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를 여는 글 제목은 '정확하게 이해하기'다. 이해하기도 힘든데,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더 힘들다.


  내 관점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글도 내 관점을 거쳐 이해되기 때문에, 나는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경우에 대화가 필요하다. 내 이해와 네 이해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로 가는 것. 하지만 이런 대화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여유에서 나온다.


  영화 '미나리'로 요즘 많이 언급되는 배우 윤여정이 했다는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유가 있어야 이해를 한다고, 그것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른 나라 인권을 문제 삼는 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행위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자신들이 하는 그 행동들이 혐오행동이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들에게는 삶의 여유가 있을까? 오히려 살기 힘들기 때문에, 그 이유를 강한 자들에게서 찾고, 그들을 향해 주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감사뿐만이 아니라 이해할 마음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빅이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음식에 관한 글이 있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 잘 가지 못하는 디저트 음식을 파는 곳을 소개하는 글. 그 글을 보면서 과연 노숙인들 자활을 돕는 잡지인 [빅이슈]에서 그런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러운 음식에 대한 글을 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아니다. [빅이슈]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실어야 한다. 노숙인이라고 해서 무료 급식소에서만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 역시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음식에는 빈부귀천이 없다.


[바베트의 만찬]이란 소설을 보라. 최선을 다해 고급스러운 음식을 대접하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바베트. 자신의 전재산을 음식을 장만하는데 쓰고도 만족해하지 않던다. 그것을 사치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자신에게 베푸는 만찬이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만찬. [빅이슈]에 실리는 음식에 관한 글을 보면서 그렇게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리고, 그런 글들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호에서 문구, 다이어리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만년필로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린 시절 펜촉에 잉크를 묻혀 글을 쓰던 모습, 펜촉을 꽂을 펜대를 사기도 했지만, 모나미 볼펜 뒤에 꽂아 쓰던 기억. 그리고 한 쪽을 쓰기 위해서 여러 번 잉크를 찍어야만 했던 기억. 그렇게 펜촉으로 글씨를 쓰면 빨리 쓸 수가 없다.


매끄럽고 빠르게 쓱쓱 써지던 볼펜과 달리 펜으로 쓰는 글씨는 천천히 쓸 수밖에 없었다. 글씨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는데, 펜촉에서 벗어난 건 만년필을 선물 받고부터... 한번 잉크를 넣으면 꽤 오랫동안 쓸 수 있었던 만년필은 새로운 세계였다.


펜촉보다는 빠르게 쓸 수 있지만 볼펜보다는 느리게 쓰던 만년필... 이번 호에서 그런 기억을 소환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펜촉으로나 만년필로 글씨를 쓴다는 것도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여유는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내 맘 속에 비워둔다. 나를 꽉 채워 더이상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없게 하지 않고 나를 비워 다른 존재로 하여금 나를 채울 수 있게 한다.


이런 비움은 곧 여유고, 여유는 내 관점만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자연스레 이해를 동반하게 된다. 이해를 하게 되면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될 테니... [빅이슈]를 만나면서 내 맘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여러모로 고마운 [빅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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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데, 해방 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문제가 남아 있다. 가해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그런 일본에 책임 묻기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상황.


  여기에 식민지로 인해 분단이 되었는데, 통일로 가는 길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캄캄해지고 있는 현실.


  또 식민지로 인해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 문제도 남아 있다.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동포들 중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또 후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지 않나 싶다. 이동순이 쓴 이 시집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구 소련 땅에 남아 있던 우리 민족 사람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삶터를 잃고 쫓겨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다.


일본 스파이가 될까봐 또는 일본에 협조할까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민족들. 그들 중에는 강제 이주를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또 강제 이주 당해 중앙아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는데...


이 시집에는 그런 사람들 중에 홍범도 장군이 나온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임에도 강제 이주의 칼날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역시 극장의 경비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에 인류애는 살아 있음을 이 시집에서 보게도 된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된 사람들. 소련 당국에서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 사람 이야기도 나온다. 


밤새도록 가족들과 빵 구워 담은 자루 / 식지 않도록 이불로 덮어 / 나귀 등에 싣고 온 / 카자흐 사내 막심 이크바로브 / 내 가족을 위해 자기 집도 냉큼 비워준 / 친형제보다 더 깊이 정든 / 카자흐 사내 / 원동에서 온 고려인에겐 / 말도 붙이지 말고 / 음식도 베풀지 말고 / 최소한의 접촉도 하지 말라던 / 당국의 지시 묵살하고 /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리 막중히 여기던 / 막심 아크바로브

('내 친구 막심' 중 일부. 96-97쪽)


그렇다. 당국과는 달리 민중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다. 자신들도 어렵게 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국적을 떠나서.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집단도 있다. 바로 군대라는 집단. 군인이 되면, 군복을 입는 순간 인간성, 인류애는 군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로지 명령만이 남는다. 그들에겐 명령뿐이다. 명령으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미얀마에서처럼.


