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과 물리학.


거리가 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가 만났다.


사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관련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이 과학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여러 분야들이 전문화되어, 전문가들만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문가들이 하는 역할이 있고, 세상은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


각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미술과 물리학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고,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을 보면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많은 그림들과 여러 물리학 이론들이 나오지만,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핵심이 그림에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을 설명하는 것이지, 물리학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예로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로서, 또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저자는 우리를 그림의 깊고도 넒은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편으로 물리학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 그림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또 화가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고.


특히 뒷부분에 가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림에 숨어 있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들을 빛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부분.


빛의 파장을 이용해 우리는 그림에 가려진 부분을 찾아내고, 화가의 노력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림 유파의 다양성을 여러 물리학 이론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부분도 좋지만 많은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더 좋다.


학문간 융합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전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교육의 힘에 대해서 말하겠지 하는 기대를 했다. 이런 구절에서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109쪽)


그런데 아니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서 관점이 뒤틀린 사람이 제 관점을 찾아가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은?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이건 '배움의 발견'이 아니라 '교육의 해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배움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위에서 주어진다는 생각. 사실 교육이 내면에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능력들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책은 끝나갈 때까지 광신적인(?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기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모습은 '배움의 발견' 아니라 '교육에서의 탈출'이라고 해야 맞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지닌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으려나?


학교, 정부를 사탄으로 보는 모르몬교도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엄마에게서, 이들에게는 병원 진료조차도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되니 참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생이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


하지만 아무리 가리고 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어야 한다. 자식이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인 존 웨스트오버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자식을 견딜 다른 관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관점, 자신이 믿는 종교, 거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계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독립해 나아가려는 타라는 회개시켜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눈 앞에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기도할 줄 아는 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발 앞에 어린아이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213쪽)

어떤 운명도 아버지와 그 여성을 함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잃을 것이다. (214쪽) 


이 말이 핵심이다. 자, 나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있다. 둘 다 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있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로 남아 가족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타라는 타일어 오빠의 말을 듣고 대학에 간다. 대학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와 헤어지지 않았다. 자신 속에 있는 아이 말을 듣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지니고, 다른 관점을 알기 시작한다. 배움의 발견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쪽)


이 부분은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언니인 오드리에게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가부장제인 가족 형태를 바꿀 수가 없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저항을 했던 오드리는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나중에 타라에게 하는 말을 보면 섬뜩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드리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숀이라는 오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막는다. 엄마에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면 타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


맹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틀을 깨고 자신들을 바라볼 거리가 없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자신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교육만 있다. 아버지가 제시한 교육. 즉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잡지 않는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온 자식들은 볼 수가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배움을 발견한다. 배움의 발견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ㅈ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373쪽)


그렇다. 배움의 발견은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움, 고통, 그리고 인내,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분열. 하지만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471쪽)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   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7쪽)


교육이라는 자아를 지니기 위해서 거쳐왔던 지난한 세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타라는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이겨낸다. 그렇다. 이미 타라는 배움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던 아이와 이제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책 저자의 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14쪽)고 했다. 그렇디.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자식들을 허용했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삶을 자식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고,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는 타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라가 결정해야 한다. 아버지의 교육과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에서 독립한 자신의 삶을 찾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쓴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다. 아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뭐 이따위 가족이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종교 강요, 가정 폭력. 홈스쿨링을 빙자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조금이라고 그 틀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배제하는 모습. 심해도 너무 심한 폭력이다. 아이들 머리를 쥐어박아도 경찰서에 갇히는 그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자신의 관점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지, 그러한 교육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인데... 


정말 소설 같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결론이 궁금해져서. 이 글을 썼으니 적어도 저자가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읽는 그런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처럼 살아간다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김현수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존재. 움직임 없이 보이나 늘 움직이고 있는 존재. 변화를 못 느꼈는데 어느 새 확 변해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 상처를 입어도 상처를 메우고, 가지를 잘려도 새로운 가지를 내는 존재. 우리 몸에 해로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해 주는 존재. 물을 흡수하고, 토양을 묶어주고 또 땡볕일 때 그늘을 제공해주는 존재. 잘려나가도 그루터기로 남아 우리가 앉아 쉴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잘려 나간 가지들이 땔감이 되어 우리에게 온기를 주는 존재. 우리들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예술 대상이 되어 주는 존재.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좋은 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그림책이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 삶에서 나무를 제외하면 과연 삶이 유지될까 싶을 정도니, 나무는 우리 삶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나무를 우리는 우리 이익을 위해 가차없이 가지를 잘라버리거나, 밑둥을 베어버리거나 하고 있으니.


