했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시인들이 쓴 시들을 읽으면  그러한 귀를 가지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즐거운 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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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하류... 흘러 흘러 도달하는 곳. 아니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 온갖 곳에서 온 물들이 모여 새로운 물,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곳.


  그곳은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다른 존재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 그곳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곳들을 거쳐야 했던 물들이, 다른 존재들이 모였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곳.


  하류에 도달하기 위해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와야 했던 존재들. 그런 소중한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시를 읽으며 하류의 고요함, 풍성함, 다양함, 그리고 잠시 휴식을 생각한다. 고단한 여정에 쉼을 주는 곳이 하류라는 생각.


이 하류를 좋아하는 시인. 그런 시인이기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짧은 시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만나 감탄을 하곤 한다.


대나무에 관한 시 중에 '대밭일기'라는 시가 있는데, 우리가 쑥쑥 자라는 모양을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고 표현한다. 비가 그친 뒤에 죽순이 쑥쑥 자라난 모습을 표현하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비 갠 뒤 / 대밭 속 / .../ 죽순이 올라 있다 / ... / 竹竹'(29쪽)'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죽죽 자란다를 한자어 대 죽(竹)자를 써서 죽죽(竹竹)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소리내어 읽으면 '쭉쭉'으로 읽히기도 하고, 하하 죽순이 올라오는 모양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표현이 참신한 시도 있지만, 지금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겨울에 눈사람이 빠질 수야 없지. 시인은 그러한 눈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읽으면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미소展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주시니 방긋 웃으시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


서정춘, 하류, 도서출판b. 2020년. 10쪽.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시. 이런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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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
권진관 외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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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다. 함께 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책. 웬만하면 신영복 선생의 책은 다 읽어보려 하고 있다. 오래 전에 녹색평론에 실린 '나의 대학시절'이란 글이 신영복 선생을 처음 만나게 했고, '청구회 추억'으로 신영복 선생의 글을 거의 다 찾아 읽게 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후에 읽게 되었는데, 이어서 '나무야 나무야'를 읽으며 이토록 쉽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라니, [강의]와 [담론] 역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런 선생이 더 우리 곁에 있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선생은 갔지만 선생이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래서 신영복 함께 읽기, 신영복 다시 읽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읽기, 아니 계속 읽기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신영복 선생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부동이라는 말.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선생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화이부동이지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고 했다.


즉 화(和)를 추구한다는 것은 똑같지 않다는 말이다. 똑같지 않기에 '관계'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관계맺기에 신경써야 한다. 즉 관계론이다. 신영복 선생이 존재론에서 나아가 관계론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화이부동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동이불화는 무엇인가? 바로 관계를 지우는 것이다. 동(同)을 추구한다는 말은 차이를 없애려 한다는 말, 이는 한 쪽을 다른 한 쪽이 흡수해버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흡수일 뿐이다. 그러니 동의 논리는 중심의 논리다. 중심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삶, 이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화(和)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주장했다고 한다.


화란 관계이고, 이는 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 거리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함께하기 위해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는 어디서 실현되는가? 바로 변방이다. 변방은 하나로 뭉쳐진, 관계가 없는 일방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이런 변방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왔다.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화의 논리보다는 동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배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신영복 다시 읽기가 필요하다. 동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을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자체가 화의 논리를 실현하고 있다. 어느 하나로 신영복 선생을 규정하지 않고, 선생이 지녔던 다양한 모습을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이 느낀 대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들이 알려주는 신영복 선생의 다양함을 인식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거기서 자신을 읽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발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영복 다시 읽기 아니겠는가.


이 책에 실린 신영복 선생에 대한 글들을 몇 가지 말로 정리하면 '화이부동'과 '관계', 그리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과 '변방'이 될 것이다. 이 말들이 하나로 꿰어질 수 있음을.


이 말들을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로 꿰어보면, 중심으로 가려는 동의 논리를 부정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서 변방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실천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입장의 동일함'은 동의 논리, 즉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는 더불어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글들 속에 그간 알고 있었던 신영복 선생의 좋은 말들, 또 그의 글씨를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지금 시대를 보는 눈을 갖추고 함께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신영복 다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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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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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단어로 창(窓)이라고 하는 것과 여기에 다른 단어인 문(門)을 붙여 창문(窓門)이라고 하는 것은 주는 느낌이 다르다. 창이라고만 하면 그냥 바라본다는, 뚜렷한 경계가 있고, 이 경계로 안과 밖이 나뉘어 있는 듯한 느낌, 드나들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창문이라고 하면 문이라는 말 때문에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지만 서로 드나들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지만.


창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창문으로는 많은 것들이 드나든다. 이 책에 창문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말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창의 영어 이름 'window'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말 'vindaug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영어로 치면 'wind'와 'eye'의 합성어로, 바람의 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람의 눈이라, 꽤 시적인 감성이다. 집의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그곳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기에 창문이 집의 눈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여긴 것 같다'(25쪽)고 하고 있는데, 바람의 눈이라 저자의 말대로 시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말이다.


이렇게 창문은 밖을 안으로 들이는 역할을 한다. 또 안에 있는 존재를 밖을 보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문처럼 그곳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만든다. 


이런 역할을 하는 창을 예술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저자는 예술, 특히 그림에서 창문이 그려진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경계 위에 서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창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계에 서서 밖을 보고, 이 경계를 통해 밖의 존재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빛과 그림자라고 해도 역시 창을 중심으로 구분이 된다. 그렇게 경계를 이루는 것, 그것이 창문이다.


그런데 그냥 경계를 그어 서로 오도가도 못하게 하지 않는다. 창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준다.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저곳을 추구하는 존재. 경계에 선 존재들이다. 


2부는 '창문 너머 빛이 이끄는 대로'라는 제목이다. 이제 창문 너머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창문이 있는 그림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곳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다른 세계도 있다고. 자, 이 그림들을 보라고... 그림 속 인물들. 창문 앞에 있지만 이들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들이 보고 있는 세계를, 그림 속에는 비록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그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나아간다.


3부는 '그렇게 활짝 열어 두었다'라고 한다. 창문은 열려 있을 때 바람을 안으로 들일 수 있다. 우리를 밖과 연결해준다. 밖을 직접 안으로 들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비록 몸이 창문을 통해서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영혼이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창은 밖과 안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밖과 안의 경계를 보여주지만, 밖과 안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언뜻 보고 더 나아갈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이 창문이다. 이렇게 창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썼다.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은 저자에게 또다른 창문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창문 너머 예술]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하고, 우리 역시 이 책을 통해 저자 또 다른 예술,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게 된다.


그림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나를 또다른 나와 또 다른 존재들과 연결해준다고 할까. 


낯선 작가들을 많이 만나게 해준 책이기도 한데 예술 작품 감상에 대한 저자의 이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예술을 감상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림에 빠져든 이유는~ 어떤 작품의 의미를 쫓아가면서 작가의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복잡한 감정들, 역사적인 맥락들, 그리고 숨겨진 비밀들을 발견하고 알아채는 그 과정이 꽤 흥분되고 보람찬 것이다.'(133쪽)


이렇게 그림은 저자에게 창문 역할을 했으니, 내게는 저자의 이 책이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창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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