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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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0년 전에 수상한 작품들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계속 존재한다. 소설은 당대 현실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야 소설이라는 이름을 계속 지닐 수 있게 된다.


7명의 작가가 선정되었고, 작품도, 작가의 말도, 해설도 모두 7개다. 그러니 이 작품집에는 심사경위와 심사평까지 합쳐 23개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이다.


젊은작가상 답게 작가에게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젊은 비평가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있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요즘 누가 평론을 읽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작품집을 읽다보면 평론 부분을 읽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이해한 작품과 평론가들이 말하는 부분에서 어떤 교집합이 나오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교집합을 토대로 합집합으로 나아간다. 하여튼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김애란이 쓴 '물속 골리앗'은 홍수라는 재난을 당한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난으로서의 홍수는 예전부터 늘 전해오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그것을 비튼다. 재난으로서의 홍수는 징벌로서 의미를 지닌다. 인간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징벌.


그렇다면 홍수는 그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 자들을 징계해야 한다. 그것이 옛이야기에서 전해주는 재난으로서의 홍수다. 징벌로서의 홍수. 그러나 현대사회에 들어서 홍수는 힘있는 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들을 징계하지 못한다. 오히려 힘이 없는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 빠진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재개발되는 아파트. 이주비용이 턱없이 적어 이주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족. 설상가상으로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표류. 


열심히 살아왔지만 오히려 홍수의 피해는 무고한 가족을 덮친다. 현대 재난은 이렇게 불평등하게 다가온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소년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그 희망이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속 골리앗이라고 하지만, 거꾸로 우리에게 골리앗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이 최후로 올라가는 곳이다. 홍수로 골리앗의 중간부분까지 잠겨있다는 것은, 이미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골리앗에 올라 주장을 하듯이, 소년은 골리앗에 오른다. 우리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장소. 그곳이 바로 골리앗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한없이 힘든 과정 속에서 그래도 살아남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밑에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골리앗 위에 있는 사람과 연대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골리앗 위에 있는 사람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위에서 자신과 함께 하려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견딘다. 소설에서 소년이 "누군가 올 거야."라고 조그맣게 속삭였듯이.


비슷한 의미의 작품이 정용준이 쓴 '떠떠떠, 떠'이지 않을까 싶다. 말을 더듬어 거의 하지 못하는 남자와 기면증으로 툭하면 쓰러지는 여자. 이들 역시 사회에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자리를 잘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럼에도 이들은 살기 위해서 탈을 쓴다. 사자와 탈과 팬더의 탈, 그리고 서로 의지한다. 한 쪽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내면서 견뎌내는 것.


결국 사랑이란 상대의 단점을 고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려는 것, 아니 단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단점도 함께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이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가 또다른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다섯 편의 소설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이 두 편의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전세계가 재난을 당하고 있는 이 때,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에게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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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2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남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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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모자이크와 같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사건을 이끌어가지 않는다. 마드리드 어느 골목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표현되고 있다.


시간 배경은 그리 길지 않다. 며칠이 전부다. 그렇지만 그 며칠 새에 그들이 살아온 삶들이 드러나고 있다. 모두들 자신만의 경험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이들의 삶은 어딘가 비틀어져 있다.


스페인 내전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스페인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시작은 카페를 중심으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하나 사연을 지니고 거기에 모여들게 된 과정이 나오게 되는데...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이지만, 이 사람들의 삶이 중산층의 삶이라기보다는 빈민층의 삶에 더 가깝다.


물론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몸을 팔아 사는 여인들, 돈이 없어 다른 사람의 돈으로 지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스페인 내전 이후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면 되겠는데, 벌집이라는 제목처럼 사는 곳 또는 쾌적하지 않다. 그리고 벌이 들락날락하듯이 이들 역시 자신들의 집을 들락날락한다. 


집이 결코 편안한 휴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줄거리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많은 인물이 나와 인물들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다.


또 이 인물 저 인물이 수시로 나왔다 퇴장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파악하려면 꽤 읽은 상태여야 한다. 그러면 이제 퍼즐조각이 맞춰지듯이 인물들의 삶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소설의 작가는 프랑코 반군 쪽에 가담했던 사람으로 공화파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소설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쓸 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표현하는 스페인 내전 이후의 스페인 사람들의 삶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하루하루 살기 힘들게 서술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비참한 삶을 기록으로 남기면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더 나아가게 된다. 도대체 이 사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런 사회를 개선하려면, 또 이런 사회에서 어떤 삶이 최선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전 이후 스페인 사람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점이 이 소설이 지닌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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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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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악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망설이지 않고 우리는 유전 요인을 든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서 반반 물려받은 유전자 어디엔가 폭력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전이 모든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아마 행동은 모두 똑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복제를 한다고 해도, 복제인간이 태어난다고 해도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복합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다면 악하게 하는 요인으로 환경을 들 수 있다. 다시 한번 속담을 인용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다. 이 말은 유전에도 해당하지만 환경에도 해당한다. 아버지가 한 행동을 보고 자란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를 '어머니 또는 부모, 가족'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합쳐지면 악한 행동을 할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유전, 환경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까? 가족의 유전이나 환경에 책임을 묻는 것이 의당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렇다면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폭력 행위에서 사회의 책임은? 바로 유전이야 생체 문제니 논외로 치더라도 가족 환경은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릴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족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음에도 개선하지 못하도록 방치해둔 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제대로 작동을 한다면 폭력 행위는 많이 감소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파스쿠알은 가족의 유전, 환경적 요인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어머니.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적인 유전, 환경은 그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결혼식에서 오다가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칼을 휘두르는 파스쿠알.