이 책에는 많은 나무가 나온다. 나무의 생태를 이야기해준다기보다는 그 나무를 통해서 우리가 삶에서 지녔으면 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가령 '솔송나무'편에서는 '햇살 누리기'를 배우라고 한다. 우리가 해가 없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듯이, 자외선이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햇볕은, 햇살은 우리들 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리고 햇살, 햇볕은 우리들 정신 건강에도 좋다. 그러니 솔송나무처럼 햇살 좋은 날에는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자고 한다. 이렇게 아주 짤막하게 나무와 삶의 자세를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한 나무만 더 보자. 그냥 아무 쪽이나 펼쳐도 된다. 그래도 '사시나무' 편을 들고 싶다. '우리는 서로의 힘'이라는 제목이다. (이 책, 14쪽)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이 시대에, 나무를 통해서 위험에는 서로 경고도 해주고, 또 좋은 것, 필요한 것은 함께 공유하는, 힘들수록 서로 손을 굳게 잡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함을 사시나무의 뿌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는 삶이라면 소외라는 말이 사라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나무는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다른 존재들까지 포용해서 숲을 이룬다. 그 숲을 통해서 지구가 더욱 아름다워지게 하고 있다.


  우리들 삶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말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삶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많은 나무들을 통해서 삶에 대한 경구를 얻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다. 힘든 때 여유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이 책은 쉽게 읽힌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시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결말이 끝에 가서야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사례들이 나온다.


핵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제목이 '타인의 해석'이라고 번역을 했다. 그냥 '낯선 이와 이야기할 때'라든지, '낯선 이와 만날 때'였으면 훨씬 좋은 제목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때 낯선 사람은 자신과 관련되어 처음 만난 또는 여러 번 만난 사람이다. 여기서 예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정보부에 일하는 사람, 경찰과 관련된 사람, 그리고 학교와 관련되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에 만난 사람, 또 유명한 시인인 실비아 플라스 같이 자살을 한 사람이다.


결국 낯선 이라고 하지만 이 낯선 이는 나와 관련을 맺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책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서로의 갈등을 줄이면서 소통하면서 잘 지낼 수 있는가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대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세 가지 쟁점을 들어서 우리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진실 기본값'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우선 의심하기보다는 환대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진실 기본값이고, 이 진실 기본값 때문에 종종 속아넘어간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에 관해 아무런 의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은 의심의 부재가 아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에 관한 의심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107쪽)


그러니 우리가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전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문에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무조건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고 시작하는 것이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속는 것은 이런 경우라고 한다.


당신을 믿음의 경계 너머로 밀어낼 만큼 충분한 위험 신호가 있었는가? 만약 없었다면, 진실을 기본값으로 삼은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을 뿐이다. (107쪽)


만약 경찰이 진실 기본값을 지니지 않고 시민들을 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많은 시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책 처음에 나온 경찰과 시민의 갈등처럼...


또다른 하나는 '투명성 가정'이다. 표정이나 행동에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표정과 이런 행동, 저런 상황에서는 저런 표정과 저런 행동을 한다고 하는 투명성 가정.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가정인지는 여러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사건에 따라서 거의 모두가 다른 표정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표정이나 행동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면 오판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여러 장에 걸쳐서 주장하고 있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을 예로 들었을 때, 그런 표정,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하긴 이 책에는 더 중요한 예가 있다. 바로 영국 수상이었던 체임벌린과 히틀러의 대담.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나 그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판단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는 방향으로 체임벌린의 판단이 내려졌던 것. 


여기에 미국 판사들이 피의자들의 얼굴이나 태도를 보고 판단한 결과가 컴퓨터가 피의자들을 보지 않고 판단한 결과보다 형편없었다는 통계. 또 세계적인 경제 사기범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들을 들어, 투명성 가정이 얼마나 낯선 사람을 잘못 이해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명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술이고 또 하나는 고문이다. 술로 인한 성폭행 사건이 비일비재한데, 술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린다고, 그래서 우리나라 사법부에서는 심신미약으로 형을 감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술은 판단력을 흐리는 근시의 위력이라고 한다. 


즉 눈앞에 있는 일만 보이는 것. 그 뒤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정말 심신미약이 아니라 판단력이 지금 당장 자신의 앞에 있는 일에만 작동한다는 것. 그래서 술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성폭력(폭력사건 등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 심신미약이라고 감형하는 것이 아니라. 술로 인해 이미 자기 행동의 결과를 잘 예측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많이 마시는 것 자체가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고의' 그 자체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고문으로 인한 자백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에서 그 점을 입증하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모건의 연구에서 이 점이 잘 나와 있는데... 이런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심문의 관건은 대상자의 입을 여는 것이었다. 대상자의 기억을 억지로 열어서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만약 굴복을 확보하는 과정이 대상자에게 너무도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해서 그가 실제로 기억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임이 밝혀졌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모건은 성인이 아이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303쪽)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인 군인들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을 왜곡한다. 그러니 고문을 통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낯선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진실에 다가가기가 매우 힘들다. 자신을 복잡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남을 단순하게 판단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글래드웰은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탐색에 실제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절대 진실의 전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온전한 진실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올바른 방법은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311쪽)


그러면서 세번째는 행동이 특정 장소나 특정 대상과의 결합됨을 제시한다. 어떤 행동에는 장소나 대상이 결합되어 있어서, 장소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꾸면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실비아 플라스다. 실비아 플라스를 예로 들고 있지만, 이는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아간다.