열차 바닥에 / 뜷어놓은 작은 구멍 / 거기 쪼그리고 앉는다는 게 / 죽기보다 싫었다 / 여자니까 / 내가 무슨 짐승인가 / ... / 여인들은 철로 옆 깔밭으로 뛰어들었다 / 하나가 뛰니 여럿이 우르르 / 한꺼번에 들어갔다 / 흰옷 입은 여인들 깔밭 사이로 보였다 / ... / 그때 돌연 총소리 탕탕 들렸따 / 탈주로 착각한 소련 병사 / 따발총 갈겨버린 것/ ('깔밭의 참변' 중. 62쪽=63쪽.)


이렇게 '깔밭의 참변'이란 시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들과, 인간적인 면을 지키려는 여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비극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의 존엄은 지키기 위해 참고 참았다가 깔밭(갈대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던 여인들.


그런 여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총을 쏴버리는 군인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군인들이 인간성을 군복 속에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 군인들의 만행은 도처에서 나온다. 그냥 사람을 죽이거나, 버려두거나 하는 모습들. 과연 인민의 조국이라고 한때 자부했던 소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민중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는가? 소련 역시 우리나라 비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식민지가 된 조국, 전체주의자에 의해 강제 이주 명령을 받은 힘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항거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런 비극. 이 시집에는 그러한 비극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다. 나라를 잃는 민족이 어떤 설움을 겪는지,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고려인 3세, 4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비극이 왜 일어났던가. 도대체 이 비극에 누가 책임을 졌던가. 아직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렇다. 책임은 끝까지 지지 않으면 언제고 책임을 다할 때까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걸로 칠 수는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겪은 이 비극. 이동순의 '강제이주열차'를 읽으며 다시 되새기겨 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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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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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여러가지로 직조된 이야기들을 꿰어맞추느라 읽기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면, 2권에선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 속 이야기 속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소설에서는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전쟁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그보다는 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정작 우리 목숨을 끊는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일 수도 있다는 것.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의 죽음에 얽힌 사연이 밝혀지게 되는 과정까지 소설은 긴박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은?


읽으면서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 속 소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도대체 누가 눈먼 암살자인가?


우선 암살이라는 말 자체가 '모르게' 또는 '비밀스럽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자신의 행적을 알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눈먼'이라는 말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가 첨가된다는 생각이든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관련된 죽음은 셋이다. 동생 로라의 죽음, 남편 리처드의 죽음, 그리고 알렉스의 죽음.


알렉스의 죽음이야 전쟁으로 인한 죽음. 세상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는, 그것도 당시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젊은이라면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알렉스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그의 죽음에는 '눈먼'이라는 말이나, '암살'이라는 말이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또는 알릴 수 없는 죽음을 당한 인물은 로라와 리처드인데... 이들의 죽음이 알렉스의 죽음과 다르다고 하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바로 '눈먼 암살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 단순하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이리스와 리처드의 여동생인 위니프리드뿐인데... 위니프리드는 오로지 서술되는 인물에 불과하니...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아이리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리스는 그야말로 어려운 시대, 집안을 지탱하기 위해 희생당한 우리들의 맏딸과 같은 역할 아니던가. 자의든 타의든, 아이리스의 결혼은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이리스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지, 그녀는 자신의 딸과 헤어지고 딸마저도 잃고 손녀도 어디론가 떠나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자, 눈먼 암살자는 누구인가? 자신이 죽이는 존재를 보지 못하는 암살자. 그런 눈먼 암살자를 꼭 사람으로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생기 있는 인물은 아이리스와 로라를 보살펴주던 리니와 또 나이들어 거동이 힘들어진 아이리스를 끝까지 돌봐주는 리니의 딸 마이라가 아닌가. 


이들을 침범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돈으로 인한 비열함, 황금만능주의. 돈으로 권력까지 사려는 모습 등이 아니던가.


아이리스와 로라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비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리처드와 같이 돈만 지닌,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로.


그럼에도 소설은 희망을 지니게 한다. 아이리스가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또 동생 로라, 딸인 에이미의 비극을 글로 남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읽히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읽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을 넘어서고 있다. 사브리나라는 손녀 딸에게 읽히기 위해 쓴 아이리스의 글을 통해서.


이미 결말은 나와 있지만, 그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겹쳐 나오기에 읽어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결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먼 암살자'가 누구일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런 '눈먼 암살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1권에서 다루어졌던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의 이야기가 왜 계속되지 않는지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 했는데...


굳이 소설 속 소설의 이야기인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잘먹고 잘살았더라 하는 이야기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에게서 혀를 잘린 소녀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혀를 잘린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지만 글을 쓸 수는 있다. 아이리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는 않지만 글로 남긴다. 그렇게... 진실을, 그리고 희망을, 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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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0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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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살인, 테러 등이 주를 이룰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소설 속에 '눈먼 암살자'가 등장한다. 소설 속 소설에.


