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최승자 시집을 읽으면 온통 없음과 빔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꽉 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 텅 비게 된다. 우리 삶은 충만함과 텅빔이 공존하고 있다.


  비우지 못하면 채우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면 비우지 못한다.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이다,.


  그렇게 이 시집에서는 어느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사라짐이 있으면 나타남이 있다.


  그게 인생이다.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느 하나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쪽에 자신을 두다가, 어느 순간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최승자의 이 시처럼.


  이 세상 속에


이 세상 속에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이 있다

겹쳐 있으면서 서로 다르다

그 홀연한 다름이 신비이다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년. 30쪽.


더 말이 필요없다. 수다스러워지면 안 된다. 그냥 이렇게 시를 감상하자. 다른 시를 보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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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30년 전쟁의 한 연대기 범우희곡선 25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연희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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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작품은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거나 보면 안 된다.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은 등장인물과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그것을 한자어로는 소격효과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 옮긴이는 생소화효과라고 한다.


즉 낯설게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게 하는 것. 그러니 브레히트의 이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도 주인공인 억척어멈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억척어멈에게 감정이입을 하면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자식을 잃고도 살아가고자 하는 한 여인의 삶에의 의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이 그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브레히트는 개인의 운명조차도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속해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개인의 삶을 바꾸려는 것보다는 사회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마르크시즘에 빠져 있었으니, 개인보다는 사회, 제도를 우선시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도 사회구조를 찾아야 한다. 즉, 전쟁 속에서 전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이용해서 살아남으려는 모습이 아니라,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억척어멈은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종군상인이다. 변변치 않은 물건을 얻고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억척어멈의 기원일 뿐이다. 자식들은 전쟁의 와중에 하나둘 죽어간다.


병사로 죽어가고,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경고를 하다가 죽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자식 셋을 모두 잃고도 억척어멈은 전쟁 부대를 따라간다. 왜? 살아가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억척어멈처럼, 그렇게 억척스럽게 전쟁 통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식을 모두 잃고 살아남은 억척어멈이 과연 행복할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살아남기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아닐까? 이념이나 종교로 분열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용한 삶이 아니라 전쟁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 희곡은 억척어멈을 통해서 전쟁을 거부해야만 우리의 삶도 평안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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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우리가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한다. 우리 눈에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시는 별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별것이게 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참 별것들이 많다. 별것이라는 말이 그렇다면 특별한 것들 투성이다. 아니 존재한다는 자체가 바로 특별이다. 모두가 특별하다. 그런 특별함을 때로는 외면하면서 지내오다가 시를 읽으며 특별함을 다시 발견한다. 


  양정자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일상에서 주로 만나는 사람들, 일들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을 갈 때 무심히 지나쳤던 제주 역사를 시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했고.


  산에 가서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슥 지나갔던 꽃들, 나무들, 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시인은 '우리들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의미한 일상이 바로 시가 될 수는 없을까에 오랫도안 천착하다 보니, 시들 자체도 매일의 일상처럼 지리멸렬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시인의 말에서)고 했지만 아니다. 시는 그렇게 우리가 의미를 찾지 않고 보냈던 수많은 일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많은 시들 가운데, 특별히 '숲 속 세 개의 길'을 인용한다.


  숲 속 세 개의 길


녹음이 우거진 우리 동네 아름다운 숲에 원래

자연스런 하나의 흙길이 있었네

키 작은 잡풀과 풀꽃들이 어우러진 푸른 숲 바닥에

오래도록 사람들이 지나다녀 또렷이 다져진

숲과 어우러진 수수하고 자연스런 흙길, 어느 날 구청 사람들이

그 흙길 위에 네모 반듯반듯한 시멘트 블록을 깔았네


깔끔하지만 어쩐지 어색하고 생경해 보이는 그 시멘트 블록 길

그 단정한 시멘트 길로만 얌전히 다녀

더 이상 숲속을 망치지 말라는 듯이 그러나

그 단정한 시멘트 길로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네


사람들은 그 시멘트 길을 비웃듯 피해 다녀

그 시멘트 길 바로 옆

위로 아래로 두 개의 흙길이 새로 더 생겼네


숲을 보호한답시고 깐 시멘트 블록 길 때문에

두 개의 새로운 흙길이 더 생겼다네


이런 것이 바로 현실 인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이라는 것이겠지


양정자, 꽃들의 전략. 천년의 시작. 2018년.  64-65쪽.


이런 일이 많지 않은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싹둑싹둑 잘라버려, 가지치기가 아니라 몸통치기가 되어버려 나무들이 그냥 일자로 무슨 전봇대 마냥 서 있는 도시의 나무들.


길 양 옆으로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터널을 만들어주는 나무들을 정비한다고 가지를 뭉텅잘라내어 터널을 없애버리는 나무 가지치기.


아파트 건물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가지를 잘라내 흉물스럽게 변한 나무들. 