그에겐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에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에겐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그에게 사회가 어떤 제재, 또는 교화를 해야 하는데, 그는 이 사건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하긴 신혼여행을 가는데 타고 가던 말이 노파를 쳐서 노파 머리가 깨졌음에도 이들은 돈 한 푼 던져주고 갈 길을 가버린다. 그리고 노파 손자가 찾아왔지만, 그 역시 돈 한 푼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리고.


이렇듯 사회에서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는 일로 치부된다. 그냥 있을 수 있는 일. 이런 사회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나약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사회가 적절히 개입하고, 환경을 조성한다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파스쿠알에게는 그런 사회가 없다. 그냥 묵인, 방조다. 그러니 그의 폭력은 살인으로까지 간다.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친구를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죽이고 만다. 또다시 폭력이다. 이번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형량은 28년인데 3년만에 나온다. 이런 세상에! 살인이 겨우 3년이라니...


집에 온 그에게 또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어머니다. 물론 망설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죄책감 없이 죽일 수는 없다. 그 정도다. 겨우... 그리고 다시 감옥행인데...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다. 가족에게서 늘 보아왔던 폭력이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묵인되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에서 그에겐 반성이란 없다. 그러니 사회라는 가장 커다란 환경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으면 개인의 폭력을 멈추기 힘들다.


결국 개인의 유전, 환경이라는 요소를 사회가 감싸안으면서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 사회에도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스쿠알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여기까지 좋다. 사회가 바람직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그런데 작가 이력을 보니,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는데, 세상에 프랑코 반란군에 가담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금방 부상을 당해 전선에서 이탈을 했지만. 그리고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랑코 독재에 부역한 인물이란 얘긴데...


읽으면서 찝찝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무어지? 폭력에 개인의 유전, 환경에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에도 물어야 한다면? 이 소설에서 배경이 되는 사회는? 바로 프랑코 독재 이전의 사회다. 이런!!! 


프랑코 독재 이전의 스페인 사회는 폭력을 제어할 어떤 사회적 규범도 없는 사회,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였다는 말이 된다. 폭력적인 개인을 들어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 프랑코 독재를 옹호하는 그런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대입하면. (이 책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 작품 내용과 관련지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 소설 참 문제 있는 소설이다. 그런 점을 잊지 않지는 말아야 한다.그점을 잊지 않고 현대 사회에 적용을 하자. 


폭력은 개인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하여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강제에 의한 규제가 아니라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아니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인데, 폭력은 개인에게서만 책임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족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이 가족은 사회의 일원이고, 사회는 가족들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런 가족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이 소설, 프랑코 이전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은 잊지 말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로 읽자. 개인-가족-사회라는 원을 그리고, 개인이나 가족이 사회라는 원 안에 있음을 명심하도록 하자. 


어떤 행동에는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사회에도 그 못지 않게 큰 책임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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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에서는 함께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빅이슈 표지 모델이 되는데, 그 표지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어서 좋다. 이번 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 출연하는데, 영화 속 인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한다.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 그런 생활.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는 내용 중에 마음에 와닿은 것은 뭇생명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물론 코로나19로 세상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가운데서 그나마 희망을 찾고, 또 자신들이 할 일을 찾는 기사들도 좋았다. 그럼에도 빅이슈라는 잡지와 연과지어 보면 뭇생명들의 소중함을 다루는 기사야말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지, 그 어떤 무고한 생명도 땅에 묻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에 가려 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서 살처분되는 가금류들이 한둘이 아니고,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이동 통로를 차단당하고 사냥을 당하는 멧돼지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어떤 질병이 발견이 되면 반경 몇 킬로미터 내에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질병도 없는데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이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빅이슈가 노숙인들의 재활을 돕는 역할을 하는데, 노숙인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약자에 해당하지 않는가. 그런 그들에게 살 공간이 아니라, 살 방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정책을 편다면 그 정책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보다도 더 약한 존재들이 바로 닭, 오리, 돼지들과 같은 동물들 아닌가. 이들 역시 특정 질병이 유행하면 살처분되는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문제점들이 계속 지적되어 왔는데, 왜 아직도 그런 방식들만 실시되고 있는지...


빅이슈를 통해 다시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동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지구는 인간만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다. 인간을 비롯된 수많은 종들이,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지구라는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들도 소중하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뭇생명들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점에서 기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조천호 대기과학자와의 인터뷰도 참으로 소중하다.(대안적 시스템, 지금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


빅이슈를 읽으면 뭇생명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함께 존재해야 하는 모두 소중한 존재니까. 그 중에 내 주변에 있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내는 생활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게 바로 빅이슈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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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를 읽으며 에셔를 생각했다. 이것과 저것이 함께 존재하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를 발견하는, 그러나 둘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그림.


  에셔 그림을 검색해 보면 참 다양한 그림들이 나오지만,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림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 세상은 논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거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들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창기 시 중에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를 읽으면 그러한 에셔의 그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살아있음에서 죽음을 발견하게 되는 시. 이 시는 처음에 살아있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마치 에셔 그림에서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어서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아올린다

새순 돋듯

나 갑자기 눈이 부셔

실눈을 뜨니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코카콜라처럼

날뛰고 있다


배고프겠구나

세상의 물줄기란 줄기를 죄다 뜯어먹으렴

그 잔뿌리 잘라 지붕에 말려

두고두고 국 끓여먹으렴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라올린다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이창기, 이생(生)이 담 안을 엿보다. 문학과지성사. 1997년. 20쪽.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의 환희에서 죽음으로 넘어가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행동에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죽음들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그러니 삶이면 다른 존재들의 죽음에 바탕하고 있는 것. 즉,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라는 감탄은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삶을 허투루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수많은 죽음에 기대고 있는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더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함께해야만 하는 존재다.


더 확장하면 한쪽 면만 보지 말고 반대 면도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은 단 하나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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