애트우드가 쓴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이 워낙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이 책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는데, 앞부분에서 난관에 부딪친다. 여러 이야기가 중첩되기 때문에 소설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처음 부분을 넘어서야 한다.


읽어가면서 서서히 소설의 구조가 그려진다. 이야기 속 이야기, 또 이야기. 세 이야기가 중첩되는데, 주된 줄거리는 아이리스라는 죽음을 앞둔 여인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것을 주축으로 삼는다. 아이리스는 쓴다. 여기에 소설에서는 과거 신문기사를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소설은 결과를 안 상태에서 그 과정을 추적하도록 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렇다고 단순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가 쓴 소설이 교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두 이야기가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그래서 소설에서 아이리스의 회고록은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진 아이리스의 현재를 보여주면서, 다시 아이리스의 과거로 돌아간다. 1900년대 초반 캐나다의 생활상.


한때 사업이 성공해 잘사는 집. 그러나 전쟁과 불황으로 인해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 결국 공장을 폐쇄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는 상황.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능력이 없는 아버지. 딸은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결혼을 해야 했다. 있는 집 사람과, 그것도 나이 차가 꽤 나는 사람과.


이것은 너무도 단순한 상황이다. 소설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아왔던 상황 아니던가. 아니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들 과거에도 이런 맏딸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았던가. 적어도 1권에서 아이리스의 삶을 서술한 부분을 보면 과거 우리네 여성들, 특히 맏딸들의 삶을 그릴 수 있다. 그때 맏딸들의 삶이 이랬다.


그러나 소설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가 쓴 (소설의 2권 끝부분에 가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소설 "눈먼 암살자". 이 소설에서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을 하는 남녀가 나오고, 여자에게 남자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눈먼 암살자'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소설이 필요한 셈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셋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1권에서는 아이리스가 결혼하는 장면... 시간 순서대로 하면 줄거리에서 이 장면까지다.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을 살펴보면 눈먼 암살자가 소녀를 구출하는 장면.


소녀는 혀를 끊겼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 아이리스는 집안 형편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말을 할 수 없는 소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아이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말을 잃어버린 삶. 


이렇게 소설과 소설 속 이야기가 연결이 된다. 여기에 1차 세계대전 이후 캐나다의 상황.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탄압을 받으며, 노동자들은 너무도 쉽게 일자리를 잃는 상황. 그럼에도 아이리스의 아버지처럼 노동자들을 자신의 부하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비록 노조에는 부정적이지만, 회사를 가족으로 판단하고, 노동자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는 있다. 마치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대기업의 광고 문구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기도 한데)로 여기고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은 강경 진압을 당하게 된다.


살기 힘들어진 때라고 모두가 힘들지는 않다. 이때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계속 여유 있게 흥청망청 쓰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만이 문화를 만들어가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없신여기면서. 


아이리스가 결혼한 리처드와 동생 위니프리드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아이리스는 신혼여행으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고, 눈먼 암살자는 말을 못하는 소녀를 구해 성 밖으로 나오고... 여기서 소설은 2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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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門)은 여러 역할을 한다. 문이 지닌 아름다움을 논외로 하고, 문이 지닌 실용성을 따지면, 문은 열림과 닫힘이다. 연결이자 끊김이다.


  열어서 외부와 연결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닫아서 외부와의 연결을 끊는 역할도 한다.


  문은 그냥 문이지만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다. 그렇게 문은 관계를 맺게도 관계를 끊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이 있어야 한다. 문이 없는 사람 관계는 없다. 다만 이 문이 잘 열리는 관계가 있고, 전혀 열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문을 어떨 때 열고, 어떨 때 닫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문을 닫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여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두드릴 때 열어주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의 비대칭. 이 비대칭이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온몸을 던져도 안 열리고, 다른 것들을 보내도 안 열리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도 힘들고... 참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는 힘들다.


어쩌면 시를 읽는 것도 이렇게 문을 여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문을 두드리는 일. 시가 문을 열어줄 때도 있고, 아예 안 열어줄 때도 있는데...


박소란 시집을 읽으며 많은 시들에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이 이상하게도 닫혀 있단 생각이 들었따. 시집 제목이 된 시 '감상'에 나오는 구절인 '한 사람의 닫힌 문'이라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감상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쏠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년. 64-65쪽.


과연 그 문이 열렸을까? 이상하게 시에서 한 사람과 나는 자꾸 빗나간다. 한 사람이 내게 몸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우리는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고 착각되는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그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나인채로 있다. 마치 한 사람의 비질에 쓸려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듯이.


나를 움직이는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을 때 그는 문을 닫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을 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도대체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릴까? 답은 없다. 다만,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어떻게 찾을까? 여기서 질문은 제자리로 온다. 우리는 그렇게 미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문을 열기 위해 헤매게 된다.  


그렇지만 문이 있으면 열림의 가능성은 늘 있다. 그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열리지 않더라도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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