그럼에도 나무들은 다시 가지를 내고, 잎을 낸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등산로를 정비한답시고, 등산로에 시멘트를 깔아놓으면 그 길보다는 그 길 옆으로, 흙을 밟으며 가곤 한다. 그래서 길이 더 넓어진다.


자연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있고 싶어하지, 인공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인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에 별것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이렇듯 양정자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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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공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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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 소설로도 그렇고, 사회 참여글로도 그렇고, 다른 이유로도 그런 사람. 젊은 시절에 공지영 작품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공지영이 쓴 '수도원 기행'을 읽는 적도 있고. 최근에는 '의자놀이'를 마지막으로 공지영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는데, 그런 공지영이 섬진강변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섬진강도 좋고, 지리산도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


참 한적하고 여유로운 유유자적하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거부하게 만든다. 처음에 이런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죽어도 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굴곡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싶다.이 문장 하나로 공지영이라는 사람이 다사다난했던 삶을 살았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가 '사람이다'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표현에 눈길이 머문다.


과거형이다. 과거형이라는 말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아니, 죽어야 할 이유는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책의 제목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래서'라는 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어울리게 공지영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통해서 드러내 보인다. 


공지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살아간다. 세상을. 주변이 바뀌지 않아도, 주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신의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간다가 된다.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은 이제 삶의 무늬로 되살아난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겠지만 그 과정들을 거쳐 지금의 공지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후배들의 고민에 덧붙여 이야기한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들을 겪었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들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지금-여기-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우리는 자꾸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고, 바꾸지 못할 과거 때문에 괴로워 하며 산다. 또 자신이 바꿀 수 없는 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짧은 생인데...


그러니 '지금-여기-나 자신'을 늘 생각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어려움이 있다고 그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러면 '그 또한 지나가게 되라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지금-여기에서.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으니. 그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지금-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세 명의 고민하는 후배들이 나온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고민들이다. 그런 후배들의 고민에 대해 공지영은 자신이 살아온 길들을 보여주면서 그 고민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들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마음을 열게 하고 있다. 그래서 '공지영의 섬진 산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섬진 산책과 더불어 '마음 산책'을 하게 된다.


세상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점점 행복해지기로 했다"는 책 표지의 말마따나 우리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가끔 잊는 그것,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


이 책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자ㅡ, 내게 죽을 이유가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30가지도 더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 행복은 남이 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지금-여기'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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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72
마이클 영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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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능력을 무엇으로 측정할까? 이런 기술적인 문제에 매달리면 도대체 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해야 할까? 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많다.


능력을 측정한다는 말은, 무언가 순위를 매긴다는 말이고, 순위를 매기는 일은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에 따른 대가를 다르게 지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능력을 측정한다는 행위 자체에는 이미 차이가 포함되어 있다. 단지 차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지만, 그 차이가 차별로 전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왜? 대가에 차등이 생기기 때문이고, 이 대가로 인해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너는 능력이 없으니 그런 일을 해야 하고,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해라고 누구나 생각하는 사회.


그래서 능력에 따라 사람을 대하게 되는 사회가 과연 행복할까? 도대체 왜 우리는 능력을 측정하고 순서를 매기려고 할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닐까?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평생을 보내지 말라고, 그러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능력을 측정해서 보여주는 것일까?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평생을 매달렸다고 과연 행복하지 않을까?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 행복할까? 그 일을 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능력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도 능력을 '지능+노력'으로만 정리할 수 있을까? 노력이 들어가긴 했지만, 이 노력은 지능에 비례한다고 하면, 결국 지능 하나로 결정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국민의 지능을 검사해서 숫자로 나타내고, 구간을 설정해 등급을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서 해야 할 일과 받아야 할 대우가 정해진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게다가 지능을 여러 차례 검사하던 것에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단 한 번의 검사,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한 검사 한번으로 미래를 결정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왜 우리나라 수능이 자꾸 생각나지? 이 장면에서)


철저하게 그러한 능력(지능)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대우하는 사회, 그렇게 지능에 따라 다르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은 사회학이라는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로 읽어야 한다. 마치 영국에서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고 사실로 읽어서는 안된다. 저자는 미래에 지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과연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이 책에 그려진 사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다.


능력이 있다고 판명된 5%의 소수는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지만, 하위 지능에 속한 사람들은 신분제 사회에서나 했었던 하인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 그것도 이제는 아주 어릴 적 단 한번의 검사로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귀결되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능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가 이르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책이 나온 지도 꽤 되었지만 지금 세계는 마이클 영이 걱정했던 '능력주의 사회'로 가고 있지 않은지...


거의 대부분의 일에서 '성과주의'를 표방하면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라고,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는가? 물론 능력주의를 완전히 없애서는 안된다. 마이클 영이 주장하는 것도 이것이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만, 모든 것을 능력만으로, 그것도 능력의 일부인 지능만으로 결정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사람의 능력은 다양하고, 또 각 분야에 따라서 필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하지만, 단 하나의 요소로 능력을 평가하고 평생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게 다양한 능력이 다양한 곳에서 꽃 피울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 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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