즉 그들의 행동은 특정 장소나 대상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들의 행동을 막으려면 그 장소에서 행동하기 힘들게 하든지,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경찰이 단속을 전국적으로, 수시로 하는 일이 얼마나 효과 없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장소나 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세 가지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낯선 이를 판단하고 행동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낯선 이와 이야기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만약 낯선 이와의 대화가 틀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그 낯선 이를 비난한다. (401쪽)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 책임을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 마지막 구절이 머리를 때린다. 그래, 낯선 이를 비난하긴 쉽다. 그러나 낯선 이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자신은 낯선 이와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를 했는가를...


감수한 사람이 쓴 글(감수사)에서 타인을 파악하려 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내용을 정리했다고 보면 된다.


첫째, 우리가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해석하는 것에 지독하게 서툴다는 점을 인정하자. (9쪽)


둘째, 낯선 사람을 보고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그의 말과 행동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뜻이다. (10쪽)


셋째,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는 대화 내용보다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1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1-1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한 권 다 읽은 것 같은 페이퍼네요!! 감사합니다!!^^

kinye91 2021-01-18 09:30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를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문장으로 이번 호를 시작한다. 이번 호에서는 민주주의 특집이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얼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제대로 답변을 못하게 된다.


  그냥 막연하게 민주주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치열하게 또 치밀하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또는 형식적 평등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선거 때가 되면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행위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려운 문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에도 너무도 다양한 편차가 있다. 극우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극좌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중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민주주의, 중도라고 해도 다시 중도 좌파와 우파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에도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나 싶다. 특히 형식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본질은 쏙 빼버려도 형식만 갖추면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된다.


수차례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형식적 민주주의는 달성했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폭과 깊이에서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정의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뜻을 백날 정의해도 실천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아닌가. 


이번 호에서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좌담에서는 그래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다룬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 서로 상충되는, 그래서 서로 보충해야 하는 글들도 있다. 즉, 비례대표 연동제와 추첨민주주의... 언뜻 보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비례대표제는 대의제를 대표하는 정치 체제이고, 추첨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비례대표제가 그나마 제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위성정당 논란이 있듯이 비례대표제가 왜곡되어 실현되었다. 그러니 비례대표제로 가자는 주장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니콜라스 코코마가 쓴 '추첨제 민주주의의 귀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주의자들은 현재의 정치제도의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또 단지 정치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을 꿈꾼다. 그럼에도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그들의 도구는 여전히 과두제 방식(선거, 정당, 정치인)이다. (79쪽)


비례대표제도 문제가 많은데,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대의제를 택해서 선거날 투표 한 번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이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와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전문적인 집단(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 교육 수준으로는 대졸 이상, 사회에서 통용되는 직업 종류에서 중간 이상 등등)에게 넘겨주고 마는 현상이니...


정치적,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되, 정책 입안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현실. 그러므로 기껏 정책에 참여하는 길은 시위를 통한 압력 밖에 없다.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그러한 방법으로 제도권 밖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지금 정치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입법 과정을 보라. 그리고 정치권에서 벌이는 정책들을 보라. 여기에 민중의 참여가 어디에 있는지...


그러니 많은 부분에서 민주주의에 어긋난 결정들이 나와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겪어도 정부에서 주도하는 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고, 이 사태로 인한 사회의 변화에 어떠한 참여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와 민주주의(박승옥), 기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이광석), 자기절제와 민주주의(야보르 타린스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가(야니스 바루파키스) 등의 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정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류세를 극복할 수 있을까(인류세에 인간을 다시 생각하며-노면 위즈바)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교육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학습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정현이)'은 생각해 볼 만하다. 여기에 다른 논의들도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에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난제들, 소수의 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없다. 또 그들에게만 해결을 맡겨서도 안된다. 민주주의...바로 주권자들의 참여로 실현할 수 있다. 좀 더디더라도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인식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참여민주주의가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번 호는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1-16 0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민주주의.. 진짜 답변하기 어렵네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내 맘대로 되야해!‘가 아닌지.. 정말 교육이 중요한데.. 하.. 답답한 현실입니다.

kinye91 2021-01-16 09:26   좋아요 1 | URL
답답하죠. 내 맘대로 해도 돼, 내 뜻대로 되어야 해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데, 자유보다는 자율이라는, 절제와 양보에 대한 생각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이잖아요. 그래도 교육에서 민주주의는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교육이 중요하고, 절대로 교육에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